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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세 시간 전.
유리를 태운 차가 갤러리의 주차장에 들어섰다. 국내 풍경화 화가 빅 4 중 한 명인 김윤경 화백과의 미팅에서 좋은 성과를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김 화백은 전시회에 작품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계약서를 토대로 그림을 받아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다음 달에 있을 <한국 경(暻)> 기획전 준비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이곳으로 직장을 옮겨 온 직후부터 석 달을 매달린 이벤트였다. 전시회를 기획하고 주제를 정하고 화가를 선정하는 작업이 처음도 아닐진대, 유리는 무척 지쳐 있었다.
주차장에서 나와 노란 튤립과 붉은 동백, 그리고 보라색의 철쭉 화단 사이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난 길을 걸었다. 갤러리의 앞마당을 색색들이 수놓은 봄꽃이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환하다. 그중 최고의 절경은 샛길에 심긴 모란나무였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코끝으로 몰려드는 향기 때문에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 갤러리로 이직한 지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간이었다. 이런 장관을 봄마다 볼 수 있다면 박봉이라 해도 견딜 수 있으리라.
유리는 허리를 숙여 철쭉 화단을 내려다봤다. 진보라색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하얀 철쭉꽃이 수줍다. 어디선가 날아온 벌 한 마리가 꽃술에 내려앉아 주변을 염탐했다. 그러곤 작업을 걸 듯 꽃잎에 얼굴을 비벼댄다.
유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세웠다. 모처럼의 여유였다. 기획전 준비와 어머니의 일로 몇 달간 바빠 제대로 봄기운을 느껴 보지도 못했다. 여전히 생각의 한편에는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염려가 놓여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고 싶었다.
“안 팀장.”
숨을 담뿍 들이마시며 향기에 취해 있는데 뒤에서 무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선 유리의 시야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선 그가 잡혀 왔다. 아침 출근길에 본 차콜그레이 재킷이 정말 멋졌는데. 유리는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 나오셨어요?”
“거기에 그렇게 서 있으니 누가 꽃이고 사람인지 모르겠네.”
쿡쿡. 유리의 입술 끝이 옅게 올라갔다. 그는 매번 이런 식으로 농담을 던진다. 그래서 유리도 비슷한 농도의 장난으로 맞받아쳤다. 석 달 만에 학습한 대응책이었다.
“아마도 제가 사람일걸요.”
그녀의 대꾸에 무형도 슬며시 미소를 올렸다. 언제나 느끼지만 그의 미소는 아이 같다. 어쩌면 자신에게 진우라는 남자 친구가 없었다면 한 번쯤은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 화백 미팅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계약했어요. 다음 주부터 그림을 받으러 가면 될 것 같아요.”
“좋아요. 올라가서 계약서를 다시 검토해 봅시다.”
“네.”
유리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올라가서 검토하자기에 그도 당연히 발을 움직일 줄 알았건만, 움직인 건 입이었다.
“연애 사업은 잘 되어 갑니까?”
그의 앞을 지나치려던 유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뭐지? 설마 알고 있는 건가.
“네?”
“안 팀장, 연애하잖아요.”
“아…… 네 뭐, 그럭저럭이요.”
유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대충 얼버무렸지만 그가 어떻게 자신의 연애 여부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선 물어보지 못했다. 진우와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엿들었을지도 모르겠고, 퇴근길에 갤러리 앞에서 진우와 만난 것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이든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다지 친근하지 않은 직장 오너에게 사생활을 드러내는 것은 얼마쯤 꺼림칙했다. 유리는 조금은 무뚝뚝해진 얼굴로 갤러리로 들어갔다.

무형과 함께 기획전 보고서를 작성하고 나니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어차피 기획전까지는 야근이 예정되어 있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설레지 않았다. 기획 팀원들과 함께 나가서 간단히 식사라도 하자며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은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잠시 얼굴 좀 보자. 갤러리 앞이야.
유리는 팀원들을 향해 먼저 식당을 잡고 연락하라 당부한 후 코트를 걸쳤다. 바깥은 어느새 짙게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갤러리 앞 도로가에 서 있던 흰색 경차가 경적을 울린다. 운전석에 앉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은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야?”
조수석에 탄 유리가 물었다. 차는 히터가 켜져 온기가 느껴졌다. 시트에 한껏 기댄 채로 하이힐을 벗어 두 발을 글러브박스에 올렸더니, 은하가 기겁을 했다.
“발 얼른 안 내려? 아무리 친구 차지만 너무 편한 거 아니니, 너?”
“무슨 일로 전화한 건지 용건이나 말해. 나 지금 엄청 피곤해. 발도 많이 부었고.”
“베프 불러내는데 이유가 있어야 해?”
“왜 갑자기 베프 타령이야? 돈 빌리러 왔어?”
“얘가 얘가. 사람을 아주 상거지 취급이야.”
은하는 현재 백수다. 그녀의 말로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쉬어 가기라고 했지만.
“그래. 거두절미하고…… 너 요즘 진우랑 어때? 별일 없어?”
그렇게 물어 오는 은하를, 유리가 빤히 쳐다봤다. 은하가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친구 같아도 아무 의미 없이 저런 종류의 질문을 할 인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은하 역시 심각하면서도 진한 연애 중이어서, 유리의 연애에 늘 관심이 많았다.
“그건 왜 물어?”
“물을 만하니까 묻지. 어때? 요즘?”
“뭐…… 그럭저럭.”
유리는 아까 무형에게 한 대답과 똑같은 것을 내어놓았다. 그러곤 덧붙였다.
“너도 알겠지만 나 요즘 바빴잖아. 거의 한 달 동안은 통화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얼굴 보는 건 더더욱 힘들었고. 내가 정신이 없어.”
“하긴 너희 둘, 대학 졸업하고 나서 2년을 사귀었는데 그쯤이면 권태기가 오는 것도 사실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뭔데? 대체 왜 그래?”
은하는 잠시 고민했다. 허벅지에 놓인 이 봉투를 친구에게 보여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분명히 친구는 상처 받을 것이고 유리, 진우, 은하, 효선으로 구성된 ‘대학 동창 절친 4인방’ 구도도 잔인하게 깨질 것이다. 은하는 괜스레 망설여져선 딴소리만 지껄여댔다.
“아주머니한테 진우 소개할 거라며.”
“후우…… 그래야지. 가끔 정신이 돌아오실 땐 결혼하라고 성화셔서 진우라도 소개해 드려야 할까 봐. 당분간이라도 조용하시겠지.”
유리는 그렇게 대답하곤 한숨을 지었다. 그녀의 어머니 혜진이 조기 치매 판정을 받고 요양 병원에 들어간 지 다섯 달. 가끔 주말을 이용해 병원엘 가면 우연히 정신이 말짱한 혜진을 만날 때가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맨 정신인 혜진을 보는 건 좋지만, 그때부터 빨리 결혼하라 난리법석이다. 혼자 남겨질 딸을 향한 회한의 당부이리라. 혜진을 생각하자 또다시 심장이 어그러지는 것 같아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후우……그 계획, 보류해야겠다. 이걸 좀 봐.”
은하가 그 말과 함께 허벅지에 놓아둔 봉투를 유리에게 휙 던졌다. 유리는 제 품에 떨어진 봉투를 거꾸로 집어 들었다. 사진 몇 장이 허벅지로 우르르 쏟아졌다. 한껏 찡그린 미간과 함께 그중 하나를 들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유리야. 나 흥신소 뭐 그런 거 아니야. 난 아주 건전한 직업을 가질 거야.”
사진 속에는 익숙한 자동차 안에 있는 익숙한 두 사람이 보였다. 운전석에 탄 진우, 조수석에 탄 효선.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붙잡은 채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엊그제 일요일에 우리 용우 씨랑 북악 스카이웨이를 드라이브하다가 마침 사진 찍기 좋은 곳이 있어서 차를 세웠는데, 그때 딱 걸린 거야. 진우 차를 내가 알잖아? 차도 음흉스럽게 구석에 딱 있더라구. 물론 둘은 내가 자기들을 발견한 걸 몰라. 안 들키려고 폰 카메라로 줌인 하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유리는 은하의 설명을 흘려들으며 사진에 집중했다. 하도 뚫어지게 들여다본 탓인지 시야가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진우의 키스를 받고 있는 여자는 효선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