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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자, 이거.”
“……뭐예요?”
“숙취에 좋은 약.”
‘흥! 병 주고 약 주고.’
루비는 이현이 뚜껑을 따 내민 드링크와 알약을 하는 수 없이 받았다. 일단 이 울렁대는 속부터 어찌해야겠기에. 안 그러면 아까처럼 이현이 욕실까지 따라 들어와 등 두드려 주는 참사가 또 발생할지도 모른다.
알약을 꿀꺽 삼키고 드링크를 마시니 속이 좀 가라앉는 것도 같다. 숙제 검사 하는 선생처럼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이현이 빈 드링크 병을 받아 치우고 현관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럼 쉬고 있어.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드디어 가나 했더니, 나갔다 온다고? 어딜 또?
대체 당신이 여긴 왜 온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루비는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아까 약국 다녀오다가 죽 예약해 뒀어.”
“아뇨. 됐으니까 그냥 가세요.”
“그럼.”
이현은 루비의 거절을 귓등으로 흘린 채 마치 제집인 양 현관 앞에 걸어 둔 열쇠까지 집어 들고는 유유히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와중에도 저 늘씬한 다리며, 떡 벌어진 어깨며, 탄탄한 등 근육이 눈에 들어오다니, 참.
“하여튼 보는 눈은 있어서.”
사실 그녀는 대한민국 최고의 몸짱은 거의 다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쭉 뻗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아니, 보기만 했나? 만지고 안기고 뭐, 뭐. 하지만 저런 남자는 또 처음이다.
“무슨 슈트가 저렇게 몸에 착착 휘감겨? 원단이 고급이라 그런가? 이건 뭐 레오타드 입은 것보다 더 섹시하잖아.”
발레를 삶의 이유로 알던 시절 탄탄한 근육질의 발레리노들이 주위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지만, 봐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인체란 무대 위에서 안무를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제아무리 아름다운 몸의 소유자도 남자로 보인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데 저 사람은 왜 다르지?
“다르면 뭐 해. 원순데. 1억! 내 돈 1억!”
어젯밤,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는 분명 루비를 향해 있었다.

‘파이널 스타 5인! 그 마지막 스타는…… 한루비!’

그런데!
놀란 그녀가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때,

‘잠깐!’
‘네? 지금 심사위원 이현 씨가 들고 있는 게 뭐죠? ‘무조건 탈락’ 카드네요. 이게 어찌 된 일인지요. 이현 씨? ‘무조건 탈락’ 카드는 전 대회를 통틀어 심사위원당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절대적인 카드인데요, 그걸 지금 한루비 양에게 내민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시다시피 ‘스타 탄생’은 아마추어를 발굴해서 프로로 키우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특히 파이널 스타 5인은 바로 음반을 내도 손색이 없는 프로급 신인 가수를…….’

어젯밤 무대에서의 일이 떠오르자 루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으아아악! 이, 이, 이, 다 된 밥에 염산 테러 한 놈!”
딸깍.
열쇠 돌리는 소리가 나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죽을 찾아온다던 이현은 뭘 그리 사 왔는지 양손 가득 쇼핑백과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내 욕 하고 있었어? 이제 좀 살 만한가?”
“아니, 뭐…….”
그러고 보니 약발이 받는지 아까보다는 컨디션이 괜찮다. 이현은 들고 온 쇼핑백을 식탁 위에 놓고 주섬주섬 내용물을 꺼냈다.
“먹어.”
“싫어요.”
“먹어. 안 그러면 또 토해.”
“그럼 나중에…….”
“지금!”
하는 수 없이 수저를 들어 그가 사 온 죽을 한술 떴다. 아닌 게 아니라 배가 고팠다. 그와 실랑이할 기운도 열정도 없었다. 사 온 성의를 봐서 몇 술 먹어 주면 제 갈 길 알아서 가겠지.
죽은 막상 입에 넣으니 부드럽고 담백해서 먹을 만했다. 몇 술 뜨니 속이 편해진다. 좀 살 거 같다. 한 그릇 비우고 나니 이제 기운이 솟았다.
“이건 복숭아 통조림인데 이따가 먹어. 그리고 집에 먹을 게 없는 거 같아서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는 거로 장 좀 봤어.”
루비가 죽을 먹는 사이 자기 마음대로 냉장고 안에 장 봐 온 걸 정리하고 있는 저 남자,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저기요…….”
“응?”
“……지금 왜 이러세요?”
“뭘?”
“그러니까 지금. 아니, 아니. 어제부터네요. 저한테 왜 자꾸 이러시냐고요.”
“몰라서 물어?”
“저 지금 그쪽이랑 말장난할 기분 아닙니다. 주소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는지 모르지만.”
“정말 모르나 보네. 기억 안 나? 어젯밤?”
안경 너머로 이현의 서늘한 눈매가 빛났다. 순간, 루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젯밤? 어젯밤에 당신이 내게 한 테러 말고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에이, 설마. 아니겠지.
“이봐. 뭘 생각해?”
“네? 아, 아니 아무 생각 안 했는데요?”
흐음. 그가 낮게 한숨을 쉬더니 팔짱을 끼고 루비를 가만히 건너다본다. 고개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인 채. 그녀의 반응이 몹시 재미있다는 듯이. 그 모습이 루비는 또 거슬렸다.
‘왜? 왜에? 왜 저러고 쳐다본대?’
안 그래도 좁은 방 안에 그와 단둘이 있다는 게 의식되어 죽겠는데, 저 눈빛은 또 뭐야? 신경 쓰이게 자꾸.
“주소는 한루비 씨가 알려 줬잖아. 내비에 입력하라고.”
“내, 내가요? 허!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집까지 고이 모셔다드린 게 누군데.”
“뭐, 뭐라구요?”
“정말 기억이 안 나나 본데? 그렇담 이거 좀 억울하군.”
억울해? 뭐가? 아무러면 코앞의 1억 원을 강탈당한 자신보다 억울할까?
“저기…… 제가 어제는 열을 좀 많이 받아서 과음했습니다. 실수한 게 있더라도 너그러이…….”
“어제 보니 술도 별로 못 마시던데, 앞으론 밖에서 술 먹지 마.”
위압적인 포스에 밀려 하마터면 네, 라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저놈 때문에 마신 술이란 걸.
“아, 저기,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이고요. 아무튼 어제 데려다주신 건 고맙지만, 이렇게 불쑥 남의 집에 들어와서 참견하고 그러시는 건 실례 아닌가요?”
“불쑥……은 아니지.”
그, 그런가?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돌진하는 그녀를 뒤쫓아 와 등을 두드려 주고 약은 물론 죽까지 사 줬으니 그렇긴 하다.
“여러모로 신세 진 건 감사합니다. 어쨌든 앞으로 뵐 일 없을 테니, 이만 돌아가세요.”
“앞으로 볼 일이 왜 없어? 질리게 볼 사인데.”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자. 그럼 우리, 계약해야지.”
이현이 식탁 위에 던져두었던 서류봉투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더니 어안이 벙벙해 있는 루비 앞에 들이밀었다.
“제가 왜…… 그쪽이랑 계약을……?”
“이미 구두 계약은 성립되었지만, 그래도 정식 계약서에 도장은 받아야 할 거 같아서 왔지. 확실한 게 좋잖아.”
“누가요? 누가 계약을 해요? 누가 당신이랑! 누구 맘대로!”
하! 참! 루비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잊었어요? 어젯밤 일? 누구 땜에 내가 1억을, 아니 파이널 5인 자리를 강탈당했는데! 당신 같으면 그런 원수랑 계약하겠어요?”
“어젯밤 일이라면…….”
그가 씩 웃으며 무언가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뭐야 저건. 보이스 레코더?’
“기억나지 않는다니…… 아무래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겠군.”
그의 매끈하고 긴 손가락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 한루비 씨. 그럼 녹음 시작합니다.
― 넵.
― 본인 동의하에 이뤄진 녹음은 법적 효력이 있음을 밝혀 둡니다.
― 아, 네에.
― 한루비 씨는 D&P 엔터테인먼트와의 3년간 전속 계약을 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 네. 하죠, 뭐. 흠.
― 계약 조건은 충분히 인지하셨습니까?
― 네. 뭐…… 대충.
― 그럼 이 시각을 기점으로 D&P 엔터테인먼트와 한루비 씨의 전속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 아! 아까 계약금이 얼마라 했죠?
― 1억 원.
― 맞다! 1억! 니가 뺏어 간 내 1어…….

녹음기 속 여자의 혀가 본격적으로 꼬여 가는 부분에서 이현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 제법 멀쩡하더니 왜 갑자기……? 아마도 ‘1억’에서 열받아 취기가 확 올랐나 보다.
“더 듣고 싶나?”
“……아뇨.”
솔직히 뒤가 궁금했지만, 얼마나 추태를 부렸을지 확인 사살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재수 없는 남자 앞에서.
근데, 술 취한 사람과의 구두 계약이 법적 효력이 있긴 한가?
“저기, 어제 제가 술에 취해서 큰 실수를 한 거 같은데…….”
“실수한 거 없어.”
“아니, 그러니까 제가 실수로 그 계약…….”
“계약금은 입금됐어.”
“네? 계약금이라뇨?”
“당장 1억 내놓으라며. 지금 통장 확인해 봐. 1억 찍혀 있는지.”
“아니, 장난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1억 원이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하지만 마치 자기 집 개 이름인 양,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지금 코앞에 앉아 있다니……! 이거야말로 판타지다.
루비는 이현의 얼굴을, 그 무진장 잘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무 빤히 보았나? 그의 미간이 차츰 좁혀진다. 진하고 단정한 눈썹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묘하게 자극적이다. 저도 몰래 꿀꺽 침을 삼켰다.
“못 믿겠어? 더 들어 볼래?”
그녀의 노골적인 시선이 불쾌했는지 그가 보이스 레코더로 다시 손을 뻗었다.
“아뇨, 아뇨, 아뇨.”
얼마나 급했던지 버튼을 누르려는 그의 손을 덥석 잡고야 말았다. 순간 뭉클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
“네?”
“놔!”
“아 네. 죄송…….”
놈의 손은 따스했다.
“흠……. 쿨럭.”
그놈의 술, 먹지도 못하는 걸 왜 그리 먹어서는. 화를 내야 하는 건 눈 뜨고 1억 강탈당한 이쪽인데, 놈한테 되려 약점까지 잡히다니! 아니, 그보다 실력 없다고 떨어뜨린 게 누군데! 인제 와서 자기네 회사로 오라고? 그게 말이 돼?
“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안경 너머 깊은 눈망울이 말을 한다. 뭐?
“제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뜨린 거 아닌가요?”
“맞아.”
“그런데 왜 저랑 계약하자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요.”
“마음에 드니까.”
뭐, 뭐야, 이 남자?
뜻하지 않은 이현의 고백에 루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숱하게 많은 남자의 고백을 질리게 들어 왔던 그녀지만, 이렇게 다이렉트로 심쿵한 건 처음이다.
“니 음색.”
“네? 으, 음색이요?”
“어. 기본기도 없고 성량도 약하고 발성도 별론데 딱 하나, 음색은 진짜 맘에 들어.”
그럼 그렇지. 1억 원쯤이야 자기 집 강아지 일주일 미용비로도 너끈히 쓸 수 있는 남자가, 유하라처럼 능력 있고 예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남자가, 순정만화를 찢고 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나를…….
‘아! 나 바본가 봐. 이게 다 술 때문이지. 휴, 정신 차리자.’
어쨌든 꼬인 매듭은 풀어야 했다.
“죄송하지만 저, 가수 할 생각 없습니다. 그럴 재주도, 끼도 없고요.”
“가수 할 생각이 없어? ……근데 왜 오디션에 나왔어?”
‘돈이 필요했어요.’
1억 원만 있으면…… 제대 후 복학할 동생 진수의 등록금을 내고, 학교 앞에 작은 원룸이라도 구해 줄 수 있다. 친구 자취방에 얹혀 지내겠다고 고집부리지만, 남의 신세 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남들처럼 즐기며 대학 생활은 못 하더라도 눈칫밥 먹게 하긴 싫었다.
남은 돈은 아픈 엄마를 돌봐 주는 이모에게 모두 보내고 싶었다. 누군가에겐 벽장의 곶감 빼 주듯 클릭 한 번으로 이체 가능한 쌈짓돈이, 다른 이에겐 가족을 살릴 생명줄이 되기도 한다.
“그냥…… 충동적으로, 상금이 탐나서…….”
“1억, 1억 하더니. 역시 돈이었군.”
총상금 10억 원을 떠들어 대던 오디션 광고가 연일 매스컴을 도배할 때도 그저 남의 일이거니 무심했었는데, 어느 순간 눈이 멀었나 보다. ‘혹시 알아? 하늘에서 불쌍한 오누이에게 금 동아줄을 내려 줄지?’ 그렇게 잠시 흔들렸던 마음이 지금에 와선 부끄러웠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거 없어. 가수가 되려고 피땀 흘려 노력해 온 다른 참가자들에게 미안해해야지. 넌 누군가의 꿈을 뺏으려 한 거니까.”
꿈. 꿈이라……. 그 말에 잃어버린 꿈이 떠올라 루비는 눈물이 핑 돌았다.
“계약금…… 돌려 드릴게요. 없던 일로 해 주세요.”
“계약금을 돌려줘? 계약을 해지하려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건 상식 아닌가?”
“위약금이요? 어, 얼마나요?”
“두 배.”
검지와 중지를 활짝 펴 V를 만들어 보이며 이현이 씩 웃었다. 그의 사악한 미소는 소름 돋게 아름다웠다.
“저 보시다시피 돈 없어요. 계약금만 받으시고 계약 해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난 내 손에 들어온 건 쉽게 놔주지 않아. 특히 맘에 쏙 드는 거라면 절대로.”
왜 내가 당신 마음에 쏙 드는 건데? 실력 없다고 떨어뜨릴 땐 언제고! 부들부들 루비의 손이 떨렸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나 때문이란 건가?”
모르겠다. 손에 쥐어진 거랑 다를 바 없는 상금을 강탈해 간 저놈 잘못인지, 가수를 할 생각도 없으면서 오디션 프로에 덜컥 나간 내 잘못인지. 꼬이고 꼬인 매듭을 풀지 못해 끙끙대는 아이처럼 한숨만 푹푹 쉬었다.
“저……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나?”
“아, 글쎄요. 넉넉하게 좀…….”
“그럼 일주일 줄 테니 그 안에 사무실로 와.”
이현이 명함을 꺼내 식탁 위에 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천장이 원래 낮았던 건지, 이현의 키가 지나치게 큰 건지 구분이 안 된다.
“아까 사 놓은 거 잊지 말고 챙겨 먹어. 속 안 좋으면 남은 약, 마저 먹고.”
“저, 이런 친절……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친절?”
하하. 그가 어울리지 않게 큰 소리로 웃더니 양손을 쫙 펴 식탁을 짚고 상체를 바짝 기울여 반대편 의자에 앉아 있는 루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루비는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몸을 뺐지만, 어차피 뒤는 벽이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했나 본데, 난 친절 따윈 모르는 사람이거든?”
부드럽게 속삭이는 음성이 마치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건 친절이 아니라 관리. 그리고 투자. ……이해됐어? 내 바운더리 안에 들어온 건 원래 철저히 관리하지.”
“…….”
“그리고 잊지 마.”
식탁 위의 보이스 레코더를 집어 들더니 루비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여기에 아직 열지 않은 게 남아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