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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14화

돌발 이벤트 (2)




이런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유저들이 GM에게 잔뜩 몰려들어 애걸복걸 구걸하는 장면은 어느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니까. 그래서 광장에서 제일 높은 시계탑 위에 자리를 잡은 거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나는 흡사 아이스크림에 몰려드는 개미 떼 같은 모습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서로 위로 올라가겠다고 싸움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하아아아아…….”

결국 참고 있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PVP 콘텐츠가 도입되지 않은 상태라곤 해도, 이곳은 현실이다. 마을이라고 체력 값을 고정시켜 놔서 HP가 깎이지 않을 뿐이지, 물리 엔진에 의해 서로를 치거나 밀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고통도 미약하게나마 느껴지게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심지어 몇몇 유저들은 혼란을 틈타 뭘 하려고 한 건지 프리징까지 걸려 있었다.

― 어떻게 할까요, 깰룩?

자기가 봐도 이건 좀 아닌지, 깰룩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 …알아서 할게.

불행 중 다행인 건, 모든 플레이어들이 거지 근성을 갖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였다.

위에서 내려다본 광장은 마치 달걀의 노른자와 흰자처럼 두 부류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냥 저 혼란에 휘말리기 싫은 건지 아니면 템에 관심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들도 나와 비슷한 얼굴로 동냥아치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맘이시리네도 있었다.

조용히 손을 시계탑 아래로 향했다.

‘타우아노테 톤 아지토우피이아.’

파앗!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자, 시계탑을 중심으로 일정 영역 안까지 보라색 빛이 퍼져 나갔다.

그러자 좀비 떼 같이 들끓던 거지들이 전부 고장 난 로봇처럼 뚝 멈춰 버렸다.

“오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유저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광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유일한 흠이 있다면…….

“영자 언니 멋져요!”

“영자님, 초면에 죄송하지만 저랑 결혼해 주십쇼!”

“누나! 야하게 입어주세요!”

많은 유저들이 아직까지도 나를 여자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 이대로 성별을 속인 채 가도 별 상관은 없지만…….

‘그만해, 이놈들아. 창피하다고.’

우선 손을 드는 것으로 술렁거리는 유저들을 조용히 시켰다.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이벤트 진행을 위해 본의 아니게 마법을 쓴 점 죄송합니다. 악영향은 없으니 모두 안심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 패치로 새로운 던전이 추가되었음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점검 이후 광장에 새로 생겨난 것이 있는데 혹시 눈치채셨습니까?]

광장에는 시계탑을 중심으로 좌우를 둘러싼 회랑이 있었다. 각종 몬스터의 모습이 조각된 수백 개의 원기둥으로 이루어진, 지붕이 있는 긴 복도. 그 끝이 만나는 곳에는 미묘하게 내 얼굴을 닮은 헌터의 동상도 있었다.

“저거요, 저거!”

“저게 뭐야, 문?”

[예, 맞습니다. 좌우를 보시면 네 개의 새로운 입구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곳이 바로 새로운 던전으로 향하는 입구입니다.]

유저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입구들을 둘러보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의 입구 안쪽에는 검은색의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입구 기준으로 왼쪽 위부터 파쿠르 던전, 이스케이프 던전, 하이드 앤 시크 던전, 서바이벌 던전입니다. 각 던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ID카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 사냥터에서는 얻을 수 없는 다양한 보상이…….]

콰아아앙!

‘아씨, 깜짝아.’

급히 돌아보니, 저편에서 뿌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헐, 뭐야? 뭐가 터졌나?”

“성문 주변인 거 같은데. 불난 거 아냐?”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유저들이 두리번거리며 쑥덕거렸다.

크아아아아!

그때, 하늘에 번지는 연기를 뚫고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몬스터로 고용된 호르핌들이잖아? 쟤들이 왜 여기에 있지?’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비행 몬스터들이 광장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 깰룩아, 뭐냐?

― 성벽 밖에서 몬스터들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깰룩.

― 아니, 나도 그건 알겠는데. 왜 오는 거냐고.

― 그건 저도 잘…….

콰과광!

유저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연달아 폭음이 들려오는 광장 바깥으로 향했다.

“저거 몬스터들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성문 밖에서부터 다 몰려오나 봐.”

“헐, 몬스터 완전 많아! 몹 웨이브인가?”

그때, 비행 몬스터들의 등에 탄 몬스터들이 광장 위에 도달했다. 방울꽃 덩굴 같은 것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집채만 한 코끼리가 눈에 띄었다.

‘응? 쟤 방길이잖아. 동쪽 초원 지대에 있어야 되는 놈이 여기에는 왜…….’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길이가 광장 아래로 뛰어내려 착지했다. 밑에 있던 유저들 수 명이 찌부러져 회색 빛이 되어 사라졌다.

10만 명이 넘는 유저들이 모두 얼빠진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크텐차오 랄 디텐츠 키오 라람(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자)!”

방길이가 코를 위로 쳐들며 크게 외쳤다. 그러자 몬스터들이 하나둘 방길이처럼 광장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쾅! 콰앙!

“으아아악!”

유저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광장 바깥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콰르르르르!

좌우의 회랑이 터져 나가듯 무너져 내렸다. 벽 사이로 드러난 것은 정수리에서 붉은 빛을 발하는 수십의 두더지들이었다. 이미 성문 외벽과 광장까지의 길이 다 점령당한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가슴이 쿵쾅거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마을이나 광장 같은 맵은 필드 구축 단계에서 기본적으로 파손 방지 마법을 걸어놓는다.

하지만, 분명 그랬을 터인 파라알 광장의 외벽이 방금 내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보란 듯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건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시스템을 변경하지 않고서는…….

― 개발 팀이랑 연결해 줘! 지금 당장!

―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 시, 신호가 안 잡힙니다, 깰룩!

― 뭐? 그럼 빨리 아무 팀에나 연락해서 파손 방지 마법 다시 켜라고 해!

― 그렇게 메시지 남겨놓겠습니다, 깰룩!

그사이 뒤쪽에서 날개 달린 올챙이처럼 생긴 비오리우스 무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벌 떼처럼 날아올랐다.

‘저건 또 뭐야.’

“라콜텐챠 라드랑 레 드코 피아초테(돌 하나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려)!”

비오리우스들이 소리치자, 온갖 몬스터들이 모두 ‘와아아아!’ 하고 이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 야, 깰룩아. 방금 저 비룡이 새끼들이 뭐라 씨부렸냐?

― 싹 쓸어버리라고 한 것 같은데요, 깰룩.

― 그치?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무너진 회랑을 넘어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밭을 갉아먹는 메뚜기 떼 같았다.

“으, 으아악!”

“이리로 온다!”

유저들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광장 전체는 몬스터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 수는 자그마치 10만 명. 뒤로 도망치려는 유저들과,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해하는 후방의 유저들이 뒤엉키며,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여, 여러분. 진정하세요! 마을 안이기 때문에 죽을 일은 절대…….]

그 순간 몬스터 한 마리가 도망가고 있는 남자의 뒤통수를 베어 물었다. 남자는 처참히 피를 흘리며 픽 쓰러지더니, 회색 빛이 되어 사라졌다.

“…없지 않네요.”

조용히 확성 마법을 해제했다.

― 야, 깰룩.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지금 죽는 애들 뭐냐고! 마을에 있는 유저들이 왜 죽는 거야!

― 저, 저도 잘…….

― 아오! 지금 죽은 애들 다 어떻게 됐어?

― 부, 부활 불가 상태로 저승에 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깰룩.

― 부불이라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여기가 던전도 아니고, 저승까지 가 있다니.

― 아씨, 운영 팀장은?

― 그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현재 신호가 잡히지 않습니다.

― 뭐?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뭐 하는 거야! 그럼 배불뚝이 새끼한테라도 연결해!

― 드, 드라비라 님도 현재 신호가 잡히지 않습니다, 깰룩.

“아나, 진짜!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이놈은 또 어딜 간 거야!”

시계탑 아래에서 유저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이쪽에 주목하지 않는 사이, 나는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분노에 반응한 마나가 변화하며 제멋대로 로브에 불이 붙었다. 로브와 가면을 벗어 던지고 발로 마구 짓밟았다.

그때, 문득 아래쪽에서 몇몇 플레이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도망치고 있는 유저들 위를 뛰어 몬스터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저것들은 또 뭐야?’

붉은 로브를 몸에 두른 유저가 가장 앞쪽으로 뛰쳐나가더니, 긴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가 광장 바닥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바닥에서 번갯불이 번쩍하고 튀었다. 굵직한 번개 줄기가 마치 용천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번개 줄기들은 근처에 있던 몬스터들을 덮쳤다.

거미줄처럼 퍼진 광장 사방으로 번개는 순식간에 하늘 높이까지 솟아올랐다. 꼭 광장의 한가운데를 가로막는 하나의 벽처럼 보였다.

‘라이트닝 월? 벌써 저 스킬을 습득한 유저가 있었나?’

몇몇 몹들은 유저들에게 달려들던 그대로 라이트닝 월에 뛰어들었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까맣게 타 죽어버렸다. 흠칫한 몬스터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잠깐, 유저들 공격도 먹히잖아?’

아무래도 광장 전체가 PVE로 설정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현 사태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얘기였다. 멀쩡하던 설정이 갑자기 바뀔 리 없으니까.

“뭐야, 몹들이 죄다 겁쟁이네.”

붉은 로브의 유저가 코웃음을 치며 갈색의 웨이브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복장과 무기를 보아하니 마녀 성향이었다.

“랭커들이다!”

도망치던 유저들이 앞으로 모여든 열댓 명의 사람들을 보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