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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7화


어쩜 무슨 남자가 손끝까지도 저렇게 근사할까. 콱 깨물어 주고 싶구랴. 아쉬움에 입맛이 다셔졌다. 저 근사한 손으로 고기 대신 나를 집어 먹어 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아, 저 점잖은 남자를 앞에 두고 이 무슨 음란한 상상이란 말인가. 미숙아, 우리 이러지 말자. 촌것이라고 불릴지언정 짐승이라고 불리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냐. 아무리 맛있게 보여도 제발 씹어 먹을 것처럼 바라보지는 말아 다오.
“마, 맛있죠?”
“…….”
“여기 야채랑 같이 드세요. 그래야 더 맛있거든요.”
아, 이놈의 발 빠른 적응력.
고기를 입에 넣고 있자니 어쩐지 덜 떨리는 듯해 방금 전부터 그가 뭐라 구분할 수 없는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하고 나는 넉살도 좋게 이것저것 권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림의 떡이요 물 건너간 남자였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에다가 어떻게든 연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도 했다. 설령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먼저 사양해야 할 처지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이를테면 꿈 많은 여자인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과 연애 한번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는 이 시골은 물론이고 TV에서도 흔히 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훈남인데 말이다. 키 크고, 잘생기고, 돈도 잘 벌고, 에, 또 짐승 같은 두툼한 목덜미와 아랫도리까지 움찔하게 만드는 미끈한 뒤태라든지 하는…… 크허험. 아무튼지 간에 바로 그래서 안 되는 거다. 그가 너무 과해서, 그리고 내가 너무 모자라서 사양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저 얼굴로 나 좋다고 방긋방긋 웃었으면 어쩔 뻔했어. 형편도 생각 안 하고 그냥 콱 넘어갈지도 모르잖아?’
무표정한 얼굴만 봐도 숨이 막히는데 정말 웃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모르긴 해도 앞뒤 분간 못하고 넙죽 엎어져 그냥 그가 하자는 대로 고개만 끄덕였을 테지.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남자도 겪어 봤어야 ‘아, 이럴 땐 튕겨 줘야지.’라는 생각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만큼 ‘연애’라거나 ‘남자’에 대해 나의 뇌세포는 면역력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양재호가 남자로 안 보이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아, 이것도 드셔 보세요. 여기 텃밭에서 키우고 있는 부추예요. 금방 뜯어 온 거라 그런지 향이 참 좋네요.”
언제 긴장했었냐는 듯 나는 이제 편하게 주저앉아 주절주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음료수까지 시켜 놓고 자작을 해 가며 허리를 펴고 반듯하게 앉은 남자에게 이것저것 권하기도 하고 한창 수확기에 들어간 과일 이야기도 꺼냈다.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였는지 때때로 그의 입가에 가는 주름 같은 것이 스쳐 간 것도 같았다.
그쯤 되자 나는 갑자기 간이 커져서 공깃밥을 시켜 고기와 함께 불판에 볶아 먹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맞선 자리에서 웬만한 여자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서슴없이 해치운 것이다.
“이게 원래 이렇게 먹는 거거든요. 헤헤.”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 싶어 뒤늦게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을 슬며시 피해 불판에 달라붙은 마지막 밥풀까지 닥닥 긁어먹었다. 그래, 나는 평소에도 이렇게 먹고살았다. 이렇게 먹지 않으면 하루 종일 먹다 만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들 하는 거다.
그런 내 모습을 그가 종종 수저질까지 멈춘 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애써 무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밥을 남길 수는 없었다. 이 맛있는 걸 남겼다가는 밤에 잠이 안 올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많이 남기면 간혹 여기 주인아저씨한테 등짝을 맞을 때도 있었다. 쌀부터 부추 하나까지 직접 농사지어 내놓은 거라 그 양반은 아주 단순하게도 많이 먹으면 좋아하고 남기는 건 원수처럼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 안 돼요. 이건 제가 사 드리는 거예요.”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꺼내 드는 그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식당을 고른 것도 나고 주문을 한 것도 나이며, 먹기도 내가 더 많이 먹었으니 당연히 내가 계산을 해야 맞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도 할 줄 아는 것을 보니 나의 양심은 아직 똥보다 쓸 만한 상태인가 보다.
“제가 추천한 곳이니까 제가 계산해야죠. 더구나 멀리서 오셨는데 밥까지 얻어먹으면 제가 너무 죄송해요.”
“…….”
“이 동네 인심이 원래 그렇거든요. 먼 곳에서 오신 손님한테는 절대로 계산을 떠넘기지 않는다고요. 그러니까 이건 제가 할게요.”
손까지 모으고 구구절절하게 애원할 때 남자는 이미 하얀색 지폐 한 장을 예의 주인아저씨에게 내밀고 있었다. 푸른색도 아니고 누런색도 아닌 하얀색이다. 아니, 고작 돼지갈비 3인분 먹어 놓고 웬 수표란 말인가. 이 경우엔 거스름돈 만들기가 더 귀찮다.
그 생각까지 마치고 재빨리 지갑을 꺼내 들 때였다.
‘수표 한 장쯤이야.’ 하며 무심코 돈을 받아 든 식당 주인아저씨의 안색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배, 배, 백? 거, 거스름돈이 없는데…….”
“예?”
덩달아 놀란 내가 황급히 아저씨의 손에서 수표를 잡아챘다.
“일금 백……만 원.”
세상에나, 정말이다. 이 남자, 고작 2만 원어치 먹어 놓고 자그마치 백만 원짜리 수표를 내밀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차마 웃지도 못하고 손에 들린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황급히 아저씨 손에 쥐어 준 다음 나는 수표와 함께 남자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식당에서 뛰쳐나왔다. 너무 당황해서 보기만 해도 무서운 남자의 손을 잡아 버렸다는 사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였다.
“아, 큰일 날 뻔했다.”
후덥지근한 밖으로 나오고서야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눈앞의 남자 때문에 차마 화는 못 내고 얼굴색만 붉으락푸르락하던 식당 주인아저씨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분도 보통은 넘는 양반이라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벌써 고함을 내지르고도 남았을 성격인데 이 남자 앞에서는 어쩐지 고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훈계를 하기엔 상대가 너무 만만치 않게 생기긴 했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수표를 들여다보며 나는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양재호도 안 할 유치한 짓을 이 남자는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는지 원. 하지만 누구 때와 달리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는다.
반듯한 차림이나 과묵한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진지했던 얼굴 때문인지 정말로 지갑 속에 다른 지폐가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애 할머니도 그러지 않았던가. 돈을 잘 버는 사람이라고. 할머니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의 행동이 고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명품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눈이 부실 만큼 그의 전신은 고급스러운 소재들로 도배되어 있었으니까. 모르긴 해도 지금 그가 매고 있는 넥타이의 끄트머리만 조금 잘라 줘도 고기값은 충분히 대고도 남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돌연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것이 무엇이냐. 크고 단단하고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그제야 꼭 움켜쥐고 있는 뜨끈한 손의 존재가 피부를 타고 심장판막에까지 생생하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허, 손이 참 곱기도 하시오. 여자인 내 손보다 더 말끔한 것 같은데 핸드크림은 어느 회사 제품을 쓰시는지……. 잠깐 나 눈물 좀 닦겠소.
꿀꺽.
갑자기 후끈한 열기가 얼굴로 확 밀고 올라왔다.
덜덜 떨리는 시선이 주춤거리며 아래로 향했다 곁에 선 그의 얼굴로 향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손가락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저, 저기 이거…….”
시뻘게진 얼굴을 푹 숙이며 나는 마치 임금님께 진상하듯 두 손으로 공손히 그에게 수표를 바쳤다. 하도 당황해서 서두르다 보니 수표도, 그의 손도 하마터면 주머니 속에다 구겨 넣을 뻔했다. 그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 얼른 넣으세요. 누가 볼까 봐 겁나요.”
“…….”
“큰돈이잖아요. 이런 건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라고요.”
특히, 윤미숙처럼 한 푼이 아쉬운 사람 앞에서는 더더욱 안 된다. 탐도 나고 부러워 죽을 것 같단 말이다. 간신히 잊고 있던 남동생의 등록금 생각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조금 기운이 빠진 몰골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남자의 손에 수표를 쥐어 주었다. 그러곤 고개를 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빙긋 웃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짧은 순간 남자의 시선이 더 깊어지더니 그림 같은 한쪽 눈썹이 하늘로 슥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차도 마셨고 밥도 먹었으니까 저는 이제 그만 가 볼게요.”
“…….”
“피곤하실 텐데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할머님께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만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예의까지 차려 가며 넙죽 허리를 꺾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같이 밥을 먹어 주어서 참으로 고마웠소이다. 대통령과 밥을 먹어 본 적은 없으나 그에 버금가는 오찬이었다고 감히 단언하는 바입니다. 무엇보다 긴장감 면에서는 단연 최고였소이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정애 할머니도 다른 소리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잘난 맛에 내질렀다가 차였다.’는 소리는 할 수 없을 테지.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윤미숙도 괜찮다. 이 잘생긴 남자와 연애하는 꿈조차 꾸지 못하는 스스로가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어차피 취향도 아닌걸. 고개를 든 나는 무심하면서도 역시나 무섭도록 잘생긴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아 준 다음 미련 없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