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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4화


하지만 아무리 고3이라고 해도 최근 그 애의 태도는 확실히 이상했다. 미주는 막내답지 않게 애늙은이 같은 성격이라 전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양반처럼 ‘허허’ 웃다가 털어 내곤 했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온갖 근심 걱정을 해 가며 사서 고생을 하는 나하고는 성격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다.
“성적이 떨어져서 그러나?”
성적이 왕창 떨어져서 신경이 잔뜩 곤두선 게 아닌가 생각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저어 버렸다. 하도 느긋한 성격이라 막내는 성적이 많이 떨어져도 ‘다음에 더 잘 보면 되지.’라며 그냥 웃고 넘길 애였다.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는 거라고 하면서. 막내의 성적에 예민한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점수에도 예민하고 등수에도 관심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더 시험을 잘 봐야 나중에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거라는 단순한 계산에서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한숨을 삼키며 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튼지 간에 하루 날을 잡아 진지하게 얘기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한데 말을 안 하는 게 너무 신경 쓰여서 더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나쁜 계집애, 오늘은 봐준다. 일단 미준이 등록금부터 해결하고 나서 보자. 으응?”
팰 땐 패더라도 몇 마디 얘기 정도는 들어 주리라.
야무지게 마음먹고 서둘러 남은 설거지를 마저 마쳤다. 그러곤 밀린 청소에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 집안 정리까지 해 두고서야 간신히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코딱지만 한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나는 네 발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동동거리느라 잠시 잊고 있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와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리 통통한 체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코끼리를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아, 죽겠다.”
대강 씻은 얼굴에 로션을 발라 주는 것조차 귀찮아 맨바닥에 그냥 길게 드러누웠다. 서늘한 기운이 등을 타고 빠르게 온몸으로 번져 간다. 그 기분 좋은 서늘함을 잠시 만끽하다 누운 채 손을 들어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갈라진 손톱, 밭일과 물일에 거칠어진 손등. 내 것 같지 않은, 볼품없는 손이 오래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힘들다.”
무의식중에 한마디 중얼거리다 퍼뜩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부터, 그러니까 18살부터 줄곧 해 온 일인데도 아직 이력이 붙지 않은 건지 아니면 점점 꾀가 느는 건지 요즘 들어 힘들다는 소리를 더 자주 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곧 서른이라고 벌써 나이 먹은 티를 내는 건가?
“아니야, 아직 늙은 건 아니라고. 그냥 여름이라서 체력이 조금 떨어진 것뿐이지.”
손이 툭 떨어졌다.
윤미숙, 29세. 연애 경험 전무. 심지어 이 나이가 되도록 키스도 한 번 못해 본 노처녀. 하지만 괜찮다. 한 번도 피어 보지 못하고 그냥 이렇게 늙어 간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직은 견딜 만하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나에게도 꽃처럼 행복한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있으니까.
나는 반듯하게 누워 빛바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마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나는 괜찮다. 진짜 진짜 괜찮다. 윤미숙은 괜찮다. 천하무적이다.”
천하무적이니까 못하는 일도 없다.
몇 번이나 중얼거리는 사이 노곤한 몸이 편하게 늘어지면서 곧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들기 직전, ‘훈남이랴.’ 하던 정애 할머니의 말과 함께 아주 잠깐 맞선에 대한 생각이 스쳐 갔지만 곧 까맣게 잊혀졌다. 한여름 밤이 그렇게 저물었다.

―마주치는 눈빛이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그으은∼ 아아, 사랑인가 봐.
오래된 전축에서 그만큼이나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수도, 노래 제목도 잊어버렸지만 어렸을 땐 나도 곧잘 따라 부르곤 하던 그 노래였다. 어쨌거나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발랄하게 들리는 그 노랫소리에 잠깐 정신줄을 걸어 놓고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왜 하필이면 ‘복다방’인가 하고.
작은 읍내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꽤 그럴듯한 커피숍도 있고 레스토랑도 몇 개나 되는데 그 많은 것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읍내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복다방에 앉아 선을 봐야만 하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애 할머니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때가 타서 거의 회색으로 보이는 벽에, 너덜거리는 소파, 야한 수영복을 입은 여자들의 사진이 벽마다 걸려 있는 실내를 주욱 돌아보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태면 내가 별말을 안 해도 상대가 먼저 도망을 가지 싶다. 시골에서만 살아온 나조차 갑자기 80년대로 건너뛴 기분이 드는데 서울에서 내려올 사람의 감상이야 오죽할까.
더구나 내 몰골은 또 어떤가.
첫날 이후 맞선에 대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못할 뻔했다. 어제 저녁에 정애 할머니랑 전화 통화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까맣게 잊었는지 약속 시간을 30분 남겨 두었을 즈음 밭으로 부랴부랴 달려온 할머니를 보고서야 간신히 맞선에 대한 일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시간이 없어 화장도 못했고, 밀린 빨래를 한답시고 아침 일찍 옷이란 옷은 죄다 빨아 버린 탓에 몸엔 청바지와 흰 티셔츠만 간신히 걸쳤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말을 안 한다. 나는 노랑 고무줄로 질끈 묶은 머리에 흰색 야구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감지 않아서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머리칼 때문에 차마 벗을 수도 없는.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었다.
너무 엄청난 몰골이라 얼굴만 봐도 ‘아, 이 여자는 어른들 등살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왔구나.’라는 인상을 줄 게 틀림없었다. 그보다 더 심하면 아예 짝짝이 들고 북한에서 온 응원단원 중 하나로 봐 주거나.
‘아, 망했다.’
민망함 탓인가 아니면 더위 탓인가.
속에서부터 열기가 훅훅 불어오는 듯해 부지런히 손부채질을 해 보았다. 하도 뛰어서 눈앞이 노랗고 얼굴은 불이 붙은 듯 온통 화끈거리고 있었다. 상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에어컨이 고장 나서 그래. 조금만 있으면 금세 시원해질 거야. 여기가 바람이 잘 들어서 평상시에도 그냥 서늘하다니까.”
더위 때문인 줄 알고 환갑을 넘긴 마담 할머니가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털털거리면서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가 보였다. 바쁘게 팔랑거리던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재빨리 손을 내리고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많이 더운 날은 아닌데, 시간에 못 맞출까 봐 제가 급하게 뛰어오는 바람에…….”
“아니, 아직 시간도 남았는데 뭐하러 그렇게 서둘렀대. 그냥 천천히 오지. 남자도 아직 안 왔구먼.”
“그, 그러게요. 하하.”
“흥, 웃기지덜 말어. 내가 바짝 서둘지 않았으면 아예 못 올 뻔했다니께. 저 가시내가 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어야.”
막걸리 들이켜듯 냉수를 시원하게 들이켠 정애 할머니가 큰소리로 타박을 주었다. 그러곤 이마의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혹시라도 딴맘 먹을까 봐 하는 소린디 말여, 귀한 사람이니께 절대로 실례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헌다. 다정허니 말도 좀 곱게 하고. 평상시마냥 잘났다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지르지 말란 말여. 알았냐?”
“예? 아, 예.”
“그리고 어지간하면 그냥 이 사람 꽉 잡아. 이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녀. 결혼만 하면 너는 하루아침에 팔자가 확 펴는 거라니께. 어지간해서는 몸 고생, 맘고생 할 일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내가 맘먹고 일부러 여기로 온 거 아녀.”
“……?”
“여기가 ‘복다방’이잖여. 옛날부터 여기서 선본 사람들은 이혼이고 뭐고 없이 아들딸 낳고 끝까지 잘 살았구먼. 분위기는 이래도 터가 엄청 좋은지 여기서 선보고 결혼만 하면 그렇게들 잘 살아. 옛날부터 유명했었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다다다 늘어놓는 소리에 나는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솔직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유명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못 들은 걸 보면 보나 마나 엄청 오래전의 이야기가 분명했다. 설마 정애 할머니가 내 나이 때의 일이었던 것은 아닐까? 맨주먹 붉은 피를 부르짖던 그 시절의 유행 같은 거였다거나.
‘그런 건 좀 잊어 주시지. 요즘 다방에서 선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쪽팔리게.’
속은 그러했으나 차마 말은 못하고 나는 또 멍청하게 웃으며 그저 물만 축냈다. 어차피 차 한 잔만 마시고 금방 헤어질 생각이었으니 어쩌면 이렇게 된 게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물론, 시간 들이고 힘들이고 돈까지 들여서 먼 길을 내려올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게 웬 자연재해야.’라고 할 만한 일이긴 했지만.
‘애당초 선 한 번 보겠다고 이 시골까지 내려오는 게 더 이상한 거야. 대체 뭘 기대하고 오는 거지?’
약간의 의문이 뇌리를 스쳐 갔지만 곧 지워 버렸다.
노총각이니 급했나 보지. 그쪽도 할머니 등살에 못 이겨 억지로 내려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스물아홉도 서른이라고 우기면서 선을 보라고 성화를 부리는데 서른셋은 오죽했을까. 그래, 그런 거다. 갑자기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피차 그런 거라면 대강 차나 마시고 헤어지려는 내 계획에도 선선히 동의를 해 줄 터였다. 아, 이왕이면 미련 없이 시원하게 차 달라고 부탁할까?
‘좋았어. 한 시간도 아까우니까 30분만 개기다 냉큼 돌아가 밀린 일을 해치우자. 청소부터 할까?’
언제 걱정을 했던가 싶게 나는 금방 잔뜩 밀린 집안일로 관심을 돌려 버렸다. 그렇게 간신히 급한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시곗바늘이 마침내 정확하게 약속 시간을 가리키고 핸드폰에서 꼬맹이가 ‘1시!’라고 외친 순간, 별다른 소음도 없이 출입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낮의 눈부신 햇살과 함께 그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