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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사장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안에 입은 속옷까지 완전히 벗어 내리자 단단하게 부푼 기둥 하나가 투명한 액체를 잔뜩 묻힌 채 허공을 향해 솟아 있었다.
혜림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없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여…… 연기! 그래, 연기를 하자.’
가슴을 주무르던 사장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왔다. 혜림은 바지를 벗기려는 듯 자신의 골반을 파고드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사, 사장님. 제가 벗을게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벗는다고?”
“네.”
혜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장을 향해 최대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저 부끄러우니까 눈 감고 뒤돌아서 있어 주면 안 돼요?”
꿀꺽.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섰다. 들키진 않았을까 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예리한 놈!’
속에서 올라오는 두려움을 꾹꾹 누르며 혜림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거절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보지 말아 줘요.”
이런 식의 연기라니, 최악이다. 사장은 부끄럽다는 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거봐. 역시 나를 좋아하는 거였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 사장은 선반 쪽으로 몸을 돌린 후 눈을 감았다.
“눈 감고 있는 거죠?”
들뜬 척 어조를 높여 말한 혜림은 조심조심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고 있는 사장이 갑자기 고개를 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만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두근두근.
불안함이 심장을 터트릴 것 같다. 그녀의 집중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됐어! 조금만 더 가면…….’
부스럭.
그 순간, 바닥에 떨어진 비닐을 밟은 혜림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사장을 쳐다보았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사장과 정통으로 마주친 그녀는 있는 힘껏 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이년이!”
도주를 눈치챈 사장은 분노에 얼굴을 구겼다. 바지를 추켜올리며 자신을 향해 쫓아오는 그를 발견한 혜림은 비명을 지르며 더욱 힘껏 달렸다.
“으아아!”
창고 문 앞에 도착한 혜림은 손잡이를 힘껏 돌려 문을 열었다. 갑자기 밝아지는 시야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왔고, 뒤를 따라 달려 나온 사장이 씩씩거리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편의점 안에 있는 손님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흠흠.”
날카로운 눈으로 혜림을 주시하며 헛기침을 하던 사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혜림은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붙잡았다. 긴장이 풀리며 다리에 힘이 빠지자 저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습니까?”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남자 손님 한 명이 캔 커피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괜찮습…….”
일단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 혜림을 보며 깜짝 놀란 남자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하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단정하게 정돈된 손톱. 하얗고 다부진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혜림은 손등으로 눈물을 쓱 하고 훔쳤다. 자신에게 내어 준 손이 민망하지 않도록 고마운 마음으로 손을 잡았다.
호감이 가는 외모에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인 남자지만, 지금은 그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다. 혜림은 자신을 힘껏 일으켜 세워 준 그의 힘이 단단해서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십시오.”
자신을 향해 조심스레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고마웠다. 혜림은 그를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곧바로 계산대를 향해 움직였고, 앞치마를 벗어 던질 생각도 없이 자신의 가방만 들고 빠르게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계산을 기다리던 손님들의 불만이 들려왔지만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무시한 채 택시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그런 혜림의 행동을 주시하던 남자는 창고와 택시가 간 방향을 번갈아 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은 적막이 넘쳐흘렀다. 처음엔 우스갯소리를 던져 대던 택시 기사도 대충대충 대꾸하는 혜림의 어두운 분위기를 눈치채곤 입을 꾹 다물었고, 창밖만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그녀를 위해 라디오도 꺼 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애초에 거기서 일하는 게 아니었어!’
혜림은 터져 나오는 분노와 울분에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기엔 완벽한 범죄였다. 때문에 반드시 고소해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도로를 신나게 달리던 택시가 한적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혜림은 눈에 비치는 풍경이 집 근처라는 사실을 깨닫곤 지갑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뒤적뒤적하며 가방 바닥에 깔린 지갑을 꺼내려던 그녀는 시야를 확 끌어당기는 붉은색 다이어리가 손등에 톡 하고 닿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소원을 들어주는 다이어리라……. 변태 사장 콩밥 좀 먹여 달라고 하면 이루어지려나?’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다이어리를 주시하던 혜림은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살짝 웃으며 도리질을 쳤다.
‘말도 안 돼. 이건 누가 장난쳐 놓은 평범한 다이어리라고.’
실소를 흘리며 다이어리에서 시선을 거둔 그녀는 원래 목적이었던 지갑을 가방에서 꺼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목적지에 멈춰 섰고, 차에서 내린 혜림의 시선은 가방 안에 있는 붉은색 다이어리로 다시 향했다.
‘한번 써 볼까?’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며 생각에 잠긴 혜림은 어젯밤 읽었던 다이어리 속 글귀들을 떠올렸다.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가득했던 다이어리가 진짜로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준다면 오늘 겪었던 일에 대한 처벌을 시원하게 할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속도를 조금 더 재촉했다.

평소보다 집에 빨리 돌아온 혜림을 발견한 엄마가 놀란 눈을 하고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많이 진정되긴 했지만 예리한 부모의 감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꼬치꼬치 캐묻는 엄마에게 몸이 안 좋아서 조퇴했다는 핑계를 대며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왔다.
혜림은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잊고 싶은데 자꾸만 떠오르는 변태 사장의 아랫도리 감촉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치…… 침착하자. 일단 신고부터 하는 거야.’
처음 겪는 일이었다. 뉴스에서 보던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혜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니, 일단 엄마한테 말해? 편의점 사장이 몸을 만져서 도망쳐 나왔다고?’
사랑하는 아이가 성추행을 당했다는데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불안한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아니야. 일단 아무 생각 말고 신고부터 하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든 혜림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문득 창고 밖을 뛰쳐나왔을 때 보았던 남자가 떠올랐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잔상 속에서 그가 뻗었던 다부진 손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도 안 했네.’
그때 그 남자가 자리에 없었더라면 혜림은 변태 사장에게 머리를 붙잡힌 채 창고로 끌려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뻗치자 울컥하고 올라오는 분노와 수치심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악!”
짜증과 분노가 한데 어우러져 폭발적인 비명을 만들어 내자 거실에 있던 엄마가 깜짝 놀라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얘, 무슨 일 있니?”
방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혜림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야?”
“네.”
“알았다…….”
걱정과 의심을 담은 말투로 혜림을 향해 말한 엄마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다시 거실로 향했다. 방문 밖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다이어리!’
순간 혜림은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에 가방 속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첫 장에는 여전히 사용 설명서가 있었고 어제 읽었던 주의 사항을 떠올리며 서랍에서 검은색 볼펜을 꺼내 손에 들었다. 내지 한 장을 팔락 넘겨 보니 적당한 간격의 실선이 열줄 정도 그어져 있었다. 다이어리를 살짝 구부려서 엄지손가락으로 나머지 내지들도 확인해 보니 사용 설명서를 제외한 나머지 내지들은 다 똑같은 스타일이었다.
‘변태 사장이 천벌받게 해 주세요, 라고 쓸까?’
볼펜 뒤꽁무니를 입에 문 채 생각에 빠진 혜림은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는 다이어리의 주의 사항을 떠올리곤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어느 수준으로 구체적이어야 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자 일단 아무렇게나 써 보기로 했다.

「내가 일하던 편의점의 사장이 천벌받게 해 주세요.」

멋들어진 필체로 다이어리에 소원을 쓴 혜림은 혹시나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숨을 죽인 채 움직임을 멈췄다.
째깍째깍.
벽시계의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방 안에는 민망한 정적만 흘렀다.
“뭐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내심 기대한 모양이었는지 혜림의 얼굴에는 실망이 피어올랐다. 민망함에 피식하고 웃은 그녀는 들고 있던 볼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낯 뜨거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이어리를 덮으려는데, 그 순간.

「어떤 종류의 벌을 내릴까요?」

혜림이 소원을 쓴 줄 아래에 물에 번지듯 글자가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일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들고 있던 다이어리를 벽으로 집어 던지며 입을 틀어막았다.
‘헉!’
쿵쾅쿵쾅.
속으로 비명을 삼킨 혜림의 심장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보고선 너무 놀라 미친 듯이 뛰었다.
‘뭐야? 뭐야!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자제가 안 되는 심장 떨림에 한 손을 가슴께로 가져간 혜림은 바닥에 떨어진 다이어리를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꾹.
혜림은 손가락으로 다이어리를 찔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다이어리를 펼치는 것까지 성공한 그녀는 참고 있던 숨을 조심스레 뱉어 냈다.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자신의 필체 아래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글자를 발견한 혜림은 손등으로 두 눈을 비볐다.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는 글자들을 보며 혜림은 자신이 주워 온 이 다이어리가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일단 써 보자.’
긴장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정신도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다시 쥔 그녀는 나타난 글자의 바로 아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로 3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해 주세요.」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긴장을 유지한 채 다이어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혜림은 자신의 글 아래에 천천히 나타나는 글자들을 보며 놀라움에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읽어 나갔다.

「당신의 욕망이 접수되었습니다.」

접수되었다는 글자를 천천히 곱씹어 보던 혜림은 주의 사항에 있던 대가가 떠올랐다.
‘근데 진짜 이뤄지는 거 아니야? 이거 오싹하잖아.’
갑자기 드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떤 혜림은 다이어리를 덮으며 고민에 빠졌다. 충동적으로 쓰긴 했는데, 귀신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악마에 씐 것 같기도 한 이 물건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이상한 기분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톱만 잘근잘근 씹어 대고 있는데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편의점 변태 사장이었다.
“여보세요.”
― 혜림 씨 집이야?
“왜요?”
― 아까 내가 너무 무섭게 대한 것 같아서 사과하려고.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말투로 말하는 사장을 향해 혜림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내일 경찰서 가서 고소하면 되니까요.”
― 뭐? 고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사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당신이 한 짓은 범죄예요. 성추행이라고요.”
혜림의 목소리가 울컥함에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속에 있는 말들을 다 하고 싶었지만 곧 경찰서에서 만날 테니 그때 그의 면상 앞에서 시원하게 쏟아 내리라 다짐하며 간신히 가라앉혔다.
“아무튼 저는 할 말 없으니까 끊을게요.”
― 혜림 씨! 잠시만 혜림…… 어? 어? 으악!
순간 다급하게 느껴지는 사장의 목소리 뒤로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가 겹쳤다.
끼이익.
혜림의 등 뒤로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설마…… 이거 설마?’
콰앙.
통화가 끊겼다.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진짜 교통사고 난 거야?’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일어나 있지도 못할 만큼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진정시킨 그녀는 조심스레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뭐야! 진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로 연결되지 않는 전화를 바라보던 혜림은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진정된 마음으로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리고 그녀는 다이어리에 적힌 새로운 글자를 확인한 후 충격과 기쁨이 공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본 것은 바로

「2개의 소원이 남았습니다. 욕망 다이어리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다이어리의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