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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으음…….”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수줍게 숨은 연분홍빛 입술을 살짝 움직여 본다.
본연의 달콤한 숨결과는 반대로 입에선 괴로운 신음을 발하고 있는 소녀의 두 눈은 곱게 접혀 그녀가 지금 기절한 상태임을 알게 해 주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놀라 제대로 된 낙법도 시전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자세로 땅 위에 떨어져야만 했던 녹의 소녀는 강한 낙하 충격에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내기가 육신을 보호한 덕에 내장이 파열되는 최악의 상황만은 막을 수 있었으나 낙하 충격과 타박상 만은 막을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괴로운 신음성을 흘리던 녹의 소녀는 자신의 몸 일부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는 본능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
두 눈을 떴다 싶은 순간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흔들리는 머릿속을 대변하듯 내부에서 이는 메스꺼움이었다. 속이 뒤집혀 구토가 나올 것만 같은 메스꺼움을 간신히 견뎌 내며 본능이 시키는 대로 오른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켰다.
유난히 긴 속눈썹 속에서 멍한 눈빛을 드러낸 녹의 소녀는 곧 자신의 다리를 매만지고 있는 두 거한과 그들 뒤로 선 또 다른 두 사내를 볼 수 있었다.
“…….”
뭘까?
아직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초점이 불분명한 시야만큼이나 흐릿한 머리론 똑같은 얼굴을 한 두 거한이 지금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잠시 그대로 지켜본다.
한편 두 거한은 소녀가 깨어나든 말든 상관없이 히죽이며 걷어 올린 치맛자락 속의 속바지 위를 투박한 손을 이용해 쓰다듬듯 주물렀다.
“……?”
그리고 점점 위를 향하고 있다.
두 거한의 손이 무릎을 지나 허벅지를 더듬으며 더욱 깊은 곳을 향하자 녹의 소녀는 다시 한 번 느껴지는 소름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힘껏 소리쳤다.
“뭐, 뭐하는 짓인가요?”
“뭐하는 짓이긴? 크크, 다 알면서.”
“흐흐, 그러게나 말이야, 형.”
두 거한들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있다면 그건 바로 겁탈당하기 일보 직전에 처한 소녀의 비명 소리일 것이다. 그 소리를 충실히 내주며 황급히 몸을 뒤로 빼 경계 태세를 취하려는 소녀의 모습에 두 거한은 그저 음흉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본다. 굳이 쫓을 필요도 없음을 알기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소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두 거한의 시선에 녹의 소녀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허리춤의 검을 빼어 들었다.
그러나…….
‘없어?’
없다.
있어야 할 검이 보이지 않는다.
항산파(恒山派)에 입문할 당시 스승에게서 직접 하사받은 소중한 검이 사라진 채 빈 허리춤만이 그녀를 맞이한다.
이에 당황한 녹의 소녀가 없는 검을 찾아 허리를 더듬으니 두 거한이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대소를 터뜨린다.
“크크크. 하하하! 봐, 봐! 내말이 맞지? 저년이 정신을 차린 후 제일 먼저 할 것은 비명이고 그 다음은 검을 찾을 것이라고 했잖아!”
“푸하하하! 맞아, 맞아! 형이 분명 그랬지! 크크, 역시 유아 형은 똑똑하다니까!”
“……!”
웃고 있다.
백과 흑의 두 거한이 아직 앳된 얼굴만큼이나 철없는 말을 토하며 자신을 비웃는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분노를 토하기보다도 잃어버린 검을 찾는 일이 더 급했기에 녹의 소녀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것을 찾고 있다면 그리 서두를 것 없소.”
“……!”
순간 그녀의 당황에 찬 눈 속으로 금포를 걸친 비대한 체구의 청년이 비쳐 든다. 웃고 있는 금포 사내의 통통한 손에는 한 자루 백검(白劍)이 들린 채 이리저리 흔들려 그 검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희롱했다.
“대체 제게 왜들 이러는 거죠? 전 당신들을 본 적도 없어요. 한데 당신들은 어째서 제 뒤를 쫓고 절 이리 괴롭히시는 건가요? 지금이라도 그 검을 돌려주면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할 테니 어서 검을 돌려주세요!”
“후후…….”
순진하다 해야 하는가, 아니면 바보 같다 해야 하는가?
정녕 자신들이 생전 처음 보는 그녀를 마을에서부터 뒤를 쫓아 결국 이곳에서 잡은 이유를 몰라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발뺌을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재밌는 계집이로군.’
재밌었다.
미녀 소리를 듣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얼굴이나 마을에서 보여 주었던 행동 하나하나는 귀여웠다. 처음 객잔에서 음식을 어떻게 시키는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모습도, 그리고 음식 하나를 시키고는 스스로 대견해 밝게 웃던 모습들이 귀엽게만 비쳤다. 그 귀여움을 갖고자 마을에서부터 뒤를 쫓아왔고, 잡고 보니 귀여움에 재미까지 곁들여진다.
점점 더 저 순진한 척하는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고 육신을 짓밟고 싶은 흉심이 일었다.
하나 금포 사내는 그 욕망을 억누른 채 좀 더 눈앞의 상황을 즐기고자 손에 쥔 검을 소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 소중한 검이라면 내 특별히 돌려 드리리다.”
“……!”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다. 손목만을 이용해 가볍게 검을 던진 금포 사내의 간결한 동작에 정확히 자신의 품으로 안겨 드는 검을 받아 든 녹의 소녀가 당황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사내의 의도야 어떻든 소중한 검을 되찾은 소녀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 웃으며 검을 돌려준 사내를 향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정말 고마워요. 검을 돌려주셨으니 저 또한 이번 일은…….”
“후훗! 무언가 오해를 했나 보군. 난 검을 돌려주었을 뿐 소저를 보내 준다 하진 않았소.”
“……!”
검을 돌려주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검을 돌려주었을 뿐 이대로 그녀를 돌려보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금포 사내가 시선을 돌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한 빛바랜 회색 무복의 사내를 바라본다.
잠시 희망에 젖었던 녹의 소녀를 더욱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위해 회의 사내를 돌아본 금포 사내는 이내 한 줄기 비소를 흘려보냈다.
“뭐해, 형? 후훗! 소저께서 기다리잖아.”
“……!”
가늘게 뜬 실눈 사이로 파르르 푸른 불꽃이 피어난다.
옆에서 들려온 금포 사내의 비아냥거림에 일순 살기가 솟구친 회의 사내였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마음속 살기를 감춘 회의 사내는 입가엔 상냥한 미소마저 그리며 금포 사내를 돌아보았다.
“응, 알았어.”
미소만큼이나 상냥한 어조다.
“흥!”
그러나 그 말에 오히려 금포 사내는 기분이 상한 듯 역겨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어서 할 일을 하라는 듯 고갯짓으로 소녀를 가리켰다.
그의 건방진 행동에도 불구하고 회의 사내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을 한 채 소녀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스르릉…….
천천히 앞을 향하는 걸음만큼이나 서서히 허리 뒤로 비스듬히 멘 도를 빼어 든다.
나직한 소성과 함께 맑은 햇빛 아래 차가운 도광(刀光)을 드러낸 사내의 도에는 다시 도집에 꼽기 전에 묻었던 말의 피가 그대로 남아 있어 오싹함을 더해 주었다.
“대체 왜들 이러는 거죠? 왜 제게……. 좋아요! 당신들이 정 원하는 게 이런 것이라면 저 또한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
제멋대로인 사내들의 행동에 화가 났음인지 녹의 소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중의 검을 뽑아 든다.
챙!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진 검은 이내 스스로 명검(名劍)임을 증명하듯 서늘한 기운을 내포한 채 말없이 다가오는 사내를 가리켰다.
하나 정작 그 검 끝을 향해 다가드는 사내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못한다는 듯 그저 미소 띤 얼굴로 다가오며 수중의 도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던 사내는 먼저 달려들며 선제공격을 펼치는 소녀의 검을 보고는 한 줄기 이채를 떠올렸다.
여섯 개의 검화(劍花).
일순 눈앞에 여섯 개의 검화가 피어오른다 싶은 순간 만개한 꽃잎이 흩어지며 스물네 개의 검영(劍影)으로 바뀌고 있다. 만개한 꽃잎이 부드럽게 흩어지며 만들어 낸 스물네 개의 검영은 위협하듯 빠르게 다가오나 그 모습을 지켜본 사내는 이내 실망의 빛을 드러냈다.
“고작 항산의 검이던가?”
말 그대로 고작 항산의 검이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입매만큼이나 힘을 주어 잡은 검을 이용해 펼쳐진 소녀의 검법은 항산파의 검인 산화검법(散華劍法)이었다.
오악검파란 테두리가 없었다면 사라져도 진작에 사라졌을 약소 방파인 항산의 검을 알아본 사내는 실망감과 함께 귀찮은 듯 다가드는 스물네 개의 검영을 베어 갔다.
우르릉!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순간 사내의 도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북성의 절대자로 군림한 한 가문(家門)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 천둥소리에 놀란 소녀의 입에선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새어 나왔다.
그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양강(陽剛)의 기운을 띤 채 다가든 한 줄기 도광이 눈앞에 휘날리는 꽃잎들을 무자비하게 불태운다.
연약한 꽃잎으로 변해 흔들리는 산화검법상의 풍유선화(風流詵花)를 너무도 쉽게 파해하며 들이닥친 오 성의 공력(功力)이 깃든 사내의 도는 이내 소녀의 검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쾅!
“꺄아악!”
미약했다.
사내의 도신 속에 담긴 폭발적인 힘을 받아 내기에는 소녀의 힘은 너무도 미약해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한다.
한 줄기 폭음과 동시에 밀려든 양강의 힘을 받아 내지 못한 녹의 소녀는 결국 비명과 동시에 손에 든 검신을 놓아야만 했다.
팟!
주인의 손을 떠난 검이 이내 빙그르르 허공 위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날아오른다 싶은 순간 다시 떨어져 내린 검은 주저앉은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그대로 대지 아래로 꽂혀 들었다.
푹!
짧은 비명과 함께 꽂혀 든 검이 손목을 움켜쥔 채 아파하는 어린 주인을 바라본다. 십 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 년간 익혀 온 검이 단 일도(一刀)에 무너진 소녀의 마음을 되살리고자 그녀를 바라보나 검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절망적인 눈빛만을 드러냈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하북팽가(河北彭家)의 도를?”
“…….”
믿을 수 없다.
눈앞의 사내가 하북팽가의 도법을 펼쳤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녹의 소녀가 회의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으나 정작 사내는 답이 없다.
말이 없는 사내를 대신해서 그의 뒤에 선 두 거한의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크크, 들었냐? 작은형 보고 왜 하북팽가의 도를 사용하냐고 묻는 거?”
“응, 들었어! 흐으, 아마도 저 계집은 바보인가 봐! 푸하하하, 하북팽가의 사람이 하북팽가의 도법을 쓰는 건 당연한 건데 그런 당연한 걸 묻다니? 크크, 정말 바보 중의 바보인 것 같아!”
“……?”
연신 손가락질하며 배를 움켜잡는다.
그러나 말 없는 사내의 뒤에서 들려오는 두 거한의 철없는 놀림에도 불구하고 녹의 소녀의 머릿속엔 하북팽가의 사람이라는 말만이 남아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떠오른 것이다. 잊고 있던 사부의 말이…….
십 년 만에 집에 돌아가는 그녀에게 하북성에서는 특별히 네 명의 사내를 조심하라고 했었다.
녹의 소녀는 창백하게 변한 안색만큼이나 무기력한 말을 흘려보냈다.
“낙화유수(落花流水)…….”
한 사람이 아니다.
낙화유수란 명칭은 곧 이곳 하북성에선 가장 위험한 존재인 네 사내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스스로를 낙화유수라 부르는 네 사내는 모두 하북팽가의 후손들로 십여 년 후에는 실질적인 하북팽가의 지배자 위치에 오를 인물들이었다.
하북팽가의 소가주인 뇌벽도(雷霹刀) 팽낙천(彭落天)을 중심으로, 그의 이복형이나 본처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가주의 신분을 내주어야만 했던 귀무도(鬼舞刀) 팽요화(彭樂花). 그리고 그들의 사촌 동생인 거령쌍도(巨靈雙刀) 팽유(彭流), 팽수(彭水) 형제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각각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낙화유수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하북성에서 그 명칭이 주는 의미는 바로 망나니였다.
현 정도 무림의 축인 구파일방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맹해진 오대세가(五大世家) 중 한 곳이었던 하북팽가는 이곳 하북성에선 절대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러한 가문의 위세를 믿고 낙화유수란 명칭을 써 가며 네 사내들이 지난 이 년간 이곳 하북성에서 벌인 일들은 도저히 명문 무가의 자제들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패악적인 것들이었다.
처음 그들이 다른 타 문파에 쳐들어가 대련을 한다며 난동을 부린 일들은 그나마 귀엽게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육신이 커 가며 점차 색(色)에 눈을 뜬 네 사내가 그간 해 온 일들은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돈을 내고 기방에 가 여자를 사는 일은 정당하다 할 수 있으나, 언제부턴가 그들은 자신들의 눈에 차는 여인이 있으면 앞뒤 생각 않고 그 여인들을 취해 왔던 것이다.
설사 그 여인이 유부녀였다 하더라도 상관없이 힘으로 눌러 겁탈을 행했으며 반항이 거세지면 살인도 서슴지 않고 행했다. 그리고 그 피해자의 가족들이 항의를 하고자 찾아오면 하북팽가에선 돈으로, 돈으로 안 된다면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도 안 된다면 관리들의 권력을 이용해 철저히 막아 냈다. 하북성 관리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하북팽가의 조치 덕에 결국 네 사내의 악행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러나 하북팽가와 인접한 곳에서 사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낙화유수란 명칭을 쓰는 네 사내가 얼마나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인물들인지를…….
그리고 그 소문은 산서성이란 다른 울타리 속에 산다고는 하나 하북성과의 접경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항산에 뿌리를 둔 항산파의 제자 매화령 역시 접할 수 있었다.
현 항산파의 문주이자 스승인 자송검(慈松劍) 여정신니(麗情神尼)로부터 고향 집을 방문하는 길에 특히 낙화유수란 명칭을 쓰는 네 사내를 조심하라 당부를 들은 것이다.
그러나 고향 집을 무사히 찾아가 정겨움을 나눈 후라 마음을 놓은 상태에서 사문으로 돌아가던 매화령은 스승의 당부를 잊고 있었다.
잊고 있던 당부를 팽유, 팽수의 놀림을 통해 떠올린 매화령이 당황에 찬 눈으로 눈앞의 사내들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 당황은 낄낄대는 사내들의 놀림에 분노가 되어 입 밖으로 터져 나갔다.
“한심한 사람들이로군요! 누구나가 인정하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뛰어난 무공을 배워 고작 한다는 짓이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라니? 당신들이 그러고도 정파의 명문인 하북팽가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나요? 긴 세월 동안 정도(正道)의 길을 걸으며 자신들이 걷는 길에 걸맞는 명성을 쌓아 왔던 하북팽가의 사람으로서의 긍지도 자존심도 없는 거냐구요? 한심한 사람들……. 당신들을 낳고 기뻐하며 정을 쏟아 부으며 기른 부모들이 불쌍하군요!”
“……!”
“……!”
다부진 말이다.
하북팽가란 이름에 주눅이 든 것도 잠시. 당당히 고개를 든 매화령이 네 사내를 노려보며 당찬 호통을 내지른다.
그 호통성에 일순 팽유, 팽수 형제의 안색은 파랗게 질린 채 등 돌리고 선 사촌형 팽요화를 바라보았다.
해서는 안 될 말. 그 말을 지금 매화령이 너무도 간단하게 내뱉은 것이다.
물론 본인은 모르고 한 말이겠으나 그 말을 들은 팽요화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과연 그들의 예측이 맞았음인지 말없이 소녀의 앞에 도를 든 채 서 있던 팽요화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끓어오르는 살기를 더 이상 주체하기 힘든 듯 떨리는 손길로 번쩍 도를 치켜든 팽요화는 두 눈 가득 핏발이 선 채 매화령을 노려보았다.
“닥쳐……. 닥치란 말이다! 네년이, 네년이 대체 무엇을 안다고 그리 지껄이는 것이냐? 나를 낳고 기뻐했다 했느냐? 나를 키우기 위해 정을 쏟았다 했느냐? 크크크……. 하하하! 그들이 나를 낳고 기뻐했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들이 나를 기르며 정을 쏟았을 리 없지 않느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히 그따위 말을 내뱉다니? 죽여 버리겠다! 네년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
“……!”
광포한 말과 더불어 치켜들었던 손이 움직인다.
아무 말도 못하고 선 매화령의 육신을 두 토막 내기 위해 힘껏, 최대한 힘껏 내그어진 사내의 도였다.
팽유와 팽수는 즐겨 보지도 못한 소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나, 팽요화의 이복동생인 팽낙천은 단지 괴로워하는 사내의 모습만을 즐겼다.
파앗!
“……?”
팽요화의 도가 매화령의 육신을 베려는 찰나, 그녀의 육신이 사라진다.
백의 자락이 일순 소녀의 등 뒤에서 허깨비처럼 솟아난다 싶은 순간 그 백의 자락과 더불어 눈앞에서 사라진 소녀의 모습에 팽요화의 도는 빈 허공만을 베어 내야만 했다.
‘대체?’
모든 것이 단 한 호흡 만에 벌어진 일이다.
숨 한 번 들이켜고 내쉴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도는 분명 건방진 소녀의 육신을 베었다. 하지만 정작 피를 흘리며 두 토막이 났어야 할 그녀의 몸이 보이지 않는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사태에 놀란 팽요화가 황급히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다가 이내 새로이 장내에 들어선 한 사내가 비쳐 들었다.
초원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허름한 백의 자락을 휘날리며 선 서생과 그 품에 안기듯 기댄 매화령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