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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환생기 (25화)

뜻밖의 행운 ― (2)


자식들의 떼죽음을 알았던 것일까.
쿠아아아앙!
석회암 동굴 저 깊은 곳에서 지축을 울리는 고성이 울렸다.
겁이라도 먹을 만하지만 일행들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자신감이 비추고 있었다.
“갈까?”
“까짓 거 가시죠.”
이 남자와 함께라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아라고네스의 서식지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쉬웠다.
아까의 격전으로 인해 아라네아의 씨가 말라버린 듯했다.
가면서 지처에 아라네아의 알이 널려 있었는데, 그것을 부숴버리는 것이 일이랄까.
쿠르르르르.
아라고네스의 괴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렌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대책은 물론 있으시겠지요?”
“대책? 응. 뭐, 그냥 때려 부수는 거지.”
“아니, 뭐… 아까처럼 진 안에서 기력을 보충해 가며 싸운다거나, 아니면 아까 화공처럼 기발한 방법이 있다거나…….”
“없어. 아라고네스 같은 놈한테 그런 게 통하겠어?”
“맙소사…….”
로렌트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따라오던 모든 이의 얼굴 또한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크르르르르르.”
하나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쿠웅.
동굴을 울리는 강한 울림.
아라고네스가 자신의 거처로 들어온 침입자를 감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투두두두둑.
천장에 달린 종유석 일부가 그 충격으로 떨어졌다.
쿠웅.
그리고 드디어 나타난 거대한 형체.
“으으… 아라고네스…….”
헤른이 비명 같은 신음을 집어삼켰다.
그만큼 충격적인 모습.
일단 크기부터 확연히 달랐다.
보통의 아라네아가 사람의 허리까지 온다면 아라고네스는 사람 크기의 다섯 배를 넘어섰다.
그리고 얼굴은…….
“마… 맙소사. 마물 도감 얘기가 사실이었어. 얼굴이 사람 얼굴처럼 생겼다더니.”
“그… 그러게요. 저도 믿지 않았는데…….”
로렌트와 옴므트리체의 대화.
미카엘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이봐! 저건 아무리 봐도 인면지주잖아.’
아무리 달리 보려 해도 중원에서 내단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영물, 인면지주의 모습이다.
은근한 목소리로 미카엘이 물었다.
“저기, 혹시 아라고네스는 죽이면 뭐 좋은 거 나온다는 얘기 없어?”
‘내단일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비는 미카엘에게 로렌트는 야속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라고네스한테는 마정석은 안 나온다는데요.”
“아니, 그거 말고. 먹는 거…….”
“예에? 먹는 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순식간에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자 미카엘은 일단 잡고 나서 확인하기로 했다.
“암, 맞을 거야. 그렇지?”
이미 미카엘에게 아라고네스는 인면지주였다.
거기다 이곳의 인간들은 내단의 존재를 아직 모를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저것이 진짜 인면지주이고 그 안에 내단이 있다면 그것을 복용 시 족히 일 갑자는 넘게 내공을 증가시켜 줄 것이다.
미카엘의 눈에 시퍼런 안광이 담겼다.
“흐흐흐, 기다려라. 이 내단 덩어리.”
“예? 그나저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일단 도망가시죠!”
로렌트는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마 어렌과 로렌트가 기사라는 직분에 충실하여 각을 세울 뿐, 무력이 약한 수호대와 헤른은 아라고네스가 뿜는 살기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럴 만한 게, 상대는 크기만 해도 가로 세로가 15피트를 넘어서는 괴수급 마물이다.
로렌트는 최종적으로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진짜로… 진정으로 대책이 없으십니까?”
“대책? 있지. 내 진짜 실력을 발휘하는 거.”
“예?”
로렌트가 의문을 갖고 고개를 돌렸으나, 대답을 해주어야 할 대상은 이미 없었다.
퍼캉.
득달같은 쾌속 공격.
“도… 도련님!!!”
“미카엘 님!”
기겁한 일행들이 소리를 질렀으나,
“어서 빨리 내단을 내놔! 이 자식아!”
이미 눈이 돌아간 미카엘은 들을 여력이 없었다.
크르르르.
아라고네스는 분노의 일격을 가했다.
철각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다리가 연이어 미카엘을 가격하기 위해 휘둘러졌으나, 이 작은 인간은 신묘한 방법으로 피해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아라고네스의 공격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몸체에 접근하기까지 하였다.
퍼캉.
드디어 미카엘의 검격이 다리에 닿았으나, 충격을 받은 면이 출렁이며 크게 동심원이 퍼졌다.
“이런…….”
미카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서 검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검을 놓칠 뻔한 상황. 그만큼 손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정도로는 전혀 안 통하는군.”
위를 올려다보니 아라고네스가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 얼굴이라 더 기분이 나빠.”
키헤에에엑.
때마침 터진 강한 충격파.
“크악!”
“으악! 내 귀!”
뒤쪽에 있던 로렌트 일행들은 난리가 났다. 아라고네스의 음파 공격이 고막을 뒤흔든 것.
쉬이이이이이.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거무튀튀한 입에서 뿜어 나오는 끈끈이 덫 같은 독연무가 빠르게 미카엘을 덮친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어렌이 놀라 소리 질렀다.
치이이이익.
미카엘은 독연무를 피해 이리저리 신형을 움직였다.
하지만 곧 사방이 끈끈한 독연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저기에 닿으면 바로 몸이 마비됩니다!”
로렌트의 비명 같은 외침.
미카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사십 년의 내공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표피에 있는 내공을 풀거나.
아니면…….
“너에게 처음 사용해 보는군. 신체 강화.”
미카엘의 내공이 분출되는 화산처럼 폭증하기 시작하였다.
“아니! 나한테는 그렇게 신체 강화술 하지 말라면서!”
당연히 로렌트는 발끈하였다.
“너의 신체 강화술 하고는 원리가 다른 거야. 이건 생명이 깎인다거나 하는 부작용이 없어.”
“네?”
로렌트의 반문에 대답해 주는 대신 순식간에 공간을 좁힌 미카엘.
퍼카카카카칵.
운룡출해의 검식으로 괴수의 턱뼈를 아작내었다.
“크케헤헤헥!”
순간 충격으로 위로 튀어 오른 아라고네스.
미카엘은 그걸 바로 원앙퇴로 직각으로 차 올려버렸다.
퍼펑.
몸체가 종유석을 부수고 올라갔다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미카엘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빛살처럼 빠르게 고성화천의 식으로 꿰뚫어 버리는 전광석화의 쾌검.
“크아아아앙!”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다.
일련의 공격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유기적으로 돌아갔다.
“맙소사!”
신체 강화술 하나로 한순간에 아라고네스를 압도하자 모두는 그만 벙찌고 말았다.
“나의 신체 강화는 자연지기를 끌어모아서 사용하는 것이다.”
원리 자체가 다르다. 이계의 신체 강화술은 생명력을 근간으로 증폭하는데 반해 미카엘이 고안해 낸 신체 강화술은 북명신공으로 자연지기를 끌어모아 순간적으로 폭증시키는 원리였다.
워낙 이계의 자연지기가 풍부하기에 쓸 수 있는 방도이기도 하다.
“젠장, 벌써… 효과가 떨어졌나.”
하지만 아직 미완성이기도 하다. 너무나 지속시간이 짧았다.
“크르르르르.”
아라고네스는 그새 충격을 회복했는지, 신형을 바로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두두두둑.
이제부터는 아라고네스의 시간.
분노한 괴수의 철각이 미친 듯이 미카엘을 쫓아 내리쳐지기 시작했다.
“젠장…….”
일순간 단전이 텅 비어버렸기에 미카엘은 피하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가 도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놀란 로렌트와 어렌이 분분히 뛰어들었다.
“이 바보들!”
미카엘은 침음을 삼켰다.
자신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퍼엉.
“크악!”
“으헉.”
일격에 어렌과 로렌트는 석벽에 처박혔다.
심지어 로렌트는 그렇게 하지 말라던 신체 강화까지 한 상태였는데, 한순간에 당해버렸다.
“아이스 볼트.”
그 와중에 발출된 옴므트리체의 마법.
바가각.
미카엘을 덮치려던 아라고네스의 거미 발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좋았어.”
미카엘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곧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르!”
그 무지막지했던 옴므트리체의 마법은 아라고네스에겐 그저 잠시간의 방해에 불과했다.
짜증을 담은 포효가 울려 퍼지자 옴므트리체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공격!”
수호대가 뒤에서 미친 듯이 화살을 뿌렸으나 그건 방해조차 안 됐다.
“크하하하아!”
오히려 화를 돋운 듯, 이차 충격파가 지하 공동을 울렸다.
“으아악!”
“어지러워…….”
충격파가 귓속을 파고들자 순간적으로 평형감각에 이상을 느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아… 안 돼!”
헤른의 비명성.
미카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큰 결심을 했다.
“내 표피 내공을 풀게 했으니 죽었다고 복창해라”
십이 년 동안 한 번도 풀지 않았던 표피 내공을 푸는 순간이었다.
“뭐… 뭐지?”
모두가 쓰러진 가운데 옴므트리체만이 그 순간을 볼 수 있었는데, 무엇인가 미묘하게 미카엘의 얼굴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죽어라!”
한꺼번에 90년의 내공을 풀었다.
그런 만큼 이번에 실린 공격은 남달랐다.
거기다가 신체 강화술이 증폭되니…….
쿠앙!
“크아아아악!”
비명성과 함께 튕겨진 아라고네스.
위맹했던 모습과는 달리 어느새 아라고네스의 철각 두 개의 마디가 끊어져 있었다.
아라고네스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포식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은 늦은 감이 있었다.
“화.룡.출.현.”
눈이 돌아간 미카엘은 검에 극강의 양기를 담았다. 현천검 후반 삼 초식을 제외하면 가장 위력이 강한 극양의 검식.
쉐에에에엑― 펑!
아라고네스는 화룡의 분노를 맞상대하는 순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감히 마물 주제에.”
미카엘은 그제야 진정이 되는지 검을 신경질적으로 검집에 꽂았다.
“다들 괜찮은 거야?”
“끄응… 괜찮습니다.”
“아이고, 허리야… 다행히도 부러지진 않았네요.”
“음. 다행이군.”
그나마 어렌과 로렌트가 무사한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미카엘은 자신이 잊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아뿔싸! 내단! 아, 안 돼. 이거 불 꺼야지. 불.”
미카엘은 정신없이 검면으로 불을 잡아 끄고는 그대로 아라고네스의 뱃속을 갈랐다.
“하아… 얼마나 아라고네스에게 치를 떠셨으면.”
“역시 주군은 위맹하시다.”
같은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두 사람.
한편 한참을 아라고네스의 뱃속을 뒤지던 미카엘은 희희낙락한 얼굴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손에는 시커먼 빛깔의 내단 덩어리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내단이 있구나. 하하하하.”
“역시 주군께서는 적이 편안하게 영면을 취하는 것도 용서치 않으시는구나. 잔혹할 때는 잔혹하신 주군이시다!”
어렌의 헛소리를 들은 체 만 체. 그저 미카엘은 내단을 얻은 기쁨을 만끽하였다.
“그런데 도련님. 아까 아라고네스에게 얼굴 한 방 맞으셨어요? 이상하게 얼굴이 많이 무너지셨는데.”
“헙.”
미카엘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숙였다.
“그… 그래. 아까 심하게 한 방을 맞았지 뭐야.”
“아이고, 진짜 심하게 맞으셨나 보네.”
‘이 녀석이…….’
미카엘은 쌍심지를 켰다.
딱 절반만 풀었을 뿐인데도 부작용이 심한 모양이다. 옆을 보니 옴므트리체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보이는 것이 보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그녀가 슬쩍 말을 건넸다.
“지금 그 얼굴이 더 낫네요.”
“젠장…….”
그녀의 심미안이 극히 안 좋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입맛이 썼다.
“진짜요. 저는 그게 더 좋아요.”
“저도요, 도련님. 지금이 더 인간적인데.”
“시끄러워. 나 얼굴 붓기 가라앉혀야 하니까 너희들은 아라네아 때문에 무너진 동굴 입구 돌이나 치워.”
“지, 진짠데…….”
로렌트가 투덜거리며 돌아섰고, 미카엘은 털썩 주저앉아 외모를 수복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