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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무형은 고개를 들었다. 때늦은 꽃샘추위로 이제 겨우 정수리를 빠끔 내민 가로수의 봄꽃이 물기를 머금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오후 내내 흐리기만 했던 하늘은 저녁이 되어서야 젖어들기 시작한 듯했다.
카페 밖, 행인들의 발걸음이 현저하게 바빠진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급한 대로 가방이며 손으로 비를 가리며 뛰었다. 그들이 걸친 두꺼운 외투가 어쩐지 무거워 보였다. 계절은 봄의 한복판에 서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도 미련스레 겨울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무형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여다보던 증시 화면을 끄고 시간을 확인한다. 7시 정각. 약속 시간이 되자 그는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말라 버린 입 안을 헹구기 위해 물을 한 잔 들이켠 후 카페 입구를 쳐다봤다.
맞선이야 이미 몇 차례 본 경험이 있어 그다지 긴장되진 않았다. 의무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벌이는 일이니, 매 순간 상대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보면 느낌이 통하는 여자가 간혹 있기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어느새 그는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발이 넓기로 소문이 난 창운(昌雲) 백화점 부사장이 주선한 거니 약간의 기대를 걸어 본다.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창운 백화점 부사장은 그중에서도 훌륭한 인품으로 칭송받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물질보다는 사람을, 거절보다는 승인을, 부정보다는 긍정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라, 그 인품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사람 보는 눈도 당연히 갖추고 있겠지, 하고.
“제가 좀 늦었죠?”
여자에게선 매우 진한 화장품 냄새가 풍겨 왔다. 얼굴과는 상관없이 냄새에 먼저 질려 가벼운 여자, 라는 선입견이 생겨 버렸다. 게다가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은 그녀의 맞선 의상은 계절과는 맞지 않는 얇디얇은 끈 원피스였다.
훤히 드러난 어깨선이 조명 등에 반사되어 윤기가 흘렀다. 숨을 쉴 때마다 움푹 패는 쇄골이 시선을 붙잡았다. 하지만 역시나 ‘선입견’이 발동됐다. 기저에 깔린 불쾌감이 옅어지지 않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괜찮습니다.”
무형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몇 번의 맞선 경험 끝에 얻게 된 학습 효과다. 이 자리를 끝으로 두 번 다시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인상을 최대한 그럴싸하게 남기는 것. 훗날을 위해 적립해 두는 자신만의 인간성이었다.
다가온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여자는 같은 걸로 주문한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곤 물 잔을 든다. 립스틱이 잔에 묻지 않도록 최대한 입술을 오므리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모이를 쪼는 오리 같았다.
“비가 갑자기 와서 차가 막히기 시작하지 뭐예요. 하마터면 옷이나 머리가 다 헝클어질 뻔했어요. 열심히 준비한 건데.”
“보기 좋은데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어깨를 으쓱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눈치가 전혀 없는 여자다.
“보기 좋을 리가요. 조금은 엉망이 되었을 텐데.”
눈치는 있다.
“홍무형 씨라고 하셨죠? 엄마한테서 이름만 전해 들었어요. 직업이랑 또 나이 같은 걸 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불쾌하신 건 아니죠?”
여자의 물음에 무형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가 다시 펴졌다. 직원이 커피를 내어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여자를 쏘아봤을지도 몰랐다.
불쾌하지 않게 됐나. 맞선 자리에 나오면서 상대방에 대한 정보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여자는 둘 중 하나인 셈이다. 매사에 건성이고 불성실하거나, 애인이 따로 있거나.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강효선 씨에 대해선 이름만 알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풀어 보죠. 효선 씨와 나, 어디서 뭘 하는 사람들인지.”
“으음…… 저 먼저 말씀을 드리자면, 지금은 딱히 직업이 없어요. 부모님이 작년에 저한테 상가 하나 명의 이전해 주신 게 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먹고 쓰고 살아요. 월급인 셈이죠.”
다시 말하자면 백수라는 소리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맞선을 보러 나온 여자라니. 창운 백화점 부사장의 안목이 염려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여자와 마주 앉아 있는 이 시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헛된 시간이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형 씨는 무슨 일을 하세요?”
여자가 물어 오자 무형은 턱을 매만졌다. 쉽게 대답할 것 같으냐.
“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글쎄요. 대기업 사원? 교수? 아니면 의사세요?”
“조그만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네에? 갤러리요?”
여자는 필요 이상으로 놀라워했다. 대답이 의외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놀란 눈치였다. 무형이 그녀의 놀람에 대한 이유를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머쓱해했다.
“아, 사실은 제 친구도 갤러리에서 일하거든요. 여기 근처인데…… 큐레이터예요.”
여자의 말이 끝맺어지기가 무섭게 카페 입구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말 그대로 거칠게였다. 유리문 꼭대기에 걸린 방울이 미친 듯이 딸랑거리고, 몇 안 되는 카페 안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쏠렸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또 한 명의 여자.
무형의 얼굴에 짙은 의혹의 빛이 일었다. 그리고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다가온 여자 2 가 무형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 1의 곁에 우뚝 멈춰선 것이다. 여자 2가 물 잔을 거칠게 집어 들었고, 그 모습을 본 여자 1의 눈빛이 뜨악하게 일그러졌다.
여자 2의 표정은 무척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여자 2가 이를 갈며 입을 연다.
“강효선.”
“이, 이게 무슨…… 너…… 왜 이래…….”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왜…… 나한테…… 왜…….”
“양손에 떡 쥔 채로 몇 사람이나 기만하는 거야, 너.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으면 내 입으로 이분께 사실대로 말할까? 너, 나 몰래 내 남자 친구랑 놀아났다고? 그러면서 가증스럽게 맞선 보고 남편 따로 애인 따로 두고 싶어 한다고?”
“헉! 그, 그걸 네, 네가 어떻게…….”
“이런 널 친구라는 이름으로 8년을 만난 내가 한심스러워. 정진우? 그래, 너 가져. 그 새끼랑 실컷 연애해 봐. 그래도 니들이, 네가, 사람이면 평생을 미안해하면서 살겠지. 사람을 이런 식으로 갖고 노는 거 아니야.”
여자 2의 말은 끝으로 갈수록 젖어 있었다. 문득 무형은 여자 2의 손을 응시했다. 물 잔을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에는 핏발이 일어서고 있었다. 무형의 한숨이 어지럽게 흘렀다. 가운데손가락에는 늘 보던 가는 실반지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는 오늘 하루 내내 그의 시야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사파이어 색의 보석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목소리와 얼굴, 그리고 그녀가 오늘 입고 출근한 붉은색 스웨터와 까만 모직 스커트까지. 모조리 그가 아는, 그의 시선에 늘 박혀 있는 여자의 것이다.
여자 2가 당당하게 무형 쪽으로 돌아섰다. 무형의 시선이 위로 들렸다. 여자 2와 시선이 부딪친 순간,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표님.”
“흐음. 안 팀장.”
조금 민망한 미소를 엷게 흘리며 무형이 대답했다.
여자 2의 손에 들려 있던 물 잔이, 테이블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