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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1화 저승사자 김시박(4)


“흐음, 여기가 마지막인가.”
시박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백여 개가 넘는 서랍장이었다.
보나마나 술을 담글 때 필요한 각종 재료들이 있을 게 뻔했다.
시박이 발길을 돌리려 하는데 문득 이 도령이 생각났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몸보신이나 시켜 줄까.”
설마 양휘락 같은 놈에게 쩔쩔맬 줄은 몰랐다.
시박은 한숨을 쉬며 서랍장에 다가갔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좀 나눠 줘도 상관없겠지.’라고 생각했다.
시박이 손에 잡히는 서랍 하나를 열었다.
분홍빛이 역력한 것으로 보아 천도복숭아인 줄 알았다.
시박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설마 이런 진귀한 게 있다니. 그것은 천도복숭아 따위가 아니었다.
영약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보물(寶物)이었다.
시박의 입술이 움직였다.
“속, 속곳이다!”
이렇게 화려한 색의 속곳이 있었다니.
시박은 분홍빛 색감에 눈을 떼지 못했다.
더구나 기존의 것보다 짧고 작다. 여인의 몸을 연상하게 하기 충분했다.
“이건 염라대왕의 글귀?”
속곳을 꺼낸 서랍 안에는 소감문이 한 장 놓여 있었다.

화산파 8대 장문인의 둘째 여식 설매향(雪닝香)의 속곳.
한 떨기 매화는 속곳도 강렬하도다. 가히 차하에 오를 자격이 있다. 근래 보기 드문 작품이다.

종이를 든 시박의 눈이 커졌다.
이런 파격적인 속곳이 겨우 차하라니. 아니, 그것보다 이 서랍들에 다 속곳이 들어 있다는 것인가.
시박은 갑자기 염라대왕이 존경스러웠다.
“이번에는 위쪽의 서랍을…….”

북해빙궁 5대 여궁주 한비아(寒妃娥)의 속곳.
북해의 속곳은 만년설처럼 희다.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의 오감을 농락하도다. 세 겹으로 이루어진 천의 구조가 불만이지만 정숙한 맛이 가히 북해의 속곳답다.

시박은 북해의 속곳을 들어 올렸다.
과연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시박은 자신도 모르게 속곳을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오래전 가 봤던 북해의 향취가…….
“시박 나으리!”
“으헉!”
찌익!
천 조각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박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시박 나으리! 큰일이…….”
“……닥쳐.”
시박은 양 갈래로 찢어진 속곳을 바라봤다.
이 귀한 보물을 망가트리다니.
갑자기 나타난 동자귀에 화딱지가 났다. 동자귀는 영문도 모른 채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달리 시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시박이 찢어진 속곳을 두루마기 안에 넣었다.

***

시박은 침상에 누워 골골거리는 염라대왕을 바라봤다.
동자귀는 그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했다. 딱밤 맞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인 듯했다.
시박은 으레 의심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어디가 아프긴 아프신 겁니까?”
“시, 씨박아. 왜 이리 늦게 왔느…… 으헉!”
염라대왕이 발작하듯 몸을 들썩였다.
얼굴까지 붉어져 땀을 흘리는 걸 보니 아프긴 아픈 듯 보였다. 하지만 여러모로 수상했다.
염라대왕의 허리 밑을 가린 커다란 천 가리개 하며 누워 있는 자세.
“아프신 분이 자세가 영 이상합니다.”
“으음! 이놈아, 아픈 곳이 항…… 아니, 엉덩이다!”
“그렇군요. 전 혹시 숙성되지 않은 뱀술 드시다 탈난 줄 알았습니다.”
염라대왕의 얼굴이 아픔 속에 경악을 피웠다.
이놈이 여태껏 비밀창고에 있다 왔구나.
대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속…….”
“보았습죠.”
시박의 말에 장단을 맞추듯 염라대왕의 항문이 한 번 더 따끔거렸다. 자지러지는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시박이 귀를 막으며 말했다.
“아프시면 요양을 하셔야지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고마운지고. 씨, 씨빡이 네가 날 다 걱정해 주는구나. 안 그래도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
시박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염라대왕은 반사적으로 시박의 눈길을 피했다.
“소인은 한 달간의 휴식을 명 받았습니다만.”
“생사가 달린 문제로다!”
“설마요. 어떤 병마가 감히 염라대왕님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이었다. 다만 병세의 고통이 가중될 뿐이었다.
염라대왕은 몇 안 되는 불멸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씨박아! 청룡이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 정말이지 너밖에 없구나!”
시박을 찾는 사이 병세의 원인을 자세히 알아본 염라대왕이었다. 환부 역시 따끔거리기만 하던 게 지금은 얼음장처럼 시려 왔다. 필시 청룡의 짓이 분명했다.
“청룡, 혹시 그 퍼런 뱀 대가리 말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그 망할 놈이 북해에서 난동을…… 크윽!”
북해란 말에 시박의 가슴 한구석이 아파 왔다.
자신의 품속에 찢겨진 북해의 속곳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놈이 어렸을 적에 팔 하나를 분질러 놓는 것이었는데…….”
시박은 원통하기라도 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저승차사가 되기 전, 시박은 도령 시절에 청룡과 같이 생활한 적이 있었다. 유난히 성격이 난폭했던지라 길들이기가 어려웠다. 오죽하면 이승을 총괄하는 월직차사도 손을 떼었겠는가.
하지만 뛰는 개차반 위에 나는 개차반이 있다 했다.
시박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여의주를 빼앗아 파기한다 협박하고, 열흘 밤낮으로 싸우기도 했다. 황산의 봉우리에 청룡의 대가리를 바늘 삼아 십자수를 뜬 전설은 아직까지도 저승에서 회자되는 믿기 어려운 전설 중 하나로 꼽혔다.
“당, 당장 그 호랑말코 같은 놈을 잡아 오너라.”
“싫습니다.”
“마음에 드는 속곳 열 개를 주겠다.”
“좋습…… 아니, 싫습니다.”
염라대왕은 마음이 급해졌다.
청룡을 제압할 만한 자가 시박 말고도 있었지만 모두가 시일이 걸리는 자들이었다. 시박을 보낸다면 분명 이틀 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염라대왕은 고민에 휩싸였다.
‘이놈이 물을 만한 미끼가 필요하도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덕분에 시박을 데리고 온 동자귀는 죽을 맛이었다.
잘못하다 자신한테 불똥이 튈 것만 같았다. 어찌 보면 속곳이 찢어진 것도 다 자신 때문이지 않은가.
시박이 입을 열었다.
“월영검에 대한 기억을 복원해 주시겠습니까?”
동자귀의 눈이 커졌다. 시박이 말한 것은 엄연한 소멸 행위였다.
감히 육신을 잃은 자가 전생의 기억을 요하다니.
염라대왕의 신음성도 어느새 사라졌다.
“환생(還生)하고 싶은 것이더냐?”
“소인은…… 궁금합니다. 망각수(忘却水)로 인해 사라진 이승의 기억 따위가 아닌 죽어서도 번뇌에 휩싸이게 하는 파기된 검 한 자루의 인연이 말입니다.”
시박이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월영검을 바라봤다.
날이 없음에도 울리는 검명(劍鳴)은 무엇이란 말인가.
“월영검은 파기된 것이 아니다.”
“그럼…….”
“좋다. 어차피 사(死)를 넘어서는 인연이었다. 내 너에게 청룡을 잡아 오고 나면 월영검에 대한 기억을 줄 것이다. 단 그것뿐이다. 그 후에 오는 의문은 아무리 시박이 너라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야.”
시박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대왕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염라대왕은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말하는 것이 필시 시박을 선택한 이유였다.
“청룡은 만년설산 12봉우리에 있다.”
시박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청룡 때문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있는 곳이 만년설산 12봉우리라니. 그곳은, 과거 시박이 차사(差使)직을 해 오며 처음으로 분노란 감정을 알게 된 곳이었다.
저승에서 유례없이 혼백을 영원(永遠)히 놓쳐 버린 것이다.
“죄인 천병세(天兵勢)를 기억하느냐?”
지금은 사라진 혈교의 마지막 교주였다. 재주가 하늘에 닿아 술법으로는 따를 자가 없었는데 그만 영생(永生)을 탐내 금지된 술법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영생을 얻었다 한들 명부에 적힌 기일은 바뀌지 않는 법.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강림차사 묵 도령이 나타났을 때 천병세는 그를 소멸시켜 버리고 말았다.
염라대왕은 분노했고 곧장 시박이를 천병세에게 보냈다.
장장 열흘간의 추격전이었다. 그 거리만 하남에서 북해였다.
시박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왜 저를 부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청룡은 하늘의 사신 중 하나. 필시 잡아 온다면 천병세를 놓친 네 오점이 사라질 것이다. 하물며 시박이 네게 찾아온 깨달음의 벽까지도.”
“차원의 균열(龜裂)이 일어나는 시각은 언제입니까?”
“두 시진에 한 번 꼴이다.”
북해의 만년설산. 그중 12봉우리는, 더위와 추위가 침범하지 못하는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도 두 시진을 버티지 못하는 곳으로 악명 높았다.
그 이상기후의 원인 중 하나가 차원의 균열(龜裂)이기도 했는데 오늘날 두 시진에 한 번을 기점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필시 휘말린다면 영혼체라도 소멸을 피하지 못한다.
“기준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묘시?”
“해시.”
시박은 말이 없어졌다.
천병세가 차원의 균열에 휘말려 대륙에서 사라진 것은 저승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청룡을 잡음으로 그것을 만회할 기회가 온 것이다.
천병세로 인해 알게 된 분노란 감정이 갈증을 일으켰다.
하지만 차원의 균열. 한 번 죽었음에도 또다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문득 천병세를 놓친 한(恨)이 덮쳐 왔다.
“택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 시박아.”
염라대왕의 말은 명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시박이 지그시 월영검을 바라봤다.
“네 대신 이 일을 할 수 있는…….”
시박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마치 무림에 있어 주군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 같았다. 동자귀 역시 시박의 그런 모습에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인 저승차사 김시박(金嘶搏). 이승을 어지럽혀 대왕의 심기를 해롭게 하는 영물 청룡을 이틀 안에 잡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출전을 허락해 주옵소서.”
염라대왕의 얼굴에 기쁨과 동시에 걱정이 어렸다.
시박이 자신에게 이런 예를 표하는 것이 처음이라 그랬고 동시에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기우에 그랬다. 시박이 몸을 일으키며 발길을 돌렸다.
시박이 염라대왕을 등지고 던지는 뜬금없는 한 마디…….
“근데 죽을병이라는 게 치질(痔疾)입니까?”
“갈(喝)!”
동자귀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웃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자신은 김시박이 아니다. 염라대왕의 민망한 기침 소리가 한동안 궁궐이 떠나갈 듯 이어졌다.
그날 이후 동자귀를 본 귀신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