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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거실 소파에 요한을 앉힌 재민이 먹을 걸 내오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숙소에 아무도 없는 건지 재민이 발소리가 멀어지자 거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요한은 옆으로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인터넷 아이콘을 누르자 마침 병원에 있을 때 보던 플루토에 대한 기사가 그대로 떠올랐다.
“그사이에 댓글이 더 늘었네.”
사실 요한은 병원에 혼자 있을 때 플루토의 팬 카페와 생전에 다니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여러 정보를 검색했었다. 플루토 자체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으나 자신이 들어와 있는 이 몸은 생각보다 더한 악평에 시달리고 있었다.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가라’라든가, ‘신은 공평하다. 요한에게 노래와 외모를 주고 인성을 가져갔다’와 같은 반응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노래라도 열심히 해야겠네.’
같은 이름이라 그런지 플루토의 요한에게 달린 악플들을 봤을 때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같아서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요한이 무심한 성격이라 쓱 보고 넘긴 거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악플들이었다.
손으로 화면을 내려 댓글을 보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무언가 튀어나왔다.
“서프라이즈!”
“서프라이즈.”
쌍둥이인 윤과 현이었다. 쌍둥이는 입원 첫날을 기점으로 일주일 내내 병원에 들락날락하더니 이제는 요한과 완전히 친해져 스스럼없이 형이라 부르고, 장난도 쳤다. 굳이 좋다고 오는 아이들을 매섭게 내칠 생각도 없었고, 일일이 터치하기도 귀찮았기에 요한은 옆에서 뭘 하든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있었으면 인기척을 내든가.”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놀랐어?”
쌍둥이가 나타나면 데시벨이 두 배로 커지기 때문에 요한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고는 했다. 자신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으면 쌍둥이가 더 시끄럽게 구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윤과 현은 얼굴은 거의 비슷했지만 성격이 꽤 달랐다. 윤이 발랄하고 활기찬 인간 비타민 같다면, 현은 윤에 비해 훨씬 차분하며 어른스럽고 성숙한 편이었다. 둘이 합심해서 악동 같은 장난을 치는 거야 똑같았지만.
소파 뒤에서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한 윤이 요한의 아이패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더니 헐, 하고 소리쳤다. 현이 무슨 일이냐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혹시 지금 인터넷 기사 봐? 보지 마, 보지 마. 거기 댓글들 미쳤어.”
“맞아, 나도 처음에 그거 보고 밤에 잠도 못 잤어. 보지 마.”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흔들어 대던 쌍둥이는 떠 있던 창을 닫아 버렸다. 어차피 이미 본 내용이고, 요한도 크게 관심이 없었으니 꺼도 상관없었다. 둘이 양옆에서 떠드니 강아지 두 마리가 낑낑거리며 우는 느낌이었다.
‘무거워…….’
윤과 현은 틈만 나면 요한에게 와서 몸을 기댔다. 요한의 반응이 무서울 정도로 심드렁하다 보니 둘 다 일부러 더 달라붙는 것이다. 큰형인 재민에게 부리는 애교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말없이 둘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대충 볼을 문질러 주었다.
“요한 형이 쓰다듬어 주면 기분이 좋아.”
“그치, 뭔가 어려운 미션 깨고 보상받은 기분이지.”
“나중에 전부 돈 받을 거니까.”
“인간적으로 미성년자들한테 그러지 맙시다!”
요한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쌍둥이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는 듯 마는 듯 하는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에 걸렸다 사라졌다. 몸이 바뀌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의 몸이었을 때보다 타인의 접근이나 스킨십에 더 유해졌다는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 건가. 그건 곤란한데.’
이 몸의 주인이 워낙 예민하고 외로움을 잘 타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고민하던 요한은 될 대로 되라며 고민을 접었다. 전 주인의 멘탈이 유리였다면 지금의 요한은 거의 초합금 강철 수준이었다. 이런 이상하고 불가사의한 상황을 별 불평 없이 넘어가는 것만 봐도 그랬다.
“윤이랑 현이 언제 와 있었어. 오늘 화보 촬영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어느새 그릇에 샌드위치를 가득 담아 온 재민이 쌍둥이를 보고 외쳤다. 셋이서 말을 하든 말든 요한은 손을 뻗어 샌드위치를 입에 집어넣었다.
“그거 저녁으로 딜레이되는 바람에 잠깐 요한이 형 얼굴 보고 가려 그랬지!”
“촬영 끝나면 너무 늦잖아. 그래서 매니저 형 졸라서 왔어.”
“그래그래, 잘났다. 너희 고집을 누가 꺾겠어.”
재민이 쌍둥이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영락없이 엄마에게 혼나는 아이들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요한은 묵묵히 샌드위치만 먹고 있었고, 쌍둥이는 너무하다며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요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째 샌드위치를 입에 넣을 뿐이었다.
세 번째 샌드위치를 집은 요한이 입을 쉴 새 없이 우물거렸다. 살짝 구워 바삭한 빵과 감칠맛 나는 채소와 과일 모두 훌륭했지만, 그중에서 제일은 샌드위치 사이에 들어간 참깨드레싱이었다. 세 번째로 먹는 샌드위치였지만 요한은 다시금 감탄했다.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겠는데 맛있네.”
요한이 작게 중얼거리자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만들었다, 또라이.”
막 씻고 나왔는지 신우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요한은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재민 빼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촬영 갔던 윤과 현을 빼고 둘 다 숙소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우가 안쪽에 있는 욕실을 사용한 탓에 거실에 있던 요한은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팽팽한 대치 상태에서 재민과 쌍둥이는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요한이 무덤덤하게 신우의 신경을 긁는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짜증 게이지가 가득 찬 신우와는 달리 요한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항상 전투태세인 건 신우였지 요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볼 때마다 속을 긁는 소리를 해 대긴 했지만 요한은 딱히 신우와 싸울 마음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샌드위치는 맛있었고, 요한은 그 이상으로 무언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거참, 오늘도 거지 같은 표정이네. 요한은 입 안에 있는 샌드위치를 씹으며 위에서부터 아래로 신우를 훑었다. 확실히 아이돌이라 그런지 키도 크고 비율이 좋았다. 눈매가 가늘고 길게 찢어져 요한보다 훨씬 더 사납고 거친 인상이었지만 동양적인 미가 물씬 느껴지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재민은 굳이 말하자면 아이돌보다는 배우 같은 얼굴에 가까웠다. 화려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맛은 없지만 보면 볼수록 질리지 않고 호감을 준다는 평이 압도적이었다. 개인플레이가 유난히 심한 플루토의 팬들이 재민에 한에서는 모두 하나 되어 ‘우리 큰오빠, 우리 큰오빠’ 하는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신우가 모델 같은 마스크, 재민이 배우 같은 마스크라면 쌍둥이는 말 그대로 아이돌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화려했다. 한 명으로도 충분히 눈에 띄는데 똑같이 생긴 게 하나 더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미 데뷔하기도 전부터 ‘미친 비주얼’, ‘하늘이 내린 비주얼’로 덕후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몰고 온 플루토는 데뷔하자마자 단번에 큰 인기를 얻었지만, 연이은 요한의 깽판으로 인해 현재까지 꾸준히 하락하는 중이었다.
모든 사정을 알게 된 요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이 몸의 전 주인을 싫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이고 데뷔인데, 먹으라고 밥을 퍼 먹여 줘도 요한이 주는 족족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상을 뒤엎어 버린 셈이었다. 요한은 오히려 플루토의 멤버들이 너무 착해 빠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었으면 물어뜯어도 한참 전에 물어뜯었을 텐데.
신우의 불쾌함 가득 섞인 눈초리에 생각에서 현실로 돌아온 요한이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아, 최신우.”
울컥하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짜증이 신우의 눈에서 일렁였다.
“짜증 나니까 내 이름 부르지 말라 그랬을 텐데.”
“예, 예.”
신우가 건성건성 대답하는 요한의 멱살을 잡으려는 걸 재민과 쌍둥이들이 간신히 말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요한은 무심한 얼굴로 세 번째 샌드위치도 해치웠다.
“건드리기만 해도 성질내는 걸 보니까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뭐?”
“그것도 아니면 욕구불만이겠지. 그럼 난 씻고 싶어서 이만.”
“야,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이런 씨……!!”
기다렸다는 듯이 정확한 타이밍에 뛰어든 재민이 신우를 온몸으로 막았다. 신우의 키가 크긴 했지만 재민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게다가 어느새 쌍둥이도 신우의 양팔에 하나씩 달라붙어 있었다.
“신우야 참아, 참아. 쟤 방금 퇴원한 애야!”
“형, 그러다 혈압 올라서 죽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사람 죽이면 저희 컴백 못 해요.”
신우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유유히 사라져 가는 요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런 신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얄밉게도 요한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욕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로운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거실에는 재민과 신우가 앉아 있었다. 요한은 다인용 소파를 지나 옆쪽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털썩 앉아 등을 기댔다. 사장님이 큰맘 먹고 숙소에 넣어 줬다는 비싼 소파는 폭신폭신해서 어떻게 자세를 뒤틀어도 편안했다.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아 늘어져 있는 요한을 보며 재민이 말을 걸었다. 앞으로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는 다시 연습실에 가서 안무와 동선을 재정비하고 스타일링도 끝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컴백까지 남아 있는 시간은 촉박한데 이 몸의 전 주인이 작업하는 내내 온갖 트러블을 다 일으키는 바람에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녹음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뮤직비디오도 찍어야 하고 그야말로 작업 너머로 작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요한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생전의 그는 성격 자체가 무심하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 할 몫은 확실하게 해냈다. 근데 이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주변 사람들에게 김요한은 민폐 덩어리에 스트레스 주범이었다. 이러고도 아직 팬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야말로 잘난 얼굴 만세, 잘난 목소리 만만세였다.
대강 설명을 들으면서 왠지 조용해진 숙소 분위기에 요한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재민이 쌍둥이는 매니저에게 끌려 촬영장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알려 주었다.
“내일부터 바빠질 거니까 오늘은 쉬어 둬. 저녁에 간단히 퇴원기념 파티라도 하자.”
“귀찮게 그러실 필요 없는데…….”
“다 같이 기합 넣자는 의미로 하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착하지.”
재민이 다정하게 웃으며 요한의 머리를 토닥였다. 묘하게 애 취급하는 재민을 요한은 알게 모르게 어려워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은 후로 이런 뉘앙스의 말이나 행동에는 면역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재민이 요한을 착한 아이 취급을 할 때면, 그는 어쩐지 목 뒤가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애 취급 좀 안 할 수 없어요?”
“그게 싫으면 나보다 먼저 태어났어야지.”
“돌겠네…….”
해맑게 웃는 재민을 보며 요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민의 어깨 너머로 신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신우는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온 신경을 요한과 재민의 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한이 돌아온다는 사실에 가장 신경을 쓰는 건 신우였다. 물론 좋은 의미의 신경은 아니었지만.
옆얼굴에 꽂히는 신우의 시선에 요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뭐.”
“왜 자꾸 보냐고.”
“제정신? 어디서 시비를 털어.”
“먼저 눈깔로 시비 털길래.”
지랄하고 있네, 하는 표정으로 요한을 노려본 신우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요한과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요한도 신경 끄고 재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신우가 작은 소리로 ‘가사나 제대로 외우든가, 병신 같은 게.’라고 중얼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뭐, 그렇긴 하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요한은 납득했다. 전 주인은 상당한 멍청이로 가사 하나를 외우는 데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것도 노력이나 하면 다행인데 노력도 안 해서 무대에 올라가서도 가사를 틀리기 일쑤였다.
초록색 검색창에 ‘플루토 요한 가사실수’, ‘플루토 요한 생방사고’ 등을 치면 그에 관련된 영상이 주르륵 나올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지금의 요한은 전 주인과는 180도 다르다는 점이었다. 예전부터 암기라면 일가견이 있었고, 쓱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내뱉을 수 있었다.
원래 이런 데 쓰는 재능은 아니었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재주껏 적응하기로 이미 마음을 잡은 상태였다.
미친놈 보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신우를 뒤로한 채 요한은 재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재민이 웃으며 요한의 손을 잡았다. 요한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가사나 다른 거 외울 거 있으면 달라는 소리였는데 덥석 손을 잡아 버리는 걸 보니 재민도 보통은 아니었다.
“혹시 가사나 외울 거 있으면…….”
“아, 그거 이따가 매니저 형이 가져다줄 거야.”
생각보다 손이 차네? 하면서 싱글싱글 웃는 재민을 보며 요한은 아이돌들은 전부 이런 건가, 하는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원래도 천하태평한 성격이긴 했지만 이 몸으로 들어온 후에는 멤버들이 특이하게 굴어도 아이돌이니까…… 하고 납득해 버리는 것이다.
“하여간 아이돌들이란…….”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신우가 질색하며 얼굴을 구겼다. 그거 뭐 예쁘다고 손까지 잡아 주냐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 뺏긴 막내 동생 같다’는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해 주자 결국 신우가 언성을 높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

플루토 컴백까지 앞으로 한 달. 트러블메이커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자 빡빡한 일정이었음에도 작업 진도가 쭉쭉 막힘없이 진행되어 갔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연습할 때 요한이 한 번도 안무와 동선을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본래의 요한은 타고난 머리도 나쁜 데다 공부하는 것도 질색하는 탓에 입만 열면 무식이 줄줄 흘러나오는 위인이었다. 예능에서 미국의 수도를 하와이라고 힘차게 외친 영상은 지금도 요한의 흑역사 중 하나로 두고두고 게시판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기본 상식이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문제였던 건 요한이 무언가 외우는 걸 지독하게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가사 실수, 안무 실수는 기본이고 가끔 동선도 헷갈려 백댄서들과 부딪히는 경우도 있었다. 덕분에 플루토가 무대에 오르면 매니저와 프로듀서는 보는 사람들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속을 태우고는 했다.
처음에 연습실에 들어온 요한은 사고의 후유증 탓인지 안무가 기억나질 않는다며, 뒤에서 연습하는 걸 좀 지켜보겠다며 자리에 앉았다. 요한이 안무를 기억 못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터라 다들 ‘그럼 그렇지’ 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백댄서 한 명이 그를 대신해 빈자리에 들어가자 요한은 조용히 앉아 백댄서가 움직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첫 번째 시범 때 손동작 하나, 스텝 하나 놓치지 않고 무시무시한 집중력으로 흡수한 후, 두 번째 시범을 볼 때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정보들을 다시 확인하고 다듬었다.
‘팔 올리고 접어 내린 다음에 옆으로 두 걸음 이동, 박자 기다렸다가 반 바퀴 턴…….’
세 번째 시범이 시작되기 전, 요한이 느릿하게 뒤에서 걸어 나왔다. 안무도 못 외우는 데다 영혼 없이 춤추기로 악명이 높았기에 사람들은 요한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음악이 나오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무를 따라했다. 마치 방금까지 같이 춤추고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칼 같은 군무인 데다 타이밍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이 눈에 확 띄는 대형임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다른 멤버들과 한 몸처럼 보였다.
안무 중간에 들어가는 팬서비스성 제스처나 시선 처리가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동작과 박자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백댄서와 안무가가 물었지만 멤버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요한은 이번 앨범의 안무가 강한 비트에 맞춰 움직이는 칼 같은 군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애드리브를 많이 요구한다거나 그루브가 많은 안무였다면 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칼군무라면 전 주인의 춤 실력과 요한의 기억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몸의 전 주인도 춤을 엄청나게 잘 추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돌인지라 평균 이상은 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으아앗! 수고하셨습니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
“배고파…….”
안무 연습이 끝나자마자 셋은 의기투합해서 시원한 빙수를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아직 마무리 녹음이 끝나지 않은 신우와 요한은 나머지 작업을 진행해야 했으므로 소속사 건물 지하에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걸어가는 내내 신우는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다른 멤버들이나 매니저라도 있으면 괜찮았겠지만, 본의 아니게 단둘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익숙한 반응에 요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순탄했던 녹음 작업이 끝난 후, 레코딩룸에서 나오던 요한은 스태프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립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설마 진짜 기립 박수를 칠 줄은 몰랐기에 요한은 머쓱하게 고개를 숙인 후 휴게실로 향했다. 작업을 하면 할수록 전 주인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휴게실의 소파에 기대앉아 요한은 자연스럽게 타이틀곡을 흥얼거렸다. 쓰면 쓸수록 이 몸의 목은 편리했다. 요한이 일부러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노래를 들으면 박자와 음정을 딱딱 맞춰 주고, 고음도 숨 쉬는 것처럼 편안하게 올라갔다. 애드리브도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정도였으니 다른 건 오죽하랴.
다른 건 몰라도 김요한의 음악적 재능은 무척이나 훌륭한 편이었다. 요즘 흔히 말하는 실력파 아이돌들 사이에서도 꿇리지 않을 정도. 쓰레기 같은 인성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탑을 찍고도 남았을 텐데, 누군가의 댓글처럼 신은 김요한에게 잔인하리만치 공평했다.
“그 작은 뇌로 용케 그 가사를 다 외웠다?”
신우가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며 요한에게 시비를 걸었다. 사실 멤버들 중 가장 복잡한 심경을 겪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신우였다. 재민이야 본래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이라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요한을 챙겨 주고 있었고, 쌍둥이는 애들답게 금세 요한과 친해졌다. 요한의 얘기만 나오면 이를 갈아 대던 매니저도 편하게 요한을 대했다.
신우는 머리가 복잡했다. 분명히 요한이 달라진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고 말하고 있는 저 얼굴을 보면 묘하게 속이 뒤집혔다. 예전부터 당한 게 많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요한을 보면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마치 검색창의 자동완성 기능처럼.
평소처럼 빈정거리는 신우의 말에 요한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쯤 되면 뭐라도 한마디 나와야 하는데 입에 자물쇠라도 건 듯 묵묵부답인지라 오히려 신우가 당황했다. 음료를 선택하는 버튼을 누르는 손이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말은 없었지만 요한이 그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신우 역시 그 시선을 아주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었다.
‘저게 약을 먹었나. 갑자기 왜 저래?’
신우는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음료수를 꺼내서 캔을 땄다. 푸슉, 하고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나고 열린 입구에 입을 가져다 대는 동안에도 요한의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묘하게 집요한 시선에 신우는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최신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상했던 대로 무덤덤한 눈으로 신우를 바라보는 요한의 눈이 있었다. 요한은 손을 턱에 괴고 고개를 조금 기울인 상태로 신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입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예민하게 신경을 세우고 있던 신우는 요한의 얼굴을 보다 들고 있던 캔을 놓칠 뻔했다. 늘 신우를 볼 때면 졸린 표정, 귀찮은 표정, 짜증 나는 표정으로 일관하던 요한이 갑자기 피식 웃었던 것이다.
“꼴에 귀엽게 구네?”
요한은 별생각 없이 제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항상 요한을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던 녀석이 무게 좀 잡았다고 위축되어서 눈치를 보는 게 퍽 귀엽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면서 기어가게 생긴 최신우가 뻣뻣하게 굳은 손으로 음료수를 집어 드는 모습이라니. 어찌 웃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요한의 말에 신우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 기겁하며 팔을 감싸 쥐었다. 반사적으로 입에서 거친 욕이 터져 나왔다.
“뭐? 무, 무슨, 방금…… 하! 이거 완전히 미친 거 아니야?! 와, 저거 완전 또라이 새끼!”
“하하, 더 해 봐. 재밌네.”
세상만사 관심 없는 요한이지만 눈치 하나는 빨랐다. 숙소에서 신우와 계속 부딪히던 요한은 그가 최근 들어 심각한 내적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날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요한에게 쌍욕을 하던 최신우와 지금의 최신우는 꽤 달랐으니까. 혼자 소외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요한에게 친근하게 굴기는 자존심이 상하는…… 아마 그런 심정이리라.
게다가 이 몸의 나이는 스무 살로 신우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신우의 입장에서는 나이도 어린 게 꼬박꼬박 반말에, 이름으로 부르고 거기다 욕까지 하니 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한은 고민했다. 볼 때마다 시비 거는 것도 번거롭고 앞으로 컴백하면 온갖 눈들이 지켜볼 텐데 그룹의 불화설이 기사로 올라오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스스로의 상황을 인지한 후부터 요한은 아이돌로 반짝 벌어서 바람처럼 사라질 굳건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룹 리더와 멤버의 불화설은 최고의 지뢰였다.
잠깐 동안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요한은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기로 했다. 자신이 한 일은 아니지만, 전 주인이 신우와 멤버들에게 했던 쓰레기 같은 짓거리에 대해 대신 사과하는 의미도 포함해서.
‘이게 바로 연상의 여유라는 거지.’
신우가 들으면 코웃음 칠 대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생전의 나이로 친다면 신우보다는 이쪽이 연상이었으니까. 재민이라면 모를까, 신우에게 형 소리가 안 나오는 것도 그래서였다.
“형이라 부르는 건 개오버고, 되도록 바르고 고운 말을 써 보도록 노력해 볼게.”
“……뭐?”
“음, 욕도 재주껏 상황 보면서 자제해 줄 용의는 있어. 짜증 나면 튀어나오겠지만 어쩔 수 없지. 이건 무릎반사 같은 거니까.”
“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신우의 반응에 오히려 요한이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보면 모르냐. 휴전하자는 거잖아.”
길고 긴 전쟁이여, 안녕. 다른 멤버들과 매니저가 들었으면 울면서 서로 끌어안았을 감동적인 휴전 요청이 요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신우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는지 입술만 열었다 닫았다 할 뿐이었다.
“랩 할 때는 뇌가 잘만 돌아가더니 왜 여기선 갑자기 일시정지냐.”
요한이 떠들자 신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머리를 털었다. 하지만 입이 정지된 건 아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요한의 의도를 종잡을 수가 없어서 그런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참다못한 요한이 휴전 요청한 지 1분도 안 돼서 욕을 내뱉었다.
“멍청한 새끼야, 너랑 나랑 지금까지 했던 거 리셋하자고.”
“아…….”
“불화설 도는 꼴 보고 싶으면 계속 지랄하시든가.”
“그건 좀.”
“싫지? 싫으면 휴전. 이해했냐?”
결국 신우는 욕을 잔뜩 얻어먹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당황한 사이 요한은 손을 내밀어 반강제로 악수를 했다. 나중에 딴말 못하게 협정서를 쓸까 했지만 종이도 없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같이 찍은 셀카로 마무리했다. 무표정한 남자와 얼이 빠진 얼굴을 한 남자의 투 샷. 이런 게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칙칙한 셀카였다.
얼떨결에 체결된 휴전 협정이었지만, 후에 빙수를 먹고 돌아온 세 사람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만세를 외쳤다. 어찌 되었든 해피엔딩, 해피엔딩.
“녹음 때문에 너희 못 데려간 게 아쉬워서 포장해 왔어.”
두 사람을 바라보던 재민은 다정하게 웃으며 빙수가 들어 있는 봉지를 흔들었다. 간이 테이블 위에 꺼내 두자 예상보다 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빙수가 나타났다. 투명한 케이스 너머로 비치는 건 망고가 가득 올라간 빙수였다. 쌍둥이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신우와 요한에게 숟가락을 건넸다.
본의 아니게 둘이 이마를 맞대고 먹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휴전 협정 덕분에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빙수에 정신이 팔린 요한과는 달리 신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빙수 한 번 퍼 먹고 요한의 얼굴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빙수 한 번 퍼 먹고를 반복해 댔다.
둘이 먹기에는 제법 양이었지만 요한이 조용하고 빠르게 먹어 치운 탓에 빙수는 금방 동이 났다. 요한이 마지막 한 숟가락을 소리 없이 입에 구겨 넣고 있을 때, 매니저가 휴게실로 걸어 들어왔다.
“녹음 끝났으면 빨리 머리 만지러 가자. 뮤비 찍기 전에 미리 스타일링 잡아 놔야지.”
“맞아, 이번 콘셉트가 좀 세서 다들 각오해야 할걸?”
“나 실장님이 무대의상 만드신 거 봤는데…… 장난 아니었어.”
“그거 나도 본 것 같아.”
다 먹은 빙수 그릇과 쓰레기들을 옆으로 밀어 버린 매니저가 스크랩북을 꺼내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대충 이런 식으로 할 거라고 알려 주기 위해 사무실에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펼쳐진 스크랩북에는 서양 모델들이 화려한 머리색을 뽐내고 있었다. 저런 색이 가능하냐는 얼굴로 눈만 굴리던 요한은 중간에 있는 사진을 보고 기겁했다. 머리 모양 자체는 아이돌들이 흔히 하는 댄디컷에 컬을 넣은 머리였지만 문제는 색이었다.
“분홍색 머리…….”
사진에 나온 머리는 위는 금발 아래는 분홍인 투톤컬러였다. TV에서야 아무나 하고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걸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비용적인 면으로나 수고스러운 점에서나 난이도가 높다고 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