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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사장과 통화 이후 불안한 표정으로 시간을 보내던 혜림은, 소원의 대가를 받아 간다는 다이어리의 글귀가 신경 쓰였다.
‘대가가 뭘까?’
혜림은 자신이 가진 물건 중에 고가이거나 아끼는 물건들을 떠올렸다. 근데 생각해 보니 대가로 물건을 받아 간다는 이야긴 하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럼 물건이 아닌 다른 것을 받아 갈 수도 있다는 걸까.
‘아, 대체 뭐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찾을 수 없는 정답을 고민하고 있던 그녀의 눈에 책꽂이 속의 다이어리가 들어왔다.
‘대답도 하는 모양이던데, 물어나 볼까?’
혜림은 아까 작성할 때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이어리를 꺼냈다. 처음 다이어리를 발견해서 집으로 가져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고급스러운 붉은 표지가 썩 마음에 들었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을 겪고 난 지금은 이 붉은 표지가 마치 피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오싹했다.
다이어리를 펼친 혜림은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지막 글귀 아래에서 시선이 멈췄다. 소원의 대가로 가져가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귀신 들린 다이어리라는 생각에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공포를 이긴 호기심은 그녀의 손을 서랍으로 향하게 했고, 펜을 꺼냄과 동시에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박자 삼아 천천히 글자를 적어 나갔다.

「질문도 받나요?」

볼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다이어리를 주시하던 혜림은 자신의 글자 아래에 뜨는 글귀를 보며 흡 하고 숨을 참았다.

「무엇입니까?」

혹시나 하고 예상한 일이었다. 때문에 아까처럼 격하게 놀라진 않은 혜림은 다이어리의 글귀 아래에 다시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소원의 대가가 무엇인가요?」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글귀가 나타났다.

「알고 싶으신가요?」

‘당연하지.’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문 혜림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 나갔다.

「네. 알고 싶어요.」
「알더라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아! 알았다고.’

「알겠으니 가르쳐 주세요.」
「소원에 대한 대가는…….」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긴장에 침만 연신 꿀꺽 삼켜 대던 혜림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슬며시 실눈을 뜬 그녀는 아래에 나타난 글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충격적인 것을 본 듯 혜림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변했다.

「당신의 순결입니다.」

‘뭐? 순결?’
손이 부들부들 떨려 온다. 변태 같은 사장을 응징하기 위해 쓴 소원의 대가가 순결이라니, 이게 무슨 심각한 장난이란 말인가.

「다른 대가로 바꿀 순 없나요?」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으니 대가도 원하는 것을 받아야지요.」

글귀의 의미가 이해된다. 네가 원하는 것을 주었으니 너도 내가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제 대가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어떻게 받을 것인지가 남았다. 혜림은 경건한 자세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갔다.

「어떻게 받아 갈 건가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 왜!’
다이어리가 대답을 피했다.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글귀를 읽은 혜림은 크게 한숨을 쉬며 다이어리를 덮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대가를 알았으니 조금만 조심하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급한 불부터…….’
혜림은 다이어리를 책장에 꽂았다. 그러곤 바로 옆에 있는 전공 서적을 꺼내어 앞에 펼쳤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심란한 마음으로 교재를 들여다보는 눈동자엔 힘이 없었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벌어졌다는 놀라움을 만끽하기도 전에, 지극히 현실적인 달력에는 기말시험을 표기해 둔 날짜가 파란색으로 굵게 칠해져 있었다.

*

그사이 특별하게 위험하다거나 신기하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장의 교통사고 소식을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들은 것만 빼면 기말시험인 오늘까지 큰 문제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물론 그사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자꾸 드는 불안함에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게 수십 번이었다. 행여 동네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과 충격받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선뜻 신고하기가 망설여졌다.
아주 예전에 성폭행 피해자 중 실제로 신고를 하는 사람의 비율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땐 신고 안 하는 사람이 바보인 거라며 속으로 비웃었는데, 직접 당하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폭행 피해자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너무도 싸늘했다. 남이 아닌 내가 받을 시선. 또 나의 부모님도 함께 겪어야 할 고통이기에 혜림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현실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 불편한 불안과 고민 속에서 혜림은 지금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솔직히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전공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한 탓에 교양과목은 자신이 없었다.
‘교양 진짜, 내가 철학을 왜 이해해야 하는 거야!’
혜림은 교양과목으로 ‘철학의 이해’를 선택한 지난날의 자신을 향해 욕지거리를 해 댔다. 이건 상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답안지를 채워 나갔고, 퇴실할 수 있는 시간만을 기다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지금부터 답안지 제출하시고 퇴실하시면 됩니다.”
감독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혜림은 빛의 속도로 가방을 챙겼다. 일등으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을 빠져나온 그녀는 시험이 끝났다는 생각에 기지개를 쭉 켜자 긴장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혜림은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건물 밖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혜림은 눈앞에 보이는 자판기를 향해 움직였다. 주위엔 시험을 다 치른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중이었고, 진한 초록의 캠퍼스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커플들로 가득했다.
“집에 일찍 가 봐야 할 것도 없는데…….”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은 혜림은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신 듯 손을 이마에 대어 그늘을 만들었다. 따뜻한 커피와 반짝이는 볕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한적한 야외 벤치에 앉아 농구 경기를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나른한 오후를 즐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벤치에 앉아 멍하게 한곳을 응시하고 있던 혜림은 저 멀리 농구장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남자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모르는 사람인데?’
멍했던 정신이 아직 덜 돌아온 모양인지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다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의 행동에 이상한 사람이라며 무시하려는 그 순간, 멀리서 그녀가 앉아 있는 벤치의 방향으로 날아오는 갈색 물체가 혜림의 눈에 띄었다.
‘어? 어! 고…… 공?’
순간적으로 당황한 혜림은 점점 가까워지는 공을 보며 온몸이 굳었다. 팔을 뻗어서 잡든지 아니면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떠올랐지만 이게 생각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부딪친다!’
혜림은 곧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머리를 감싸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저 공에 맞으면 많이 아플 텐데’라고 생각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몇 초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픈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뭐지?’
혜림은 엎드렸던 몸을 천천히 세웠다. 눈을 조심스레 떠 보니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손에는 갈색 농구공이 들려 있었다.
“괜찮습니까?”
‘어?’
저음의 남자다운 목소리, 공을 들고 있는 저 손과 얼굴을 혜림은 본 적 있었다. 그가 만들어 놓은 그늘에 앉아 얼굴을 든 그녀는 해를 등지고 있는 그의 뒤로 따스한 햇볕이 퍼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혜림의 시선은 다시 그를 향했고, 편의점 창고 앞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순간에 느꼈던 감동과 지금의 강인함이 한데 섞여 반가움에 심장이 뛰었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하다. 이 남자는 처음 보았던 그때도 이런 눈빛으로 혜림을 쳐다보았었다.
“아…… 괜찮습니다.”
혜림의 대답에 안도한 남자는 들고 있던 공을 힘껏 던졌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이 마치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또렷한 움직임이었다.
“위험할 뻔했네요.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고개를 까딱거리며 혜림을 향해 인사한 그가 가던 길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그의 다리가 살짝 움직이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혜림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의 눈이 의문을 품었고, 혜림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 갔다.
“할 말 있습니까?”
혜림은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소매가 흐트러진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다정한 목소리가 심장 속으로 울려 퍼진다. 이전에 그가 내밀어 주었던 다정한 손길이 혜림의 머릿속을 스치자, 이전과 현재의 고마움이 겹쳐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떨리는 가슴을 참아 내며 혜림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남자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반문하는 것을 보니, 그는 편의점 창고 앞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혜림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 본 건가 봐요.”
“그렇군요. 그럼.”
혜림은 바쁜 걸음으로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고 이것이 두 번째 만남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를 앞에 두고 혼자만 반가워한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워진 그녀는, 시야에서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떨리던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

종강 후, 혜림은 농구공 사건 이후로 더 이상 그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학이 시작됐음에도 강의실, 동아리방 등등을 전전하며 학교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지만 남자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관계자가 아니었나?’
그 시간에 정장을 입고 대학교에 있는 사람은 관계자일 확률이 높다. 물론 일반인도 캠퍼스에 들어올 순 있지만, 보통은 편안한 사복을 입고 오지 정장을 입고 오진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혜림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어딜 가면 만날 수 있는 거지?’
그 남자를 찾아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게 아니다. 그저 고마운 마음과 묘한 호기심이 섞여서 한 번만 더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혜림은 괜히 우울해지는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손에 들린 성적표를 착착 접어 주머니에 넣은 그녀는 완전히 망친 저번 학기의 보강을 위해 신청해 둔 계절학기 일정을 확인하러 학과 사무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쾅.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혜림은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복도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문소리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방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소음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깜짝이야.’
별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소심해졌는지……. 아마도 편의점에서 사장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난 후에 생긴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복도 끝,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던 시선을 아무 생각 없이 거둔 혜림은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동작을 멈췄다. 방에서 나온 사람의 실루엣이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설마…….’
혜림은 굳은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복도 끝을 주시했다. 곧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그녀의 발길이 복도 끝으로 향했다.
타박타박.
걸음걸이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그사이 남자는 복도 끝에 다다랐다.
“저기요!”
휑한 복도에 혜림의 목소리가 울린다. 안 들릴 리가 없을 텐데 남자는 못 들은 것처럼 순식간에 모퉁이를 돌아 혜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탁탁탁탁.
혜림의 발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그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걷는 것도, 달리는 것도 아닌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덧 복도 끝에 다다른 혜림은 그가 지나간 모퉁이에 이르러서야 걸음 속도를 늦췄다. 그녀의 시야에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문이 슬로비디오처럼 들어왔다. 한쪽에는 커다란 화분 안의 파키라 나무가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었고, 다시 그 옆에는 커피 자판기를 바라보며 서 있는 그 남자가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혜림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불쑥 나타난 그녀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자판기는 쪼록거리며 뜨거운 물을 종이컵에 부어 내고 있었고, 커피의 더운 열기와 햇살의 따뜻함이 어우러져 혜림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우리 또 만나는군요.”
남자가 말했다. 살짝 거친 호흡을 정리한 혜림은 자판기를 향해 손을 뻗는 그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네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계세요?”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이유는 그렇게 찾아다니던 그를 드디어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림은 뜀박질 때문이라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여기가 직장이니까요.”
남자의 말에 혜림의 표정이 어둡다. 직장이라니, 학생은 아니란 소리다.
“직장이요?”
혜림이 반문하자 남자의 미소가 점점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