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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10화


미소까지 지으며 친절하게 맞은 일 따윈 없었다는 듯 나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처럼 싸늘한 얼굴로 나직하게 일갈했다. 그 모습이 조금 냉정하긴 했는지 주위 사람들이 죄다 움직임을 멈추고 빳빳하게 얼어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굳어 있는 양 사장을 향해 다시 말했다.
“아, 그리고 저 양재호 씨랑 연애 같은 거 할 생각 없으니까 그것도 안심하세요. 귀한 아드님이 별 볼 일 없는 집구석 딸이랑 만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좀 창피하실 테니까. 그렇죠?”
“…….”
“영업시간 중이라 사적인 이야기는 더 못 드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고객님.”
깍듯하게 고개까지 숙여 인사하고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아 버렸다. 그때까지도 양 사장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나만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방법이 없었는지 슬그머니 돌아서더니 문을 나서기 직전 도로 홱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오냐, 잘난 낯짝 값을 하고 싶다는 게지? 어디, 니가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서도 큰소리를 치는지 두고 보자꾸나. 제 발로 찾아와 싹싹 빌게 만들어 줄 테니 그때 보자.”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나는 두 눈 똥그랗게 뜨고 끝까지 바라보아 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양 사장이 문짝을 부서뜨릴 듯 거칠게 밀치고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앉아 숨도 쉬지 않았다.
“어, 언니 어떻게 하려고 그래?”
“괜찮으세요?”
“미스 윤, 대체 무슨 일이야?”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나자 방금 전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다가와 한마디씩 물었다. 대답 대신 나는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쉰 다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몇 장 안 되는 전표만 뒤적거렸다. 자연이 옆구리를 찔러도 돌부처마냥 꿈쩍도 안 했다. 결국 보다 못한 박 부장이 손짓으로 사람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더니 본인은 슬그머니 옆자리를 차고앉았다.
“방금 그 사람, 김치 공장 양 사장님인 거 같은데 맞지?”
“…….”
“맞는가 보네. 큰일이네. 그 사람 농협 이사잖아. 땅도 꽤 되고 건물도 몇 개나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는데. 그럼 우리 이사장하고도 당연히 안면이 있을 테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을 봐. 내가 보니까 잘하면 그 집안으로 시집을 갈 수도 있는 것 같던데 말이지. 그럼 미스 윤은 하루아침에 사모님이 되는 거 아냐?”
탁!
“부장님.”
“응? 왜, 왜?”
찬찬히 넘기던 전표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나는 박 부장을 노려보았다.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쓸데없이 참 많이 참고 살아왔다. 고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다른 건 다 치우고서라도 내 오늘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제가 미스 윤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죠? 요즘 세상에 여직원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요샌 다방에서도 그렇게 안 부른다고요.”
“아니, 난 그냥 습관이 되어서……. 벌써 십 년이나 그렇게 불렀는데 새삼스럽게. 크흠,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야? 양 사장 저러고 갔으니 분명히 무슨 일을 해도 할 것 같은데.”
“하든지 말든지. 설마하니 죽이기야 하겠어요?”
“흠, 그건 또 그렇지. 자기 아들이 목을 매고 있다는데. 그런데 양 사장 아들하고는 어쩌다가 그렇게…….”
“아, 몰라요, 몰라. 그만 가서 일이나 하세요.”
궁금한 게 왜 그리 많은지 박 부장은 더 묻지 못해 안달을 했다. 묻고 또 묻고. 결국엔 내가 불 맞은 멧돼지마냥 신경질을 부리는 걸 보고서야 마지못해 자리로 돌아갔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상황을 더 알아내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이 너무 역력하다 보니 불현듯 짜증의 강도도 불쑥 커졌다.
여기서 내가 한마디라도 더 보태면 오늘이 다 가기도 전에 온 동네에 방금 전의 일이 소문날 테지. 여긴 그만큼이나 좁은 곳이었다. 두 다리가 아니라 한 다리만 건너도 우리 집 숟가락 개수까지 낱낱이 다 까발려질 정도다. 그래서 속이 터져 죽을지라도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는 거다.
‘망할 인간,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물귀신도 아니면서 왜 자꾸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거니? 으응?’
방문을 걸어 잠갔다는 양재호를 향해 나는 속으로 갖은 원망을 퍼부었다.
철딱서니 없다 노래를 했더니 시위를 하는 방법도 딱 철부지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이해를 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고작 그런 짓이나 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올 지경이다. 할 수만 있다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패 주고 싶을 정도였다. 뭐? 방문을 걸어 닫고 밥을 굶어?
“하여간에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다리몽둥이가 부러져 봐야 그딴 헛짓을 안 하는데. 아무리 곱게 자랐다지만 무슨 인간이 그렇게 유치하게…….”
몸 편하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 시위도 하는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없다. 설사 중간에 그가 굶어 죽는다고 해도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양재호는 단단히 혼나 봐야 정신을 차릴 인간이었다. 같은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양심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흠씬 패 다리몽둥이라도 분질러 놨음 좋겠다.
“걱정되지?”
같이 금고를 나선 자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표정이 조금 어두워 보이긴 했는지 위로하듯 어깨도 두어 번 토닥거려 준다. 그러다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곧 타박 아닌 타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좀 참지 그랬어. 그 노인네 성질 엄청 안 좋아 보이던데 정말로 잘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갚아야 할 대출금도 많으면서.”
“그거야 그렇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자르기야 하겠니?”
“하고 간 것만 보면 정말로 그러고도 남게 생겼잖아. 하여간에 언니는 다 좋은데 가끔 욱해서 내지르는 게 문제야. 어쩜 그렇게 확 돌아 버리는지 몰라. 화나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지지?”
“……응.”
민망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도 참고 사는 게 많은 탓인지 일단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내지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답답한 속을 금방 터뜨리면 그런 일도 없을 텐데 끝까지 꾹꾹 눌러 참다가 터뜨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더 모질어지기도 한다. 그런 스스로에게 질려서 나도 때마다 고쳐야지 생각하고는 있지만 역시나 쉽지가 않았다. 쉬운 일이었다면 애초에 버릇으로 정착되지도 않았을 거였다.
이렇게 저질러 놓았으면서 나는 아마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오늘 한 일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그러곤 어떻게든 제대로 된 사과를 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엔 소문을 들은 아버지에게 한바탕 혼이 난 다음 양 사장 앞에 불려 가 죄인처럼 무릎을 꿇을 게 틀림없었다.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었다.
“휴우, 마가 끼었나. 요즘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형편처럼 내 상황도 나날이 꼬여만 가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원래도 안 좋았지만 확실히 요즈음의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중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씨?”
“언니!”
“응? 왜?”
잠깐 넋을 놓고 있었던가?
무심히 걷고 있는 나를 자연이 거칠게 잡아챘다. 그러더니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맹렬하게 등 뒤를 가리켰다.
“저, 저, 저기 저분이 방금 언니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그래? 누군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돌아섰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오후의 강한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긴 그림자 하나. 누구지? 정면에서 눈을 찔러 오는 오후의 강한 빛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나는 눈을 조금 가늘게 떠 보았다. 그사이 흐트러진 구석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회색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 하나가 코앞으로 다가와 우뚝 멈춰 서고 있었다. 여름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사람이었다.
남다른 때깔과 포스를 자랑하는 그 모습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 남자, 나에게 끝 모를 좌절을 안겨 주었던 예의 맞선남. 그 남자가 딱 저랬었다. 공포스러울 만큼 잘생긴 얼굴에 도저히 이 동네 사람 것 같지 않은 말끔한 차림과 아무리 뒤져도 빈틈 하나 없을 것처럼 반듯한 자세를 내내 유지하고 있었던 그…….
“윤미숙 씨?”
“헉!”
그 사람이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온몸의 신경이 또 화다닥 곤두섰다. 그 사람이었다. 문제의 맞선남. 알아본 순간 피곤에 지쳐 조금 멍하던 정신이 확 깨어나면서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예리하게 눈을 찔러 오는 햇볕을 뚫고 나는 기어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았다. 하느님 맙소사. 정말로 그 사람이었다.
“어? 다, 다, 당신이 왜 여기에?”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나는 바보처럼 한참이나 버벅거렸다.
그날의 만남 이후 내내 연락이 없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찾아온 것일까? 아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설마 나를 기다린 것일까? 온갖 상상과 무수한 가능성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뇌를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덕분에 먹통이 되어 버린 컴퓨터처럼 나는 또 한없이 멍청해지고 말았다. 아아, 머릿속이 완전 하얗구나.
“언니야, 호, 혹시 아는 사람?”
멍청하게 서 있는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자연이 물었다.
차마 말이 안 나와서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다.
“어떻게 아는 분인데?”
“응? 으응, 그게…… 서, 선본 남자.”
“어머!”
자연의 눈이 더 커졌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세상에, 진짜 훈남이잖아. 이게 웬 떡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