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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Chapter 0. 어느 화창한 여름날

장요한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인 평범한 대학생이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부모님이 물려주신 깨끗한 피부와 좋은 목소리. 얼굴도 잘 보면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항상 두꺼운 안경과 부스스한 앞머리로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는 성장 배경, 외모, 능력, 그 어느 면에서나 평범해 보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스스로 숨기고 있었지만 요한은 머리가 굉장히 좋았다.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이나 스쳐 지나가듯이 본 사람의 이름, 얼굴 등을 전부 기억할 정도였다.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머리였지만 요한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귀찮고 성가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다지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 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읜 천애고아였으며 게이였으니까.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빨랐던 요한은 사람들이 이러한 부류를 얼마나 무시하고 동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이 스스로 게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첫 몽정 때, 섹시한 누님이 아닌 섹시한 형님이 나왔던 것이다. 요한은 뜻밖의 등장인물에 약간 당황했다. 자신을 물고 빨던 섹시한 형님은 TV에서 잠깐 보았던 이름도 모르는 남자 아이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한밤중에 축축해진 속옷을 느끼며 눈을 뜬 그는 덤덤하게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내가 게이라서 그랬나 보군.’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인데 여자를 좋아하든 남자를 좋아하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단번에 생각을 정리한 요한은 속옷을 빨아서 건조대에 올려놓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잠에 들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후에도 요한은 별 탈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평소 영미권 작품을 좋아했던 요한은 영문학과로 진학했고, 그곳에서도 튀지 않는 수수한 삶을 살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게다가 고아에 게이라면 오죽하겠는가.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후, 친척도 없고 깊게 사귀는 친구도 없이 요한은 언제나 그렇게 혼자 살아왔다. 튀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요한의 유일한 목표이자 미래였다.
하지만 어느 화창한 여름날, 요한의 삶은 평범함의 궤도에서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책을 읽으면서 횡단보도를 걷다가 요한은 달려오는 덤프트럭에 부딪쳐 그대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끼던 원서가 저 멀리 날아가고 눈앞이 아찔해지는가 싶더니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거친 마찰음이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시발, 더럽게 아프네.’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 요한은 거칠게 욕을 뱉었다. 성대라도 다친 것인지 분명히 입으로는 욕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웅성거리는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저 소설 결말…… 보고 싶었는데…….’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 소설책을 생각하며 요한은 눈을 감았다. 어쩐지 푹 자고 싶은 기분이었다.


Chapter 1. 두 번째 시작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요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리를 지르고 시끄럽게 울어 대서 귀가 따가웠다. 누가 자신을 잡고 흔들기라도 하는 걸까. 무겁게 가라앉은 몸이 요동치는 것 같기도 했다.
“……시끄러워.”
요한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흔들거리던 몸이 멈췄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소리도 멈췄다. 그것만으로도 요한은 천하를 얻은 것만큼 만족스러웠다. 평화다, 귀에 평화가 왔어. 요한이 속으로 안도했다.
“요한아?”
“지금 얘가 말한 거 맞지?”
“나도 들은 것 같은데…….”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요한은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을 저렇게 친숙하게 부를 사람이 있었나? 잠깐 생각했지만 없었다. 요한은 과에서도 아웃사이더였고 친척들은 물론, 동창, 동네 사람 등등 그 어떤 사람들하고도 교류하지 않았다.
“요한아, 눈 좀 떠 봐! 정신이 들어? 눈 좀 떠 보라니까?”
평온을 얻었던 몸이 다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새끼였구나. 아까 계속 잡고 흔들던 게 이 새끼였어. 요한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고는 어떤 놈인지 면상이라도 볼 생각으로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얀 천장 너머로 강한 빛이 쏟아지고, 이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파 죽겠는데 더럽게 흔들어 대네. 개자식아, 작작 안 하냐.”
갈라진 목소리에서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요한은 늘 그랬다. 매사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설령 돌이 지껄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흐릿한 시야가 답답했는지 요한이 눈을 비볐다. 갈라진 목소리고 뭐고, 중요한 건 지금 앞에 보이는 인간들이 전부 초면이라는 점이었다. 다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반쯤 얼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힘겹게 몸을 일으키던 요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가 이렇게 주렁주렁 달려 있나 싶어서 신경질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팔과 손을 확인하는 순간 어라, 하고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햇빛을 자주 보지 않아 파리하고 창백하던 팔이 아니었다. 끝에 달린 손가락도 전보다 훨씬 얇고 길었다. 묘한 기시감. 그야말로 다른 사람의……. 손을 뻗어 주삿바늘이 꽂힌 팔을 더듬었다. 근육이 잡힌 단단한 팔이었다.
“미친.”
아직도 패닉 상태에 빠진 인간들을 무시한 채 요한은 손으로 더듬더듬 온몸을 만져 보았다. 원래 요한의 몸은 덩치만 컸지 운동은 전혀 안 해서 근육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이 몸은 무서울 정도로 단단했다. 누가 봐도 운동으로 관리했다고 외치고 있는 듯한 몸이었다.
요한은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거기.”
“……네?”
“그래, 당신.”
“왜, 왜요……?”
“거울 좀.”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결국 거울을 못 찾았는지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요한에게 건네주었다. 요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 렌즈에 얼굴을 비쳤다. 그리고 감탄하듯이 내뱉었다.
“오, 이런.”
액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얼굴은 요한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사납게 올라간 눈꼬리에 강하게 다물린 입, 섹시하게 뻗은 콧날과 턱선. 얼굴에 자잘하게 긁힌 상처는 있지만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과 이름이 같아서 잠깐 눈여겨보았던 신인 아이돌 요한이었다.
주인에게 핸드폰을 돌려준 요한은 한 1분 정도 말이 없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 듯했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1년처럼 느껴지는 1분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뭐든 좋으니 반응이 나오길 기다리던 이들은 그가 고개를 들자 움찔하며 튀어 올랐다.
요한은 붕대로 감겨 있는 손을 들어 목덜미를 긁었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한은 배가 고팠다.

***

배가 고프단 말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병실 밖으로 달려가 먹을 걸 잔뜩 사 왔다. 떡볶이, 과자, 만두, 김밥 등등 주변에 있는 건 죄다 쓸어 온 것 같았다. 병원에서 이런 걸 먹어도 되나 싶었지만, 요한은 허기가 졌으므로 사 온 것들을 묵묵히 입에 집어넣었다.
몸도 무겁고 기력도 없었는데 밥을 먹으니 좀 살 것 같았다. 요한은 그제야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일단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있었고, 나머지 둘은 머리 스타일은 좀 달랐지만 쌍둥이처럼 보였다.
남자는 걱정 반, 당황 반 섞인 모습으로 요한을 보고 있었고, 쌍둥이는 유난히 요한의 눈치를 보며 그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천천히 머리를 굴리던 요한은 금방 그 이유를 알아냈다. 다행히 이 몸 주인이 가진 기억을 요한도 끄집어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막 깨어난 탓에 모든 기억을 떠올리는 건 무리였지만 최근의 일이라면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처음에는 물속에 흘러가는 실을 잡듯이 가닥가닥 정보를 잡아내는 느낌이었는데, 이게 요령이 생기니까 하나둘 원하는 기억을 뽑아낼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쌍둥이. 맞지?”
“네, 네?”
“으……응? 아, 아니 네…….”
요한은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이온음료를 집어 들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연상이라면 좀 더 예의를 갖춰서 말했겠지만, 어차피 쌍둥이보다 요한 쪽(실제 요한이든 이 몸의 주인이든)이 연상이니까 말을 놓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왜 쫄고 그러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네?”
“아니지, 일부러 한 건 맞는데……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테니까…….”
“네?!”
“됐고, 머리 아프니까 작작 좀 울어라. 사내놈들이 쪽팔리게 질질 짜기나 하고.”
이게 왜 안 열리지, 손가락도 병신이 됐나. 요한이 열리지 않는 페트병을 노려보자 옆에 있던 남자가 대신 병을 열어 주었다. 다정하게 요한을 바라보던 남자가 얼핏 웃는 것도 같았다. 나사가 하나 빠진 인간인가. 뭐가 좋다고 실실거리지.
고개를 돌린 요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벌컥벌컥 이온음료를 마셨다. 병실 안이 더워서 그런지 차가웠던 이온음료가 미지근하게 데워져 있었다.
‘하나도 안 시원해.’
예상치 못한 미지근한 온도에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더니 쌍둥이가 지레 겁을 먹었다.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반응이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쌍둥이들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장난이 너무 심했어.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됐다니까. 죽은 것도 아니고, 어디 불구된 것도 아닌데 요란 떨기는.”
여기 주인 되시는 분 영혼은 날아갔지만 일단 신체는 멀쩡하니까. 아, 그럼 멀쩡한 게 아닌 건가. 갸웃거리던 요한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빌미는 제공했지만 백 퍼센트 쌍둥이 잘못은 아니었다. 전 주인이 멍청하게 군 탓도 있긴 했으니까.
이 녀석은 쌍둥이가 장난으로 밀기 전에 이미 죽을 마음으로 온갖 약이란 약은 다 처먹은 상태였다. 이런, 더럽게 심약하기도 하지. 요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생긴 건 아무나 물어뜯을 것처럼 생겼는데 하는 짓이 멍청이에 세계 제일 팔푼이일 줄이야.
요한은 이온음료를 연신 들이켜며 이 몸의 전 주인에 대해 생각했다. TV에서 봤을 때는 그냥 섹시하고 사나운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아이돌 예명은 요한, 실명은 김요한. 데뷔 후 제법 인기를 끌고 있는 5인조 그룹 플루토(Pluto)의 메인보컬이었다. 생긴 것처럼 속 알맹이도 훌륭하면 좋으련만 현실의 그는 답이 없는 머저리에 성격파탄자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잘빠진 얼굴이랑 몸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을 정도로 답이 없는 인간이었다.
능력도 되고, 얼굴이랑 몸도 되는데 항상 이상한 데서 울컥해서 화를 내고는 했다. 혼자만의 어마어마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고. 팬들 사이에서도 그의 편집증과 예민함은 유명한 수준이었다. 팬들이 좋다고 호감을 표시해도 질색하거나 쳐내 버리기 일쑤여서 이미지도 최악이었으며 평판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첫 몽정을 남자 아이돌로 했던 이후로 요한은 아이돌들에게 제법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눈이 즐겁기도 했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들도 재미있었다. 게다가 혼자서 웹 서핑을 하다 보면 볼만한 게 죄다 아이돌과 관련된 자료들이었으니까.
천천히 기억을 헤집던 요한은 전 주인의 멍청함에 고개를 저었다. 원래 아이돌은 덕후 장사란 말이 있다. 코어팬들을 잡지 못하면 길게 못해 먹는다는 소리다.
심지어 소속사에서도 꽤 밀어줬던 모양인데 전 주인은 푸시해 주는 족족 본인이 다 쳐 내는 놀라운 짓거리를 해 댔다. 플루토의 팬들이 유난히 개인팬으로 갈리게 된 것도 김요한의 공이 컸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소속사는 물론 멤버들도 그를 꺼리기 시작했고, 자기가 난리 친 건 요만큼도 생각 안 하던 그는 혼자 울고불고 난리 치다 자살하겠다며 약을 한 움큼 먹었다. 그걸로는 부족할 거 같아서 몇 번이고 먹었다. 기억을 더듬는 요한까지 속이 이상해질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러곤 이대로 죽어 버리자는 마음으로 옥상으로 향했다. 그때 마침 쌍둥이가 그를 엿 먹이겠다며 실수인 척 발을 걸었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상황은 모두가 아는 대로 ‘계단에서 데굴데굴, 눈 떠 보니 병원이었습니다’였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영혼이 날아간 요한의 몸에 또 다른 요한이 들어오게 된 것이 현재 상황인 것 같았다. 사후세계 따위 관심도 없고 믿지도 않았던 요한으로서는 이 모든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설정인 건데.’
요한은 그보다도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아이돌이라니? 평생 튀지 않고 수수하게 살겠다는 요한의 목표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연습생도 아니고 이미 얼굴이 팔릴 대로 다 팔렸는데 이대로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또, 앞으로 계약 기간도 꽤 남아 있을 테고 말이다. 하필이면 들어온 게 아이돌의 몸이라 귀찮아질 게 뻔했지만 하기 싫다고 도망가는 건 요한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돌은 한철 장사니까 몇 년 고생하고 바람처럼 사라지자.’
요한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돌이 뭐 대수냐. 어차피 작곡 능력이나 노래 실력 같은 건 이 몸이 원래 가지고 있는 거라 요한이 정보만 제대로 습득한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래라면 요한도 그리 싫어하진 않고 말이다.
다 먹은 병을 옆으로 밀어 두니 쌍둥이가 요한의 다리를 붙잡고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자기들 딴에는 걱정도 많이 하고 별생각을 다 했을 텐데, 요한이 너무 쉽게 괜찮다고 하는 바람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누가 애새끼들 아니랄까 봐.”
더럽게 귀찮은 녀석들. 요한이 소리 없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래서 애들이 싫었다. 시끄럽고 잘 울고, 사람을 귀찮게 만든다. 요한이 손을 뻗어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 주자 쌍둥이 중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만 뻐끔거렸다. TV에서야 항상 무대화장에 화려한 옷만 입고 나와서 잘 몰랐는데 이럴 때 보니까 확실히 아이 같기는 했다.
“떨어지면서 머리도 다친 건가…….”
지금까지의 세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요한은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었다. 남자의 이름은 신재민, 플루토의 가장 연장자로 그룹 내에서 항상 큰형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순하게 생긴 강아지상에 목소리도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여심을 훔치다 못해 후려치는 수준이었다. 일단은 리드보컬을 맡고 있지만 비중으로 보면 거의 메인보컬이나 다름없었다.
“멀쩡해요.”
“아, 물론 나쁘다는 건 아닌데…… 훨씬 나아지긴 했지. 전보다야…….”
“사람 면전에 대놓고 너무한 거 아닌가요.”
“미안, 그래도 역시 이상해서 말이야.”
재민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요한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그러곤 열이라도 재려는 모양인지 잠시 대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뗐다. 요한의 입장에서는 쌍둥이나 재민의 반응이 너무나도 이해가 잘 됐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설명한다고 납득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좋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죽을 뻔해서 바뀐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쌍둥이가 서로 안절부절못하면서 대화하는 게 들려왔다.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요한은 그냥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요한이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니 생전에 꽤나 좋아하던 과자들이 보였다. 밥은 먹었지만 입이 심심하니 과자를 먹는 게 좋겠다 싶어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먹는 건 요한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였다.
과자 봉지를 뜯은 후 안에 있는 과자를 하나 집어 드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이 개새끼 어디 있어? 애들한테 해코지했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
요한은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을 과자 하나를 입에 문 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뭘까, 저건. 신흥 지랄인가. 씩씩거리면서 다가오는 걸로 봐서는 전 주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요한은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면서 머릿속을 뒤졌다. 그리고 이 몸의 뇌는 어렵지 않게 불청객의 정체를 뱉어 냈다.
“아, 최신우.”
“지랄하네, ‘아, 최신우.’는 무슨. 기분 더러워지니까 내 이름 입에 담지 마.”
“예, 예.”
건성으로 대답하는 요한을 보며 신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최신우, 22세. 플루토의 리더이자 래퍼. 김요한을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남자.
요한은 경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우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신우의 혐오 가득한 시선을 보는 건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성가셨을 뿐이지 무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먹을래?”
요한은 신우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과자를 들어 보였다. 신우는 경악과 경멸이 어린 표정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자기 혼자 쇼하다가 계단에서 떨어졌다기에 욕이나 실컷 해 주려고 왔는데 진짜로 미쳐 버린 모양이었다. 신우가 낮게 욕을 내뱉었다. 꼴 보기 싫은 얼굴이 눈앞에 있으니 위가 뒤틀렸다.
“싫으면 말고.”
과자는 그대로 요한의 입으로 들어갔다. 묘한 정적 속에 오독거리는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신우는 분노 어린 깊은 한숨과 함께 ‘저 미친놈이…….’ 하면서 이를 갈았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기세등등한 신우를 말린 것은 재민이었다.
“신우야, 아픈 사람한테 너무 그러지 마. 요한이 방금 정신 차렸어. 지금 나도 뭐가 뭔진 모르겠는데 애가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달라져? 저 또라이가? 미친놈이 달라져 봤자 미친놈이지. 개새끼가 정신 차려 봤자 개새끼고.”
“그게 나도 뭐라고 확신은 못하겠는데 좀 얌전해졌다고 해야 할지. 말로 설명을 잘 못하겠네.”
복잡한 얼굴을 한 재민의 뒤로 쌍둥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진짠데. 또라이…… 아니, 저 형이 우리한테 괜찮다 그랬어.”
“나는 칼에 찔리거나 얻어맞을 줄 알았는데, 우리보고 시끄럽다고 울지 말라 그랬다니까. 사내놈들이 그런 걸로 우는 거 아니라고, 괜찮다고…….”
쌍둥이의 말에 신우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잘못하든 안 하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온갖 패악과 성질을 부리던 건 언제나 요한이었다.
그런 요한이 쌍둥이에게 괜찮다고 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쌍둥이의 말대로 칼로 찌르면 찔렀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요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우가 피처링 녹음을 끝내자마자 급하게 달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쌍둥이는 어렸고, 재민은 너무 마음이 약했기 때문에 요한에게 욕을 하거나 앞서서 화낼 수 있는 건 신우뿐이었다.
신우는 여전히 불신이 가득 담긴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태연히 침대에 기대 과자를 먹는 중이었다. 이미 한 봉지는 다 먹어서 예쁘게 쪽지 모양으로 접어 놓고 두 번째 봉지를 해치우고 있었다.
신우는 다시 한번 인상을 썼다. 항상 그런 쓰레기 같은 걸 왜 먹느냐면서 간식에는 손도 안 대던 요한이었는데 이상했다. 재민의 말대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의 집요한 시선을 느꼈는지 요한이 고개를 돌렸다. 신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요한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까딱하고 다시 과자를 집어먹었다. 예전 같았으면 욕을 하든, 짜증을 부리든, 물건을 던지든 했어야 했다.
“너 진짜 또라이 맞냐?”
“그럴걸.”
원래 몸일 때도 또라이 소리를 종종 들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우는 말없이 요한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얼굴만 비슷한 다른 놈이 앉아 있나 의심하는 것 같았다.
“네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야.”
“너.”
“매니저 형 이름 대 봐.”
“양봉선.”
“…….”
“윤이 새끼가 매일 내 거 훔쳐 먹어서 뒤지게 혼나는 게 뭐야.”
“프링글스.”
“무슨 맛.”
“치즈 맛.”
과자를 먹는 순간에도 요한은 계속 파묻힌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새끼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할 리가 없는데…….”
심지어 질문한 것도 모두 맞췄다. 신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재민이 형이 자주 마시는 맥주.”
“산 미구엘. 야, 이딴 거 계속 대답해야 하냐?”
“……아니, 됐다.”
이쯤 되니 신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김요한이 확실하다고. 바뀐 건지 아닌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전의 요한과는 확실히 달랐다.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에도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거, 더럽게 복잡하네. 신우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무슨 아침드라마냐. 자빠졌다 깼는데 인간이 달라졌다는 게 말이 돼? 머리통이 고장 났거나 쇼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난 그냥 손 떼련다. 이제 저 새끼 뒤치다꺼리하기도 질렸어.”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컴백도 얼마 안 남았잖아.”
“일단 별일 없었다니 다행이긴 해.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난 저 새끼 싫거든?”
“너야 당한 게 워낙 많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어차피 계속 같이 활동할 거 좋은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최소한 싸우지만 말자.”
“누가 뭐래? 저 새끼만 지랄 안 하면 돼. 나한테 시비나 털다 걸리면 죽일 거니까.”
요한을 보며 으르렁거리던 신우는 그대로 병실을 박차고 나갔다. 멤버들과 요한 사이의 감정의 골은 깊다 못해 지층을 뚫을 정도였다. 그중에서 제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신우였고 말이다.
재민은 고개를 돌려 요한의 표정을 살폈다. 거친 말들이 나왔지만 요한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평온해 보였다. 신우가 자신에게 폭언을 쏟아 내는 데도 요한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건가? 아니면 진짜 신우 말대로 머리라도 다친 걸까?’
요한의 옆에서 이것저것 떠들어 대는 쌍둥이를 보며 재민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분명히 쌍둥이도 기겁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둘 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재민보다 변화에 적응하는 게 훨씬 빨랐다. 머리가 유연하다고 해야 하나.
‘뭐가 되었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은 재민에게 무언가 쓱 밀어졌다.
“먹고 싶으면 보고 있지만 말고 말을 하든가.”
무심한 얼굴로 과자를 내미는 요한을 보며 재민은 그대로 정지했다. 이어지는 잠깐의 정적.
“먹어요.”
다정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권유에 재민이 실소를 터뜨렸다.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과자를 받아 들자 요한이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탁탁 털어 냈다.
“푸흡, 그래. 마…… 맛있네.”
“근데 나 퇴원은 언제 할 수 있어요?”
“의사가 바로는 무리라던데. 매니저 형 오면 자세히 물어봐.”
“아아.”
아무래도 퇴원까지 시간이 좀 걸릴 모양이다. 요한은 제 방 침대처럼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신기한 일이었다. 재민은 자신이 요한과 평온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쌍둥이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의 대답은 거의 단답식이고, 윤은 쓸데없이 밝고, 현이는 아직도 눈치를 보고 있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세 사람 사이에 대화와 소통이라는 게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조합이네.’
요한과 쌍둥이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문득 이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민은 갑자기 찾아온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으로의 행보에 고난이 가득하더라도 말이다.

***

퇴원은 생각보다 빨랐다.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았던 것도 있고, 요한이 생각보다 잘 자고 잘 먹었기 때문에 회복이 빠른 것도 있었다. 새로운 몸, 새로운 환경이지만 요한은 주변 지식을 게걸스럽게 흡수하고 소화시켜 갔다.
아이돌이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는 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덕후나, 사생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이돌들의 무대 영상이나 리얼리티 프로그램 같은 건 나름 즐겨 보는 편이었다. 별달리 밖에서 활동하는 게 없었던 요한에게 TV와 컴퓨터는 주요한 취미 수단이자 정보를 얻는 도구였다.
물론 성향이 성향인지라 예쁜 여자 아이돌보다는 잘생긴 남자 아이돌 위주로 보는 편이었다. 누군가와 사귀고 어떻게 해 보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단순히 잘생긴 남자들을 보는 건 꽤 좋아했다. 눈 호강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퇴원 수속을 밟은 후 숙소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민이 튀어나와 요한을 반겨 주었다. 쉬는 날이라 그런지 편안한 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래도 막 화보에서 나온 것처럼 멋진 자태를 자랑했다.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오랜만에 오니까 반갑지?”
“겨우 일주일인데요, 뭘.”
“네 옷이랑 짐은 매니저 형이 정리해 준다 그랬으니까 일단 쉬고 있어.”
“네.”
“뭐 먹을 거라도 가져다줘야겠네. 얌전히 앉아 있어,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