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2. 넌 나한테 왜 이러는데?


“으으…… 아아아…… 으읏!”
고통인지 희열인지 모를 하이소프라노가 헉헉 몰아쉬는 거센 숨소리와 뒤범벅되어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온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 싫어…… 그만! 으으…… 하윽!”
“자, 한 번만 더. 이번엔 좀 세게!”
“아아, 아으으으…… 윽!”
5층 계단을 올라온 이현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흐윽! 차라리 날 죽여!”
“그래. 차라리 죽어라. 죽어!”
“꺄아악!”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와중에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널찍한 마룻바닥 위에 늘씬한 여자 다섯 명이 뒹굴고 있다. 핫팬츠와 레깅스 아래 쭉 뻗은 다리며, 잘록한 허리와 볼륨감 있는 가슴. 아무렇게나 질끈 동여맨 머리를 하고도 감출 수 없는 미모. 대한민국에서 이들을 모르면 간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걸 그룹 ‘코튼 캔디’의 멤버들이다.
본격적인 연습 시작 전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 때면 몸치인 리드보컬 아영이 때문에 늘 난리굿을 벌이곤 한다. 유연성 없는 아영이를 위에서 누르며 다잡는 건 타고난 춤꾼 은지.
연습실 유리창 너머로 그들을 잠시 지켜보던 이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드르륵.
“오오! 대표님이다!”
“대표니임!”
문을 열고 한 걸음 들어선 이현에게 늘씬한 미녀들이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그가 든 커다란 비닐봉지에. 너무 잘나 그림의 떡인 대표님 얼굴보다 이젠 그 손에 들린 비닐봉지가 더 반갑다.
“까호! 오늘은 아이스크림이다! 고맙습니당!”
“아우, 나 살찌는데. 어떡해.”
“뭘 어떡해! 오늘은 먹고 죽자. 아니, 먹고 빼자!”
“요것들이. 니들이 뺄 데가 어딨니? 꼭 마른 것들이 엄살이야.”
“그러는 언니는? 언니는 뭐, 쪘어?”
“내가 여기서 제일 몸무게 많이 나가는 거 몰라?”
“웃기네. 너 그거 다 슴가 무게잖아. 부러운 베이글녀, 배이주 양. 아이고, ‘배이’야!”
아주 난리가 났다.
없는 게 없다는 D&P의 사옥은 ‘연예 기획사의 구글’로 불린다. 하지만 다이어트에 목매는 걸 그룹 멤버들은 늘 배가 고프다. 그 와중에 종종 간식을 사다 주는 대표님이 그녀들에겐 산타클로스다. 연습에 지친 어린 영혼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주는 소울 푸드, 떡튀순이나 치킨. 찬바람 부는 계절엔 붕어빵이나 호떡. 무더위에 지쳐 있을 땐 아이스크림이나 슬러시. 산타의 비닐봉지 안엔 늘 맛난 것들이 가득하다.
“우와! 내가 좋아하는 거 다 있네. 뭐 먹지? 두 개 먹어도 돼요, 대표님?”
“안 돼. 하나씩만 먹어.”
“이잉. 대표님 너무해요!”
이현의 냉정한 대답에 귀여움을 담당한 막내 주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앙탈을 부린다. 연습생 시절, 이현이 무서워 눈도 못 마주치던 아이가 주리였다. 엄할 땐 서릿발이지만, 자신이 정한 울타리 안에선 마음껏 뛰놀게 해 주는 게 이현의 방식이란 걸 이제는 그녀도 안다.
“그래? 그럼 두 개 먹고 이따가 피트니스 센터로 올래? 오랜만에 기초 체력 보강 운동 좀 하지 뭐.”
“으악! 그것만은 싫어요! 그냥 한 개만 먹고 연습할게요.”
까르르. 별것도 아닌 일에 또 웃음이 터지는 아이들이다.
구내식당의 산해진미보다 이런 주전부리가 더 맛있다는 솜털 보송보송한 아이들. 이현도 속으론 그녀들을 막냇동생처럼 아꼈다. 보이시한 매력의 래퍼 미나는 실제 이현의 고종사촌이다. 처음엔 비밀로 하고 데뷔했지만, 그녀와 코튼 캔디의 실력이 입증된 후로는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 먹고 연습들 해라.”
“넵! 두 배로 열쒸미 하겠슴다!”
“잘 먹겠습니다, 대표님.”
“다음엔 호두과자로 부탁해요, 대표니임.”
수다쟁이들을 뒤로하고 복도로 나온 이현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6층엔 그의 집무실과 널찍한 회의실, 소강당이 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후 밖으로 나가 군것질거리를 사 오는 날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한 층씩 걸어 올라가며 D&P 식구들에게 일일이 간식을 나눠 준다. 오늘도 입구의 경비실을 기점으로 식당, 녹음실, 연습실, 어학실, 휴게실, 피트니스 센터, 도서실, 사무실 할 것 없이 사람이 있는 곳은 다 들른 참이다.
잠시 위를 올려다보며 숨을 고른 이현은 무언가 결심한 듯 계단을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도장이라도 찍듯 신중하게 지르밟으며.
‘온다, 오지 않는다, 온다…….’
겨우 이틀째인데 벌써 초조해진 건가? ‘냉혹한 승부사’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고작 연습생 하나에 이런 허튼짓을 하는 제 꼴이 우습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오지 않는다, 온다, 오지 않는…….’
“대표님! 손님 오셨던데요.”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안길태 매니저가 이현에게 인사하고 다시 바삐 내려갔다.
‘왔다!’
이현은 긴 다리로 한 번에 두세 개씩, 남은 계단을 단숨에 올라갔다. 대표 이사실 문을 벌컥 열자 윤 비서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대표님…… 안에…….”
설명을 들을 새도 없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왔냐?”
“……어, 형.”
그녀가 아니다.
“여긴 웬일로?”
“웬일은. 보고 싶어 왔지. 근데, 누구 올 사람 있어?”
정시열이 소파에 앉아 느물거리며 웃는다. 허탈해진 이현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던지듯 테이블 위에 놓고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왜?”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내 얼굴 보고 실망하는 거 같아서.”
“실망은 무슨. 밥은 먹었어?”
“방금 니네 식당에서 먹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구내식당이 아니라 7성급 호텔 레스토랑이라니깐. 나 스카우트 좀 해 줘라. 여기서 매일 밥 먹게.”
“누가 형 같은 늙은이를? 몸값도 더럽게 비싸면서.”
“여기라면 그냥 숙식만 해결해 줘도 온다니까 그러네. 오늘도 솔직히, 너 보러 온 게 아니라 밥 먹으러 왔다. 바리스타가 만들어 주는 카푸치노 맛도 죽이고! 두 잔이나 먹었어. 괜히 ‘구글’이 아니라니까.”
연신 너스레를 떨며 정시열은 테이블 위의 비닐봉지를 뒤적여 아이스바 하나를 꺼내 아그작 깨물었다. 하는 짓으로 봐선 도저히 서른세 살로 보이지 않는다.
마침 윤 비서가 생과일주스 두 잔을 가지고 들어오자 정시열은 역시 주스도 급이 다르다며 반색한다. 정말이지 먹을 거 너무 좋아하는 형이라니까, 피식 웃으며 이현은 윤 비서에게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아래층은 다 돌렸으니까 윤 비서도 하나 먹고 위층에 쉬는 애들 가져다줘.”
7, 8층은 연습생들 숙소로 쓰고 있는데, 시설이 워낙 좋다 보니 이곳에 입주하길 희망하는 연예인도 꽤 많았다. 인기 그룹 화이트 스톰 멤버들은 작업하기 좋다며 전원이 8층에서 지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비닐봉지를 받은 윤 비서가 생긋 웃으며 나갔다.
“하여튼 자기 식구는 엄청 챙겨요. 넌 밖에서나 냉혈한이지, 새끼한테 벌레 물어다 주는 어미 새가 따로 없다니까. 돈 벌어서 회사 사람들 먹여 살리는 데 다 쓰겠다.”
“배가 불러야 일도 잘하지. 근데 진짜 왜 왔어? 술이라도 한잔할래?”
“먹고 싶긴 한데, 이따가 녹음이 있어서. 술은 다음에 하자. 밥 먹으러 왔다니까 안 믿네, 얘가.”
“내가 형을 몰라? 얼른 용건이나 말해.”
꽤 오래 알고 지낸 두 사람이지만, 이 정도로 친해진 건 최근의 일이다. 정시열이 S대 재학생이란 타이틀로 주목받으며 데뷔했을 때 이현은 이미 한류 스타였다. 데뷔 연차로 따져도 한 살 어린 이현이 대선배였다. 성격도 다르고 음악 색도 완전 달랐던 두 사람이 친해질 만한 접점은 없었다. 그러다 ‘스타 탄생’ 심사위원으로 함께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데뷔 10년 차인 정시열은 말 많고 탈 많은 연예계에서 늘 한결같은 이현에게 부쩍 호감을 느꼈다. 거짓과 위선과 아부가 난무하는 이곳에서 시종일관 차갑고 도도하고 까칠한 녀석. 녀석의 굳은 절개가 마음에 들었다.
“너 인터넷 봤니? 난리 났더라.”
“뭐가?”
“한루비. 너 때문에 떨어졌다고 갑자기 동정표가 쏟아지네. 안티에서 팬으로 돌아선 여자들도 많고.”
“그렇겠지. 실력도 없이 외모 하나로 올라왔다고 주로 여자들이 욕했었잖아. 남자들은 다 형처럼 헬렐레하고.”
“야 인마, 내가 언제? 근데 한루비가 이쁘긴 이쁘잖아. 뭐랄까……. 요즘 흔한 강남 언니 스타일이 아니라 이슬 머금고 피어난 한 떨기 수선화? 발레 전공했다더니, 불면 날아갈 거같이 하늘거리는 게 참…… 제대로 취향저격이다.”
“형 원래 글래머 좋아했잖아. 방송에서 베이글녀가 이상형이라고 만날 떠들더니, 좋아하는 스타일 언제 바뀌었어?”
“바뀌긴 뭘. 다다익선이지. 어쨌든 네놈이 ‘만인의 역적’으로 등극할 만도 하다. 남자들이 아주 그냥 막. 너 때문에 이제 금요일 밤의 낙이 없어졌다고, ‘만인의 연인’ 한루비 돌려 달라고 난리도 아냐. 너 완전 오래 살겠더라. 크하하.”
“그래서. 지금 예언하려고 온 거야? 나 만수무강할 거라고?”
“그래. 알았으면 복채나 두둑이 챙겨 줘. 근데 너, 일부러 그런 거냐?”
“뭘?”
“한루비가 파이널 5인에 들면 안티들이 물고 뜯고 씹고, 당장 이번 주 라이브 무대에서부터 다른 참가자들에게 밀릴 게 빤하니까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걔 이미지에 낫다고 보고 그랬냐고.”
“그건 또 누구 각본이야?”
“아니…… 어떤 연예 블로거가 그렇게 분석해서 올려 둔 거 봤는데, 그게 또 일리가 있는 거 같아서. 니가 진짜 그런 심오한 뜻으로 그랬나, 물어나 보는 거지 뭐.”
“형답다. 그런 음모론을 또 믿으세요?”
“아냐? 아님 말구. ……근데 웃긴 게 니가 한루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너어무 좋아해서, 감춰 두고 혼자 보려고 뒤로 빼돌렸을 거란 어이없는 베댓도 봤다. 그거 ‘좋아요’ 누른 사람이 만 명이 넘어. 푸하하.”
“그런 거 관심 없고요. 심사위원으로서 냉철하게 판단한 거뿐입니다. 질문에 답이 됐습니까?”
“헐. 짜식 재미없긴. 알았다! 나, 간다!”
정시열이 시계를 흘낏 보더니 투덜대며 일어났다.

* * *

여름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목요일 밤 11시. 어둑한 집무실에서 이현 혼자 모니터를 보고 있다. 윤 비서를 비롯한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지만, 이곳의 밤은 늘 열려 있다. 밤샘 작업을 하는 가수와 작곡가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공부하고 연습하는 연습생들.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24시간 후끈하다.
내일 있을 ‘스타 탄생’ 생방송 준비로 지난주 방송을 모니터링하던 이현의 시선이 화면 속 여자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리모컨의 빨리 감기 버튼을 눌러 건너뛰어도 무방한 장면이다. 이제 저 여자는 ‘스타 탄생’에 나오지 않으니까. 내일 현장에서 볼 일 없으니까. 더는 심사할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불필요한 장면일 뿐이다. 시간 낭비일 뿐이다.
경영자로서 냉혹하다는 세간의 평을 듣는 이현은 일과 관련 없는 것은 모두 패스한다. 그렇게 달려온 지난날이 있어 오늘 이 자리에 오른 것이다. 대한민국 연예 사업을 이끄는 수장. 한류의 새 물결을 일으킨 젊은 사업가.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리모컨을 쥔 그의 손가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빨려 들 듯 모니터를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넌…… 나한테, 왜 이러는데?”
자조 섞인 음성으로 화면 속 여자에게 묻는다. 맑고 투명한 음색만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숨 쉬는 것조차 잊을 것 같은, 몰입의 순간.
똑똑.
노크 소리에 이현은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러 모니터를 껐다. 그러곤 창가로 걸어가 비 오는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순간을 침범당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똑. 똑.
아마도 녹음 중이던 가수거나 뭔가 꽉 막힌 작곡가거나 상담할 게 있는 연습생이거나…….
“들어와요.”
달칵.
문이 열리고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저, 계약……할게요.”
귀를 의심하며 서서히 돌아보니 거기, 그녀가 서 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뚫어지게 마주 보던 화면 속 그녀가.
“……너!”
비를 쫄딱 맞은 채, 눈물을 흘리며.
“너,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럼 꼴이 이게 뭐야? 비는 왜 이렇게 다 맞았어?”
손엔 분명 접힌 우산이 들려 있는데 머리부터 옷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우산을 펼치는 걸 잊은 건지, 아니면 고장 나 쓸 수가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계약…… 아직 유효한 거, 맞죠?”
창백한 뺨을 타고 비와 눈물이 뒤엉겨 흘러내리고 있지만, 그녀는 닦을 생각도 않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묻는다.
“지금…… 계약서, 쓸게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처연한 눈망울로 대뜸 계약하겠다는 여자를 보니 이현은 화가 치밀었다.
“대체, 너! 지금 몇 신 줄 알아?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밤에, 여길 온 거야?”
“…….”
“하아,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이현이 화를 내자 루비는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제야 조금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늦은 밤 예고도 없이 불쑥 들이닥쳤으니 화낼 만도 하지…….’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한루비 씨 아니냐며, 대표님이 언제든 올려 보내라고 했다며 반색하던 경비 아저씨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어 얼결에 타고 올라오긴 했지만, 아마도 그의 업무를 방해했나 보다.
“밤늦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
루비가 문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노려보던 이현은 성큼 다가가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잡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가녀린 뼈가 바스러질 듯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
“……!”
그에게 어깨를 잡힌 채, 루비는 가만히 서서 제 발치만 내려다보았다. 똑. 똑. 머리카락과 가방과 옷에서 빗물이 떨어져 신발 아래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가 타는 듯 뜨거웠다.
“일단 그 젖은 옷부터 어떻게…….”
얇은 여름 원피스가 비에 젖어 몸의 굴곡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틀어 올린 머릿밑으로 드러난 여린 목덜미가 첫눈처럼 눈부시다.
꽈악. 이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듯하더니, 화들짝 손을 뗐다. 마치 뜨거운 것에 손을 덴 사람처럼.
“안 되겠다. 따라와.”
이현이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가져다 루비의 어깨에 둘러 주며 말했다. 아까보다 노기는 덜하지만,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하다.
“그냥 갈게요.”
“너 바보야?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마? 그럼 신경 안 쓰이게 행동하던가!”
화를 억누르는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쉰 이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지. 내 영역 안에 속한 건 철저히 관리한다고.”
……맞다. 그랬었지. 계약하러 왔다면서, 또 그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루비는 아랫입술을 잇새로 잘근거렸다.
‘이제 난, 그의 회사에 속한 상품일 뿐인데……. 망가진 상품은 가치가 없으니 신경 쓰는 것뿐인데, 왜 자꾸 바보처럼…….’
“계약이고 뭐고, 목소리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할 거 같으면 때려치워!”
“…….”
“따라와.”
집무실 문을 열고 이현이 앞서 나갔다. 루비는 후, 작게 숨을 내뱉고 그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 밖엔 비서의 책상과 널찍한 소파가 놓인 리셉션 공간이 있고, 그곳에 이현의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바로 열렸다. 엘리베이터 바닥은 젖어 있었다. 방금 루비가 타고 올라온 흔적이다.
“타.”
쭈뼛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탄 루비는 밀폐된 공간에 이현과 단둘이 있는 게 의식되어 자꾸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금방 목적지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