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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화 저승사자 김시박(3)


“푸하하. 취걸개, 물건은 물건이다.”
호외에 적혀 있는 마지막 대목은 분명 때려죽이는 게 아닌 먹어 없앤다는 게 틀림없었다.
“황구라, 꿀꺽. 명주나 훔쳐 견옥에 놀러 가 볼까.”
시박은 이승에서 먹었던 황구의 맛을 생각하며 궁궐로 들어갔다.
궁궐은 제법 북적였다.
살아생전의 죄를 심판 받는 영혼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대왕이 또 일은 안 하고 농땡이 치고 있구만. 줄이 꽤나 밀렸어.”
유독 혼백이 탁한 게 많았다.
필시 이승에서 마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녀석들은 제압이 잘 안 된다는 것이 흠인데 가끔 술법에 뜻을 둔 자들은 어설프게 도망치기도 했다.
“노부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이냐!”
“감히 음양대제(淫陽大帝) 양휘락 님을 노하게 하다니!”
시박이는 수라간으로 가는 걸음을 멈췄다.
제법 무공 수위가 높은 놈들인지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흥미로운 눈길로 그들을 지켜본 시박은 치안 담당이 누구인지 찾아봤다.
필시 담당자를 우습게 보고 난리를 피우는 것일 터.
도령들이 주로 맡는 이 일은 그들을 데리고 있는 직속 저승차사들의 얼굴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대체 어떤 도령인지 한심하기 짝이…….”
시박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저 손으로 얼굴을 가릴 뿐이었다.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멀리서 음양대제 양휘락에게 뛰어오고 있는 도령은 익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강림차사였다.
아무리 도령이 된 지 일 년이 넘지 않았다 하지만 저 꼴은 대체 뭐란 말인가.
“노부를 기다리게 한 죄, 네놈은 찢겨 죽어도 모자라다!”
양휘락의 고함에 이 도령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로 보아 그를 제압이 아닌 진정으로 달래는 것 같았다.
양휘락의 손가락이 이 도령의 이마를 찔러 댔다.
아플 리야 없겠지만 이 도령의 반응은 일종의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딱밤을 너무 때렸나?”
시박의 딱밤은 다 잘되라고 때린 것이었다.
저승에서 삼세 번의 실수는 곧 소멸의 죄를 받을 수 있다.
다 애정이 어린 것이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역효과가 나타난 셈이었다. 양휘락의 기세에 혼백들이 이 도령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저, 저런 똥물에 튀겨 죽일!”
시박이 조용히 품에서 부채를 꺼냈다. 벌써 뒤치다꺼리를 해 준 게 열 번째다. 도움이 독이 되는 줄 알면서도 시박은 구시렁거리며 참견했다.
언제 한 번 딱밤이나 호되게 갈겨야지 생각하며.
“갈(喝)!”
시박은 노호성과 함께 부채를 휘둘렀다.
이 도령을 둘러쌌던 혼백들이 원인 모를 강력한 풍력(風力)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놀랍게도 땅에는 이 도령과 양휘락만이 남아 있었다.
시박은 순식간에 양휘락 앞에 나타났다.
보법과 달리 그 속도가 저승에서도 보기 힘든 상위의 움직임이었다.
“으힉! 귀, 귀신이…….”
시박의 손가락이 양휘락의 이마로 향했다.
마침 민머리라 어디를 때려도 잘 익은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나기 충분했다. 시박의 중지가 시위를 떠난 활처럼 양휘락의 이마 한가운데에 적중했다.
빠악!
소림의 탄지신공(彈指神功) 부럽지 않은 위력이었다.
음양대제 양휘락은 딱밤 한 대에 궁궐 밖으로 날아갔다. 물론 정신을 잃어버린 채로. 이 도령은 갑작스레 양휘락이 날아가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시박이 몸을 돌려 딱밤을 먹이려 들었다.
“으악!”
시박의 손가락이 이 도령의 이마 앞에서 멈췄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비 맞은 강아지 새끼마냥 떨고 있는 모습이라니. 괜스레 마음이 동해진 시박이었다.
명색이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도령인데 그동안 얼마나 고초를 겪었으면 이런 것일까. 시박은 이 도령에게 눈을 돌려 땅에 처박힌 혼백들을 쏘아봤다.
“히익!”
영혼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한 번 보여 준 시박은 이 도령의 목덜미를 잡고 뒷간으로 날아갔다.

***

궁궐 뒷간은 이승의 뒷골목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용변을 볼 리 없는 혼백인데 순전히 염라대왕의 취향 탓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자연스레 발길이 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시박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이 도령을 바라봤다.
“잘, 잘못했어요.”
이 도령은 쥐구멍에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떨고 있었다. 딱밤을 얼마나 맞을까, 아니 이번에는 딱밤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 도령.”
“네, 넵!”
이 도령은 불안한 마음에 얼굴을 쭉 내밀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박에게 자진 납세한 것이다. 그런 이 도령의 모습에 시박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힘드냐?”
“네?”
“요새 힘드냐고.”
“…….”
시박이 품속에서 뭔가를 뒤적거렸다. 이 도령은 긴장했다.
방심하게 만들고 둔기 같은 걸로 때리려는 걸까. 당장에 시박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려 했다.
“술안주로 먹으려던 건데…… 쩝. 이거 먹고 힘이나 내라.”
시박은 이 도령의 손에 억지로 뭔가를 쥐어 줬다. 미련이 남는지 쉽사리 손을 놓지는 못했지만 시박은 한숨 쉬며 말했다.
“내가 도령이었을 땐 저승차사를 부려 먹었어.”
시박은 그 말을 끝으로 수라간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도령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개떡이었다. 어느 천인공노할 놈이 제사상에 개떡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이 도령은 개떡과 시박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봤다.
난생처음 먹어 본 개떡은 눈물 나게 맛있었다.

수라간에 도착한 시박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술 창고를 지키는 자물쇠에게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 크기가 족히 사 척은 되고도 남아 보였다.
우습게도 자물쇠는 쇳덩어리답지 않게 몸을 떨고 있었다.
시박은 오랜만이라는 듯 자물쇠에게 말했다.
“철 공(鐵公), 오랜만이오. 그간 무탈하셨소?”
시박의 말에 자물쇠는 묵묵부답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박이 일부러 쇠 따위를 공이라고 높여 부르다니 말이다.
“그대가 오늘도 이렇게 맡은 바 소임을 다해 주어 이곳을 찾았소. 그러니 당신의 주둥이를 개봉해 문을 열어 주오.”
이번 역시 자물쇠는 대답이 없었다.
졸지에 시박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이나 하는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다. 시박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맞고 싶지 않으면 대답해라.”
“잠, 잠시…….”
시박의 하대에 자물쇠가 놀라 반응했다.
이윽고 자물쇠가 귀신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곧 팔 척 장신의 무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람한 덩치와 달리 그의 표정은 굉장히 떨떠름한 게 꼭 똥 밟았다는 얼굴이다.
“잘 지냈느냐.”
“저, 저승차사 시박 나으리 덕택입지요.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오냐. 자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예. 나으리.”
창고지기 자물쇠 귀신은 긴장했다.
시박의 입에서 나올 말은 불 보듯 뻔했다. 이번에도 막지 못한다면 염라대왕이 분명 경을 칠 것이다.
아니, 그전에 자물쇠 귀신이란 자신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
“안 됩니다.”
“……아직 말도 안 했다.”
“…….”
시박은 부채를 접어 자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소리가 묵직한 게 잘못 맞아도 골로 갈 정도였다.
“비켜라.”
“이번에도 막지 못하면 소인의 자물쇠란 존재감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압니다.”
“그런데 안 비켜?”
“예.”
자물쇠 귀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는 어떻게 맞는 것일까. 그는 과거 시박에게 두 번 정도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구타였다.
갓 100년을 넘어선 저승차사 김시박이 대뜸 술 좀 먹게 문을 열라 한 것이다.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뺨이나 한 대 때리고 말려 했는데, 그는 호되게 맞았다. 염라대왕에게도 맞아 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이틀간 개 패듯이 맞았던 것이다.
그 충격이 장장 80년은 갔다.
두 번째는 괴소문이었다.
시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술을 마시겠다고 찾아왔다.
자존심도 회복할 겸 이번에도 막아섰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다만 해괴한 소문이 하나 났는데 창고의 술동이 비는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뻔한 음모라는 것을 알고 그러려니 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살에 살을 더해 갔다. 어쩌면 100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자신이 술 창고나 지키는 신세인 건 그 때문인지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자물쇠 귀신의 오금이 저려 왔다.
차라리 맞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시박은 순순히 물러서려 하고 있었다.
저 흉악한 놈이 또 뭔 짓을 꾸미려 하는 것인가.
“시, 시박 나으리.”
“되었다. 난 그냥 가련다.”
자물쇠 귀신의 마음이 급해졌다.
분명하다. 저 말투는 소문이 퍼진 그날과 똑같다.
“신선주(神仙酒)만 드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진작 그럴 것이지.”
발길을 돌리던 시박이 시간만 낭비했다는 듯 곧장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자물쇠 귀신은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봤다.
이 행각을 보는 이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인상을 쓰더니 다시 자물쇠로 돌아가 버렸다.

창고 안은 명주의 향(香)으로 진동했다.
시박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냄새 맡기를 수십 번,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필시 걸음이 멈추는 곳에 신선주가 있으리.
심안(心眼)이라도 터득한 것처럼 시박은 술독들을 피해 움직였다. 모퉁이를 부드럽게 지나고 턱이 나온 부분은 사뿐히 밟았다.
시박이 멈춰 섰다. 막다른 벽이었다.
신선주가 있어야 할 곳은 열 장 정도 떨어진 진열대다.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
코끝에 감도는 오묘한 향이었다.
농도도 제법 짙어 시박의 발바닥이 말뚝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시박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백 일간 자리를 비운 사이 뭔가 새로운 술이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벽을 몇 번 두드려 본 시박은 바짝 코를 들이댔다. 냄새를 따라 몸이 움직이니 점점 바닥을 향했다.
지하다. 지하에서 냄새가 난다.
시박은 부채를 꺼내 먼지를 살살 훑어 냈다.
“움푹 패었어?”
자세히 보니 패인 곳은 모두 다섯이었다.
시박이 손바닥을 펴 바닥에 대었다.
손가락 끝이 패인 곳 전부에 닿자 쿠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한 장 정도의 바닥이 꺼지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허어. 이 양반이 이제 잔머리까지 굴리는군.”
처음에는 신선주나 마실 요량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런 장치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왠지 괘씸해졌다.
“다 마시지 못하면 내가 시박이 아니라 씨박이다. 흐흐.”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시박의 귀곡성(鬼哭聲)이 한동안 메아리쳤다. 계단은 일다경 정도 내려가자 끝이 보였다. 호롱불 같은 자그마한 불빛이 보였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시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만년설삼(萬年雪蔘)과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 그 수로 보아 백여 개는 충분히 넘고도 남았다.
시박은 만년하수오 하나를 천장에서 떼어 입으로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즙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무림인(武林人)이 보면 경악할 일이었다.
“무가 꽤 다네?”
소매로 입술을 훔친 시박은 술 단지로 보이는 항아리에 다가가 바가지로 한 모금 퍼마셨다.
공청석유(空淸石乳)였다.
만년하수오의 단맛을 공청석유로 입가심한 시박은 호리병에 가득 채워 허리춤에 매달았다.
“영약 창고는 따로 있을 텐데? 이상하네. 호오, 저건 독각화망이 아닌가!”
독각화망은 뿔이 달린 12척 길이의 구렁이다.
유별나게 큰 몸뚱이는 자연의 기운과 영물을 잡아먹은 탓인데 그 수가 저승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독각화망은 똬리를 뜬 채 유리병에 잠겨 있었다. 유리병 또한 크기가 천장에 닿을 정도다.
시박은 피식 웃었다. 이곳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영약 창고가 이런 곳에 있을 리 없지.
독각화망을 바라보는 시박의 눈에 강렬한 탐욕이 일었다.
“이 작자가 뱀술을 만들고 있었군.”
영물로 담근 술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박은 내심 염라대왕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과연 대왕이란 자리에 있을 만해. 생각의 차이가 달라도 이렇게 다르니.”
개봉이 되지 않은 걸로 보아 아직 숙성이 덜 된 듯싶었다.
시박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뱀술을 지나쳤다.
언젠가는 꼭 마시겠다는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