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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6화


덕분에 그와 마주 앉아 있는 내내 스스로가 아주 하찮게 느껴지는 위험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순간 모든 것이 확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이 몰려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팍 꿇고 싶은 걸 참느라고 남몰래 이까지 악물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그의 깊고 무심한 눈길이 느껴지면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 코드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전신이 바짝 긴장을 해 버리는 걸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탁자 밑에서 마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정말로 숨이 딱딱 막히는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과묵한 성품인지 남자는 줄곧 말이 없었고 나는 나대로 엄청나게 긴장을 해 버린 탓에 계속해서 이를 악물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무언가를 묻거나 대답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도, 나도 그저 똑바로 마주 앉아 서로를 잡아 죽일 듯이 바라본 것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무슨 원수 집안사람끼리 마주 앉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상태로 우리는 그 후줄근한 복다방에서 설탕이 듬뿍 들어간 다방 커피를 축내며 한 시간을 버텼다. 그러다 마침내 공기구멍을 뚫듯 내가 먼저 그렇게 ‘밥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에다 대고 ‘저기, 취미가…….’라고 내지를 만한 용기는 없었으면서 밥 먹자는 소리는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혹시 생존 본능이었을까? 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었다. 무심한 남자의 얼굴에서 ‘뭐야, 이 후줄근한 여자는?’이라는 말 대신 아주 다행스럽게도(?) 순간 스쳐 가는 ‘허기’를 읽어 버렸고, 서울로 유학 보내 놓은 남동생을 가진 나로서는 그걸 그냥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 내가 가진 거라곤 마이너스 통장과 바다 같은 모성애밖에 없다.
오죽하면 예전에 선본 어떤 남자가 나를 향해 ‘미숙 씨는 우리 엄마 같아요.’라는 소리를 다했겠는가. 물론, 나는 그때 너무나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의 엄마가 나만큼이나 예쁘다는 소리로 알아들었었다. 나중에 아주 우연히 태평양처럼 후덕하기 이를 데 없는 몸매의 그의 엄마를 생눈으로 목격하고서야 진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나저나 커피 한 모금 들이켜는 일도 그렇게 힘에 겨웠는데 이제 마주 앉아 밥을 먹어야 한다니. 이거 정말 큰일 아닌가?
평소 다니던 식당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지레 그런 걱정을 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와 마주 앉기도 전에 그 많은 레스토랑을 놔두고 하필이면 후줄근한 돼지갈빗집을 고른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깊이 절망하고 말았다.
‘아,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자 이제는 거의 울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어쩌면 이건 인연이 아님을 알리는 신의 계시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하긴, 신이 아니라 거지가 봐도 우리는 그다지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임금님과 무수리라면 모를까 아무리 잘 봐 준다 해도 연인으로는 어림도 없다.
더구나 맨 처음, 너무도 무심하여 흡사 칼날 같기도 하고 얼음 조각 같기도 한 남자의 서늘한 시선과 마주한 순간 나는 뼈가 아프게 깨달았다. 이 남자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고 앞에 앉은 것은 그냥 여자 사람 모양을 한 덩어리다…… 라고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남자에게 굳이 계획까지 변경해 가며 밥을 권한 것은 역시 조금은 미안한 탓일 것이다. 누가 시골 여자 아니랄까 봐 흙냄새 풀풀 풍기는 후줄근한 꼬라지로 나와 황금 같은 그의 주말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것에 대한. 그의 할머니와 수십 년 친구라는 정애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보내는 것은 도무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소심한 결론이었다.
‘그래, 차일 땐 차이더라도 내가 할 도리는 다하자.’
정애 할머니도 눈이 있으니 이 사람이 훈남 중에서도 보기 드문 훈남이라는 사실을 알아봤을 거다. 그러니 이 잘난 남자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상정으로 받아들여 줘야 한다. 악조건 가운데에서도 내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도. 절대로 윤미숙의 얍삽한 수작질 때문이 아니란 말이지.
“좀 허름하죠?”
누런 장판이 깔린 바닥에 긴 다리를 접고 반듯하게 앉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물었다. 우아한 곳에서 칼질만 하면서 살 것 같은 고급스러운 남자에게 웬 돼지갈비.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려서 식은땀과 함께 죄책감이 다 몰려왔다.
“보, 보기엔 이래도 이 집이 읍내에서 제일 맛있어요. 아, 혹시 돼지고기를 안 좋아하시는 건…….”
“아닙니다.”
‘흡!’
아, 또다. 또 호흡곤란이 찾아오려고 한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남자의 무거운 입이 열리고 그 촉촉한 입술 사이에서 낮고 부드럽지만 강직한 힘을 가진 목소리가 새어 나오자 버릇없는 심장이 또다시 벌컥거렸다.
저만큼이나 잘난 외모를 가졌으면 목소리라도 좀 깨는 면이 있어야 나름 인간미가 느껴질 텐데 무슨 조화인지 그는 목소리마저도 완벽했다. 너무 두루두루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라 순간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야. 그동안 내 안구가 너무 저렴한 것만 보아 온 것뿐일 거야. 배우들도 많이 산다니까, 역시 서울엔 저 사람처럼 잘생긴 사람이 흔한 거겠지.’
우리 동네에선 가장 어린 영농 총각조차 40대인 것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 양재호 그 작자는 전원주택에 사는 하이에나 과의 짐승이니까 열외다. 어쨌거나 모처럼 눈 호강 한번 잘하는 날이었다. 비록 사하라 사막과 아마존의 중간쯤에 혼자 서서 모래바람과 비바람을 동시에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긴 했지만 이런 불편한 시간을 겪는 것도 오늘 하루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 조금은 기쁜 마음으로 호기롭게 돼지갈비 3인분을 주문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털어지지 않는 긴장으로 인해 목소리가 덜덜 떨리긴 했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그의 눈엔 처음부터 어딘가 나사 하나쯤 빠진, 한참 덜떨어진 여자로 보이고 있을 텐데. 혹은 살짝 미쳤거나.
“고기 나왔습니다.”
점심때가 살짝 지난 시간 덕분에 고기는 주문하자마자 바로 나왔다. 또 말없이 앉아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일이 내심 두려웠던 나는 아예 벌떡 일어나서 돌돌 말린 고기 몇 덩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무 말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입에 뭐라도 넣는 것이 나을 것도 같았다. 그러면 무섭도록 똑바로 다가오는 그의 시선을 조금쯤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안 그래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무 이유 없이 민망하고 부끄러워져서 속으로 얼마나 안절부절못했는지 모른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너무나도 과묵해서 다방에 앉아 있었던 그 시간 동안 고작 두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맨 처음의 ‘윤미숙 씨?’ 그리고 ‘고은후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담 할머니가 내어 주는 뜨끈뜨끈한 다방 커피를 군소리 없이 마셨다.
‘그런 거 보면 성격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잘나서 혹시 성격이 아주 더럽다거나 남모르는 변태적인 취향 같은 것이 있어서 그 나이까지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지만 그 생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의 태도는 너무나 점잖고 예의가 발라 마치 그 옛날의 선비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오? 뭐가 문제였기에 이 지경으로까지 내몰리신 게요? 설마 진짜로 고자인 것은…… 어머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치이익.
고기를 구우면서 나는 또 남몰래 그를 흘깃거렸다.
그는 상 위에 하나하나 차려지는 반찬들을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담백한 모습을 보자 한여름에도 뜨거운 다방 커피를 군소리 없이 마셔 줄 만큼 양호한 성격이니 별 볼 것 없는 시골 상차림도 용납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물론 고자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저 얼굴, 저 몸매에 고자면 도대체 얼마나 아까울 거냔 말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아니 될 일이었다.
‘기분이 나쁜 건가, 좋은 건가?’
아무리 살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모습에 고개가 잠시 이리저리 방황을 했다.
표정이라도 풍부한 사람이었다면 얼굴을 보고 속내를 대강 짐작해 볼 수 있을 테지만 그는 그런 면에서도 굉장히 인색해 내내 별다른 표정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아니,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마치 잘 만들어진 인간형 로봇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혹은 외계인이거나.
‘혹시 머릿속으로 지구 멸망의 날짜를 계산하고 있는 거 아냐?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머릿속엔 캐로로 소대원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다거나. 아, 진짜 어려운 사람이네, 어려워.’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역시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혹시 벌을 주고 있는 거라면 그는 정말 제대로 된 방법을 선택한 셈이었다. 물론, 진짜로 그런 마음일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 익었어요. 어서 드세요.”
그의 앞 접시에 잘 익은 고기 몇 점을 놓아주며 나는 아무 의미 없이 또 생긋 웃었다. 나는 생긋 웃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눈엔 조금 실없이 보인다고 해도 하는 수 없었다. 이 마당에 울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그는 그런 나를 비웃지 않았다. 그저 나의 권유대로 고기를 몇 점 집어 입에 넣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살짝 감동했다. 그 사소한 동작조차도 얼마나 단정하고 우아한지 내가 가위로 썩썩 잘라 놓은 것이 돼지갈비가 아니라 무슨 스테이크쯤 되어 보이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