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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GV 배우의 어려움 5화
+ 새로운 시작 (3)


등줄기가 비죽 솟아 올랐다. 처음부터 열 명이라니……. 프로필 촬영을 마치고 데뷔 촬영에 대해 간단하게 들었지만, 너무 간단하게 들었나 보다. 뭐, 은수 씨는 그의 입장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데뷔 날짜가 정해진다.
준지 씨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으니 심장이 아주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내가 GV배우가 되는 거다. 거기다가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기게 된다. 심장이 제 박자를 찾지 못하고 두근두근, 엇박으로 뛰었다.
심장 소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지금 나는 무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전에 미오의 엉덩이 넓혀야 하는데 누가 할래? 너희 둘 중에 아무나 미오 엉덩이 좀 풀어 줘.”
긴장으로 바싹 올라붙었던 몸이 흠칫, 떨렸다. 대수롭지 않게 흘리듯 한 말치고는 내용이 상당히…… 상당히 거시기 했다.
“당연히!”
“우리 둘이 할게요.”
손을 번쩍 들고 방방 뛰며 입을 열던 소라의 앞으로 료 형이 불쑥 끼어들었다.
“웃! 료 형! 내가 먼저 말했는데!”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하지 않잖아. 둘이 같이 하자, 둘이. 3p 연습도 할 겸.”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었는지 료 형은 크게 당황하는 빛 없이 소라를 달래며 장난스럽게 말을 마쳤다. 파스타 가게에서부터 느낀 거지만, 료 형도, 소라도 얼굴과 참 어울리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엉덩이 얘길 서슴없이 하질 않나, 3p라는 얘길 하질 않나.
“너희만 즐기지 말고 나도 즐겁게 좀 해 주지?”
소라와 료 형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준지 씨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툭 던졌지만 료 형도, 소라도 재밌는 일을 앞둔 이들처럼 밝은 표정만 지을 뿐 대표이사의 심드렁한 기분은 시원하게 무시해 버렸다. 준지 씨의 말을 나라도 거들어야 되는 걸까…….
늙은이는 서럽다고 말하며 짐짓 슬픈 표정을 짓던 준지 씨가 갑자기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데뷔 날짜 정확하게 정해지면 알려 준다는 말만 남기고 촬영장을 휙 나가 버렸다. 잘은 몰라도 또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다.
데뷔 영상 일정이 곧 잡힌다니……. 두렵고 무섭지만 한편으론 기대도 되었다.
‘그래도 좀 무섭네. 열 명을 상대하는 건.’
료 형과 소라와 잠시 어울렸던 나는 그들이 간 후 할 일 없이 TV를 멍하게 보았다. 그러다 눈이 스르륵 감겨 잠을 청했다.

한참 단잠을 자고 있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기척이 들렸고 곧이어 침대가 출렁이는 게 느껴졌다. 내 옆에 사람이 누웠다.
‘소라가 왔나? 술 냄새는 하나도 안 나네?’
술 먹고 노래방에서 시간을 많이 때우고 왔나 보다 생각을 하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잘 자네.”
‘소라 목소리가 아닌 거 같아.’
잠에 취했어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 옆 자리를 꿰어 차고 있는 사람은 소라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흐릿한 시야로 소라와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남자가 보였다. 푹 자고 일어나서 처음 마주할 사람이 이 남자일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소라가 왔었는데…….
주위를 둘러봤다. 잠에 취했어도 누군가가 내 옆에서 잠들었던 기억은 있다. 잠결에 소라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시간에 올 사람은 소라밖에 없었다.
“일어났어? 샌드위치 사 왔는데 먹을래?”
“아, 저, 소라는요?”
눈앞의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소라를 찾았다.
“소라? 너밖에 없던데?”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내 옆에 누군가가 잤다. 그건 단정할 수 있다. 그렇다는 건 소라가 왔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생각을 하다 말고 눈앞의 남자와, 방금 내가 나온 방과 거실을 죽 둘러보았다. 이상한 기시감이다. 잠에 취해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밖에 없었다는 말은…….
“저기, 그럼 어제 여기서 주무신 건 레이 씨였어요?”
조심스럽게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물으면서 속으론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랐다. 안 그래도 어색한데 같이 한 침대를 쓴 게 맞다면 더 어색할 것 같아서다.
“응. 어제 복귀했다고 준지 씨랑 은수랑 술 좀 마셨거든.”
“아…… 그렇구나. 아! 저기 죄송하지만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제야 어젯밤에 들어오지 않은 소라가 떠올랐다. 혹시나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잠이 든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폰? 여기.”
‘레이 씨가 료 형이랑 친한 거 같았으니까 소라 번호는 없어도 료 형 번호는 있겠지?’
전화번호부를 뒤지려다가 남의 전화번호를 보는 건 예의에 어긋날 것 같아 레이 씨에게 폰을 내밀었다.
“레이 씨, 죄송한데요. 소라가 어제 술 마시고 여기서 자고 간다고 그랬는데 오지 않아서 혹시나 길거리에서 잠이 든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료 형이 아마 소라 번호를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료 형에게 전화 좀 걸어 주시면 안 되나요?”
“……잠시만. 료에게 전화 걸어 주면 되지?”
그의 물음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소라라는 애, 사귀는 사이?”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모양인지 폰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레이 씨가 불쑥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네? 아, 아뇨. 여기 들어와서 알게 된 친구예요.”
심지어 어제 알게 된 친구다. 게다가 그렇게 귀엽게, 인형처럼 생긴 애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
“친구? 친구면서 전화번호도 몰라?”
그의 물음에 소라를 걱정하던 마음에 안개가 끼었다. 어제 알게 된 친구인 데다가 전화번호까지 모른다. 순간 ‘전화를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폰이 없어서요. 얼마 전에 못 쓰게 됐거든요.”
그러자 레이 씨가 나를 흘끔 보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들고 나왔던 폰은 언제부터인가 불통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못 쓰게 만든 모양이다. 용건이 있으면 이곳 촬영장으로 직접 와 주시는 준지 씨 덕분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불편한 일이 생기니 당장 장만해야겠다.
“자.”
“감사합니다!”
-여보세요? 레이 형?
전화를 건네받자마자 료 형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둘러 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료 형. 저 미오예요.”
-미오? 미오!? 미오 네가 이 시간에 왜 레이 형의 전화를 쓰고 있어? 너 벌써 레이 형한테 잡힌 거야?
료 형의 반응에 내가 오히려 더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다짜고짜 잡혔다니. 무슨 소린가 싶어 갸웃했지만 지금은 그런 대화로 시간을 잡아먹을 때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소라가 어제 자고 가기로 했는데 오지 않아서 걱정이 돼서 전화했어요. 료 형은 소라 번호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소라? 술 먹고 거기서 자고 가기로 하지 않았어?
“네. 그런데 안 왔어요. 그래서 걱정이 돼서.”
-아, 알았어. 내가 전화해 보고 다시 전화 줄게. 레이 형 전화로 하면 돼?
그래 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료 형과 통화를 하고 나니 그나마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지만 사그라들었다.
“료 형이 조금 있다가 연락 주기로 했는데 그거 한 통만 더 받을게요.”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미오는 친절해 보이네. 정도 많고.”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저 그곳에 있는 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호감도, 호기심도 깃들어 있지 않다.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사람처럼. 레이 씨의 표정은…… 기괴했다.
“에? 아, 아뇨. 그게 친절한 게 아니라.”
“내가 폰 사 줄까?”
순간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선뜻 와닿지 않았다.
“별 뜻 없어. 폰 없는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것뿐이니깐.”
‘무표정으로 별말을 다 하네. 폰 없는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폰을 사 주겠다니. 착각하면 어쩌려고 말을 막 하는 거지?’
하지만 보통 상식과는 달리, 이 남자가 스스로도 말했듯이 정말 별 뜻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표정은 그런 생각에 확신을 가질 정도로 지루해 보였다.
“아뇨. 괜찮아요!”
별 뜻 없이 던진 말을 거절한 것인데도 내심 어색한 상황이 된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찰나, 폰을 쥐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기다리던 료 형의 전화다.
“전화 좀 받을게요!”
레이 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미오?
“네. 저예요.”
-소라한테 전화하니까 아직까지 술 마시고 있더라. 그 녀석 때문에 아침부터 미오만 놀랐네.
“아니에요. 별일 없으면 된 거죠. 이른 시간에 죄송했어요.”
-아니야. 괜찮아. 놀러 갈게. 조금 있다가 보자.
“네. 조금 있다가 봬요.”
료 형의 전화에 안심이 됐다.
‘소라는 귀여워서 아무 곳에서나 자면 진짜로 누가 납치해 갈지도 몰라.’
“전화 다 했으면 샌드위치 사 왔으니 그거 먹자. 혹시 밥 먹어야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
잠시 잊고 있었던 레이 씨의 목소리에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은수 씨와 생활했을 때와 맞먹을 정도로 같이 있는 게 편하지가 않다.
“아뇨. 아무거나 잘 먹어요.”
“잘됐네. 먹자.”
소파에 앉는 레이 씨를 보며 그의 옆에 앉으려다가 간이 의자를 가져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나를 레이 씨가 노골적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불편해 하는 걸 눈치챈 건가?’
이미 앉았는데 이제 와서 그의 곁으로 자리를 이동해 봤자 더 이상하게 볼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 씨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고 보니 레이 씨의 손에 샌드위치가 들려 있지 않다. 혹시나 싶어 그가 앉은 소파를 봐도, 잡다한 것이 올려져 있는 탁자를 봐도 샌드위치는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 있어.”
“예?”
“주방에 놔뒀다고.”
“아, 드셨어요?”
아닌데. 분명 먹자고 그랬는데? 그럼 같이 먹자는 뜻 아닌가?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레이 씨를 바라보니 그런 나를 레이 씨도 멀뚱멀뚱 바라본다. 그러길 몇 초 후, 그가 한 말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섰다.
“아, 가져올까요?”
“아니. 그냥 우리가 주방으로 가자.”
“네? 아, 네.”
주방으로 향하는 레이 씨를 주춤주춤 따라나섰다. 주방으로 들어선 우리는 멀뚱멀뚱 샌드위치가 담긴 비닐봉지만 바라봤다. 멀뚱거리는 나를 레이 씨가 또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대로 나를 봐 봤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안 되겠던지 봉지 속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접시에 담아 내게 내밀었다.
‘아, 준비해야 하는 거구나.’
“죄…… 송해요. 제가 눈치가 없어서. 뭐, 다른 거 필요한 건 없으세요?”
“아니.”
그의 말에 일단 샌드위치를 집어 입에 넣고는 흘끗 바로 앞에 앉은 남자를 훔쳐봤다.
‘레이 씨는 밖에서 산 샌드위치도 접시에 담아 먹는구나.’
눈치 보며 먹는 찌질한 나와는 달리 레이 씨는 샌드위치를 우아하게 한 입, 한 입 베어 먹었다. 마치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게 또 신기해 흘끗흘끗 그를 훔쳐보다가 결국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표 나게 눈을 내리깔지만 이미 마주치고 난 후라 어색하게 다시 시선을 올렸다.
“내가 어색해? 어제 밥도 먹고 잠도 같이 잤잖아.”
‘어제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잔 건 맞지만, 딱히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요만큼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 대놓고 나는 그쪽이 너무 어색해요,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미오는 조용하네.”
“네? 그게……. 말주변이 별로 없어요.”
낯선 사람과 둘이 있을 때는 말주변이 없는 게 고통스럽다. 혹시나 이 사람이 나 때문에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사서 걱정을 하느라 숨이 막혀 오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미오 옆에선 조용히 있어도 될까? 나도 가끔 말하는 게 싫을 때가 있거든.”
“아, 네.”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다. 특별하게 조용한 걸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레이 씨와는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내 대답을 끝으로 오물오물 샌드위치 씹는 소리만 들렸지만 아까보단 훨씬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레이 씨가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마실 거라곤 김빠진 콜라밖에 없을 냉장고라 얼른 일어나 찬장에서 커피스틱을 꺼내 들었다.
“마실 건 커피밖에 없는데 다른 거 사 올까요?”
“아니. 커피 마시면 돼.”
내가 들고 있던 스틱커피를 건네니 레이 씨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물끄러미, 물끄러미, 계속. 그 시선을 고개를 기울인 채 보다가 뒤늦게 눈치를 채곤 얼른 내민 스틱커피를 거둬들였다.
“아, 끄, 끓여 드릴게요.”
나는 갓 들어온 신입이고 이 사람은 선배인 데다가 나이도 나보다 많은데 ‘네 손으로 직접 커피 끓여 먹어’라고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어머니가 모든 걸 다 해줬기에 이런 것에 눈치가 많이 없다. 앞으로 정신 바짝 차려야 미움 살 일이 없을 텐데 벌써부터 앞날이 캄캄하다. 그리고 일을 저질러 놓고 말하긴 뭣하지만 나는 커피 물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일을 어쩐다……. 내가 하겠다고 했는데 이제와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커피스틱을 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레이 씨가 내 손에 들린 스틱커피의 끝을 잡고 나를 물끄러미 본다. 왜 쳐다보나 싶어 어색하게 그를 보고 있으니 그가 별반 표정 변화 없이 내 손에 들린 스틱커피를 빼앗았다.
“이리 줘. 미오는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지?”
“아…… 저, 죄송합니다. 다음엔 제가 할게요.”
익숙하지 않다는 게 틀린 말도 아닌데 괜히 상처가 된다. 가슴 한 부분에 멍이 생긴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어떤 허당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의 표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죄송하기는. 너도 타 줄까?”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조금 느린 말투다.
“저는 커피 먹으면 속이 울렁거려서요.”
“그래? 그럼 우유 사 올 걸 그랬네.”
“제가 사 올게요.”
“그럴래?”
차라리 우유 사러 나가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겠다, 생각하며 서둘러 지갑을 들고 나섰다.
“선생님이랑 단둘이 밥 먹는 기분이 이럴까?”
레이 씨와는 빨리 친해질 것 같지 않다. 까마득한 선배 같아서일까? 그래도…… 그래도 언젠가는 친해질 날이 오면 좋겠다.



♥애널 확장 (1)


부리나케 달려 우유를 사 들고 촬영장으로 들어서다 들리는 료 형의 목소리에 어제보다 더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레이 씨와 단둘이 있었던 시간이 생각보다 힘이 들었었나 보다.
“신기한 거 많네?”
“그런가? 형 한 달밖에 안 쉬었잖아.”
“한 달 사이에 물건들이 꽤 늘었어.”
“아, 이거, 이거. 이거 때문에 네코 애들 엉덩이 다 찢어져서 난리 났었어.”
“크긴 크다. 큰데 돌기까지 있으니 엉덩이 찢어질 만했겠어. 이건 뭐야? 유리관? 애널용인가? 이것도 꽤 굵은데?”
“응. 이것도 초반에 넣으면 애널 찢어져서 촬영 막바지쯤에 확인용으로 넣는 게 좋아.”
“볼만하겠네.”
“아주 볼만하지~”
투명 케이스에 담긴 촬영 소품들을 하나하나 꺼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가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들의 대화에 낄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서다.
“미오 왔어? 하루 만에 다시 보니깐 더 예쁘네.”
어떻게 안 건지, 료 형이 힐끔 뒤를 돌아보다 나를 보곤 환하게 웃어 주었다. 반가운데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니 료 형이 그런 나를 보며 옅게 웃고는 내 손을 잡아 소품 앞으로 앉혔다.
“미오는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
료 형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스 안에 펼쳐진 소품들의 현란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에 쓰는 거지?’
달아오른 얼굴이 신경 쓰여 도구 상자에서 시선을 돌리려다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소품을 발견하고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료 형이 그런 나를 어떻게 알고 그걸 꺼내며 씩 웃는다.
“이거 오늘 미오 엉덩이에 넣을까?”
“네? 이, 이게 뭔데요?”
작은 탁구공같이 생긴 물건을 경계하며 물었지만 료 형은 싱긋 웃기만 하고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첫 촬영에 피를 흘리지 않으려면 애널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료 형의 입에서 내 애널 얘기가 나오니 당장 숨어 버리고만 싶다.
“이건 원래 은수가 할 일이잖아?”
레이 씨가 무표정한 얼굴로 애널 길들이기는 원래 은수 씨가 해야 하는 건데 왜 료 네가 하냐며 묻는다.
“흐음~ 왜 내가 할까? 준지 씨가 난생처음으로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르지.”
“위기?”
위기라고 말하며 싱긋 웃는 료 형과, ‘위기?’라고 되묻는 레이 씨의 살짝 구겨진 얼굴이 참 상반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감상에 젖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더욱이 준지 씨의 위기에 대해서 생각할 만한 정신머리도 못 되었다.
‘설마 료 형, 이 대낮부터 레이 씨 앞에서 내 애널을 늘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혹시나 싶었지만 젤을 찾느라 부산스러운 료 형을 보니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다.
“미오! 오늘 아침 모닝 배변 했어?”
“모닝 배변? 웃! 아, 아뇨! 아, 아직요.”
모닝 배변이라는 말에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놈의 얼굴은 시도 때도 없이 왜 이렇게 빨개지는 거야.’
“그럼 관장해야겠다. 네코는 이게 불편하다니깐.”
“과, 관장이요?”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관장약이 어디 있더라~ 분명 여기에도 관장약이 있을 텐데.”
료 형은 미처 준비 못한 네코를 위한 관장약이 있을 거라며 서랍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여기 있다고 소리치며 조그만 상자를 꺼내 왔다. 없기를 바라는 내 바람을 비웃듯 상자 안에 관장약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싱긋 웃는 료 형의 미소가 이번처럼 싫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못 하겠으면 내가 해 줄까? 관장기구가 따로 있는데.”
그가 얇은 자바라 펌프처럼 생긴 긴 줄을 내게 보여 주었다.
‘아. 이게 관장할 때 쓰는 거였구나.’
“이건 어떻게…….”
그걸 물끄러미 보며 이걸로 어떻게 관장을 시키느냐고 물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고? 한쪽 끝을 용액 통에 넣고 다른 이쪽은 미오의 엉덩이에 집어넣은 다음 펌프질을 하는 거야.”
“아. 난로에 기름 넣는 거랑 비슷한 거네요?”
관장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신기한 도구를 호기심 가득하게 쳐다봤다.
“어? 어린 미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 설마 이게 더 좋은 거야? 미오는 내가 해 주는 걸 원하는구나?”
“히익,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하, 하고 나올게요!”
료 형의 짓궂은 장난에 부리나케 일어나 화장실로 달음박질쳤다.
“뭣하면 주사기로도 해 줄 수 있고!”
“아, 아뇨! 제, 제가 할게요!”
주사기를 들먹이는 료 형의 말에 깜짝 놀라 화장실 문을 서둘러 닫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있으니 손 안에 든 것이 유난히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상자 겉에 적힌 사용설명서를 가만히 보다 한숨이 절로 터졌다. 항문에 넣은 다음 한 번에 액을 다 짜 넣고 기다리라는 사용설명서의 첫 부분부터 막혀 버렸다. 항문에 어떻게 넣는 건지.
폭탄의 내부를 확인하는 것처럼 긴장감이 가득한 손길로 천천히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물방울 모양처럼 생긴 관장약을 보고 일단 안심했다. 생각보다 액도 많이 없을뿐더러 항문에 삽입되는 부분이 새끼손가락보다 훨씬 가느다래서 아프지는 않을 것 같다.
그때였다,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왜요?”
“넣었어? 어려우면 내가 해 줄까?”
문 너머로 들리는 료 형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같은데도 전혀 자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뇨! 제가 할게요!”
‘이런 친절은 굳이 베풀지 않아도 되는데.’
“어려우면 불러. 내가 해 줄게.”
“네!”
대답은 씩씩하게 했지만 료 형을 부를 생각은 전혀 없다. 조금 후 어차피 보이게 될 엉덩이지만 구태여 지금 당장 까서 보이고 싶진 않았다.
“하아, 일단 바지부터 벗고.”
이대로 있으면 뭐하나 싶어 용기 내어 바지를 벗고 애널에 관장약의 입구를 살짝 가져가 대었다. 애널이라고 생각한 곳에 입구를 가져가 댔음에도 입구가 엉뚱한 엉덩이 골 사이에 닿아 난감하기 그지없다. 꾸물꾸물 손을 움직여 애널로 조심스럽게 관장약 입구를 옮겼다.
‘이대로 밀어 넣으면 되려나? 조심해서 밀어 넣으면 다치지 않겠지?’
조심스럽지만 힘 있게 관장약을 밀어 넣으니 이물질의 침입에 항문이 앙 다물려 쓸데없이 여린 살들만 쓸렸다. 어정쩡한 포즈로 씨름하고 있는데 갑자기 찰칵 소리가 들리며 문고리가 돌아갔다. 어? 어어? 이게 갑자기 왜?
너무 놀라 바지를 다시 입을 새도 없이 눈만 끔뻑인 상태로 보게 된 건 아직도 어색해 죽을 것 같은 레이 씨다.
“료가 처음일 것 같다기에 도와주려고.”
“괜… 찮은데요.”
“처음엔 혼자서 어려워. 해 줄게.”
“아…….”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 앞에서 창피함에 길길이 날뛰기도 뭐하다. 이 남자는 창피함과 수치심마저도 얼어붙게 만드는 재주가 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약을 건네고 어정쩡하게 뒤돌아섰다.
“엉덩이 더 들어 봐. 그래야 다치지 않아.”
레이 씨에 말에 이상한 곳이 더 들리고 말았다. 페니스가 슬슬 커지는 느낌이 매우 곤란했지만 애널만 보고 있을 레이 씨에겐 아마 보이지 않을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