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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GV 배우의 어려움 4화
+ 새로운 시작 (2)
“이런 좁은 곳에선 이 인원이면 충분해. 너무 적어서 놀란 거지?”
어떻게 내 생각을 안 건지 스태프 중 누군가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아…… 그렇구나. 아! 미, 미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니 일순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 후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이번 신입은 귀엽다느니 애가 참 순해 보인다느니, 촬영할 맛이 나겠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고갔다.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으니 다행이다.
“자자! 인사했으면 촬영 들어가자!”
히단 감독님이 일어나며 말하자 다들 여유롭게 그를 따라 일어나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GV 촬영이라고 해서 내가 너무 선입견을 뒀나 보다. 이쪽 관련 사람들은 다 변태인 줄 알았는데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쉬는 시간에 또 얘기하자. 밥 안 먹은 거 같은데 뭐라도 챙겨 먹고 있어.”
촬영장으로 쓰이는 방으로 가던 료 씨가 자상하게 나를 챙겼다. 다시 들어도 그윽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
‘료 씨하곤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 저렇게 화보에서 갓 뽑아낸 듯한 잘생긴 사람이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과 친구해 줄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주위에 저 사람과 어울릴 만한 화려한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을 터다.
촬영을 시작한 방을 소심하게 멀리서 훔쳐봤다. 료 씨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누워 책을 펼치자 히단 감독님이 이것저것 요구하며 그의 자세를 조금씩 바꿔 갔다.
“좀 더 위로 올라갈까?”
“여기쯤이요?”
이제 딱 좋은 자세와 구도가 된 모양이다.
“료, 돌린다.”
감독님이 말하자 순식간에 주위가 아주 조용해졌다.
정말 책을 읽고 있는 건지 미동이 없던 료 씨가 어느 순간 허벅지를 슬쩍슬쩍 비벼 댔다. 허벅지를 비벼 대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야할 수 있구나. 그의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숨마저 참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내가 료 씨의 DVD를 산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저 팬티를 벗겨 내고 싶어 동영상을 뒤로 넘겼을 게 분명해. 이런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 료 씨에게서 눈을 뗐다.
이 이상 봤다가 큰일이 날 것 같다. 완전 발기가 되고 얼굴까지 붉어진다면 앞으로 이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 도망쳐 다니게 될 거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냉장고를 열었지만 허기를 채울 만한 마땅한 게 없다.
‘사 놓은 게 없으니 당연한 건가?’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먹을 것을 사러 집을 나섰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혹시나 길을 잃을까 싶어 앞으로만 천천히 걸었다.
몸이 삐걱댈 때마다 아버지에게 맞았던 그 악몽 같았던 순간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내 몸에서 이런 소리도 날 수 있구나 싶은, 귀를 얼얼하게 할 정도의 커다란 타격음과 마음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말들.
목이 뜨끈해질 정도로 씁쓸함이 치밀어 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은 흐린데 날씨는 되게 좋네.”
나는 언제쯤이면 따뜻한 햇살에 행복하게 웃게 될까?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 대신, 행복하고 설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5분 남짓 걸어 찾아낸 마트에서 컵라면과 일회용 밥을 사서 돌아와 주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갈 때였다.
“료, 소라가 올 때까지 쉬어.”
“쉬지 말라고 해도 기운 없어서 축 늘어져요.”
거친 숨소리가 아주 적나라하게 들렸다. 소라라는 사람이 와야 한다는 걸 보니 촬영이 잠시 중단이 된 모양이다. 두근두근. 다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현실감 확 와닿는 거친 숨소리, 심지어 아주아주 멋진 남자의 사정 후 숨 고르는 소리다. 심장뿐 아니라, 아랫도리까지 직격할 만하다.
“너도 이제 나이 들었나 보다. 한 번 사정한 걸로 축 늘어지는 걸 보면.”
“10대랑은 당연히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스물여섯 밖에 안 됐는데 나이 들었다니, 좀 너무한데요?”
“우는 소리 하기는, 너 갓 들어왔을 때보다 체력이 떨어진 건 사실이잖아. 아, 그렇지. 우리 소라 올 때까지 자장면이나 시켜 먹고 있을까?”
컵라면의 비닐을 벗기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방금 미오가 들어 온 소리가 났는데, 하며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랄 일도 아닌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대화에 내가 나왔기 때문일까, 대화를 엿듣는 꼴이 돼서 놀랐던 걸까?
가만히 몇 초 정지해 있다가 쭈뼛거리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 듣고 있다는 걸 저들도 뻔히 다 알 텐데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게 버릇없어 보이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다.
“우리 자장면 시켜 먹을 건데 미오는 뭐 먹을래?”
아니나 다를까 거실로 나서자 감독님이 놀란 빛 하나 없이 태연하게 나를 보며 물었다.
“네? 저는 볶음밥이요.”
마침 배가 고팠던 데다, 아무래도 라면보다는 밥이 먹고 싶어 사양하지도 않고 주문했다. 그러고 나선 첫 만남인데 한 번은 사양했어야 하지 않나 뒤늦게 걱정을 하며 감독님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라도 ‘얘 뭐지?’ 하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낌새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일사천리로 자장면 가게에 주문까지 마친 감독님이 스태프와 여상한 대화를 나눴다. 방금 전 야한 영상을 찍던 사람들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평범한 모습이라 나 홀로 어리둥절하다.
오래 일하면 이렇게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는 걸까? 나도 오래 일하면 이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걸까?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를 숨기지 않는 날이 오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앞으로 맺을 인연들과는 숨기는 거 없이, 답답한 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내겐 지금 소속감이 아주 절실히 필요하니까. 아직은 친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붕 뜬 기분으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음식이 배달되어 와 밥을 먹을 때였다.
“우와! 얘가 미오야?”
언제 들어온 것인지 눈이 아주 동그랗고 앳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를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먼저 인사하는 게 좋을까? 인형같이 생겼는데…… 게다가 성인 같지도 않은데……. 여기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는 걸까?
“응, 화제의 신입인 미오. 인기 많을 것 같지? 미오, 이쪽은 소라.”
갑자기 등장한 인물에 깜짝 놀라 말도 못하고 눈만 댕그랗게 뜨고 있으니 료 형이 중간에 끼어들어 서로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목소리만큼이나 행동도 자상하기 그지없다.
“우와! 내 타입! 완전 귀티 나게 생겼다!”
일언반구 없이 내 목을 답삭 끌어안고 품에 안기는 남자…… 아이의 행동에 몸이 쩍 얼어 버렸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내가 왜 이 사람에게 안긴 걸까? 아, 그러고 보니 소라라고 하면 아까 기다려야 한다는 그 배우인 건가? 그럼 성인? 이렇게 앳되어 보이는 사람이?
머리가 혼란스러워 한 손에는 볶음밥 그릇, 한 손에는 숟가락을 쥔 채 그대로 얼어 버렸다.
“둘이 아마 동갑일 텐데. 미오 23살이지? 소라도 23살이니까 둘이 친하게 지내면 되겠네.”
“우와! 신난다! 동갑 친구다!”
정말 기뻐하는 소라 씨의 모습에 얼어붙던 몸이 조금씩 녹기는 했는데, 동갑이라고? 내가? 이 사람과? 신기한 마음에 눈이 아주 동그란 귀여운 남자를 멀뚱멀뚱 감상했다. 다시 봐도 참 인형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작고, 앳되다. 처음 본 내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대해 주는 게 퍽 감사하다.
‘좋은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
소라 씨도 료 씨도 감독님도 모두 좋은 사람 같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되겠다.’
GV 촬영이라는 특수한 조건하에 만난 이들이라 같이 어울릴 수조차 없는 변태면 어쩌나 했는데 일반인들의 만남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듯하다.
식사를 마치고 료 씨와 소라 씨의 촬영이 시작됐다.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뻘쭘해서 방으로 들어왔지만, 문을 닫았음에도 소라 씨의 여자 같은 가느다란 신음,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 몸과 몸이 닿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이럴 상황에 대비해 챙겨 온 료 씨의 책을 읽으며 한동안 고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순 소리가 잠잠해졌다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촬영이 끝났나 보다. 조심스럽게 나가 보니 소라 씨와 료 씨는 보이지 않고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카메라를 챙겨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 간다. 료랑 소라는 씻고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나올 거야.”
“아,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은 스탭진과 함께 섞여 중요한 촬영 장비를 짊어지고는 문을 닫으셨다.
“좋은 사람들 같아서 다행이야.”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 힘든 시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지는 모양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기도 뭐해서 현관에서 시선을 떼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으니 소라 씨와 료 씨가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 거실로 나와 반갑게 아는 체해 주었다.
“미오 나와 있네~”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소라 씨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다 허리에 수건만 두른 모습이라니……. 심장이 세차게 펌프질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내 몸은 이 야시시한 상황에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료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우리 친해질 겸 셋이서 밥 먹으러 갈까?”
“난 찬성! 미오도 찬성!”
료 씨의 제안에 손을 번쩍 든 소라 씨가 꿈쩍도 하지 않은 내 손을 덥석 잡아 번쩍 들며 외쳤다.
“좋아. 그럼 오늘은 내가 쏜다.”
“오예!”
밥 먹자는 소리에 이렇게 기쁘게 반응할 수 있는 소라 씨가 부럽다.
‘그나저나 신기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안고 있었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니.’
금세 평범한 동료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다. 나갈 준비를 하는 료 씨와 소라 씨를 따라 나도 주뼛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껴입었다.
‘아직 볶음밥 소화 안 됐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뻥 차 버릴 순 없다. 언제 저런 멋지고 귀여운 남자들과 밥을 먹어 볼까? 외투를 입고 나오니 둘이 소파에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남선남이라는 게 저 두 사람들 보고 하는 말일 거다.
“이 앞에 낙지철판 가게로 가자.”
료 씨의 제안에 소라 씨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런 게 있었던가?’ 하고 중얼거렸다.
“생겼어?”
“응. 얼마 전에 생겼는데 평이 괜찮아.”
“응! 나는 좋아! 미오도 괜찮지?”
소라 씨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보며 묻자 매운 걸 못 먹는데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나 때문에 다른 메뉴를 고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많이 맵지는 않겠지.’
많이 매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일긴 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 낀 채 가게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어? 레이 형!”
료 씨가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등을 보곤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료 씨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몸을 돌리는 남자를 보고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가늘지도 그렇다고 너무 우락부락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구에 큰 키를 가진 남자가 천천히 돌아봤을 때 이게 웬 영화 속 한 장면인가 했다. 어쩌면 런웨이에 선 엄청난 모델을 눈앞에 본 느낌 같기도 했다.
“료?”
서둘러 걷는 료 씨를 따라 소라 씨와 나도 레이 씨라고 불린 사람에게 다가섰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져 그의 얼굴이 또렷해질수록 가슴이 점점 더 거세게 날뛰었다.
“응, 나 료. 안경이나 렌즈 하라니까.”
대화를 유추해 볼 때 레이 씨라는 남자는 눈이 나쁜 모양이다. 료 씨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눈을 가느다랗게 뜬 이유가 그래서인가 보다. 그나저나 이 남자는 또 누구일까?
한순간에 세상이 뒤집혀 버린 것만 같다. 23년을 살며 연예인 이외에 이렇게 외모가 출중한 사람을 본 적은 준지 씨를 만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앞에 이런 어마어마한 사람이 나타나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안경은 거슬려서 싫고 렌즈는 못 넣어서. 그리고 눈이 많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럼 라섹이라도 하라니깐.”
“별로 불편하지 않아.”
“형답다. 여긴 웬일이야? 형 잠시 쉬는 거 아니었어?”
“아, 이제 복귀.”
“이번엔 복귀가 빠르네?”
“응. 이번엔 빨리 헤어졌어.”
“그래? 우리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아, 이번에 미오라고 신입 들어왔어.”
돌연 내게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남자의 시선에 등줄기가 바짝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안, 안녕하세요. 미, 미오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수줍은 인사였지만 나름 발음은 잘 된 것 같다.
“미오라고? 그래, 반갑다.”
말로는 반갑다고 말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억양이라 들떠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런 반응은 당연해.’
레이 씨는 나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행동했다. 나는 속으로 ‘난 특별하지 않다’고 주문을 외며 욱신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런 반응은 흔히 보아 왔다. 영재 교육을 받고 월반으로 대학까지 졸업한 형과 비교당하던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왔다.
“미오, 미오. 레이 씨 처음 보지?”
싸늘해질 정도로 차분해진 마음을 돌이켜 보고 있을 때, 소라 씨가 내 팔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였다.
“아, 네.”
“저 사람 천연 바람둥이니깐 조심해야 돼. 대놓고 바람둥이야, 바람둥이.”
조금은 멍해 보이는 레이 씨가 바람둥이라고 하니 확 와닿지 않는다. 순간 뇌리에 ‘나는 특별하지 않아’라는 말이 스쳤다. 특별하지 않은 나는 내 주제를 매우 잘 알기에 그에게 반하지 않을 거다.
“저 같은 사람은 거들떠도 안 볼 거예요. 그래도 귀띔해 줘서 고마워요.”
나를 걱정해 준 소라 씨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겉치레 인사를 하긴 했지만 정말 괜한 걱정이다. 저런 사람이 나를 볼 리가 없다.
“그나저나 료 형 너무하다. 레이 씨 만났다고 우리는 안중에도 없나 봐. 치, 혼자 신났어!”
우리가 속삭이고 있는 잠깐 사이, 레이 씨와 대화하던 료 씨가 우리와 꽤 멀어져 있었다. 소라 씨가 그 거리를 가늠하고는 치,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걸음 걷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핑크빛 분위기는 내가 다 방해할 거야! 미오도 어서 가자.”
“아, 네.”
소라 씨의 손에 잡혀 부지런히 걷기는 했지만, 혹시나 방금 만난 레이 씨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건가 싶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거 맛있다. 먹어 봐.”
레이 씨가 좋아하는 곳이라며 낙지에서 파스타로 급 식사 메뉴가 변경이 되었다.
안 먹어 봤던 거 시킨다던 레이 씨가 새로 접한 음식이 꽤나 맛있었던 모양인지 옆에 앉아 있던 내게 포크에 돌돌 만 파스타를 내밀었다.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황하고 있으니 레이 씨가 묻는다.
“왜? 너는 이거 싫어해?”
“아, 아뇨.”
“그럼 먹어 봐. 맛있어.”
레이 씨는 내 입에 기어이 자신의 포크를 밀어 넣었고 나는 어색하게 입을 벌려 파스타를 받아먹었다. 좀 전에 사람을 귀찮아하던 그 기색은 어디에 버려두고 이러나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갑자기 왜 친한 척하세요?’ 하고 물을 수 있는 성격도 못 되니 그저 말없이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맛있지?”
싱긋 웃으며 묻는 레이 씨의 모습에 차갑게 가라앉은 줄 알았던 심장이 또 세찬 반응을 보였다. 대놓고 바람둥이란 게 이런 거구나. 소라 씨가 미리 알려 준 덕분에 레이 씨의 행동에 오해나 헛된 생각을 하지 않게 돼서 참 다행이다.
“그나저나 미오 너무해~”
갑작스러운 소라 씨의 발언이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먹던 파스타를 소라 씨에게도 맛보여 줘야 했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해 보지만 소라 씨가 ‘너무해~’라고 할 정도의 일을 했던가 싶다.
“동갑인데 말 좀 놓자! 소라 씨라고 하니까 내가 너무 늙어 보이잖아!”
“어? 아, 미안해… 요. 아니, 응. 알았어.”
그런 ‘너무해’라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얼른 알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앗! 나도!라고 외치며 끼어들었다.
“예? 그, 그치만.”
“나도 료 씨보단 료 형이 좋아.”
“아, 알겠어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불러 볼 기회가 극히 적어 형이라는 단어가 조금 어색했다.
“우리 동갑끼리 친하게 지내자. 앞으로 자주 볼 거니까!”
“아, 응.”
소라의 적극적인 행동에 금방 적응할 수가 없어 자꾸만 어색한 미소가 지어진다. 소라가 기분 나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노력할 때였다.
“흐음, 미오가 탑인가 봐? 나랑 자주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이런 평범한 음식점에서 탑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라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이 씨가 부드럽게 웃으며 상체를 조금 기울이고 턱에 손을 괴었다.
‘바람둥이.’
레이 씨의 눈빛에 심장이 내 뜻대로 제어가 안 된다. 속으로 바람둥이, 바람둥이, 바람둥이를 외치며 얼른 시선을 내려 파스타를 뒤적였다.
“오랜만에 복귀를 신입에게 당하는 걸로 해 볼까? 그것도 나름 재밌겠네. 사용한 적이 오래라 좀 풀어 놔야겠는데?”
이번에야 말로 몸이 펄쩍 뛰어오를 만큼 당황했다. 만약 입 속에 파스타가 들어 있었더라면 분명 내뿜었으리라.
“뭐?! 정말로 미오한테 엉덩이 주려고? 내가 달라고 할 때는 코웃음도 안 치더니?!”
“원하면 원할수록 주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잖아.”
엉덩이를 주제로 이 장소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게 과연 정상일까, 음란죄는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문득 주위를 보니 나 빼고는 다들 태연해 보여서 되레 내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했다.
“뭐야, 치사하게.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다정하기만 할 줄 알았던 료 형이 입을 삐죽이며 레이 씨에게 따졌다. 우와, 이 멀끔하게 생긴 얼굴에 저런 표정도 있구나…… 하던 찰나였다. 섹시하게 웃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낮은 웃음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레이 씨가 료 형의 반응에 웃음이 터진 모양이다.
뭐야……. 이 남자도 웃을 줄 아네? 기분 좋게 웃는 그의 모습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을 알 텐데도 레이 씨는 내게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안달 나게 만드는 게 내 매력이니까 좀 더 노력해 봐.”
아직도 웃음기가 배어 있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다시 속으로 ‘내가 특별한 게 아니야’를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전 레이 씨가 한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걱정이 되었다.
‘에이, 그냥 하는 말이겠지. 왜 나 같은 거 때문에 사용한 적이 오래된 애널을 풀겠어?’
혹시나 진심일까 봐 물어보려다가 괜히 창피당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진심일 리도 없고, 나 같은 초짜가 이들과 촬영할 일도 아마 당분간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프로필 촬영 후 대충이나마 들었던 곧 찍을 데뷔 영상 생각만으로도 내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맞다, 나 오늘 미오 방 좀 빌려도 돼?”
뜬금없는 소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오늘 촬영장 근처에서 술 약속 있거든. 가까운 곳에 미오가 있으니 잠시 신세질까 해서.”
“아, 응. 아무 신경 쓸 것 없이 언제든지 와. 내 집도 아닌데 뭐.”
“준지 씨가 너 쓰라고 내준 방이니까 네 방이나 다름없지 뭐. 새벽에 몰래 들어갈게.”
새벽에 조용히 들어오겠다는 소라의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혼자 자취하는 집에 친구가 놀러 온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자고 있을 때 잠깐 들르는 건데 기다리고 있으면 부담이겠지? 들뜨지 말자. 앞으로 이런 기회가 많을 거니까.’
자꾸만 들뜨려고 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파스타로 신경을 돌려 버렸다.
파스타로 배를 과하게 채우고 료 형과 소라와 함께 촬영장으로 돌아왔을 때다.
“미오!”
문이 열려 있어서 촬영 팀이 와 있나 했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주 낯이 익다.
“준지 씨?”
준지 씨가 거실 소파에 앉아 상체만 비틀어 나를 불렀다. 그 바람에 단추 세 개가 열린 그의 셔츠가 활짝 열리며 가슴골이 쩍 갈라져 있는 아주 탄탄한 가슴과 봉긋 솟아 올라있는 색이 진한 유두가 아주 똑똑히 보였다. 적갈색의 유두에는 금색의 피어스가 달려 있었다.
홀린 듯 그의 앞으로 다가서니 그가 손이 뻗어 내 머리를 토닥였다.
“벌써 선배들이랑 친해진 거야? 역시 미오는 매력적이라니깐.”
“좋, 좋으신 분들이 많아서요.”
“그랬어? 우리 미오, 좋은 선배 만나서 표정이 훨씬 좋아졌는데? 네 데뷔 날짜를 정해도 되겠어.”
데뷔라는 단어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싫다는 건 아닌데…… 긴장이 되긴 했다.
“미오 데뷔 날짜 정하러 온 거예요?”
소라가 내 대신 물었다.
“응. 미오 몸에 멍이 옅어질 쯤으로 잡아 두려고. 새로운 신입에 대한 고글맨들 기대가 상당해. 지원하는 놈들도 많고. 열 명으로 추려내기 어려울 정도라니까. 아, 은수가 탑이 몇 명인지 알려줬지?”
고개를 저었다. 탑들이라고만 했던 것 같다.
“탑은 열 명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관례야, 관례.”
+ 새로운 시작 (2)
“이런 좁은 곳에선 이 인원이면 충분해. 너무 적어서 놀란 거지?”
어떻게 내 생각을 안 건지 스태프 중 누군가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아…… 그렇구나. 아! 미, 미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니 일순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 후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이번 신입은 귀엽다느니 애가 참 순해 보인다느니, 촬영할 맛이 나겠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고갔다.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으니 다행이다.
“자자! 인사했으면 촬영 들어가자!”
히단 감독님이 일어나며 말하자 다들 여유롭게 그를 따라 일어나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GV 촬영이라고 해서 내가 너무 선입견을 뒀나 보다. 이쪽 관련 사람들은 다 변태인 줄 알았는데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쉬는 시간에 또 얘기하자. 밥 안 먹은 거 같은데 뭐라도 챙겨 먹고 있어.”
촬영장으로 쓰이는 방으로 가던 료 씨가 자상하게 나를 챙겼다. 다시 들어도 그윽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
‘료 씨하곤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 저렇게 화보에서 갓 뽑아낸 듯한 잘생긴 사람이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과 친구해 줄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주위에 저 사람과 어울릴 만한 화려한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을 터다.
촬영을 시작한 방을 소심하게 멀리서 훔쳐봤다. 료 씨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누워 책을 펼치자 히단 감독님이 이것저것 요구하며 그의 자세를 조금씩 바꿔 갔다.
“좀 더 위로 올라갈까?”
“여기쯤이요?”
이제 딱 좋은 자세와 구도가 된 모양이다.
“료, 돌린다.”
감독님이 말하자 순식간에 주위가 아주 조용해졌다.
정말 책을 읽고 있는 건지 미동이 없던 료 씨가 어느 순간 허벅지를 슬쩍슬쩍 비벼 댔다. 허벅지를 비벼 대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야할 수 있구나. 그의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숨마저 참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내가 료 씨의 DVD를 산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저 팬티를 벗겨 내고 싶어 동영상을 뒤로 넘겼을 게 분명해. 이런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 료 씨에게서 눈을 뗐다.
이 이상 봤다가 큰일이 날 것 같다. 완전 발기가 되고 얼굴까지 붉어진다면 앞으로 이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 도망쳐 다니게 될 거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냉장고를 열었지만 허기를 채울 만한 마땅한 게 없다.
‘사 놓은 게 없으니 당연한 건가?’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먹을 것을 사러 집을 나섰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혹시나 길을 잃을까 싶어 앞으로만 천천히 걸었다.
몸이 삐걱댈 때마다 아버지에게 맞았던 그 악몽 같았던 순간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내 몸에서 이런 소리도 날 수 있구나 싶은, 귀를 얼얼하게 할 정도의 커다란 타격음과 마음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말들.
목이 뜨끈해질 정도로 씁쓸함이 치밀어 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은 흐린데 날씨는 되게 좋네.”
나는 언제쯤이면 따뜻한 햇살에 행복하게 웃게 될까?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 대신, 행복하고 설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5분 남짓 걸어 찾아낸 마트에서 컵라면과 일회용 밥을 사서 돌아와 주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갈 때였다.
“료, 소라가 올 때까지 쉬어.”
“쉬지 말라고 해도 기운 없어서 축 늘어져요.”
거친 숨소리가 아주 적나라하게 들렸다. 소라라는 사람이 와야 한다는 걸 보니 촬영이 잠시 중단이 된 모양이다. 두근두근. 다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현실감 확 와닿는 거친 숨소리, 심지어 아주아주 멋진 남자의 사정 후 숨 고르는 소리다. 심장뿐 아니라, 아랫도리까지 직격할 만하다.
“너도 이제 나이 들었나 보다. 한 번 사정한 걸로 축 늘어지는 걸 보면.”
“10대랑은 당연히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스물여섯 밖에 안 됐는데 나이 들었다니, 좀 너무한데요?”
“우는 소리 하기는, 너 갓 들어왔을 때보다 체력이 떨어진 건 사실이잖아. 아, 그렇지. 우리 소라 올 때까지 자장면이나 시켜 먹고 있을까?”
컵라면의 비닐을 벗기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방금 미오가 들어 온 소리가 났는데, 하며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랄 일도 아닌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대화에 내가 나왔기 때문일까, 대화를 엿듣는 꼴이 돼서 놀랐던 걸까?
가만히 몇 초 정지해 있다가 쭈뼛거리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 듣고 있다는 걸 저들도 뻔히 다 알 텐데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게 버릇없어 보이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다.
“우리 자장면 시켜 먹을 건데 미오는 뭐 먹을래?”
아니나 다를까 거실로 나서자 감독님이 놀란 빛 하나 없이 태연하게 나를 보며 물었다.
“네? 저는 볶음밥이요.”
마침 배가 고팠던 데다, 아무래도 라면보다는 밥이 먹고 싶어 사양하지도 않고 주문했다. 그러고 나선 첫 만남인데 한 번은 사양했어야 하지 않나 뒤늦게 걱정을 하며 감독님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라도 ‘얘 뭐지?’ 하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낌새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일사천리로 자장면 가게에 주문까지 마친 감독님이 스태프와 여상한 대화를 나눴다. 방금 전 야한 영상을 찍던 사람들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평범한 모습이라 나 홀로 어리둥절하다.
오래 일하면 이렇게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는 걸까? 나도 오래 일하면 이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걸까?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를 숨기지 않는 날이 오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앞으로 맺을 인연들과는 숨기는 거 없이, 답답한 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내겐 지금 소속감이 아주 절실히 필요하니까. 아직은 친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붕 뜬 기분으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음식이 배달되어 와 밥을 먹을 때였다.
“우와! 얘가 미오야?”
언제 들어온 것인지 눈이 아주 동그랗고 앳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를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먼저 인사하는 게 좋을까? 인형같이 생겼는데…… 게다가 성인 같지도 않은데……. 여기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는 걸까?
“응, 화제의 신입인 미오. 인기 많을 것 같지? 미오, 이쪽은 소라.”
갑자기 등장한 인물에 깜짝 놀라 말도 못하고 눈만 댕그랗게 뜨고 있으니 료 형이 중간에 끼어들어 서로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목소리만큼이나 행동도 자상하기 그지없다.
“우와! 내 타입! 완전 귀티 나게 생겼다!”
일언반구 없이 내 목을 답삭 끌어안고 품에 안기는 남자…… 아이의 행동에 몸이 쩍 얼어 버렸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내가 왜 이 사람에게 안긴 걸까? 아, 그러고 보니 소라라고 하면 아까 기다려야 한다는 그 배우인 건가? 그럼 성인? 이렇게 앳되어 보이는 사람이?
머리가 혼란스러워 한 손에는 볶음밥 그릇, 한 손에는 숟가락을 쥔 채 그대로 얼어 버렸다.
“둘이 아마 동갑일 텐데. 미오 23살이지? 소라도 23살이니까 둘이 친하게 지내면 되겠네.”
“우와! 신난다! 동갑 친구다!”
정말 기뻐하는 소라 씨의 모습에 얼어붙던 몸이 조금씩 녹기는 했는데, 동갑이라고? 내가? 이 사람과? 신기한 마음에 눈이 아주 동그란 귀여운 남자를 멀뚱멀뚱 감상했다. 다시 봐도 참 인형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작고, 앳되다. 처음 본 내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대해 주는 게 퍽 감사하다.
‘좋은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
소라 씨도 료 씨도 감독님도 모두 좋은 사람 같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되겠다.’
GV 촬영이라는 특수한 조건하에 만난 이들이라 같이 어울릴 수조차 없는 변태면 어쩌나 했는데 일반인들의 만남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듯하다.
식사를 마치고 료 씨와 소라 씨의 촬영이 시작됐다.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뻘쭘해서 방으로 들어왔지만, 문을 닫았음에도 소라 씨의 여자 같은 가느다란 신음,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 몸과 몸이 닿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이럴 상황에 대비해 챙겨 온 료 씨의 책을 읽으며 한동안 고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순 소리가 잠잠해졌다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촬영이 끝났나 보다. 조심스럽게 나가 보니 소라 씨와 료 씨는 보이지 않고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카메라를 챙겨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 간다. 료랑 소라는 씻고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나올 거야.”
“아,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은 스탭진과 함께 섞여 중요한 촬영 장비를 짊어지고는 문을 닫으셨다.
“좋은 사람들 같아서 다행이야.”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 힘든 시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지는 모양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기도 뭐해서 현관에서 시선을 떼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으니 소라 씨와 료 씨가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 거실로 나와 반갑게 아는 체해 주었다.
“미오 나와 있네~”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소라 씨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다 허리에 수건만 두른 모습이라니……. 심장이 세차게 펌프질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내 몸은 이 야시시한 상황에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료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우리 친해질 겸 셋이서 밥 먹으러 갈까?”
“난 찬성! 미오도 찬성!”
료 씨의 제안에 손을 번쩍 든 소라 씨가 꿈쩍도 하지 않은 내 손을 덥석 잡아 번쩍 들며 외쳤다.
“좋아. 그럼 오늘은 내가 쏜다.”
“오예!”
밥 먹자는 소리에 이렇게 기쁘게 반응할 수 있는 소라 씨가 부럽다.
‘그나저나 신기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안고 있었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니.’
금세 평범한 동료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다. 나갈 준비를 하는 료 씨와 소라 씨를 따라 나도 주뼛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껴입었다.
‘아직 볶음밥 소화 안 됐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뻥 차 버릴 순 없다. 언제 저런 멋지고 귀여운 남자들과 밥을 먹어 볼까? 외투를 입고 나오니 둘이 소파에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남선남이라는 게 저 두 사람들 보고 하는 말일 거다.
“이 앞에 낙지철판 가게로 가자.”
료 씨의 제안에 소라 씨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런 게 있었던가?’ 하고 중얼거렸다.
“생겼어?”
“응. 얼마 전에 생겼는데 평이 괜찮아.”
“응! 나는 좋아! 미오도 괜찮지?”
소라 씨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보며 묻자 매운 걸 못 먹는데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나 때문에 다른 메뉴를 고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많이 맵지는 않겠지.’
많이 매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일긴 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 낀 채 가게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어? 레이 형!”
료 씨가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등을 보곤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료 씨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몸을 돌리는 남자를 보고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가늘지도 그렇다고 너무 우락부락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구에 큰 키를 가진 남자가 천천히 돌아봤을 때 이게 웬 영화 속 한 장면인가 했다. 어쩌면 런웨이에 선 엄청난 모델을 눈앞에 본 느낌 같기도 했다.
“료?”
서둘러 걷는 료 씨를 따라 소라 씨와 나도 레이 씨라고 불린 사람에게 다가섰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져 그의 얼굴이 또렷해질수록 가슴이 점점 더 거세게 날뛰었다.
“응, 나 료. 안경이나 렌즈 하라니까.”
대화를 유추해 볼 때 레이 씨라는 남자는 눈이 나쁜 모양이다. 료 씨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눈을 가느다랗게 뜬 이유가 그래서인가 보다. 그나저나 이 남자는 또 누구일까?
한순간에 세상이 뒤집혀 버린 것만 같다. 23년을 살며 연예인 이외에 이렇게 외모가 출중한 사람을 본 적은 준지 씨를 만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앞에 이런 어마어마한 사람이 나타나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안경은 거슬려서 싫고 렌즈는 못 넣어서. 그리고 눈이 많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럼 라섹이라도 하라니깐.”
“별로 불편하지 않아.”
“형답다. 여긴 웬일이야? 형 잠시 쉬는 거 아니었어?”
“아, 이제 복귀.”
“이번엔 복귀가 빠르네?”
“응. 이번엔 빨리 헤어졌어.”
“그래? 우리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아, 이번에 미오라고 신입 들어왔어.”
돌연 내게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남자의 시선에 등줄기가 바짝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안, 안녕하세요. 미, 미오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수줍은 인사였지만 나름 발음은 잘 된 것 같다.
“미오라고? 그래, 반갑다.”
말로는 반갑다고 말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억양이라 들떠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런 반응은 당연해.’
레이 씨는 나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행동했다. 나는 속으로 ‘난 특별하지 않다’고 주문을 외며 욱신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런 반응은 흔히 보아 왔다. 영재 교육을 받고 월반으로 대학까지 졸업한 형과 비교당하던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왔다.
“미오, 미오. 레이 씨 처음 보지?”
싸늘해질 정도로 차분해진 마음을 돌이켜 보고 있을 때, 소라 씨가 내 팔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였다.
“아, 네.”
“저 사람 천연 바람둥이니깐 조심해야 돼. 대놓고 바람둥이야, 바람둥이.”
조금은 멍해 보이는 레이 씨가 바람둥이라고 하니 확 와닿지 않는다. 순간 뇌리에 ‘나는 특별하지 않아’라는 말이 스쳤다. 특별하지 않은 나는 내 주제를 매우 잘 알기에 그에게 반하지 않을 거다.
“저 같은 사람은 거들떠도 안 볼 거예요. 그래도 귀띔해 줘서 고마워요.”
나를 걱정해 준 소라 씨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겉치레 인사를 하긴 했지만 정말 괜한 걱정이다. 저런 사람이 나를 볼 리가 없다.
“그나저나 료 형 너무하다. 레이 씨 만났다고 우리는 안중에도 없나 봐. 치, 혼자 신났어!”
우리가 속삭이고 있는 잠깐 사이, 레이 씨와 대화하던 료 씨가 우리와 꽤 멀어져 있었다. 소라 씨가 그 거리를 가늠하고는 치,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걸음 걷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핑크빛 분위기는 내가 다 방해할 거야! 미오도 어서 가자.”
“아, 네.”
소라 씨의 손에 잡혀 부지런히 걷기는 했지만, 혹시나 방금 만난 레이 씨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건가 싶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거 맛있다. 먹어 봐.”
레이 씨가 좋아하는 곳이라며 낙지에서 파스타로 급 식사 메뉴가 변경이 되었다.
안 먹어 봤던 거 시킨다던 레이 씨가 새로 접한 음식이 꽤나 맛있었던 모양인지 옆에 앉아 있던 내게 포크에 돌돌 만 파스타를 내밀었다.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황하고 있으니 레이 씨가 묻는다.
“왜? 너는 이거 싫어해?”
“아, 아뇨.”
“그럼 먹어 봐. 맛있어.”
레이 씨는 내 입에 기어이 자신의 포크를 밀어 넣었고 나는 어색하게 입을 벌려 파스타를 받아먹었다. 좀 전에 사람을 귀찮아하던 그 기색은 어디에 버려두고 이러나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갑자기 왜 친한 척하세요?’ 하고 물을 수 있는 성격도 못 되니 그저 말없이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맛있지?”
싱긋 웃으며 묻는 레이 씨의 모습에 차갑게 가라앉은 줄 알았던 심장이 또 세찬 반응을 보였다. 대놓고 바람둥이란 게 이런 거구나. 소라 씨가 미리 알려 준 덕분에 레이 씨의 행동에 오해나 헛된 생각을 하지 않게 돼서 참 다행이다.
“그나저나 미오 너무해~”
갑작스러운 소라 씨의 발언이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먹던 파스타를 소라 씨에게도 맛보여 줘야 했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해 보지만 소라 씨가 ‘너무해~’라고 할 정도의 일을 했던가 싶다.
“동갑인데 말 좀 놓자! 소라 씨라고 하니까 내가 너무 늙어 보이잖아!”
“어? 아, 미안해… 요. 아니, 응. 알았어.”
그런 ‘너무해’라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얼른 알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앗! 나도!라고 외치며 끼어들었다.
“예? 그, 그치만.”
“나도 료 씨보단 료 형이 좋아.”
“아, 알겠어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불러 볼 기회가 극히 적어 형이라는 단어가 조금 어색했다.
“우리 동갑끼리 친하게 지내자. 앞으로 자주 볼 거니까!”
“아, 응.”
소라의 적극적인 행동에 금방 적응할 수가 없어 자꾸만 어색한 미소가 지어진다. 소라가 기분 나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노력할 때였다.
“흐음, 미오가 탑인가 봐? 나랑 자주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이런 평범한 음식점에서 탑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라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이 씨가 부드럽게 웃으며 상체를 조금 기울이고 턱에 손을 괴었다.
‘바람둥이.’
레이 씨의 눈빛에 심장이 내 뜻대로 제어가 안 된다. 속으로 바람둥이, 바람둥이, 바람둥이를 외치며 얼른 시선을 내려 파스타를 뒤적였다.
“오랜만에 복귀를 신입에게 당하는 걸로 해 볼까? 그것도 나름 재밌겠네. 사용한 적이 오래라 좀 풀어 놔야겠는데?”
이번에야 말로 몸이 펄쩍 뛰어오를 만큼 당황했다. 만약 입 속에 파스타가 들어 있었더라면 분명 내뿜었으리라.
“뭐?! 정말로 미오한테 엉덩이 주려고? 내가 달라고 할 때는 코웃음도 안 치더니?!”
“원하면 원할수록 주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잖아.”
엉덩이를 주제로 이 장소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게 과연 정상일까, 음란죄는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문득 주위를 보니 나 빼고는 다들 태연해 보여서 되레 내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했다.
“뭐야, 치사하게.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다정하기만 할 줄 알았던 료 형이 입을 삐죽이며 레이 씨에게 따졌다. 우와, 이 멀끔하게 생긴 얼굴에 저런 표정도 있구나…… 하던 찰나였다. 섹시하게 웃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낮은 웃음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레이 씨가 료 형의 반응에 웃음이 터진 모양이다.
뭐야……. 이 남자도 웃을 줄 아네? 기분 좋게 웃는 그의 모습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을 알 텐데도 레이 씨는 내게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안달 나게 만드는 게 내 매력이니까 좀 더 노력해 봐.”
아직도 웃음기가 배어 있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다시 속으로 ‘내가 특별한 게 아니야’를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전 레이 씨가 한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걱정이 되었다.
‘에이, 그냥 하는 말이겠지. 왜 나 같은 거 때문에 사용한 적이 오래된 애널을 풀겠어?’
혹시나 진심일까 봐 물어보려다가 괜히 창피당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진심일 리도 없고, 나 같은 초짜가 이들과 촬영할 일도 아마 당분간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프로필 촬영 후 대충이나마 들었던 곧 찍을 데뷔 영상 생각만으로도 내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맞다, 나 오늘 미오 방 좀 빌려도 돼?”
뜬금없는 소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오늘 촬영장 근처에서 술 약속 있거든. 가까운 곳에 미오가 있으니 잠시 신세질까 해서.”
“아, 응. 아무 신경 쓸 것 없이 언제든지 와. 내 집도 아닌데 뭐.”
“준지 씨가 너 쓰라고 내준 방이니까 네 방이나 다름없지 뭐. 새벽에 몰래 들어갈게.”
새벽에 조용히 들어오겠다는 소라의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혼자 자취하는 집에 친구가 놀러 온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자고 있을 때 잠깐 들르는 건데 기다리고 있으면 부담이겠지? 들뜨지 말자. 앞으로 이런 기회가 많을 거니까.’
자꾸만 들뜨려고 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파스타로 신경을 돌려 버렸다.
파스타로 배를 과하게 채우고 료 형과 소라와 함께 촬영장으로 돌아왔을 때다.
“미오!”
문이 열려 있어서 촬영 팀이 와 있나 했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주 낯이 익다.
“준지 씨?”
준지 씨가 거실 소파에 앉아 상체만 비틀어 나를 불렀다. 그 바람에 단추 세 개가 열린 그의 셔츠가 활짝 열리며 가슴골이 쩍 갈라져 있는 아주 탄탄한 가슴과 봉긋 솟아 올라있는 색이 진한 유두가 아주 똑똑히 보였다. 적갈색의 유두에는 금색의 피어스가 달려 있었다.
홀린 듯 그의 앞으로 다가서니 그가 손이 뻗어 내 머리를 토닥였다.
“벌써 선배들이랑 친해진 거야? 역시 미오는 매력적이라니깐.”
“좋, 좋으신 분들이 많아서요.”
“그랬어? 우리 미오, 좋은 선배 만나서 표정이 훨씬 좋아졌는데? 네 데뷔 날짜를 정해도 되겠어.”
데뷔라는 단어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싫다는 건 아닌데…… 긴장이 되긴 했다.
“미오 데뷔 날짜 정하러 온 거예요?”
소라가 내 대신 물었다.
“응. 미오 몸에 멍이 옅어질 쯤으로 잡아 두려고. 새로운 신입에 대한 고글맨들 기대가 상당해. 지원하는 놈들도 많고. 열 명으로 추려내기 어려울 정도라니까. 아, 은수가 탑이 몇 명인지 알려줬지?”
고개를 저었다. 탑들이라고만 했던 것 같다.
“탑은 열 명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관례야, 관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