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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9화


“그나저나 미준이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한다?”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다시 해묵은 고민을 꺼내 잡았다.
그 문제는 언제나 단박에 효과를 발휘해서 바라던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나는 금방 고뇌 어린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래, 한 푼이 아쉬운 여자에게 스쳐 가는 훈남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그러니 생각은 이제 그만. 개꿈 한번 화려하게 꿨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움 한 조각까지도 다 털어 내자, 미숙아.

“20만 원 출금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창구 너머로 얄팍한 지폐 뭉치를 넘기며 나는 습관적으로 미소 지었다. 이 일을 오래하긴 했는지 이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만 봐도 무조건 입꼬리가 올라간다. 뿐만 아니라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따위의 말들은 아예 입에 붙어 버려서 아무 때나 막 나올 때도 있었다. 가끔은 자는 동안에도.
“아, 오늘 정말 한가하네.”
손님이 객장을 나서기가 무섭게 자연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거리도 지나치게 한산하고. 뭔 날인가?”
“날은 무슨……. 아침부터 푹푹 쪘으니까 다들 집 밖으로 나오기가 겁나는 거겠지.”
“하긴, 오늘 정말 덥긴 해.”
체념한 듯 그녀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은 아침부터 푹푹 찌기 시작해서 마감 시간이 다 된 지금까지도 햇볕이 쨍쨍했다. 보기만 해도 거리가 온통 지글지글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뉴스에서도 한낮의 온도가 30도니 32도니 하면서 외부에서 일하는 경우 일사병 등에 대해 주의를 당부했었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에게 오늘은 밭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왔다.
“근데 언니야…….”
“왜?”
“그 사람한테 연락은 없어?”
“그 사람 누구?”
“시치미 떼기는. 지지난 주에 선본 남자 말이야. 한 번쯤 연락 올 때도 됐잖아.”
글쎄, 때는 되었을지언정 연락이 올 일은 없지 않을까?
나는 자연을 향해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과 함께 썩은 미소를 날려 주었다. 그러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야 간신히 깨달은 사실 하나를 수줍게 털어놓았다.
“전화번호를 안 가르쳐 줬다.”
“뭐어? 왜? 엄청난 훈남이라고 했잖아?”
“그랬지. 훈남이셨지. 너무 훈남이라서 나 겁먹었잖아. 그러니 이 경우엔 연락을 안 해 주시는 게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길이야. 어차피 연락처 같은 걸 묻지도 않았고.”
그는 묻지 않았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을 뿐이고.
“에이, 뭐가 그러냐? 혹시 훈남이라는 거 순 거짓말 아냐? 그래서 차고 싶어서 전화번호도 안 가르쳐 준 거지?”
“아니야. 훈남 맞습니다, 맞고요. 슬프지만 내가 차였다네.”
그날의 참담했던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나는 좌절스럽게 고개를 꺾었다. 가능하면 말끔하게 잊고 싶었지만 어찌나 기억이 선명한지 열흘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깊은 패배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몰골로, 그 주접을 떨었으니 그에게서 연락이 없는 건 당연하다.
심지어 정애 할머니조차 바로 그다음 날부터 ‘다른 사람으로 다시 알아볼까?’ 하며 넌지시 퇴짜를 예고해 줬었다. 다행이었다. 다행은 다행인데 동시에 왜 그렇게 실망스럽던지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기분을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더랬다. 설마 벌써 갱년기가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차여서 정말 다행이야.”
뜻 모를 소리에 자연의 얼굴이 더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왜 다행인데?”
“그 잘생긴 남자랑 연애질을 한다는 생각만 해도 심장마비가 일어날 것 같으니까. 역시 난 평범한 남자가 좋아.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게 좋다고.”
“어련하시겠어요. 하지만 그래 가지고서야 언제 연애 한번 제대로 해 볼 수 있겠어? 연애를 하려면 때로는 좀 용감하게 들이대기도 해야…….”
“어? 어서 오세요.”
자연이 일장연설을 시작하려는 순간 오늘따라 한가하던 객장의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그사이로 한낮의 열기를 잔뜩 뒤집어쓴 것처럼 시뻘건 얼굴을 한 중년인이 들어섰다. 그에 나는 반사적으로 미소 지으며 또 ‘어서 오세요.’ 소리부터 토해 놓았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니 딱 마감 시간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시간에 쫓겨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손님인 줄만 알았다. 얼마나 급했으면 이 더위에 뛰어왔을까 하고. 그러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예의 통통을 넘어 풍만한 몸매의 남자는 이미 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우리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객장이 떠나가라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윤미숙이가 누구야?”
“예에?”
“윤미숙이라는 계집애가 누구냐니까! 오라, 너냐?”
흥분한 와중에도 가슴팍에 매달린 명찰을 발견한 그가 내 자리로 바짝 다가섰다. 창구 너머로 거구의 몸을 쑥 들이민 채 쪽 찢어진 눈으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여차하면 한 대 칠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날렵한 백스텝으로 문 워킹을 시도할 뻔했다.
대체 누구지, 이 아저씨는?
“저어, 고객님?”
당황한 나는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보기보다 더 나이가 들었으며 이유는 아직 모르겠으나 나를 정말로 한 대 쳐 주고 싶어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살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봐도 아는 사람은 아니고 자주 다니는 고객도 아닌 이 중년, 아니 노인은 대체 뭣 때문에 나를 증오하게 되었나. 이유는 간단하게 밝혀졌다. 상황을 눈치챈 청원경찰과 한가하게 졸고 있던 박 부장이 슬슬 일어나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그가 마침내 나도 아는 이름 하나를 꺼냈던 것이다.
“니가 감히 우리 재호더러 싫다고 했다며?”
“예?”
“아, 재호 몰라? 우리 재호 말이다, 양재호!”
양재호! 그 망할 인간.
그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갑자기 앞통수가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긴장으로 인해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그제야 나는 상대의 정체를 눈치챘다. 양재호의 아버지, 저 김치 공장의 사장인 양만식. 양 사장이었다. 그 양 사장이 바짝 굳어 있는 나를 향해 굵은 침방울을 튀겨 가며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니가 지금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유세를 떠나 본데, 그래 봤자 별 볼 일 없는 집구석 딸내미 주제밖에 안 되는 것이 어디서 감히 큰소리냐? 남자한테 망신을 줘? 어엉?”
“…….”
“니가 뭐야? 니가 뭔데 내 아들을 그 꼴로 만들어? 너 때문에 우리 재호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나 알아? 그놈이 방문을 걸어 잠갔다. 벌써 열흘째 방에 처박혀서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는다고. 너, 걔가 어떤 애인 줄이나 알아? 너 따위 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귀한 자식이야. 우리 집안 삼대독자라고.”
“…….”
“그런 놈이 다 죽어 간다. 고작 너 따위 때문에 애비 말도 안 들어 먹고 있단 말이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함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침이 튀었다.
덕분에 내 고개는 점점 더 뒤로 젖혀지고 객장은 갑자기 난입한 불친절한 긴장감과 더불어 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나의 여린 감성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그가 숨을 몰아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자 고요함의 크기가 불쑥 커졌다. 그때에서야 나는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요?”
길길이 날뛰면서 하는 소리를 잠자코 다 듣고 새긴 내가 마침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담담했을지언정 속까지 조용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코털을 뽑힌 암사자처럼 신경줄이 확 곤두섰다.
어차피 상황은 다 파악했다. 하나뿐인 자식이 시위 중이라니 그 안타까운 심정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까지 납득이 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 양재호가 양씨네 귀한 삼대독자인 것도 맞고 내가 별 볼 일 없는 집구석의 딸내미인 것도 맞다고 치자.
맞는 건 맞는 건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윤미숙이 양재호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나. 양재호가 임금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별 볼 일 없는 집구석 딸은 누가 선택만 해 주면 무조건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기라도 해?
안 그래도 지나치게 잘난 남자랑 선을 보는 바람에 속이 쓰려 죽겠는데 이젠 관심도 없는 양씨네 부자까지 나서서 나를 달달 볶으려고 들다니. 잔잔하던 속이 확 뒤집히면서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어, 어떻게 하기는? 당장 가서 우리 재호를 설득해 방 밖으로 꺼내 놔야지.”
“그리고요?”
“그거야……. 아니, 근데 어린것이 어디서 눈 똑바로 뜨고 대꾸냐, 대꾸가?”
그새 할 말이 떨어졌는지 양 사장은 이제 나의 태도를 놓고 한바탕할 기세였다. 그에 그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먼저 치고 나갔다.
“설득을 하라고 하셨죠? 그건 연애라도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양재호 씨가 진지하게 연애하자고 하던데 그렇게 하라고요?”
“누, 누가 그러라고 하던? 일단은 애부터 살려 놓고 나서 이야기하자 그거지.”
“걱정 마세요. 사람은 생각보다 생명력이 강해서 고작 며칠 굶는다고 안 죽으니까. 어차피 그 사람은 죽을 용기 같은 것도 없을 테지만, 정 걱정되시면 그냥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시면 되는 거고요. 더할 말씀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