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제1장 : As you wish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게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 3:23)

피닉을 처음 만난 건 1894년의 겨울이었다. 늦은 밤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네 개의 탑이 세워진 거대한 저택의 웅장함에 흥미를 느낀 나는 복도를 걸으며 벽에 걸린 그림을 구경했다. 그러다 열린 방문 너머로 남자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예기치 못한 우연이었다. 우연으로 시작해 운명으로 발현할.
남자는 붉은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은 대리석 벽난로에서 어른대는 불기가 그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벽난로를 제외하고 불을 전부 끈 방은 어두웠지만, 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고전적인 미남이었다. 특히 속눈썹이 짙은 눈이 그랬다. 남자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 밑에 그늘을 드리우는 검은 속눈썹은 일견 애처롭게 보일 정도였다. 살짝 내리깐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서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높게 솟은 콧대와 선이 뚜렷한 입술에서는 눈매와 상반되는 야성이 느껴졌다. 한없이 우울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느낌의, 종잡을 수 없는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나는 단번에 그의 눈에 매혹되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심해처럼 어둡고 깊은 파란 눈이 흡반을 가진 양 거세게 나를 끌어당겼다.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그의 남자다운 뺨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유도 없이 초조해졌다. 나는 원래 인간에게 간섭하지 않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말을 걸고 싶었다. 그래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나를 보고도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소리를 죽여 울기만 했다. 내가 물었다.
“어째서 울고 있어?”
그가 답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애할 자격이 없는 것이 비참해서 울고 있단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자격을 만들면 되잖아?”
“너는 몰라. 자격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주어지는 거지.”
그의 말대로 나는 몰랐다. 인간의 풍습은 내겐 너무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청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잠시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흑표범처럼 미끈한 얼굴, 온몸으로 풍기는 사내다운 분위기와 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눈물. 문득 저 남색 눈동자가 갖고 싶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얼굴을 문지르는 커다란 손과 파르르 떨리는 입술도 갖고 싶었다. 그의 울음과 웃음, 그 외의 다른 표정들도 모두 갖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계약을 하자. 내가 너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대신 네가 죽고 나면 네 영혼을 나에게 줘.”
그렇게 피닉은 내 첫 번째 계약자가 되었다.

***

나는 지옥의 귀족이며 역병과 질투의 아들이다. 질투의 가슴을 찢고 세상에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살아 있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살점을 뜯어 먹는 일이었다. 인간의 뜨거운 피는 나를 황홀하게 했고 붉은 살점은 내 혀를 달게 적셨다. 태어나 처음으로 맛본 진미였다. 그 얼굴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신분이 고귀하든 천하든 인간은 내게 모두 먹이로만 보였다.
하지만 피닉은 달랐다. 나는 그를 먹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걸고 싶었다. 곁에 두고 관찰하고 싶었다.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가 다른 표정도 보여 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와 계약을 맺었다. 이후 나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핑계로 내내 그의 곁에 머물렀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했다. 피닉은 불편해 보였지만,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기실 피닉은 처음 제 앞에 나타난 나를 요정이나 천사 뭐 그런 종류의 것으로 착각했다고 했다. 계약을 맺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아마 겉모습을 보고 그런 거겠지. 고위 악마의 외모는 인간을 현혹하는 데 안성맞춤이니까. 어쨌거나 내 정체를 안 후에도 피닉은 그다지 후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세 번의 기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일주일 뒤, 피닉이 내게 처음으로 빈 소원은 이러했다.
“내게 작위를 줘.”
“작위?”
“그래.”
“그게 뭔데?”
피닉은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차남으로 태어난 탓에 작위를 가질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작위와 영지, 그 외 모든 권리는 장남인 형에게 상속될 것이었다. 피닉의 몫으로 돌아오는 건 아주 약간의 재산뿐이다.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피닉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닉은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도 성실히 답해 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피닉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작위는 누구에게로 상속되는데?”
“보통 첫째 아들에게 상속되지. 장남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차남에게, 차남도 죽는다면 그다음 아들에게로. 만약 아들이 없다면 가까운 친척에게.”
“너희 집안의 작위는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데?”
“내 아버지, 오데어 백작이 가지고 있다.”
“그럼 아버지가 죽으면 너한테 오겠네?”
“나는 차남이다. 작위는 내 형님에게 승계되겠지.”
“차남?”
“둘째 아들.”
그 정도는 아는데.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찾았다. 케이크의 속을 장식한 크림을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넣고 쭉쭉 빨았다. 엉망진창으로 먹어 대는 내 앞에서 피닉은 반듯하게 앉아 차를 마셨다.
“가능한 빨리 그 작위라는 것을 네게 주는 게 좋겠지? 안 그러면 그 아가씨가 결혼해 버릴 테니까 말야.”
“그래 주면 고맙겠군. 하지만 작위를 얻을 만한 공을 세우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아. 여왕 폐하께서는…….”
그가 작위를 얻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직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만 집중했다. 어서 피닉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빨리 밤이 왔으면 했다.
그의 소원을 들어주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지. 인간들은 친애하는 사람의 볼에 입맞춤을 남기기도 한다던데, 어쩌면 그런 것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혹은 남아프리카나 인도에서…….”
“피닉.”
“왜 그러지?”
“소원 들어주면 뭘 해 줄 거야?”
“……내 영혼을 가져가기로 했잖나.”
“아니, 그거 말고.”
“…….”
“웃어 봐. 환하게.”
피닉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마지못해 웃어 보였다. 시원한 입매가 보기 좋게 위로 휘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케이크의 크림과 빵에 곁들여 나온 잼을 피닉의 턱에 묻히며 장난을 쳤다. 그의 흰 크라바트에 찐득한 붉은 덩어리가 묻었다. 피닉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뭐든지 들어줄게.”
“…….”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사위가 고요했다. 사용인들까지 모두 잠든 밤, 꺼져 가는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만이 괴괴히 복도를 울렸다. 나는 피닉의 형을 찾아갔다.
침대의 휘장을 걷었다. 미색의 이불 속, 피닉과 똑 닮은 얼굴이 평온하게 누워 있다. 옆에는 그의 부인이 자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형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쁜 꿈을 꾸는지 빽빽한 속눈썹이 이따금 가늘게 경련했다. 피닉과 찍어 낸 것처럼 닮은 얼굴임에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피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여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충만한 생명의 소리였다. 그 소리를 앗아 가기는 매우 쉬웠다. 내 손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숨을 쉬지 못해 괴롭게 헐떡헐떡 몸부림치더니 몇 분도 되지 않아 목을 꺾고 죽어 버렸다. 옆자리의 남편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깊게 잠든 부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한껏 구겨진 그의 몸을 정성스레 펴서 도로 반듯하게 누였다. 상처도, 독의 흔적도 없는 죽음. 누가 봐도 의심하지 못할 사랑스런 죽음이었다.
휘장을 치고 돌아서기 전 다시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숨을 쉬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옆자리에 누운 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부인도 죽여 버릴까 했지만, 태중에 아이가 없기에 그냥 살려 두었다. 저 여자가 깨어나 지르는 비명은 나와 피닉의 기쁨이 되어 줄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심장의 박동을 매우 빠르게 만들어 놓았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 절규하다 그대로 절명할 수 있도록. 이미 죽어 버린 남자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 등을 돌렸다.
피닉의 아버지를 죽이는 일은 더욱 손쉬웠다. 초로의 남자는 몸부림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그의 옆에는 비명을 질러 줄 부인이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주름진 얼굴이 피닉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도.
피닉의 아버지가 뿜어내는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한동안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지금쯤 스틱스 강에서 재회하고 있을 부자의 얼빠진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형의 부인이 지르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급하게 뛰어가는 사용인들의 발소리도 들린다. 곧 집사가 백작의 침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여유가 없다 못해 주먹질에 가까운 손길이다. 다급한 노크 소리를 배경 삼아 일어섰다. 침실의 창을 열고 춤추듯 훌쩍 뛰어내렸다.

일부러 저택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끌었다. 정원의 폭포와 분수대를 구경하고 오두막의 나무 벽에 대고 장난을 쳤다. 지금쯤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피닉을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내 활기를 반영하듯 날씨도 화창했다. 피닉의 눈동자보다 훨씬 밝은색의 파란 하늘 위로 하얀 조각구름이 떠가고, 신선한 공기가 피부를 가볍게 감쌌다. 늘 비가 와 눅눅하던 곳이었다. 맑은 날씨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천사들조차 나의 우아한 솜씨에 놀라 비를 뿌리는 일을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당연하지, 나는 지옥에서 300년 만에 태어난 고위 악마이자 마천 전쟁 당시 홀로 천사 한 군단을 몰살한 질투의 아들이니까.
정원을 둘러싼 저택에서 터지는 인간들의 울음과 비명이 끊임없이 내 기분을 돋웠다. 하루 만에 자신의 소원을 이뤄 준 내게 피닉이 어떤 찬사를 보낼지 벌써부터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는 준남작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내가 그에게 준 것은 무려 백작위였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재산과 영지도 함께였다. 성취감에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빙글빙글 돌며 저택으로 돌아오는데 검은 사냥개가 나를 보고 컹컹 짖었다. 저 시끄러운 개의 피로 간지러운 목을 축일까 생각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저 개는 이제 피닉의 재산이므로.
술 저장고에서 훔쳐 낸 포도주를 들고 피닉을 찾아갔다. 피닉의 아버지가 아끼던 것이라 피닉 역시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를 빼고는 마셔 본 적이 없다던 술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이제 죽어 버렸고, 이 저택의 새로운 주인은 피닉이었다. 이까짓 술쯤 피닉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피닉!”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피닉의 뒤에서 왁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포도주 병과 잔을 든 손으로 피닉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에 뺨을 비비고 귓불을 물며 방방 뛰었다. 하지만 피닉은 굳은 채였다. 내 힘에 온몸이 들썩거리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반응이 없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대꾸가 없어 의아함에 몸을 뗐다. 피닉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흰 뺨에 눈물이 흥건하고 안구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시뻘겠다. 당황해 뻗은 내 손을 피닉이 사납게 쳐 냈다. 튕겨 나간 유리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황망하여 물었다.
“피닉, 왜 그래?”
억눌린 대답이 돌아왔다.
“네 짓인가?”
“뭐가?”
“네가 아버지와 형님을 죽였나?”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피닉의 기분이 나아졌으면 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닌가.
“내가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너무 빨리 이루어져서 얼떨떨해? 괜찮아, 별일 아니었으니까. 우리 이거 먹으면서 축하하자. 너 이 술 다시 마셔 보고 싶다며.”
“내가, 언제…….”
“이거 아니야? 다른 거 가져올까?”
생긋 웃으며 피닉의 뺨을 감쌌다. 순간 그의 몸이 격하게 요동쳤다. 피닉은 속에서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삼키듯 눈을 질끈 감더니 씹어뱉듯 한 마디를 토해 냈다. 꽉 쥔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당장에라도 내 목을 죄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양.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해.”
“…….”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멀뚱히 선 채 눈만 끔뻑거렸다. 내가 고개만 갸우뚱할 뿐 반응이 없자 벌떡 일어난 그가 내 목줄기를 잡았다. 커다란 손이 온통 땀으로 축축했다. 나는 충분히 피닉을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내게 왜 화를 내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빨리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해!”
“왜 그래, 피닉……. 의심받을까 봐 그래? 걱정하지 마, 아무도 몰라. 상처 하나 안 남겼어. 그냥 숨통만 막아서 죽였단 말이야.”
달래듯 조근조근 설명했다. 역효과였다. 내 목을 움켜쥔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러다간 정말 내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놓아 달라고 턱 끝으로 톡톡 치자 더 강하게 조여 온다.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던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되돌려 놔. 소원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다시 살려 놔.”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어. 스틱스 강을 건넌 영혼을 다시 데려오는 건 우리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일인걸.”
“…….”
“너무 갑작스러워? 아버지는 죽이지 말걸 그랬어? 하지만 나는 네가 빨리 작위를 가졌으면 해서…….”
아버지가 죽으면 바로 작위를 받을 수 있잖아, 중얼거리며 피닉의 눈치를 살폈다. 태어나 누군가의 눈치를 본 건 처음이었지만 그런 것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풀죽은 나를 본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보듯 내 몸에 닿은 제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나는 피닉이 움켜쥐었던 목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목구멍이 부어 화끈거렸다. 그는 정말로 내게 화가 난 모양이다. 나는 항의했다. 억울함에 목소리가 떨렸다.
“왜 화를 내……? 나는 소원을 들어준 건데. 네가 그랬잖아, 작위를 달라고. 작위를 줬는데 왜 화를 내.”
“그게 네 귀엔 아버지와 형님을 죽여 달란 소리로 들렸나 보지?!”
피닉이 악을 썼다. 갈기갈기 찢어진 그의 목소리가 허공을 벴다. 내게 손을 뻗었다가 도로 거둬들였다가 차라리 자기 목을 조르려는 듯 힘을 주었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여유 없이 한참을 그러다 무릎에 힘이 풀리는 듯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얼른 그의 주변에 널린 유리 조각들을 치워 주었다. 그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속이 막힌 것처럼 가슴만 쥐어뜯던 그가 갑자기 내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아 저만치 내던져 버렸다. 곧이어 씨근거리며 일어선 피닉이 이번엔 방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부수기 시작했다.
이따위 방법으로 얻은 작위는 필요 없다는 둥, 도로 살려 내라는 둥, 차라리 자기 목숨을 거둬 가라는 둥 그의 절규가 방안을 왕왕 울렸다. 나는 도리 없이 서서 그런 피닉을 지켜보기만 했다. 양손이 피투성이가 되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발광하던 그가 문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언제…… 내 혈육을 죽여 달라고 했느냔 말이야.”
“…….”
“그렇게까지 해서 가지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어.”
핏발 선 눈동자가 내게로 돌아왔다. 처음 받아 보는 경멸의 눈빛이다. 고작 인간 하나가 쳐다보는 것인데도 뱃가죽에 화살이 꽂힌 양 아팠다. 목을 졸렸을 때보다도 더한 통증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피닉이 입을 열었다. 낮게 쉰 그의 목소리가 독무처럼 바닥으로 깔렸다.
“내가 너무 순진했군.”
“…….”
“악마가 순순히 소원만 이루어 줄 리 없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오해다. 나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섰다. 벌어졌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가 진저리를 치며 내 손을 거부했다. 진절머리 난다는 듯한 그 동작에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바보처럼 입술만 벌렸다 닫았다 했다. 피닉이 냉엄하게 나를 보았다. 내 변명을 들어 줄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없는 얼굴이었다.
“어제 내게 웃어 보라고 했었지.”
“…….”
“내 가족을 죽이려는 줄도 모르고 웃는 나를 보고 즐거웠겠군. 어리석은 인간을 실컷 조롱하니 기분이 좋던가?”
“아니야, 그건…….”
“너 같은 악마 새끼와 계약을 맺는 게 아니었어.”
“…….”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는 내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나는 돌아서는 피닉을 잡지도, 사과를 하지도, 그렇다고 따지지도 못한 채 입술만 씹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인간의 감정은 내게 너무 어려웠다. 내게 그런 것을 설명해 줄 사람은 피닉뿐인데, 그는 나를 보고 싶지도 않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