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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원치 않는 길.
그것은 아마 검의 길이며, 또한 그 길은 바로 검의 주인인 화산파의 문도가 돼야 함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화산의 문도가 되길 거부한다면 여인이 말한 대로 큰 화가 미치리라. 화산파에서 자신들의 검을 도적질한 격이 된 유원영을 그대로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검을 익혀 강호에 나온다면 그 검을 알아본 화산파에선 자신들의 검을 되찾기 위해 날 회유하거나 해하려 들 것이다. 설사 그들이 자신들의 검을 알아보지 못하고 날 내버려둔다 해도 그것은…….’
유원영 자신이 허락할 수 없었다.
주인이 없는 것도 아니요, 버젓이 그 주인이 살아 있음을 안다.
또한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음에도 남의 것을 훔쳐서까지 장위와 자신의 마음을 살리고 싶진 않았다. 남들이 보면 너무 올곧은 그의 선택을 바보 같다 비웃을지 모르나, 그것은 곧 그의 자존심이자 지금껏 살아오며 지킨 신념이기도 했다.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유원영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주원하.
그를 두고 여인은 말했다.
책을 펼치든 펼치지 않든 손에 쥔 책을 그에게 돌려주라고.
그리고 만약 책을 펼쳤다면 앞으로 그와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깊은 인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함인지 이제는 안다.
또한 그 인연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유원영은 답을 기다리는 주지약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화산에 들어야만 네 어머니께서 주신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렇군요.”
화산(華山)이다.
그 단어에서 소녀는 사내가 말했던 검을 익히기로 마음먹었으나 검을 익힐 수 없다는 의미를 불현듯 깨닫는다. 그녀의 모친이 전해 준 검이 바로 화산의 검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자세한 속사정을 알 리 없었던 동악사로선 두 남녀만이 통하는 대화에 소외감을 느끼고는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쯧! 대체 뭔 소리들인지…….”
“그것이…….”
“아니, 됐네. 동생은 아무 말 말게! 내 스스로 맞힐 테니.”
“형님…….”
심사가 뒤틀린 듯하다.
설명을 해 주겠단 자신의 말을 거부한 채 아예 등을 돌려 홀로 생각에 잠긴다.
그 모습을 쓴 미소와 더불어 바라보던 유원영은 곧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날카로운 추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화산에 들어야만 꼬마 여우의 모친이 준 무공을 익힐 수 있다? 음……. 가만, 그러고 보니 아우의 허리에 찬 매화검(梅花劍)이 본시 이 꼬마 여우의 모친 것이렷다! 매화검은 화산의 상징이니……. 하하, 이제 알겠군! 이 아이의 모친이 화산파의 문도이고, 그 모친이 동생에게 주었다는 무공 역시 화산의 무공일 테니, 아우가 화산에 들겠다는 말은 곧 이 아이의 모친이 줬다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 화산파의 문도가 되겠단 말이 아닌가?”
“맞습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영의 행동에 동악사는 뭐 이 정도쯤이야란 표정이 되어 자랑스레 가슴을 편다.
스스로의 추리가 뿌듯해 만족에 찬 미소를 짓던 동악사는 곧 화산파란 세 글자가 주는 의미를 떠올리고는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유원영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아우. 굳이 화산파의 문도가 되어서까지 그 무공을 익혀야겠나?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래 봐야 고작 화산의 무공일세.”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고작 화산의 무공이라뇨?”
“엥? 난 아우한테 한 말인데 어찌 꼬마 여우 네가 발끈해서 나를 노려보느냐?”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주지약의 시선에 동악사로선 움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지약의 두 눈에 파란 한광마저 감도는 것이 단단히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허허, 거참……. 내 말이 뭐 틀렸느냐? 화산파라 하면 스스로 가진 힘이 없어 자신들의 세력을 흡수하려는 구파일방의 압력에 대항코자 다른 여타 문파와 힘을 합친 곳이 아니냐? 그 뭐더라……. 그렇지 오악검파(五嶽劍派)! 오악검파란 이름으로 연합해 겨우 그 맥을 근근이 유지해 가는 약소 방파가 바로 화산파 아니더냐? 고작 그런 약소 방파에 나 악선의 의제가 든다는 것이 넌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네 모친이 준 무공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고작 화산의 무공이다. 약소 방파의 무공이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할 것이며, 그런 약한 무공을 내 동생이 배워서 어디다 쓰겠느냐? 차라리 내 다른 강대 문파에 주선을 넣어…….”
“그만하세요! 화산은……. 화산은 약하지 않아요! 악선께 고작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약하지 않단 말이에요!”
“허…….”
분한 듯 조막만 한 손에 가득 힘을 주어 움켜쥐며 소리친다.
얼굴 가득 분기가 차오른 소녀의 표정에서 동악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나 유원영은 주지약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모친이 몸담았던 화산파이다. 또한 그녀의 모친이 어린 시절을 보냈을 화산파를 동악사가 고작이란 표현으로 비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표현은 곧 주지약에게 있어 화산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모친을 비하시키는 말과 같이 느껴졌으리라.
“그만 진정하도록 해라. 형님께선 결코 네 모친께서 나오신 화산파를 욕하고자 함이 아니라 전부 이 못난 아우를 좀 더 좋은 곳으로 보내고픈 마음에 나온 말일 뿐이다. 그러니 너무 형님을 미워 말거라.”
“알아요. 악선께서 결코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유원영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결국 분함을 이기지 못한 주지약이 동악사로부터 몸을 돌린다.
냉랭한 그녀의 태도에 쓴 미소를 그릴 수밖에 없었던 동악사는 영 어색한 장내의 분위기에서 빨리 몸을 빼고픈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이대로 떠나기엔 자꾸 등 돌린 주지약의 몸이 작게만 느껴져 신경이 쓰인다.
본래의 그였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을 일에 찝찝한 기분마저 이니 결국 동악사는 평생 몇 번 해 본 적도 없던 사과를 전해야만 했다.
“꼬마 여우야, 아우의 말대로 결코 네 모친을 욕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오해 말거라. 내가 이리 사과할 테니 말이다.”
‘에휴……. 내 팔자야. 내가 어찌 이리 변했을꼬?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이리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다 하다니……. 쯧쯧! 나도 이제 늙은 게로구나. 자꾸 저 꼬마 여우가 눈에 밟혀 이대로 떠나기가 영 뭐하니.’
여전히 잘못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 주지약이 걸려 결국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전한 동악사는 지금의 어색한 분위기에서 얼른 몸을 빼고자 그녀의 답도 듣지 않은 채 유원영을 향한 작별의 말을 건넸다.
“쯧! 아우 그럼 난 먼저 가 보겠네. 선녀폭을 잊지 말게나. 내 시간이 되면 꼭 그리 갈 테니. 꼬마 여우야, 너도 그곳에서 보자구나!”
말이 끝났다 싶은 순간 대지를 박차 오른다.
“형님!”
“……!”
한차례 혀를 참과 동시에 신법을 펼친 동악사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유원영은 그저 다급한 외침만을 토해 냈다.
한편 주지약 역시 고개를 돌려 동악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점이 되어 초원 위로 사라지고 있다.
단 한마디 작별의 말도 건네지 못한 소녀의 마음속엔 사라지는 동악사에 대한 작은 원망이 일었다.
그러나 동악사에 대한 원망도 잠시…….
원망보다는 함께한 정이 더 깊었던 주지약은 유원영과 더불어 초원 위에 선 채 처음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사라지는 동악사를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八章. 낙화유수(落花流水)


“하아! 하아!”
마상(馬上) 위에 앉은 열일곱 소녀의 입에선 거친 숨결이 쏟아져 나온다. 그 숨결과 호흡을 맞추려는 듯 그녀를 태운 말 역시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미친 듯 초원 위를 질주했다.
녹의 자락을 펄럭이며 힘껏 채찍질하는 여인의 다급한 손길에 그녀를 태운 갈색 말은 심장이 터져라 달릴 수밖에 없었다.
‘빨리! 좀 더 빨리!’
두두두…….
거침없는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가운데, 소녀의 뒤로 네 줄기 긴 암영(暗影)이 그려졌다.
그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는 소녀의 마음은 더욱더 다급해졌다.
파바밧!
칠팔 장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소녀를 쫓는 네 사내의 표정이 제각각이다.
하나같이 허리엔 도(刀)를 찬 그들 가운데 제일 선두에 선 실눈의 사내는 웃고 있는 눈매만큼이나 여유로운 미소를 그리며 말에 탄 소녀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갔다.
그 뒤로는 비대한 체구와 달리 날렵한 몸놀림을 보여 주는 청년이 자리했다. 그러나 흐르는 땀만은 어쩔 수 없었던지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면서 신경질적인 눈빛을 발했다.
‘시팔!’
절로 욕설이 터져 나온다.
비단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을 정도로 많은 땀을 흘리던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초원 위에 알몸인 채로 벌렁 드러눕고 싶을 정도였다. 하나 한 가문의 대공자란 체면이 있어 힘든 내색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솟구쳐 오르는 짜증을 한차례 욕설로 토해 낸 청년이 앞서 가는 사내를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하는 거야, 형! 어서 저년을 잡으라고! 저러다 저년이 도망치고 말겠어!”
“……!”
“……!”
짜증 섞인 그의 말에 맨뒤에서 쿵쿵 울어 대는 지면을 헐떡이며 따르던 두 거한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어 앞선 소녀를 바라본다.
똑같은 얼굴을 한 쌍둥이 형제인 두 거한은 커다란 체구와 달리 아직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열일곱이란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세속의 떼가 가득 묻은 채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음흉한 시야 속에 들턱 아래로 사라지려는 소녀의 모습이 비쳐 든다. 이대로 그녀를 영영 놓칠 것만 같아 다급함이 인 두 거한은 뚱뚱한 청년과 마찬가지로 선두에 선 사내를 바라보며 이구동성(異口同聲)이 되어 외쳤다.
“작은형! 어서 그년을 잡아요!”
“…….”
뒤에서 들려오는 동생들의 외침에 살기가 밀려든다.
마치 하인 부리듯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시키려는 그들의 외침에 흉심을 품은 사내였으나 그런 마음을 가슴 깊이 숨겨 둔 채 달려 나가던 동작 그대로 허리 뒤로 찬 도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차가운 소성과 함께 뽑혀진 도를 있는 힘껏 움켜쥔다.
장작개비마냥 비쩍 마른 팔뚝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아날 만큼 억세게 도를 움켜쥔 사내는 도신을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가로로 눕히며 바짝 허리를 낮췄다.
스윽…….
“…….”
허리를 낮춤과 동시에 도신을 잡은 오른팔을 최대한 뒤로 젖힌다.
부웅!
젖혔다 싶은 순간 힘껏 휘둘려진 사내의 손에서 한 자루 도신이 떠났다.
섬전처럼 내쏘아진 도신은 섬뜩한 음향과 더불어 들턱 아래로 사라지려는 소녀를 향했다.
파바밧!
윙! 윙!
바람 소리를 내며 지면을 스치듯 팽그르르 돌아가는 도신에 의해 연한 풀잎들이 힘없이 허공 위로 날아오른다.
무자비하게 대지를 유린하며 소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쏘아진 한 자루 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녀와의 거리를 좁히며 그녀를 태운 말의 뒷다리를 베어 갔다.
“……!”
팟!
히이잉!
모든 것이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사내의 신기(神技)에 다리가 잘려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 낸 말이 잘려나간 다리를 들턱 위에 남겨 둔 채 그대로 들턱 너머 지면을 향해 고꾸라져 비탈길을 굴렀다.
형편없이 나뒹구는 말에서 튕겨난 소녀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싶은 순간 그대로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치며 들턱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하핫! 잘했어! 역시 형이야! 내 이래서 형을 안 데리고 다닐 수 없다니까! 하하하!”
“하하, 맞아요, 대형! 대형의 말대로 작은형이 무공 실력 하나만은 출중하죠.”
“암, 암, 수아 말대로 작은형의 무공 실력이야 세가 사람들이 다 알아줄 만큼 가장……. 흡!”
들턱 아래에 처박혀 있을 소녀를 상상하며 고소한 눈빛을 발하던 뚱뚱한 청년의 말에 두 거한이 맞장구를 치며 여전히 등 돌린 사내를 칭찬한다.
그러나 쌍둥이 동생의 말을 이어받아 웃음을 흘리던 흑의 거한은 대형이라 불린 싸늘한 청년의 시선에 황급히 말을 멈춰야만 했다.
“가장 뭐?”
“그, 그것이 가장 강한 것은 물론 대형이지만 작은형도 제법 강하다 얘기하려 그랬어요.”
“…….”
통통한 볼살 위로 자리한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시선에 흑의 거한이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죄하듯 숙여진 시선과 더불어 흘러나온 그의 힘없는 말에 뚱뚱한 체구의 청년은 만족한 듯 미소를 그렸다.
“뭐해? 어서 가지 않고? 사냥이 끝났으니 이제 사냥감을 먹으러 가야지?”
“무, 물론 먹으러 가야죠!”
미소 그린 청년의 말에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흑의 거한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든다. 고개를 치켜들어 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쌍둥이 동생이란 놈은 희희낙락 신이 나서 들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욕정(欲情)에 찌든 동생의 모습에, 형 된 입장으로서 질 수 없었던 흑의 거한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힘껏 들턱을 향한 뜀박질을 시작했다.
“…….”
두 거한이 한 소녀를 향해 들뜬 걸음을 옮기는 사이 뚱뚱한 체구의 청년은 여전히 자신에게서 등 돌린 채 목석마냥 풀밭 위로 멈춰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등을 노려보던 청년은 눈빛과는 달리 입가엔 선한 웃음을 띤 채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사내의 어깨를 툭 쳐 보였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셈이야? 형도 어서 가자고. 저 멍청이들이 위아래도 모르고 우리 사냥감을 먼저 먹기 전에.”

* * *

“정말요? 정말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요?”
“그래.”
“말도 안 돼…….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요? 아무리 전진교의 도사들이 만든 선유진경이라 하지만 그 안에 기재된 그 순보(瞬步)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니? 피……. 이제 보니 아저씨가 지금 절 놀리려는 거군요.”
섬서성과 하남성의 접경 지역으로 접어드는 초원 위로 불신에 찬 소녀의 말이 흘러 퍼진다.
맑은 하늘과 닮은 눈빛을 발하며 여전히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선 어린 소녀의 말에 약관도 되지 못한 백의 서생은 억울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아니다. 내가 왜 널 놀리겠느냐? 너 역시 나와 함께 형님께서 주신 선유진경 안의 내용을 보지 않았더냐?”
“물론 보았죠. 그러니까 더욱 믿을 수 없어요.”
“…….”
보았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내용을 보았기에 더욱 믿을 수 없다고 소녀는 말한다.
그녀의 말에 유원영은 그저 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 역시 만약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동악사가 따로 잡기편이라 나눠 놓은 곳에 기재된 순보라는 이름의 선술(仙術)을 사람이 펼칠 수 있다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다.’
가능했다.
선유진경 하권에 기록된 천사신공은 총 다섯 단계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의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얻는 깨우침을 이용해 직접 펼칠 수 있는 선술이 부록처럼 붙어 있었다.
그 선술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동악사는 그것을 따로 잡기편을 만들어 적어 두긴 했으나 그는 그 내용을 적는 내내 ‘헛소리! 사기치고 있네!’란 말을 연발해야 했다.
말 그대로 선술이었기에.
인간이 펼칠 수 없는, 신선들이나 쓰는 술법이었기에 어찌 보면 동악사의 불신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천사신공을 익힐 수 있는 이들도 선골을 타고난 자들로 한정되어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천사신공 자체가 사기일 가능성이 컸다.
그것이 처음부터 동악사가 갖고 있던 선유진경에 대한 생각이었으며, 혹여나 기대를 품고 책의 내용을 직접 보고서 실망한 주지약의 뒤바뀐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원영의 생각만은 달랐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유원영 자신이 직접 일 단계인 도도통천을 익혔고, 그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과 일맥상통하는 순보는 유원영이 보기에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실현 가능하다 생각했기에 동악사와 헤어진 지난 이틀간 그 순보라는 것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너무 쉽게 순보를 익힐 수 있었단 점에서 싱거운 마음마저 들던 유원영이었다.
순보에서 이르는 가장 중요한 요점은 ‘끌어당긴다’였다.
그 표현을 현실에서 직접 행함에 있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반년은 걸릴 것이라 여겼건만 만 하루만인 지난 밤에 그것을 너무도 쉽게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
늦은 시각 잠이 들었던 주지약은 순보를 성공시킨 유원영을 직접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리 불신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심 어린 시선에 유원영은 그저 웃으며 한마디를 내뱉는다.
“날 믿어라.”
“……물론 아저씨는 믿어요.”
믿는다.
미소 띤 사내의 눈에 담긴 진정(眞正) 어린 빛이 아니라 하더라도 유원영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과 머리가 따로 노니, 비록 마음으론 그를 믿어도 머리론 여전히 쉬이 그의 말을 믿지 못한다.
“아저씨는 믿지만 그 순보라는 것은 못 믿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결국 선유진경에서 이야기하는 순보는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축지법(縮地法)이잖아요?”
“맞다. 선유진경에선 순보가 축지법의 기본이 된다 하였다. 비록 지금 내가 펼칠 수 있는 거리는 한계가 있으나 절정에 이르면 그 거리의 한계조차 없어진다 하더구나.”
“펼칠 수 있다구요? 신선도 도사도 아닌 아저씨가요?”
“그래.”
“그럼 보여 줘요. 보여 주면 믿을게요.”
“…….”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 방법을 제시한 주지약의 요청에 유원영 역시 이리 끝없는 대화를 주고받기 보다는 한 번 보여 주는 것이 나을 듯싶어 고개를 끄덕인다.
“잘 보거라.”
“…….”
짤막한 미소와 더불어 앞을 향해 두어 걸음 나아간다.
주지약을 향해 등을 돌린 채 탁 트인 초원을 바라보고 선 유원영은 가만히 자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일깨웠다.
움직인다.
일반적인 내공심법과는 달리 단전이란 그릇 자체가 없어 몸 구석구석 흘러 퍼져 있던 대지의 기운이 그의 부름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몸의 중심이 되는 아랫배를 향해 서서히 몰려든 기운들은 이내 하나가 된다 싶은 순간 둘로 나뉘어져 양 발목 아래에 각기 자리를 잡았다.
“…….”
‘땅은 그저 지켜볼 뿐이다.’
발바닥 부근에 모인 또 하나의 자신을 느끼며 그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대지의 한곳을 집중해 바라본다.
그리 멀지 않은 곳.
불과 일 장도 안 되는 거리의 한 지점을 바라본 유원영은 부동의 의미로써 긴 세월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대지와 시선이 마주침을 느끼고는 한 줄기 미소를 그려 냈다.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
그 속에서 자신의 발에 머문 땅의 기운과 바라보고 있는 대지의 기운이 하나됨을 느낀 것이다.
“……!”
본시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었던 두 기운이 하나되는 순간, 그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다 느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초원 위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그저 고요히 서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등 뒤에서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어린 소녀는 일순 자신의 눈을 비비며 재차 그를 바라봐야만 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등을 돌린 채 선 사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본래의 모습 그대로 서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있던 자리. 그 자리는 분명 열 걸음도 더 뒤였다.
그러나 사내는 그 본래의 자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진 채 어느새 저만치 앞에 나아가 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주지약이 두 눈을 크게 떠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의 시선에 천천히 등을 돌린 사내가 웃으며 입을 연다.
“여기까지다.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거리는 여기까지가 한계란다. 내 몸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나는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아 갈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으나 선유진경에선 절정에 이르면 그 거리가 수십 장으로 늘어나며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끼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 하더구나. 하지만…….”
그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아마도 영생(永生)을 얻어야 하리라.
단지 방랑자에 지나지 않았던 유원영은 대지의 기운을 빌려 쓰는 순보를 펼치는 대가로 몸 안에 머문 또 하나의 자신 중 일부를 다시금 땅에 돌려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선유진경에서 말하는 절정에 오르기 위해선 영원한 생명을 얻어 긴 세월에 걸쳐 또 하나의 나를 무한대(無限大)로 키워야 하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선들처럼 죽지 않고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영생과수(永生果樹)의 과일을 복용치 않는 한 인간인 유원영의 생명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해요! 정말……. 이건!”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놀랍고도 신기했던 어린 소녀가 그 광경에 대한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자, 대신 한달음에 달려가 사내를 향한 기쁨과 부러움의 눈빛을 드러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녀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난 시선에 유원영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주지약을 맞아 주었다.
“그리 신기해하기보다 너도 직접 배워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
배운다.
그 말에 잠시 고뇌가 어린다.
동악사의 말과는 달리 유원영의 머리엔 커다란 뿔도 달리지 않은 보통 사람이건만 그는 선유진경 안의 천사신공을 배우고 그것을 펼친 것이다. 그가 배울 수 있다면 자신 역시 배울 수 있는 것이기에 잠시 고민하던 주지약은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짐짓 차갑게 몸을 돌렸다.
“싫어요.”
“……배워 놓으면 필시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데, 어찌 싫다 그러느냐?”
“그건……. 보기 흉하잖아요!”
“……!”
보기 흉했다.
그동안 유원영이 해 왔던 도도통천의 괴이한 자세는 아직 어린 주지약이 보기에도 민망함 그 자체였다. 그 민망한 자세를 다른 누구도 아닌 유원영 앞에서 쭉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 이리 차갑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유원영은 그저 웃을 뿐이다.
“하하, 걱정마라. 창피함은 잠시뿐이다. 일단 깨우침을 얻으면 그 이후부터는 굳이 그 자세를 유지하지 않아도…….”
“……!”
히이이잉!
순간 웃으며 이야기하던 사내의 머리가 반사적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주지약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는 갑작스레 흘러나온 고통 어린 말울음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
“……!”
자신들이 지나온 길.
저 멀리 보이는 솟은 들턱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유원영과 주지약의 눈 속으로 비쳐 든다.
본시 하나였을 그림자는 허공으로 튕긴 녹의 소녀와 발목이 잘려나가 비탈길을 구르는 갈색 말로 나뉘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두 남녀에게 당황을 안겨 줬다.
비록 먼 거리이긴 했으나 탁 트인 시야 덕에 모든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던 유원영은 곧 허공 위로 튕겼던 소녀가 다시금 땅 위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다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