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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의 로맨스
2화


“그런데 소은 선생님, 나이가 어떻게 돼요? 많이 앳돼 보이네.”
“저, 빠른이라서 학년으로는 이미 졸업했지만, 나이는 이제 스물세 살입니다.”
“어머, 나도 빠른인데 학창 시절에는 애들이 하도 놀리니까 빠른이 나쁜 건 줄 알았는데, 사회에 나와 보면 좋아요. 친구들 서른 먹을 때 혼자 이십 대고, 한 살이라도 어린 게 어디예요?”
대화를 하면서도 긴장감에 심장이 곧 머리를 뚫고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뛰었다. 그리고 그 심장이 멈춘 것은 고 선생님이 교실 앞문을 열어 버렸을 때였다.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다가 고 선생님과 소은을 보고는 헐레벌떡 자리를 찾아 앉았다.
“첫날부터 반이 이렇게 지저분하면 어쩌자는 거야?”
고 선생님은 작은 체구답지 않게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들고 있던 막대기를 바닥에 휘둘렀다. 무심한 듯한 그녀의 손짓에 쓰레기들이 밀려 나왔다.
“안 주워? 누가 내 방에 이렇게 함부로 휴지들을 버려?”
아이들이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기 위해 연신 몸을 구부렸다. 교실 한 바퀴를 쭉 돈 고 선생님은 다시 교탁 앞으로 와서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소은의 어깨에 팔을 감쌌다.
“자, 나는 작년에 너희들이랑 수업을 해서 다들 알고 있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리고 우리 반을 담당하게 된 부담임 정 선생님을 소개한다.”
아이들의 눈이 갑자기 반짝이더니 곧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반응에 소은이 화들짝 놀랐다.
“역시, 내 눈에만 정 선생이 예뻐 보이던 건 아니었나 봐.”
고 선생님이 싱긋 윙크를 하며 작은 목소리로 아이들이 왜 이 난리를 치는지 힌트를 말해 주었다. 그러고선 소은의 어깨를 살며시 교탁 쪽으로 밀었다. 소은이 더욱 굳은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무거운 입술을 떼어 내려고 하던 그때였다.
드르륵하고 뒷문이 열리더니 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보통의 남학생들보다도 상대적으로 키가 큰 아이는 교탁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빈자리로 향했다.
어쩐지 얼굴 가득 반항기가 묻어나 있어서 소은은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서 금세 눈을 떼 버렸다.
“너 지금 오는 거니?”
하지만 고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굳이 다가가면서까지 물었다. 문득, 오랜 경험이 저기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밀려서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애치고 목소리나 표정이 당당해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래. 죄송하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니…….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러니?”
“고양이한테 긁혔어요.”
고양이한테 긁힌 자국이 절대 아니었다. 피멍과 까진 살결. 고 선생님도 그것을 눈치챈 듯하지만 제 시선을 외면해 버리는 아이에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깨를 다독인 후 쓸쓸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고양이 녀석 다음에 데려와. 선생님이 혼내 줄 테니까.”
교실 뒤쪽으로 향한 고 선생님이 다시 얘기를 하라는 듯, 소은에게 눈짓을 했다. 소은이 다시 입술을 떼어 냈다.
“안녕. 나는 정소은 선생님이라고 해. 과목은 미술이고, 뭐 필요한 것이 있다든가,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와서 상담해도 좋아. 앞으로 1년 동안 너희의 부담임으로서 열심히 할 테니 잘 부탁해.”
“선생님! 저요! 저 지금 당장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뭔데?”
“제가 방금 연상녀에게 사랑에 빠진 것 같은데, 어떻게 작업을 걸면 될까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던 소은의 시선이 하필이면 그 아이에게 닿고 말았다. 삐딱하게 앉아서는 지그시 소은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는 장난기가 다분한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깊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고작 열여덟 살 아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고단함과 묘한 눈동자에 소은은 또다시 다급하게 시선을 피해야 했다. 어쩐지 그 눈빛이 무섭기보다는 너무 서글퍼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1교시 준비해!”
계속 대답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아이들을 제지시키며 고 선생님은 소은을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고 선생님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교탁 앞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교탁 앞이 아닌 그 아이의 앞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에 들어온 학생 이름은 박담호야.”
“…….”
“엄마는 집을 나가시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래. 그래서 자주 담호에게 폭행을 가하나 봐. 나도 쟤 1학년 때 담임한테 전해 들었어. 얼굴 보고 말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아이가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야. 휴…….”
한탄하는 고 선생님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소은은 그저 조용히 뒤를 따를 뿐이었다. 복도를 꺾어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참에 무의식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막 교실에서 나온 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피하지 않는 담호를 눈에 담은 채, 소은은 계단을 내려왔다.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부모님이 원해서 택한 직업이라 직업 정신이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소은은 자신이 한창 수업 중인 2학년 7반을 기웃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기만 했다.
“어딜 간 거야…….”
그러면서도 비어 있는 담호의 자리가 마음에 걸려 결국 학교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수업을 땡땡이치고 있을 녀석을 찾기 위해서였다. 흔히 학생들이 가 있을 만한 곳을 몇 군데 가 보았지만 담호는 없었다. 전교를 샅샅이 뒤지고 마지막으로 옥상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 나 파산! 파산!”
담호의 목소리는 분명 아니었지만, 학생의 목소리였다. 소은의 작은 심장이 펄펄 뛰기 시작했다. 행여나 질 나쁜 학생과 맞닥뜨려 무시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돌아서려던 소은이 다시 걸음을 멈칫했다.
그래도 선생님이다. 무섭다고 학생들이 옳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선생님.
소은이 굳게 다짐을 하며 옥상 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놈들! 수업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호기롭게 윽박을 지르며 옥상으로 들어갔지만, 보여야 할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소은이 어리둥절하며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쌤!”
소리는 위쪽에서 들려왔다. 소은이 올려다보자, 옥상 문 위쪽 꽤 높아 보이는 작은 공간에서 한 남자아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소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와는 다르게 여느 남학생과 다를 바 없는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위험하게 거기 올라가서 뭐 하는 거야?”
“부루마블 게임이요!”
“뭐?”
“쌤도 한 판 하실래요?”
“이노옴! 지금 수업 시간에 땡땡이치는 것도 부족해서 그 위험한 곳에 올라가? 얼른 안 내려와?”
정말 화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최대한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이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겁을 먹은 걸까?
“쌤 많이 화나신 거 같아서 무섭다. 우리 얼른 내려오라는데?”
아이의 말에 곧 두 개의 머리통이 불쑥하고 소은에게로 내밀어졌다.
“담호야!”
그중 한 명은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고 있던 담호였다.
“얼른 내려와. 수업 들어가야지.”
처음부터 나무라면 더 삐뚤어져 나갈까 싶어서 타이르듯 좋게 얘기했지만 담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나른해지는지, 아예 팔을 뻗어 그 위에 제 머리를 기대고선 소은을 바라보았다. 양지에서 햇살을 만끽하는 팔자 좋은 고양이처럼 보였다.
“박담호. 이놈! 얼른 안 내려와? 선생님 정말 화낸다!”
담호를 나무라고 있는데, 아까 제게 처음 말을 걸었던 아이가 갑자기 불쑥 몸을 내밀었다.
“쌤! 제 이름은 연우예요. 양연우!”
“그래. 연우야. 얼른 네 친구들 데리고 내려와.”
소은이 재빠르게 그나마 제일 가능성 있어 보이는 연우로 타깃을 바꾸어 보았다.
“저희 내려가면 뭐 해 주실 건데요?”
“내가 꼭 뭘 해 줘야 하는 거니?”
담호를 제외한 두 아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째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소은이 실없이 웃고 말았다. 그래, 아이들이 수업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뭐든 못 해 줄까?
뭘 해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에 연우와 담호가 아닌, 뭔가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아이의 입술이 떨어졌다.
“오늘 학교 끝나고 햄버거 세트를 사 주신다면 내려갈 의향이 조금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넌 이름이 뭐니?”
“고태조입니다.”
“그래. 햄버거 세트 사 줄게. 두 개씩 사 줄게. 얼른 내려와.”
“네!”
반쯤 누워 있던 연우가 재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머! 위험해!”
어디 계단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위에서 바로 뛰어내려 착지했다. 그 뒤로 태조도 잇따라 내려왔다. 하지만 정작 소은이 데리고 가야 할 담호는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야. 너 왜 안 내려와?”
연우의 물음에도 담호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소은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쉽지 않은 아이라는 것은 처음 마주할 때부터 직감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아이라면 어쩌나 걱정이 몰려왔다. 유독 선명해서 외로워 보이는 담호의 눈동자가 소은을 담아냈다.
마치 밀어 내는 것처럼 강하게 몰아붙이는 그의 냉랭한 눈빛에도 소은은 꼼짝하지 않았다.
“얼른 안 내려와?”
“네. 안 내려가요.”
“왜!”
“수업 듣기 싫으니까요.”
소은이 제 주변에 있는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니들 먼저 내려가 있어. 그리고 방과 후에 교무실로 와. 햄버거 사 줄게.”
“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조라는 아이는 말투가 좀 특이하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임에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쌤! 그렇다고 담호 너무 많이 혼내시면 안 돼요!”
활기찬 연우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소은은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여전히 여유롭게 엎드려 있는 담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업 들어가자, 담호야.”
이젠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며 딴짓이다. 햇빛은 다사로운데 바람은 꽤 쌀쌀했다. 봄은 아직도 겨울에 미련이 남기라도 한 것처럼 여름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지 못하고 있었다.
소은이 가만히 담호를 올려다보았다.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던 담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소은의 시선과 부딪쳤다.
“들어가서 공부해야지. 너 이제 내년이면 고3이야.”
“공부하면 뭐 해요?”
“공부하면 뭐 하냐니? 당연히 좋은 대학도 가고…….”
“대학?”
담호의 목소리에 허탈함이 잔뜩 배어 있었기에 소은은 잠시 입을 닫아야 했다.
“어차피 공부하나, 안 하나, 전 취업할 거예요. 가고 싶은 대학도 없고 갈 수 있는 대학도 없어요.”
순간, 얼굴도 모르는 담호의 아버지가 술병을 들고 아이를 구타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곳에서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야 하는 담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제가 불쌍해요?”
그 감정이 고스란히 밖으로 나와 버렸는지, 어느새 예민해진 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소은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담호가 몸을 일으켜 뛰어내리곤 가볍게 착지해 소은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불쌍해 죽겠다는 눈빛.”
화가 많이 났는지 담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눈 한 번 끔뻑이지 않고 저를 마주하고 있는 담호의 얼굴에 난 상처들이 생각보다 꽤 깊어 보였다. 하지만 얼굴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깊은 것 같아서 소은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널 그렇게 쳐다본 건 맞아. 하지만 떠도는 너의 소문 때문이 아니야. 네 나이에 꿈이 없다는 게, 장래희망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야.”
“선생님.”
“…….”
“지옥에서 꿈은 낭비예요.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꿈은 무슨 꿈. 그런 건 여유가 남아도는 애들이나 있는 거라고요.”
미동 하나 없이 단언하는 담호의 덤덤한 말이 소은을 더욱 마음 아프게 했다. 무엇이 저 아이를 이토록 희망도 없는 곳에 가두어 놨을까. 한창 꿈꾸고 먹고 뛰어 놀기도 바쁠 아이를. 치열하고 지독하고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아이건만…….
미련 없이 매정하게 돌아서는 담호를 소은이 따라나섰다.
“그래도 수업엔 들어가. 넌 그곳에 있어야 돼.”
“…….”
“네가 하고 싶은 일은 선생님이랑 차차 찾아보자. 선생님도 네 나이 때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 많이 했었어. 선생님이 도와줄게.”
앞서 걷던 담호의 걸음이 우두커니 멈추었다. 담호의 걸음을 따라가던 소은도 뒤에서 움찔하고 멈추고 말았다.
“담호야.”
“그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진심도 아니시잖아요.”
누가 이 아이를 혼자, 이리도 외롭게 놔둔 것일까. 유난히도 처져 있는 아이의 어깨가 좀 전과는 다르게 작아 보였다. 마음이 울컥해졌다.
“기대려고 하면 부담스럽다고 도망가 버릴 거면서.”
담호는 외딴 섬에 혼자 피어난 나무같이 외로워 보였다. 가을을 맞이해 잎사귀들이 다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버석한 나뭇잎들이 차가운 바람에 부서져 사라진 후에 홀로 서 있는…….
가히 보는 것조차도 서글플 정도로 지독히도 외로워 보이는 아이.
고작, 열여덟 살의 아이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이 소은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도망 안 갈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오늘 처음 만난 담호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자부심과 책임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선생님, 도망 절대 안 갈게. 그러니까 언제든지 찾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지 않으면, 아이의 축 처진 어깨가 조각조각 부서져 버려서 차가운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담호가 교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들어가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자 버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교실에 담호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해하며 소은은 교무실로 내려왔다.
“어디 갔다 와?”
수업이 없는 시간인지 자리에 있던 고 선생님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소은은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을 고 선생님에게 이야기해 주면서 상담을 했다.
“나도 1년 동안 담호를 위해서 뭐든 해 보려고. 그러니까 정 선생도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담호한테 신경 좀 써 줘.”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