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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악몽 (1)
끝이 보이지 않는 회갈색의 암석 지대. 흙도 모래도 없이 딱딱하기만 한 바닥에는 풀 한 포기 없다. 층이 진 암석들이 울퉁불퉁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도무지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불모지. 그러나 그 위로 그곳과는 이질적인 것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파란 머리에 파란 눈,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얀 피부. 그녀가 거친 땅 위로 맨발을 디딜 때마다 흰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멀리서 본다면 그녀는 이 암석 지대 위를 지나는 한 줄기 푸른 섬광과 같았다.
여인은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전력을 다해 달렸다. 땀방울이 그녀의 턱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제발, 더 빨리.”
이미 기력이 많이 빠진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뒤를 향한 그녀의 시선에는 끔찍한 것이 비치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것은 호랑이. 적어도 몸길이가 5미터는 되는 집채만 한 덩치의 호랑이였다. 딱딱한 돌로 된 바닥임에도 불구하고, 호랑이가 발을 딛는 곳이면 발 모양으로 땅이 팼다. 호랑이는 앞다리로 땅을 짚고 뒷다리로 힘껏 박차며, 그 거구로 낼 수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건 속도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눈에 그것의 기괴한 머리가 비쳤다.
일반적인 동물의 머리와는 달랐다. 눈도 귀도 코도 없이 아가리만 존재하는 머리. 마치 파리지옥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파리지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선연한 분홍 빛깔 입 안에 날카롭게 빛나는 이빨이 잔뜩 들어차 있다는 것. 물리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곤죽이 될 것 같았다.
그녀를 쫓아오는 것들은 전부 그런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개나 고양이, 늑대, 심지어는 벌레까지. 그런 것들이 전부 아가리를 딱딱 부딪치며 달려들었고,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도망가야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도망가는 것에는 익숙했고, 추격전이라면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따돌리고 살아남아 왔던가.
“더 빠르게.”
그녀는 호랑이 괴물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하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보통 같으면 이미 훨씬 전에 나가떨어졌을 터. 그러나 호랑이 괴물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체력이 다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는 돌처럼 딱딱해져서 이미 감각이 없었다. 아까부터 괴물과의 거리도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
“제발!”
이제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괴물의 숨소리마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을 울리고 나오는 소리는 낮으면서도 깊었고, 약간의 쇳소리가 섞여 있는 듯했다.
찌릿한 감각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얼굴 위로는 경악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죽는다. 이제 죽는다. 도무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찾았다!’
멀리서부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서늘한 광채.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것은 이 세계의 끝, 이곳으로부터의 출구였다. 도달하기만 하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그녀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괴물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출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까?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겠어.’
만일 출구가 가만히 있거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면 당연히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운이 좋게도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지금보다 속도를 조금 더 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는 순간에도 뒤에서 들리는 괴물의 숨소리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규칙적으로 무게를 실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요란한 소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리가 멈추었다. 길게 한 번 숨을 깊이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고, 땅을 한 번 강하게 박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조용해졌다.
포기한 걸까? 조심스럽게 희망 사항을 꺼내본다.
그러나 곧 가능성을 부인했다.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는 먹이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리고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위로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간신히, 아슬아슬한 지경이 되어서야 그녀는 알아차렸다. 괴물이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대로 도약해 온 것이었다.
황급히 그녀는 몸을 옆으로 던졌다. 공중에서 그녀는 호랑이의 몸과 가까스로 엇갈렸다. 호랑이 괴물은 머리를 비틀며 그녀가 몸을 날린 방향으로 뻗었다.
다음 순간, 호랑이 괴물은 지면에 몸을 박고 굴렀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울퉁불퉁한 땅 위를 이젠 지쳐서 고통도 잘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굴렀다. 호랑이 괴물의 몸에 딸려가서 구르다가 더 멀리까지 날아갔다.
“아아아아악!”
왼팔에 마치 끓는 기름이라도 들이부은 것 같은 격통이 내달았다.
팔을 확인했을 때, 이미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공중에서 물리면서 팔뼈가 으스러져, 그대로 땅을 구르며 끊겨 버린 것이다. 뼈가 튀어나온 절단된 단면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저 절단된 것도 아닌, 당겨져 끊어진 팔. 곧 온몸의 골격이 뒤틀린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아아아악, 흑!”
그래도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고통. 눈앞이 새하얘질 듯하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여기서 멈추게 되면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미칠 듯이 아프지만, 팔 하나 잃었다고 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광채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다행히도 호랑이는 뜯어낸 팔을 먹느라고 잠시 멈추어 있더니, 그 자리에서 팔을 뼈째로 집어삼키고 나서야 다시 그녀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지쳐서인지, 부상을 입어서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호랑이가 바로 뒤까지 따라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금세 바로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황. 여기에서 잡힌다면 그것만큼 분한 일도 없을 터였다.
여인은 살기 위해 괴물의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면서 괴물이 다시 한번 도약해 주기만을 바랐다. 계속 평범하게 달린다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 하지만 괴물이 도약 후 다시 땅 위를 구른다면, 몸의 무게도 무게일 테니 다시 속력이 붙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 그 정도의 시간만 더 벌 수 있다면 출구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 그녀의 바람대로 깊이 들이쉬는 숨소리와 뒤이어 강하게 땅을 박차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에 맞추어 재빨리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고는 뛰어오른 그대로 땅 위를 한 바퀴 굴러, 일어나 다시 달렸다.
달리면서 아직도 땅 위를 구르고 있는 호랑이가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뗄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고 땀으로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지만, 처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 남은 힘을 모두 끌어 모아, 풀리려는 무릎을 억지로 세우면서. 그리고 바로 출구 앞에 다다랐을 때, 힘껏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비로소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몸의 모든 긴장을 풀고, 비로소 평온해지던 찰나.
‘…어째서?’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호랑이가 또다시 도약한 것이다. 이미 공중으로 몸을 날리고 있어 피할 수조차 없다.
호랑이의 벌어진 아가리가 머리 쪽으로 돌진해 왔다.
끼기기기기끼기까가가가까가각.
날카로운 이빨이 피부를 뚫고, 광대를 파고들어 뼈를 산산조각 낸다.
웃음인지 울부짖음인지 모를 소름 끼치는 괴물의 소리가 멀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동시에 푸른 섬광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 *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소년은 눈을 떴다.
제정신이 아닌 듯 연신 땀으로 달라붙은 곱슬머리를 아래로 쓸어내린다. 왼팔이 경련하고 있다.
잠시 후, 소년은 비로소 이곳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은 알 수 없는 암석 지대가 아니라 어두컴컴한 기숙사의 침대 위.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 아니라 검은 더벅머리를 한 동그란 얼굴의 소년의 몸에는 머리도, 왼팔도, 제대로 붙어 있다.
베갯잇과 닿아 있는 목 뒤가 축축하게 느껴졌다. 안도하는 한편, 울분이 치밀어 소년은 누운 채 손에 집힌 시트를 부득 움켜쥐었다.
이 꿈이 시작된 것은 여덟 살 무렵부터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이들은 자라면서 누구나 괴물이 나오는 꿈을 꾼다고 하니까.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하니까.
그러나 무언가 달랐다. 악몽이라고 하기에 그것은 너무나 길게, 또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꿈이 아니라 정말로 또 다른 어딘가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에 들면 그는 이전에 깨어난 곳에서부터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어떤 세계를 여행하듯이.
꿈속에서 자신은 늘 푸른 여인이었고, 언제나 ‘그것들’에 쫓겨야 했다.
다행히도 푸른 여인의 몸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만, 언제나 잠에 들면 생명의 위협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어쩌면 푸른 여인인 꿈속의 나도…….’
애초에 지금까지 수년이 넘게 그 꿈을 꾸면서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 미친 것 같은 세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그냥 죽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잡혀서 먹히면 그걸로 꿈이 끝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이상한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본능이 말했다. 여기서 잡히면 정말로 끝이라고. 꿈뿐만 아니라 네 목숨도 끝나는 거라고.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언제까지 이런 꿈을 꾸어야 하는 걸까? 평생토록 밤마다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꿈속에서 죽어버리면… 현실의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너무나 두려웠다.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 이상의, 미지에 대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소년은 동그란 눈을 일그러뜨렸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잠을 험하게 자냐? 계속 끙끙대고 소리 지르고.”
소년은 퍼뜩 놀라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에 짙은 눈썹이 전체적으로 다부진 인상을 주는 또 다른 소년. 룸메이트인 강찬비가 일어나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 미안.”
목이 멘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눈이 너무 뜨거웠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끝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니, 사과받자고 한 말은 아니고.”
찬비는 미간을 모으며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소년을 살폈다.
“너 우냐?”
“…….”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계속 두 손으로 눈물을 훔쳐 낼 뿐이었다.
아직도 머리와 팔에는 생살을 썰고 들어가던 이빨의 감촉이 선명히 남아 있다. 공포와, 그것을 어찌해 보지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울분으로 소년은 몸을 떨었다.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던 찬비가 방의 불을 켜더니, 다시 다가왔다.
그러고는 소년의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얌마, 남자 새끼가 무서운 꿈 좀 꿨다고 질질 짜냐? 빨리 잊어버리고 다시 자.”
그러고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소년의 등을 토닥였다.
이럴 때는 오히려 씩씩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야 한다.
두려움이란 어차피 한순간일 뿐, 이겨내면 그만이다.
찬비는 그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떨쳐내길 바랐다. 그러나 소년은 아직 얼굴을 가린 팔을 치울 수 없었다.
“미안해.”
거듭 사과할 뿐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악몽을 꾸는 것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늘 밤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찬비의 잠을 방해하고 있다.
그런데도 찬비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꿈을 꾸는 괴로움도, 어쩔 수 없는 절망도,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마저도.
그 모든 게 주체할 수 없어서 소년은 단지 중얼거리듯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마저도 다 알기에 찬비는 잠시 기쁜 듯도 슬픈 듯도 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야. 난 악몽이라고 해봐야 어쩌다 한번 꿔. 그러니까 솔직히 매일 밤 그런 꿈을 꾸는 게 어떤 기분일지도 모르겠고, 모르는 걸 잘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안 해. 그런 주제에 내가 너한테 뭘 해줘도 실제로 쥐뿔도 도움이 안 되겠지. 이게 내가 해주는 전부잖아? 네가 소리 지르면서 일어나면 옆에 앉아 있는 거.”
그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침대를 손으로 툭툭 치는 찬비를 보았다. 찬비는 침대에서 손을 떼더니 그의 등을 퍽, 쳤다.
“그러니까 별거 아니라고. 내가 뭐하든, 신경 쓰든, 왜 별것도 아닌 걸 일일이 미안해하냐? 힘든 것도 너고, 이겨내야 하는 것도 결국 너고, 어차피 내가 해주는 건 그냥 말뿐인데. 그 꿈도 마찬가지야. 그 꿈을 네가 꾸고 싶어서 꾸냐? 그거 가지고 미안해하지 마. 그렇다고 내가 꿈을 안 꾸게 해줬냐? 그러니까 나한테 고마워하지도 마. 미안할 일도, 고마울 일도 아니라고. …뭐, 하도 옆에서 험하게 자니까 밤마다 설치긴 하지만, 1년 동안 방 같이 쓰면서 좀 많이 싸웠냐? 이미 예전에 졸업해서 아무렇지도 않아. 새삼스럽게 짜증 같은 게 나겠냐. 오늘따라 더 끙끙대는 거 같으니까 물어본다고 한 소리야.”
그러고는 씩 웃는다.
그는 얼른 눈물을 마저 훔치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맞다.
“고마워.”
“고맙긴. 그럼 이제 불 끈다. 잘 자.”
찬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깍, 소리와 함께 다시 방은 어둠 속에 잠겼다. 찬비의 침대 쪽에서 이불 끄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도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 덮은 뒤,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다. 공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 또 꿀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룸메이트의 잠이 방해 받지 않도록,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향했다.
창밖에는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기숙사 앞마당이 보였다. 작은 정원과, 기숙사의 안과 밖을 가른 담장. 아직 새벽이기에 잘 보이지 않지만 봄을 맞은 정원에는 갖가지 색깔의 꽃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그는 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정원이 실룩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라기엔 그 움직임의 폭이 너무나 크다. 그는 의아해하며 정원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거대한 동물의 그림자였다. 집채만 한 네발짐승의.
곧 방금 꿈속에서 보았던 호랑이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건 꿈이잖아.’
다시 창밖을 내려다보았을 때, 거대한 그림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길고양이나 뭐 그런 거겠지. 그림자라서 그렇게 컸나 보다. 아니면… 내가 아직 덜 깨서 헛것을 봤겠지.’
그는 침대로 돌아가며 다시 한번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악몽 (1)
끝이 보이지 않는 회갈색의 암석 지대. 흙도 모래도 없이 딱딱하기만 한 바닥에는 풀 한 포기 없다. 층이 진 암석들이 울퉁불퉁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도무지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불모지. 그러나 그 위로 그곳과는 이질적인 것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파란 머리에 파란 눈,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얀 피부. 그녀가 거친 땅 위로 맨발을 디딜 때마다 흰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멀리서 본다면 그녀는 이 암석 지대 위를 지나는 한 줄기 푸른 섬광과 같았다.
여인은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전력을 다해 달렸다. 땀방울이 그녀의 턱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제발, 더 빨리.”
이미 기력이 많이 빠진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뒤를 향한 그녀의 시선에는 끔찍한 것이 비치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것은 호랑이. 적어도 몸길이가 5미터는 되는 집채만 한 덩치의 호랑이였다. 딱딱한 돌로 된 바닥임에도 불구하고, 호랑이가 발을 딛는 곳이면 발 모양으로 땅이 팼다. 호랑이는 앞다리로 땅을 짚고 뒷다리로 힘껏 박차며, 그 거구로 낼 수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건 속도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눈에 그것의 기괴한 머리가 비쳤다.
일반적인 동물의 머리와는 달랐다. 눈도 귀도 코도 없이 아가리만 존재하는 머리. 마치 파리지옥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파리지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선연한 분홍 빛깔 입 안에 날카롭게 빛나는 이빨이 잔뜩 들어차 있다는 것. 물리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곤죽이 될 것 같았다.
그녀를 쫓아오는 것들은 전부 그런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개나 고양이, 늑대, 심지어는 벌레까지. 그런 것들이 전부 아가리를 딱딱 부딪치며 달려들었고,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도망가야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도망가는 것에는 익숙했고, 추격전이라면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따돌리고 살아남아 왔던가.
“더 빠르게.”
그녀는 호랑이 괴물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하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보통 같으면 이미 훨씬 전에 나가떨어졌을 터. 그러나 호랑이 괴물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체력이 다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는 돌처럼 딱딱해져서 이미 감각이 없었다. 아까부터 괴물과의 거리도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
“제발!”
이제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괴물의 숨소리마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을 울리고 나오는 소리는 낮으면서도 깊었고, 약간의 쇳소리가 섞여 있는 듯했다.
찌릿한 감각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얼굴 위로는 경악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죽는다. 이제 죽는다. 도무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찾았다!’
멀리서부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서늘한 광채.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것은 이 세계의 끝, 이곳으로부터의 출구였다. 도달하기만 하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그녀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괴물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출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까?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겠어.’
만일 출구가 가만히 있거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면 당연히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운이 좋게도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지금보다 속도를 조금 더 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는 순간에도 뒤에서 들리는 괴물의 숨소리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규칙적으로 무게를 실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요란한 소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리가 멈추었다. 길게 한 번 숨을 깊이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고, 땅을 한 번 강하게 박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조용해졌다.
포기한 걸까? 조심스럽게 희망 사항을 꺼내본다.
그러나 곧 가능성을 부인했다.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는 먹이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리고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위로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간신히, 아슬아슬한 지경이 되어서야 그녀는 알아차렸다. 괴물이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대로 도약해 온 것이었다.
황급히 그녀는 몸을 옆으로 던졌다. 공중에서 그녀는 호랑이의 몸과 가까스로 엇갈렸다. 호랑이 괴물은 머리를 비틀며 그녀가 몸을 날린 방향으로 뻗었다.
다음 순간, 호랑이 괴물은 지면에 몸을 박고 굴렀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울퉁불퉁한 땅 위를 이젠 지쳐서 고통도 잘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굴렀다. 호랑이 괴물의 몸에 딸려가서 구르다가 더 멀리까지 날아갔다.
“아아아아악!”
왼팔에 마치 끓는 기름이라도 들이부은 것 같은 격통이 내달았다.
팔을 확인했을 때, 이미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공중에서 물리면서 팔뼈가 으스러져, 그대로 땅을 구르며 끊겨 버린 것이다. 뼈가 튀어나온 절단된 단면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저 절단된 것도 아닌, 당겨져 끊어진 팔. 곧 온몸의 골격이 뒤틀린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아아아악, 흑!”
그래도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고통. 눈앞이 새하얘질 듯하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여기서 멈추게 되면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미칠 듯이 아프지만, 팔 하나 잃었다고 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광채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다행히도 호랑이는 뜯어낸 팔을 먹느라고 잠시 멈추어 있더니, 그 자리에서 팔을 뼈째로 집어삼키고 나서야 다시 그녀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지쳐서인지, 부상을 입어서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호랑이가 바로 뒤까지 따라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금세 바로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황. 여기에서 잡힌다면 그것만큼 분한 일도 없을 터였다.
여인은 살기 위해 괴물의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면서 괴물이 다시 한번 도약해 주기만을 바랐다. 계속 평범하게 달린다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 하지만 괴물이 도약 후 다시 땅 위를 구른다면, 몸의 무게도 무게일 테니 다시 속력이 붙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 그 정도의 시간만 더 벌 수 있다면 출구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 그녀의 바람대로 깊이 들이쉬는 숨소리와 뒤이어 강하게 땅을 박차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에 맞추어 재빨리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고는 뛰어오른 그대로 땅 위를 한 바퀴 굴러, 일어나 다시 달렸다.
달리면서 아직도 땅 위를 구르고 있는 호랑이가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뗄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고 땀으로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지만, 처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 남은 힘을 모두 끌어 모아, 풀리려는 무릎을 억지로 세우면서. 그리고 바로 출구 앞에 다다랐을 때, 힘껏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비로소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몸의 모든 긴장을 풀고, 비로소 평온해지던 찰나.
‘…어째서?’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호랑이가 또다시 도약한 것이다. 이미 공중으로 몸을 날리고 있어 피할 수조차 없다.
호랑이의 벌어진 아가리가 머리 쪽으로 돌진해 왔다.
끼기기기기끼기까가가가까가각.
날카로운 이빨이 피부를 뚫고, 광대를 파고들어 뼈를 산산조각 낸다.
웃음인지 울부짖음인지 모를 소름 끼치는 괴물의 소리가 멀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동시에 푸른 섬광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 *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소년은 눈을 떴다.
제정신이 아닌 듯 연신 땀으로 달라붙은 곱슬머리를 아래로 쓸어내린다. 왼팔이 경련하고 있다.
잠시 후, 소년은 비로소 이곳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은 알 수 없는 암석 지대가 아니라 어두컴컴한 기숙사의 침대 위.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 아니라 검은 더벅머리를 한 동그란 얼굴의 소년의 몸에는 머리도, 왼팔도, 제대로 붙어 있다.
베갯잇과 닿아 있는 목 뒤가 축축하게 느껴졌다. 안도하는 한편, 울분이 치밀어 소년은 누운 채 손에 집힌 시트를 부득 움켜쥐었다.
이 꿈이 시작된 것은 여덟 살 무렵부터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이들은 자라면서 누구나 괴물이 나오는 꿈을 꾼다고 하니까.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하니까.
그러나 무언가 달랐다. 악몽이라고 하기에 그것은 너무나 길게, 또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꿈이 아니라 정말로 또 다른 어딘가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에 들면 그는 이전에 깨어난 곳에서부터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어떤 세계를 여행하듯이.
꿈속에서 자신은 늘 푸른 여인이었고, 언제나 ‘그것들’에 쫓겨야 했다.
다행히도 푸른 여인의 몸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만, 언제나 잠에 들면 생명의 위협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어쩌면 푸른 여인인 꿈속의 나도…….’
애초에 지금까지 수년이 넘게 그 꿈을 꾸면서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 미친 것 같은 세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그냥 죽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잡혀서 먹히면 그걸로 꿈이 끝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이상한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본능이 말했다. 여기서 잡히면 정말로 끝이라고. 꿈뿐만 아니라 네 목숨도 끝나는 거라고.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언제까지 이런 꿈을 꾸어야 하는 걸까? 평생토록 밤마다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꿈속에서 죽어버리면… 현실의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너무나 두려웠다.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 이상의, 미지에 대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소년은 동그란 눈을 일그러뜨렸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잠을 험하게 자냐? 계속 끙끙대고 소리 지르고.”
소년은 퍼뜩 놀라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에 짙은 눈썹이 전체적으로 다부진 인상을 주는 또 다른 소년. 룸메이트인 강찬비가 일어나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 미안.”
목이 멘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눈이 너무 뜨거웠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끝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니, 사과받자고 한 말은 아니고.”
찬비는 미간을 모으며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소년을 살폈다.
“너 우냐?”
“…….”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계속 두 손으로 눈물을 훔쳐 낼 뿐이었다.
아직도 머리와 팔에는 생살을 썰고 들어가던 이빨의 감촉이 선명히 남아 있다. 공포와, 그것을 어찌해 보지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울분으로 소년은 몸을 떨었다.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던 찬비가 방의 불을 켜더니, 다시 다가왔다.
그러고는 소년의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얌마, 남자 새끼가 무서운 꿈 좀 꿨다고 질질 짜냐? 빨리 잊어버리고 다시 자.”
그러고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소년의 등을 토닥였다.
이럴 때는 오히려 씩씩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야 한다.
두려움이란 어차피 한순간일 뿐, 이겨내면 그만이다.
찬비는 그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떨쳐내길 바랐다. 그러나 소년은 아직 얼굴을 가린 팔을 치울 수 없었다.
“미안해.”
거듭 사과할 뿐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악몽을 꾸는 것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늘 밤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찬비의 잠을 방해하고 있다.
그런데도 찬비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꿈을 꾸는 괴로움도, 어쩔 수 없는 절망도,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마저도.
그 모든 게 주체할 수 없어서 소년은 단지 중얼거리듯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마저도 다 알기에 찬비는 잠시 기쁜 듯도 슬픈 듯도 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야. 난 악몽이라고 해봐야 어쩌다 한번 꿔. 그러니까 솔직히 매일 밤 그런 꿈을 꾸는 게 어떤 기분일지도 모르겠고, 모르는 걸 잘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안 해. 그런 주제에 내가 너한테 뭘 해줘도 실제로 쥐뿔도 도움이 안 되겠지. 이게 내가 해주는 전부잖아? 네가 소리 지르면서 일어나면 옆에 앉아 있는 거.”
그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침대를 손으로 툭툭 치는 찬비를 보았다. 찬비는 침대에서 손을 떼더니 그의 등을 퍽, 쳤다.
“그러니까 별거 아니라고. 내가 뭐하든, 신경 쓰든, 왜 별것도 아닌 걸 일일이 미안해하냐? 힘든 것도 너고, 이겨내야 하는 것도 결국 너고, 어차피 내가 해주는 건 그냥 말뿐인데. 그 꿈도 마찬가지야. 그 꿈을 네가 꾸고 싶어서 꾸냐? 그거 가지고 미안해하지 마. 그렇다고 내가 꿈을 안 꾸게 해줬냐? 그러니까 나한테 고마워하지도 마. 미안할 일도, 고마울 일도 아니라고. …뭐, 하도 옆에서 험하게 자니까 밤마다 설치긴 하지만, 1년 동안 방 같이 쓰면서 좀 많이 싸웠냐? 이미 예전에 졸업해서 아무렇지도 않아. 새삼스럽게 짜증 같은 게 나겠냐. 오늘따라 더 끙끙대는 거 같으니까 물어본다고 한 소리야.”
그러고는 씩 웃는다.
그는 얼른 눈물을 마저 훔치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맞다.
“고마워.”
“고맙긴. 그럼 이제 불 끈다. 잘 자.”
찬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깍, 소리와 함께 다시 방은 어둠 속에 잠겼다. 찬비의 침대 쪽에서 이불 끄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도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 덮은 뒤,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다. 공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 또 꿀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룸메이트의 잠이 방해 받지 않도록,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향했다.
창밖에는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기숙사 앞마당이 보였다. 작은 정원과, 기숙사의 안과 밖을 가른 담장. 아직 새벽이기에 잘 보이지 않지만 봄을 맞은 정원에는 갖가지 색깔의 꽃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그는 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정원이 실룩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라기엔 그 움직임의 폭이 너무나 크다. 그는 의아해하며 정원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거대한 동물의 그림자였다. 집채만 한 네발짐승의.
곧 방금 꿈속에서 보았던 호랑이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건 꿈이잖아.’
다시 창밖을 내려다보았을 때, 거대한 그림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길고양이나 뭐 그런 거겠지. 그림자라서 그렇게 컸나 보다. 아니면… 내가 아직 덜 깨서 헛것을 봤겠지.’
그는 침대로 돌아가며 다시 한번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