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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작정하고 엿들으려고 했던 것도, 부러 기다리다 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날은 그러니까, 그날은 순전히 정말 순수하게도 우연의 한 부분이었다.



― 잊지 않았지? 지금쯤 출발했겠네? 네 이름으로 예약해 뒀으니까 가서 네 이름 말하면 자리 안내해 줄 거야.

“아니 글쎄, 굳이 원하지도 않는데 뭐 그런 쓸데없는 자리를 만드셔 가지고.”

― 뭐라고? 쓸데없는? 쓸데없느은?

“……아니, 불필요한?”

― 불필요한? 불필요하안?

어쩌면 날이 가면 갈수록,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는 톤이다. 차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거의 찢어 버릴 듯 들려오는 음성에 경도는 스틱에서 손을 떼 제 귀를 한 번 매만졌다. 어째 고막이 얼얼해진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 내가 괜히 이래?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 아니니, 너 좋으라고. 엄마가 어? 아들한테 어? 나쁜 거 시키니!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어? 내가 너한테 좋은 것만 입히고,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선 자리 알아보고!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못해 왼쪽 깜빡이를 켰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파투를 내는 게 상대방한테 매너 없는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애초부터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영 내키지 않아서 아예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갖은 이유를 대며 내빼려고 했으나 돌아오는 제 어머니의 반응으로 보아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을 저를 볶을 게 빤했다. 차라리 눈 한번 딱 감고 다녀오고 말지. 그냥 밥 한 끼 먹으러 가는 셈치고.

“알았어요, 알았어. 지금 가고 있는 중이에요.”

― 얘, 아가씨가 아주 반듯하고 참하대. 세상에 그런 아가씨 드물다고, 일등 신붓감이라고 그 언니가 어찌나, 저찌나 입이 닳도록 말을 하던지, 원. 내가 너랑 자리 한번 마련하느라고 엄청 고생했어.

“앞으로는 무턱대고 약속 잡고 그러지 마세요. 저한테도 그렇고 상대한테도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거.”

― 미리 말했으면 네가 잘도 나갔겠다. 내가 널 몰라? 이 핑계, 저 핑계 아주 엄마 머리 아픈 말만 막 하면서 피했으면 피했지.

“……어쨌든요. 이런 자리 딱 오늘만이에요. 두 번은 없어요.”

― 오늘만일지 아닐지는 모르는 거지. 너도 마음에 들 거야. 나중에는 엄마한테 자리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절을 할걸?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무턱대고 왜 이리 확신을 하시는 건지. 경도는 말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제 어머니의 미신론은 알아줘야 한다.

어련히 알아서 인연을 만들어 오겠지, 하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점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말하기를 맞선을 통해 인연이 들어온다고 했더란다. 그 후로 이렇게 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맞선 자리를 만들어 놓곤 하셨다.

“운전 중이라 통화 길게 못 해요. 이만 끊을게요.”

― 그래, 알았어. 집 도착해서 꼭 연락하고, 응? 아니다. 오늘 안 들어갈 수도 있니? 요즘 젊은 애들은 하루 만에 통해 가지고 그, 그러기도 하잖니. 호호호.

“후우, 끊습니다.”

혹여나 더 말을 덧붙일까 싶어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눌렀다. 5분도 채 되지 않았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통화가 끝나자 차 안에 고요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백경돕니다.”

중간에 차를 돌리긴 했어도 다행히 약속 시간에 늦진 않았다. 누가 먼저 도착해 있고 그런 법칙이랄 게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선으로 남녀가 만나는 자리인데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게 여자 쪽이라 조금 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경도는 서둘러 안내받은 자리로 가서 여자를 향해 짧게 묵례를 했다. 그러자 상대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었다.

“아니에요. 딱 맞춰 오셨는걸요. 김선주예요.”

결이 좋은 머리칼의 반을 어깨 한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제 어머니가 언급했던 그대로 정말 ‘참한’ 아가씨였다. 수줍게 짓는 미소에 양옆으로 보조개가 들어가고 목소리는 어디 낭송대회에 나가서 시를 읊어도 될 만큼 나긋하고 차분했다.

그래 봐야 여태 만났던 맞선 상대와 별다를 것 없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나온 자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몰라도 말이다.

“앉을까요?”

“네.”

선을 보는 것에 있어서 딱히 정해진 방식이나 순서 같은 건 없었지만 어쨌든 들었던 대로, 보아 왔던 대로 굉장히 고루했으며 지루했고 너무나 평범했다.

서로 알고 있던 정보를 얘기하고 또 알고 싶은 정보도 물어보고.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취향 같은 것들을 얘기하다 다시 겉으로 돌기도 하고.

스테이크를 썰어 입 안으로 씹어 넣으면서 고기가 질긴지 연한지, 맛이 있는지 없는지 같은 걸 느낄 새가 없이 그저 무미건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차리기 위해 성의껏 대답하고 눈치껏 한두 개의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저 메인이 끝나고 얼른 디저트 타임으로 갔으면 해서. 그래야 식사가 마무리를 향해 달려갈 테니 말이다.

“저, 죄송한데…….”

제 몫의 식사는 어느새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나름 상대방이 먹는 속도에 맞춘다고 맞추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가 보다. 아니면 조금 남기려고 그러나?

열심히 접시를 노려보고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던 말을 멈추고 꽤 곤란한 표정으로 경도 쪽을 보고 있는 상대였다.

“네?”

“자리 좀 바꿔 줄 수 있을까요? 아까부터 여기 에어컨 바람이 너무 강하게 와서 겉옷을 걸쳐도 조금 춥네요.”

“아, 네. 물론이죠.”

별거 아니라는 듯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는 그 틈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제 쪽 자리로 왔고 저 또한 괜찮다고 대답을 하며 상대가 앉았던 자리로 갔다. 그리고 그 찰나였다.

똑단발을 하고 있는 여자의 옆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자리를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저보다 나중에 왔었는지 모르지만 익숙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얼굴이 바로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이따가도 추우시면 온도 좀 높여 달라고 얘기해 볼게요.”

“아뇨, 여기 오니까 훨씬 나은 것 같아요.”

각자의 접시를 바꾸고 덜 비운 고기를 조각, 조각내서 다시금 먹기 시작했다. 별 흥미도 없던 이야기는 어디에서 어떻게 끊겼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대방으로 인해 다시 이어졌다.

웃음을 곁들여 가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몇 조각 남지 않은 제 몫의 고기를 보다 더 느리게, 느리게 입으로 옮기던 때였다. 뒤에서 갑자기 냉랭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이쯤 하면 오래했어. 그만하자, 이제.”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워낙 잔잔한 탓이기도 했고, 바로 뒷자리라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탓에 원하지 않아도 그 소리가 경도에게까지 들렸다.

“……뭐?”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은 서두를 듣고 저도 모르게 열심히 썰고 있던 나이프질을 뚝, 하고 멈추었다. 귀는 어쩌다 보니 제 앞보다 뒤쪽으로 더 쫑긋 세워졌다.

“헤어지자고, 우리.”

“…….”

“생각 많이 하고 하는 말이야. 그냥 충동적으로 너 떠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상대방의 대답은 예상보다 간결했다. 아니, 그건 가타부타 따져 묻고 하는 게 하나도 없는 빠른 수긍이었다. 담백하다고 하기보다는 너무나 건조해 퍼석거리기까지 하는.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응.”

“이렇게, 쉽게…… 그냥 알았다고?”

헤어지자고 먼저 말을 꺼냈던 건 남자 쪽이면서 그 말에 그저 알았다고 대답하는 여자더러 남자는 갑자기 역정을 내는 것처럼 물음을 던졌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 그 얼굴이 구겨져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돌아오는 말은 보다 더 차분하고 가라앉아 있는 채였다.

“생각 많이 했다며. 충동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알았다고 했는데 뭐가 잘못됐어.”

나름 논리 정연한 말에 자연스레 경도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지영주.”

“여기. 반지는 지금 돌려주고, 집에 있는 물건들은 정리해서 택배로 보낼게. 원하지 않으면 내가 알아서 처분하고.”

와중에도 깔끔한 정돈이었다. 헤어짐을 마주할 때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못하는 게 보통임에도 말이다.

“하, 역시. 넌 진짜…… 끝을 내도 이렇게. 후우…… 그래, 알아서 해. 난 필요 없으니까 어디 팔아 버리든, 내다버리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이 자리에서 그들의 관계는 더 이상 회생이 불가해 보였다. 늘 빈틈이 없어 어쩌면 갑갑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신선해할 찰나도 없이 곧바로 이별을 알아 버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듣지 말아야 할, 타인에게 알려져서 하나도 좋을 게 없는 직장 상사의 사생활 그것도 연애사에 관한 대화를 엿들어 버린 탓이다.

“경도 씨?”

“…….”

“저기, 경도 씨?”

“네?”

“식사 다 하신 거죠?”

“아, 네.”

“저도 이쯤 하면 될 것 같은데. 디저트 시킬까요, 이제?”

“그렇게 하죠.”

퍼뜩 정신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간단한 베이커리와 각자 기호대로 주문한 음료가 곁들어 나왔다. 그러는 사이 이야기가 마무리된 모양인지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고 경도가 앉은 테이블 옆으로 남자가 휘적휘적 스쳐 지나며 출입구 쪽으로 곧 사라졌다. 바로 들려야 할 것 같은 상대편의 의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자꾸 뒤쪽에 신경이 쓰였다. 제가 바로 뒤에 앉아 있다는 걸 제 직장 상사가 영영 몰라야 할 텐데. 그 대화를 들었든, 못 들었든 간에 이 장소에서 저를 마주쳤다는 게 절대 유쾌할 리 없을 테니까.

“이 집 음식 잘하는 것 같아요. 분위기도 좋고요. 자주 오세요, 여기?”

“아, 아뇨. 저도 오늘 처음이에요.”

“그래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런 델. 경도 씨가 직접 예약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아마도 어머니가 미리 분위기 좋고 맛 좋은 곳을 열심히 찾고 찾아 제 이름으로 예약을 해 둔 탓이겠지. 그러니까 직접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이라는 표현이 더 맞으리라.

“주변에서 괜찮다고들 하더라고요. 접근성도 좋고.”

“아, 그렇군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적당히 가른 케이크를 떠먹는 중이었다. 최대한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자리를 끝내고 싶었는데 뒤쪽에 신경을 쓰느라 앞쪽엔 의도치 않게 무례를 저질러 버렸다. 상대도 그걸 모르지 않을 거다. 표정 관리를 부러 하지 않은 탓에 이 자리 자체에 감흥이 없다는 것도 잘 알 테고. 그런 김에 경도는 아예 솔직하게 말을 하기로 했다.

“실은…… 어머니가 갑작스레 약속을 잡으셔서 나온 자리예요. 제가 원해서 잡은 선이 아니라. 레스토랑도 어머니께서 고르셨고요.”

“역시. 그런 것 같았어요. 너무 저만 떠들어 대고 형식적으로만 답하셔서.”

“아, 죄송합니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런 실례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오히려 먼저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해 주시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네요. 그럼 이것만 먹고 이만 일어날까요?”

금세 식어 버리는 표정과 말투였다. 마음이 편하다고는 하지만 자존심이 긁힌 기분은 도통 피할 수가 없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아,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마주하게 될 어머니의 잔소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고막이 아파 왔다.

핸드백을 챙겨 또각또각 앞서 걸어가는 상대를 서둘러 뒤쫓은 경도가 계산대 앞으로 반걸음 더 앞서 도착했다. 그러고는 살짝 옆으로 비켜서는 상대를 흘끗 쳐다본 후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

“계산은 제가 할게요.”

“그러실래요?”

“네. 시간 내시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뭐, 그래요. 그럼 여기서 헤어지는 게 낫겠네요. 괜찮다면 먼저 나가 볼게요.”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상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나가 버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바람을 맞히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까? 그러게, 이런 자리는 쓸데없고 불편하기만 하지.

계산을 한 뒤 경도는 곧장 나가지 않고 아까 앉았던 자리를 물끄러미 한 번 쳐다보았다. 출입구가 하나인지 둘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바라보고 있던 출입문 쪽으로는 나가지 않았던 그녀다. 분명 그녀가 자리했던 테이블은 비어 있는 채였는데. 그러면 다른 쪽으로 나가기라도 했나.

연인이 이별을 고할 때 보통은 ‘왜?’라고 이유를 묻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그저 알았다는 말이 먼저였다. 단번에 단호하게 떨어지는 그 대답이 참 우습게도 너무 그녀다웠다. 회사에서나, 일반 사석에서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그래, 그렇다고 생각을 했다.

“흡…… 흐으윽. 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