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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손을 들어 반대쪽 팔을 감쌌다. 겨우겨우 단어를 골라 말을 끌어냈다. 지금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마음대로 해. 그래도 계약을 한 이상, 네가 죽고 나면 네 영혼은 내 거야.”
“잘됐군. 죽기 전까진 너를 볼 일이 없을 테니.”
“…….”
그가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반항하듯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모습을 숨긴 채 다시 들어왔다. 피닉은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다.
잠시 후 집사가 들어와 형의 부인이 쇼크로 끝내 사망했음을 알리기까지, 그는 얼굴을 묻은 베갯잇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었다. 널찍하던 남자의 어깨가 유난히 좁아 보였다.
나는 땀에 젖은 피닉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내 손길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장례 절차가 진행되었다. 깃털 달린 검은 보닛을 쓴 숙녀들과 무거운 코트를 걸친 신사들 사이로 십자가가 새겨진 세 개의 관이 지나갔다.
오데어 일가의 영문 모를 죽음이 전염병 탓이 아니냐는 의혹이 돌아 작별의 키스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관은 굳게 닫힌 채 못질 되었다. 하지만 피닉은 세 개의 관 모두에 정성스런 입맞춤을 남겼고, 체면도 의식하지 않은 채 끝내 눈물을 흘렸다. 묘지의 천사상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그제야 후회가 들었다. 피닉의 부모형제를 죽일 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그들의 시체가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한 지금까지도, 그들이 죽은 것은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피닉이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웠다. 나는 조용히 피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들어준 피닉의 첫 번째 소원은 피닉으로 하여금 나를 증오하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

피닉은 자기 앞에서 꺼지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다시 나타났느냐고 고함치는 그에게 그렇게 내가 보기 싫으면 소원을 빌라고 대꾸했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나를 외면했고 나는 뻔뻔스럽게 그의 옆에 머물렀다.
여전히 그와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고 아침과 저녁을 함께했다. 오후의 티타임에는 그의 몫으로 나온 스콘과 샌드위치를 집어 먹으며 저택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했지만 기분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은근슬쩍 피닉의 눈치를 보았고 피닉은 그런 나를 끊임없이 무시했다.
피닉은 내게 몇몇 감정들을 깨닫게 했다. 주눅, 긴장, 후회……. 너무나 생소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동안 내가 알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질투, 분노, 살의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새로 깨달은 감정들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즈음 나는 피닉이 사랑하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백작이 된 피닉에게는 하루빨리 결혼을 해 후사를 볼 의무가 있었고, 그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성실히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1년에 3만 파운드를 버는 부유한 귀족, 키가 크고 어깨가 단단한 독신 남성에게 온 사교계의 이목이 쏠렸다. 갓 사교계에 나온 소녀들부터 혼기가 꽉 찬 숙녀들까지, 모든 여성이 피닉을 소개받기 위해 자신의 보호자를 재촉했다.
하지만 피닉의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피닉은 내게 따로 일러 주지 않았지만, 머무는 시선만 보아도 그가 누구에게 영혼을 빼앗겼는가는 명백했다.
로렌. 그 여자의 이름은 로렌이었다. 총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두 눈과 또랑또랑한 목소리, 얼굴을 구기며 씩 웃는 표정이 인상적인 미인. 그라프 공작의 금지옥엽이자 사교계의 유명 인사.
“그라프 양.”
“오데어 씨. 아, 이제는 백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저어…….”
“무언가 필요하신가요?”
“예. 그게 그러니까…….”
“……?”
“……제게 그라프 양과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어머나, 백작님! 저는 중대 발표라도 하시는 줄 알고 긴장했지 뭐예요.”
피닉은 정말로 그녀를 좋아했다. 가족이 죽은 뒤로 더욱 그랬다. 혈육을 잃은 상처를 그녀에게 몰두함으로써 치유하는 것처럼. 파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그녀의 모습부터 찾았고 그녀가 등장하면 눈빛부터 달라졌다. 느른하게 풀어져 있던 몸이 순식간에 긴장하고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오지 않으면 눈에 띄게 실망하여 우울해하는 기색이 주변인들의 눈에 뜨일 정도였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꾸준히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라프 가에 보내는 초대장을 가장 먼저 썼다. 로렌에게 말이라도 건넬 양이면 피닉은 긴장에 자꾸 침을 삼켰고, 종종 무언가를 실수했다. 행여 로렌이 다른 남자와 즐겁게 이야기라도 나눌 때면 그는 질투와 불안함에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그는 심지어 로렌이 정찬 모임에 달고 오는 리본의 색깔까지도 날짜에 맞춰 기억하고 있었다.
피닉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로렌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리고 분석했다. 무엇이 피닉으로 하여금 그녀를 사랑하게 하고 애정을 갈구하게 하는 걸까, 나에겐 없고 그녀에겐 있는 그 특별한 무언가를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 하며. 분명 흠이 있는데, 저 결점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건가 의문하면서.
확실히 그녀는 조금 특이했다. 나태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지런했다. 책을 많이 읽었으며 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은 투표권과 식민지 문제에 관해 격렬하게 토론을 벌인 끝에 상대 남성을 결국 입 다물게 해 버린 적도 있었다. 여성이 의견을 내는 것을 같잖게 취급하며 자신의 지식으로 그녀를 한 수 가르치려던 남자였다.
물론 그가 입을 다물었다고 해서 그녀가 이긴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로렌의 의견을 멋모르는 헛소리 취급하며 무시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당당했다.
언제나 로렌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피닉뿐이었다. 심지어 피닉은 로렌의 의견에 동의하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여 주변인들을 경악시키기도 했다. 상대방이 사랑하는 로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피닉은 상대방에게 호감이 있건 없건, 그가 여성이건 남성이건 늘 상대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성의껏 답변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어느 봄, 피닉은 로렌의 가족을 비롯한 열 명의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부인이 없는 피닉을 위해 이미 결혼한 그의 여동생이 안주인 노릇을 했다. 여자 주빈은 로렌이었다. 피닉의 팔짱을 끼고 식당에 입장한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준비된 아홉 가지 코스 요리를 만족스럽게 즐겼다.
다양한 주제를 통과한 대화가 책과 문학에 닿았다. 로렌은 자신이 ‘제인 에어’라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저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글까지 폄하될 것을 우려해 필명으로 글을 냈던 작가 샬롯 브론테의 죽음 이후로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도 했다. 어김없이 신사들은 그녀를 찡그린 얼굴로 보았다. 숙녀들은 쓸데없는 말을 한다며 우아하게 비꼬았다.
여성들이 먼저 응접실로 떠나고 남성들만 남은 자리에서 한 신사가 로렌을 망아지에 비유하며 경박하게 웃었다.
“그라프 양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뿔난 망아지처럼 굴다간 붉은 방에 갇히기 십상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자칭 신사라고 일컫는 다른 남자들도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그라프 공작은 붉어진 얼굴로 모욕을 감내했다. 그 역시 자신의 딸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던 사람들이 화살을 피닉에게 돌렸다. 피닉은 간단하게 답했다.
“그런 그라프 양의 당당한 면이 저는 사람처럼 보이더군요.”
그 말에 로렌의 아버지조차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결혼에 목매며 인형이 되길 택한 여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부조리한 인간 사회에서 그녀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 흐름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로렌 역시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녀를 조롱하는 남자들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성별에 따라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없음이 정해진단 말인가? 저들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갈 내 눈에, 저들이 그토록 되길 원하는 진짜 신사는 피닉 오데어뿐이었다.
피닉과 로렌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닉은 혈육을 잃은 슬픔을 잊어 갔고, 사랑의 충만함에 젖어 갔다.
이따금 그 감정은 너무나 과해서 집착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의 의사는 명백했다. 로렌을 얻기 위해 어마어마한 값을 치렀으니, 자신은 무조건 그녀의 옆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선택을 받기 위해 피닉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죄책감과 애정과 갈망이 뒤섞인 감정은 쓸쓸했고 처량했으며 그래서 서글펐다. 원인을 제공한 나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피닉은 새벽이 오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른 기상 시간에 사용인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는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몇 시간이나 공들여 몸을 씻고 옷을 걸쳤다. 그리고 흐린 창밖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겨우 안개가 걷히고 맑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피닉은 간신히 예의에 맞춘 시간에 그라프 가를 방문했다. 그의 손에는 다이아몬드와 홍옥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반지가 들려 있었다.
피닉의 청혼을 받은 로렌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어제, 다른 이와 약혼했음을 알렸다. 타 귀족가의 삼남으로 작위도, 작위를 받을 가능성도 없는 남자였다. 재기 넘치는 그녀는 단 몇 마디로 내가 들어준 피닉의 소원을 아무 쓸모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작위 같은 것은 없어도 좋답니다. 앞으로 귀족으로 살아가지 못한대도 상관없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친우이신 백작님이라면 저를 이해해 주시겠지요?”
피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겹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로렌의 뒤에 서서 피닉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피닉은 한참을 두문불출했다. 그는 생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은 사람 같았다. 식사도 걸렀고, 잠도 자지 않았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던 붉은 소파에 정물처럼 앉아 그저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수행원과 집사가 젊은 주인의 상태를 걱정하며 의사를 부를 때쯤이 되어서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 위에 놓인 다 식은 차를 벌컥 들이켠 피닉이 작게 중얼거렸다.
“로렌조차 내 옆에 있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피붙이를 죽인 거지?”
문득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을 과연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을 하는 피닉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이윽고 결심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음울했다. 어쩌면 그때 피닉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교양인으로서의 바닥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을 죽인 악마와 다시 한번 손을 잡으면서.
“내가 나머지 소원을 빌든 그러지 않든 어차피 내 영혼은 네 것이라고 했었지.”
“…….”
“두 번째 소원을 빌겠어.”
“…….”
“로렌이 나와 결혼하게 해 줘.”
“……네가 원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일 차례였다.
반면 피닉의 고개는 떨구어졌다. 그는 로렌의 결정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짓밟았다는 자괴감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스스로를 한심하고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소원을 철회하지 않는 자신의 위선에 치를 떨었다. 그것은 내가 해득할 수 없는 종류의 고뇌였다.
오데어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와 흉상이 전시된 복도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로렌 그라프, 그 당찬 귀족 여자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망가뜨려 결국 피닉의 품에 안겨 주는 방법에 대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로렌의 약혼자를 죽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피닉이 또 화를 낼 것이 뻔했으므로 그 안은 제쳐 놓았다. 인간은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피닉의 곁에서 가장 절실히 깨달은 교훈이었다.
이번에는 결코 실수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간 배운 인간의 풍습을 이용해서 아주 세련되게, 교묘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피닉이 내게 감사할 수밖에 없을 만큼.
방법은 금세 떠올랐다.
“로렌 그라프.”
그녀의 방으로 잠입하는 것은 한 번의 읊조림이면 충분했다. 그녀를 염탐하며 이미 수십 번도 넘게 와 본 곳이므로. 피닉보다 로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나는 그녀에 대해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언제 자리를 비우는지, 하녀에게 절대 손대지 못하도록 하는 곳이 어딘지,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은밀한 물건을 어디에 보관하는지도.
로렌의 방은 미색과 호박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푹신한 소파 위에는 베끼다 만 ‘폭풍의 언덕’ 원고가 놓여 있다. 은은한 장미 향이 공중을 떠돌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곧장 화장대로 다가갔다. 서랍 속 보석함에 들어 있는 편지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이전 연인과 교환했던 연애편지였다. 연인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만으로도 이 시대의 여인들에게는 치명적이다.
편지에 뿌린 향수를 추적해 상대방을 찾아내는 것은 손쉬웠다. 그 상대방을 매수해 로렌의 편지를 공개하도록 하는 일은 더욱 쉬웠다. 결혼을 앞둔 전 연인의 명예를 완전히 부수는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데는 보석 하나면 충분했다. 남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고, 이 모든 것이 단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 공개된 편지를 읽은 로렌의 약혼자가 부들부들 떨며 ‘정숙하지 못한 여성과의 파혼’을 선언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었다. 로렌은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이었지만 남자 보는 눈은 없던 게 분명하다.
로렌에 관한 추문으로 사교계가 들썩거렸다. 신사들은 ‘건방진 여자’의 추락에 즐거워하며 은유적인 희롱을 던졌고, 숙녀들은 그녀를 헐뜯으며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남편 후보들에게 강조하고자 했다. 모두가 기꺼이 로렌을 겨냥한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이제 그녀는 원래의 약혼자는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 귀족 여성은 자신을 보호해 줄 남편과 자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곤경에 빠진 로렌을 구해 줄 남자는 이제 피닉뿐이었다.
멋지게 일을 성공시켰지만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마조마했다. 내가 또 무언가를 실수한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했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모든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본 후에야 나는 피닉에게 돌아갔다.
또다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공기가 싸늘했다. 춥지도 않으면서 나는 조금 몸을 움츠렸다. 피닉은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게 창문을 두드리는 광경을 그저 무연히 바라본다. 딱히 기뻐 보이지도, 그렇다고 화나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확인한 피닉이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창틀에 비벼 껐다.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나는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심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앞에 선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수 어린 그 얼굴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내 뺨을 때렸다는 것도 나는 한동안 느끼지 못했다.
“…….”
상황은 느릿하게 파악되었다.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 피닉이 다시 내 뺨을 쳤다. 고개가 이쪽저쪽으로 휙휙 돌아갔다. 볼이 후끈했다. 상황을 인식하자 바로 모멸감이 따라붙었다. 감히……. 나도 모르게 피닉을 확 밀쳐 냈다. 창백한 내 손에서 적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순식간에 방을 날아 구석에 처박힌 피닉이 웅크리며 신음했다. 그의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가 떨어진 곳은 벽난로 바로 옆이었다. 자칫하면 불기가 오르는 벽난로 안에 그대로 밀어 넣어질 수도 있었던 위치. 한 번의 손짓에도 날아가는 연약한 인간들이 불구덩이 속을 버틸 리 없다.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
“미안해, 피닉……. 이렇게 쉽게 날아갈 줄 몰랐어. 정말이야.”
손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죽는지 몰라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말 그대로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내 뺨을 다섯 대나 때린 것쯤은 이미 잊어버렸다.
다행히 피닉은 멀쩡해 보였다. 그는 내 손을 쳐 내더니 제 힘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책상을 짚고 선 채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푸른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깨달은 게 있어.”
“피닉…….”
“내 절망이 네겐 한낱 유희거리에 불과하다는 거. 내가 아무리 분노를 쏟아 내 봐야 네겐 닿지도 않겠지.”
“…….”
“내 절박함을 이용하고, 상황을 망치고, 괴로워하는 날 보며 즐기고 있어. 또다시 네게 소원을 들어 달라 비는 나를 얼마나 조롱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군.”
“피닉, 나는…….”
“재미있었나?”
나는 최선을 다해 설명하려고 애썼다. 로렌의 약혼자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 모두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상한 것은 로렌의 평판뿐이며 결국 그녀는 네 것이 될 테니 상관없지 않으냐고. 종국에는 서러움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그런 건 알아주지도 않고 나를 비난해? 그럼 네가 방법을 알려 주지 그랬어.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안아 달라고 팔을 뻗었다. 피닉의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지만, 그는 몸서리치며 나를 밀어 냈다.
“로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으면 됐잖아. 그게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생각해 낼 수 있는 정상적인 해결책이라구. 아니면 역시 악마라서 올바른 방법은 떠올리지 못하는 건가?”
“사람의 감정은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없어.”
할 수 있었다면 네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었을 거야.
“너는 그녀를 천박한 여자로 만들었어!”
“어쨌든 가졌잖아. 이제 그녀에게 청혼할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소원을 들어줬잖아…….”
“망가뜨려서 갖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혹감에 입술만 뻐끔거리자 피닉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손수건으로 꼼꼼히 얼굴의 피를 닦아 낸 그가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네게도 감정이란 게 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닉도 더 묻지 않았다. 널찍한 방 안에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만 공허했다. 피닉이 만든 담배 연기에 눈이 어릿해졌을 즈음,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백작님.”
“무슨 일이지.”
“그라프 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라프 양이?”
피닉이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장 모셔 오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흥분과 당혹으로 떨렸다. 그가 허둥지둥 담배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빗줄기가 들이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손수 현관으로 뛰쳐나가 로렌을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다시 본 로렌의 모습은 좋지 않았다. 안색은 초췌했고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푸석했다. 노란 치맛자락이 흙탕물에 젖어 지저분했다. 그런 그녀에게 피닉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추락한 사람은 로렌인데 정작 애간장이 끊어지는 표정인 건 피닉이었다.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한 피닉은 채 빠져나가지 않은 담배 연기에 당황했다. 좋지 않은 냄새를 맡게 해 죄송하다 사과하고는 열린 창문과 최대한 먼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떨고 있는 그녀를 위해 손수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은 그가 집사에게 뜨거운 차와 담요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나는 피닉의 코앞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었다.
피닉이 로렌을 자기 앞의 편안한 의자에 앉혔다. 나는 보란 듯이 둘 사이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주의를 끌어 보려 몇 번 노력하다 제풀에 지쳐 버렸다. 멀찍이 떨어진 창틀에 올라 무릎을 세웠다.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끊길 듯 이어지는 로렌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는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세상에 실망했다는 편이 옳겠지요. 저는 제가 저지른 일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요. 성인 남녀가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백작님도 저를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생각하신다면 차라리 지금 저를 내쳐 주세요. 이제 와 말을 번복하는 제 꼴이 우습다는 건 알아요. 궁지에 몰린 여성의 정신 나간 행동으로 보이겠지요. 뻔한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백작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러도록 노력하겠어요. 백작님은 이 세상에서 저를 인간으로 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묵묵히 듣고 있던 피닉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영혼은 비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