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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3화


이거 놔라, 새꺄.
심순애도 아닌 것이 왜 남의 팔뚝을 잡고 지랄이냐. 아파 죽겠으니까 차라리 발목을 잡아라.
총알처럼 다다다 쏴 준 다음 붙잡힌 팔을 홱 뿌리치고 나는 얼른 튀었다. 한순간이라도 틈을 줬다간 또 붙잡혀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한참이나 듣고 있어야 한다. 안 그래도 피곤해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라 여기서 더 힘든 일을 만든다면 이대로 그냥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전에 없이 용감하게 내질러 주고 후다닥 튀었는데 그런 보람도 없이 용의주도한 양재호 놈은 벌써 물 찬 제비처럼 땅을 박차고 훌쩍 뛰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잠깐!”
소리와 함께 몸이 홱 돌아갔다.
인상을 제법 사납게 구긴 양재호가 성마르게 소리쳤다.
“야, 너 진짜 뭘 믿고 자꾸 튕기냐?”
“허! 뭐, 뭐라고요?”
“아니, 일부러 찾아왔는데 번번이 너무하잖아요.”
“기가 막혀서. 누가 오라고 했어요?”
“쳇, 하여간에 얘기 좀 합시다.”
“무슨 얘기요? 왜요, 또 내 가슴 사이즈가 궁금해요?”
나는 이를 앙 물고 소리쳤다.
양재호는 나름 허우대 멀쩡한 서른두 살의 남자였다. 남자는 남자인데 한량 짓에 도가 튼 바람둥이 변태다. 비싼 밥 먹고 하는 짓이라는 게, 오늘처럼 불쑥 나타나 가슴만 뚫어지게 바라보다 문득 손가락으로 툭 가리키며 ‘거기 사이즈가?’라고 묻거나 대뜸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치고 튀는 식이었다. 그게 바로 지난주의 일이었다. 그 전 주에는 남자 경험을 물었고, 그전에는 밑도 끝도 없이 돈 자랑질을 하고 갔었다. 어쨌거나 아주머니들의 농담처럼 연애 감정을 키워 볼 만한 상대가 애초에 아닌 것이다.
“크흠, 아니 무슨 여자가 이렇게 사나워. 다른 여자들은 안 그러는데…….”
제가 한 짓이 민망하긴 한지 그는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또 가관이었다.
“방금 전에 만나던 여자랑 헤어지고 왔단 말입니다.”
“그래서요?”
“……진지한 거 아니고 그냥 잠깐 만나는 거였습니다. 어쨌거나 다 정리했다고요.”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요?”
“사귑시다!”
“……!”
“연애하자고요. 진지하게!”
‘진지하게’를 강조하면서 그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기가 무섭게 머리 꼭대기가 뜨끈해지면서 갑자기 숨이 턱 막히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가 아니라 너무 기가 막혀서. 날도 더워 죽겠는데 이젠 혈압도 오른다. 대체 뭐 이런 덜떨어진 놈팡이가 다 있나.
“오늘 엄청 더웠죠?”
그 못지않게 심각한 어조로 나는 말했다.
“이달 들어 최고로 높은 기온이었다고 뉴스에서 그러더라고요.”
“에? 뭐, 그야 여름이니까…….”
“자꾸 헛소리를 하시는 거 보니까 아무래도 더위를 드신 것 같은데 얼른 집에 가세요. 더위 먹은 덴 약도 없다고 하잖아요.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놓고 냉수 한 잔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
“그리고 나 때려죽여도 그쪽이랑은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냉정한 일갈과 함께 나는 후딱 돌아서서 미친 듯이 뛰었다.
돌아가신 엄마가 그랬다. 자고로 도박, 술, 여자에 빠진 남자는 아무리 허우대가 멀쩡하다고 해도 절대로 가까이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양재호는 여자를 즐기는 남자였다. 안 그래도 수시로 바뀌는 여자 문제로 이 좁은 지역사회에 벌써 소문이 자자했다. 워낙 손이 귀한 집이라 여자가 수시로 바뀌든 말든 그 집안에서는 그저 오냐오냐 한다는 사실과 함께.
“진지하게는 무슨! 석 달만 즐기고 바로 차 버리는 것도 진지한 거냐? 하여간에 나쁜 놈. 콱 병이나 옮아라.”
대문간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그렇게 인생 최대의 저주를 퍼부어 주었다. 그런 놈에게 찍혀서 때마다 피곤한 일을 겪고 있는 스스로가 불쌍하기까지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반년째가 아닌가 말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지저분한 시련을 겪게 하시나.
“진드기 같은 자식. 그런 놈들은 아예 남자구실을 못하게 만들어 버려야 돼. 암튼, 귀신은 뭐하나 몰라. 그놈 안 잡아가고.”
쌀 씻어 안치고 부랴부랴 찌개를 끓이면서도 중얼거림이 쉬이 그쳐지지 않았다. 시집 못 간 노처녀가 타령까지 한다고 할까 봐 혼자서 주절거리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쌓인 피로가 많은 만큼 오늘따라 입이 쉬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올해는 사과가 참말 좋다.”
저녁 무렵 흙투성이가 된 바지를 털면서 들어온 아버지가 대강 씻고 밥상 앞에 앉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올해는 바람도 잘고 비도 없어서 그런지 사과가 아주 이쁘게 빠졌다잉. 잘만 여물면 엄청 달겄어.”
“그래요? 그럼 값도 좀 더 받을 수 있겠네요?”
“암만! 이대로만 가면 너 시집보낼 돈은 충분히 나올겨.”
“예? 시, 시집요?”
“클클, 정애 할매가 너 선보인다고 하더라. 좋은 자리라고 입에 침이 마르던디.”
“어머, 벌써 다녀가셨어요?”
고집이 센 만큼 발도 빠른 정애 할머니.
벌써 바람처럼 달려와 아버지에게 맞선에 대한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그날 꼭 내보내마.’ 하는 약속까지 받아 가지고 갔단다. 어지간하면 기회를 봐서 정중히 사양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손을 쓸 틈이라곤 아예 없어지고 만다. 다시 한 번 패배감을 느끼며 나는 입술을 씹었다.
“갈 때가 되긴 했지.”
타들어 가는 딸내미의 속도 모르고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올 가을에 하면 참 좋겄다잉. 그챠?”
“아이고, 됐어요. 저 아직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괜한 말씀하지 마시고 얼른 저녁이나 드세요. 선본다고 다 결혼하나 뭐?”
“하면 좋은 것이지. 엄청 잘난 사람이라는디.”
“엄청 잘난 남자가 왜 이런 시골에서 여자를 찾는대요? 다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그런 거죠. 혹시 알아요? 술 마시고 도박하는 남자일지. 그게 아니면 여자를 때리는 놈이거나 혹은 뒤로 감춰 둔 여자가 한 다스쯤 된다거나.”
“에이, 설마…….”
“글쎄 ‘설마’가 아니라니까요?”
어림도 없다는 듯 나는 단칼에 말을 잘랐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일에 공연히 기대를 걸게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은 결혼을 할 때가 아니라 미준이 등록금을 마련할 때니까. 더구나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 ‘설마’가 종종 사람을 잡지 않던가. 행운과는 아주 거리가 먼,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윤미숙 팔자대로라면 딱 양재호 같은 놈이 나와 복장을 확 뒤집어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돈 생기면 농협에 이자부터 넣어야지 결혼은 무슨……. 암튼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부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맞선에 대해 나는 벌써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만날 수밖에 없다면 그냥 나가서 차나 한잔하고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차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서 거국적으로 걷어차이면 된다. 가능하면 빼도 박도 못하도록 단박에! 시골 여자도 콧대가 하늘을 찌를 수 있음을 증명해 주면 제가 알아서 달아나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굳이 진상을 떨지 않아도 차이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고, 그것은 곧 나의 신상에도 이로운 일이 될 것이었다. 아, 상대가 싫다는데 고집쟁이 정애 할머니인들 어쩔 것이냔 말이다. 장담하건대, 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오고 가는 시간까지 합해 넉넉잡아 한 시간이면 충분히 결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 일어나 밭에 잠깐 나가 보고 오후엔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역시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으로 약속을 잡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앉을 필요도 없이 계획대로 차나 한잔 마시고 가뿐하게 헤어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암, 시간은 절약할수록 좋은 것이지.
“다행이다, 사과가 잘되어서. 그럼 대출을 좀 더 쓰고 사과 따면 갚을까?”
설거지를 하면서도 나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맞선에 대한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하루 종일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던 미준이 등록금 생각이 또 머릿속을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목돈이 들어가는 일이라 그런지 나로서도 도저히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딜 가야 돈을 좀 더 수월하게 마련할 수 있으려나.
“이자는 얼마나 되려나? 미주 등록금도 준비를 해 놓아야 할 텐데…….”
그때였다.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문이 슥 열리더니 교복을 입고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막내가 불쑥 들어왔다. 더위 속에서 공부하느라 지쳤는지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이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오니?”
“……응.”
“배고프지? 밥 차릴까?”
“생각 없어.”
걱정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주는 우울이 착 달라붙은 얼굴로 무심히 대꾸하며 휘청휘청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재빨리 따라붙었다.
“왜 생각이 없는데?”
“그냥 없어.”
“밥 싫으면 냉면이라도 해 줄까?”
“됐어, 나 잘 거야.”
탁!
냉랭한 말을 끝으로 코앞에서 문이 탁 닫혔다.
그 버릇없는 모습에 순간 울컥했지만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해 나는 그냥 참는 쪽을 선택했다. 막내가 얼마 전에 기말고사 성적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