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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하얗고 굵은 눈송이가 혜원의 작은 어깨 위로 나부꼈다. 교문 앞에 차를 대기하고 있던 진성이 눈을 맞고 달려오는 혜원을 발견하고 보조석 문을 급히 열어 주었다.
“우산이라도 좀 쓰고 오지.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리 달려와.”
“아저씨. 어서 출발해요. 강준 오빠 기다려요.”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내며 혜원이 재촉했다.
고된 공부를 마치고 서울 유명 의대에 입학 허가를 받은 혜원은 어느덧 스물이라는 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부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다 보니 요즘 들어 얼굴이 많이 여위었다. 통통하던 볼살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선이 고운 이목구비에 아스라하고 고혹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이런저런 일로 힘들 텐데,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그보다 한 간호사님은 서울에서 돌아오셨어요?”
“그래. 네 덕분에 그 사람이 마음 놓고 외출도 하는구나.”
청평 별장 살림을 도맡아 하는 진성은 정숙의 남편이었다. 얼마 전까지 정한그룹 기획실에서 근무했던 그는 최근 퇴직하면서 정숙이 있는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 박사님도 다녀가셨고요?”
“그럼.”
진성이 빙긋 웃었다. 제아무리 바빠도 강준에 대한 일만큼은 야무지게 챙기는 혜원이였다. 별장 일을 거드는 사람들이 농을 섞어 작은마님이라 부르는 것도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여전히 의식 없이 누워 있지만, 혜원의 정성 탓인지 강준은 점점 화색이 돌고 마른 몸에도 살이 붙었다.
수액으로 영양을 공급받는 환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달라진 모습에 그를 진료하는 의사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보다, 별장에 손님이 와 있단다.”
“손님이요?”
“사모님께 들었지? 미국에서 공부 중이던, 강혁이 귀국했다고. 지금 별장에 와 있어.”
느닷없는 말에 혜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장 여사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늘 강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 여사가 끔찍하게 증오하는 아들이자, 그가 낸 사고로 의식을 잃은 강준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
오만하고 냉정한 성격 탓에 늘 강준과 비교 대상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
강준을 향한 마음 탓일까. 잡힐 듯이 가까이 느껴지는 그의 존재가 늘 두려움과 함께 불편한 기분을 끌어냈다.
“그분은 어떤 분이세요?”
“누구, 강혁이?”
“네.”
“사내 중의 사내지. 인물도 출중하고 똑똑한 데다 성격까지 딱 부러지고. 돌아가신 전 회장님을 그대로 빼닮은 녀석이야.”
강준 오빠 아버지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지녔다는 정한그룹의 창립자 겸 전 총수. 몇 년 전 지병으로 별세했지만,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화제가 되는 인물이었다.
“정말 그분이 낸 사고로 강준 오빠가 저렇게 된 거예요?”
내내 품었던 궁금증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혜원이 물었다.
“그건 단순한 사고였어. 강혁이도 당시 외상이 꽤 깊었단다.”
“하지만, 사모님 말씀으로는…….”
“강혁이가 고집스럽고 못된 구석이 있긴 했어. 게다가 전 회장님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일찌감치 강혁이를 그룹 후계자로 점찍고 매몰차게 몰아붙였지. 어린 나이에 부친의 지나친 기대와 모친의 따가운 외면을 받고 자랐으니, 당연히 성격이 비뚤어질 수밖에. 사실 나는 강준이보다 강혁이가 더 마음 쓰이고 안타깝게 느껴졌어.”
“그래도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저렇게 누워 있는 형을 한 번도 찾지 않고 안부조차 묻지 않는다는 것이.”
“글쎄다. 사람 속을 다 어찌 알겠냐만은 강혁이도 나름의 상처가 있겠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잡목 숲이 솜이불을 두른 것처럼 하얀 눈으로 소복하게 덮였다. 혜원은 현관 입구에 주차된 검은색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날렵한 느낌의 낯선 차를 보자, 강준이 있는 별채로 숨어들고 싶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별장에 찾아 든 낯선 손님, 까닭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쩌면 직감이 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차에서 내린 진성이 혜원을 향해 말했다.
“나는 먼저 별채로 갈 테니, 어서 들어가서 인사부터 해라.”
혜원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감색 투피스 차림의 장 여사가 테라스를 바라보며 난 높다란 창 앞에서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그래서, 오자마자 네 멋대로 회사를 휘두르겠다고?”
금속성과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에 안으로 들어가려던 혜원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이미 이사회에서 결정 난 일입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반대하셔도 소용없어요.”
나지막한 중저음이 한껏 고조된 장 여사의 목소리와 대조되어 넓은 실내를 무겁게 울렸다.
혜원의 시선이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앉아 있는 넓은 어깨에서 멈추었다.
가죽 의자 손잡이에 팔을 걸친 남자의 뒷모습을 보자, 까닭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습관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는 남자다운 손과 그 아래로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지나서 검은색 구두에 그녀의 시선이 옮겨 갔다.
커다란 발을 감싼 클래식한 디자인의 수제화를 보니, 남자의 까다로운 취향이 단번에 파악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분이 얼마인지나 알고서 하는 소리야?”
달칵하며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을 보여서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찻잔을 들어 올린 남자는 느긋하게 차를 마신 후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우아하고 느긋한 동작이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맹수처럼 느껴져서 혜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순순히 받아들이세요. 어차피 처음부터 제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순리를 거스르다가, 자칫 가진 것 모두를 잃을 수도 있어요.”
오만할 정도로 싸늘한 대꾸였다. 장 여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남자를 쏘아보았다.
“뭐라고?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거니!”
“사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모자지간의 대화라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살벌한 분위기에 놀라서 뒤돌아 나가려는 찰나, 장 여사가 멀찌감치 서 있던 혜원을 발견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뭐 하니?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당황한 표정의 혜원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사모님.”
인사를 마친 혜원이 막 고개를 들었을 때, 등을 보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한 순간, 혜원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자연스러운 윤기로 빛나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짙고 선명한 눈썹, 쭉 뻗은 코와 날카로운 턱선. 주름 하나 없이 잘 손질된 슈트가 탄탄한 몸을 죄듯이 감쌌다. 사내다운 강렬한 매력과 아름다움에 혜원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어린 나이의 혜원은 살아오면서 많은 남자를 만나 보진 못했다. 대부분이 그저 또래의 친구들이나 껄렁한 동네 남학생이 전부였지만, 강준을 만나면서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비록 의식 없이 누워 있지만,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에 대한 마음이 저절로 깊어졌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한껏 달려가서 저 혼자 수다를 떨고 우울한 날이면 그의 품에 기대어 울었다.
따스한 가슴에 기대어 있으면 미래에 대한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어딘가 비뚤어지고 기괴한 감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불행했던 과거가 강준에 의해 점점 잊혀져 갔다. 또한, 보잘것없고 초라한 저 자신이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여겨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며 안전한 울타리였다.
하지만 앞에 있는 남자는 달랐다. 강준이 젖어 드는 가랑비라면 강혁은 휘몰아치는 폭풍우였다. 강준이 따스한 봄 햇살이라면, 강혁은 내리쬐는 한여름의 태양이었다.
순수한 칠흑의 눈동자와 끝이 올라간 나른한 눈매가 혜원의 몸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물결치듯이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지나 선이 고운 턱선으로, 가는 목을 지나 부풀어 오른 가슴으로, 잘록한 허리와 골반을 따라 가늘고 매끈한 다리까지.
그래도 모자란 듯이 진득한 시선이 지나왔던 곳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굳게 다문 붉은 입술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봉긋 솟은 가슴 쪽을 더듬었다. 순간, 풀어 헤쳐진 남자의 셔츠 깃 사이로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혜원은 직감했다. 그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사정 따위 두지 않는 사냥꾼이었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짐승이었다.
그의 과녁이 되는 순간, 자신은 갈가리 찢겨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맹렬하게 뛰어 대는 심장박동이 그것을 증명했다.
“인사해라. 내가 말했지? 강준이 동생 강혁이다.”
장 여사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휘청거리는 걸음을 힘겹게 옮기며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혜원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리를 꼰 자세로 비스듬하게 앉아 있던 그가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짐작은 했지만, 인사는커녕 없는 사람 취급하는 오만한 태도에 지독한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런 혜원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장 여사가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인사 안 하니?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혜원이는 앞으로 네 형수가 될 사람이다.”
장 여사의 말에 찻물을 머금은, 윤곽이 뚜렷한 그의 입술 끝이 천천히 올라갔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시죠?”
그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끝까지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람 앞에 더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강혁의 비아냥거림에 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이만 별채로 가 보겠습니다.”
“앉아라. 별채로 들인 이상, 너도 우리 집안사람이다. 미친개 한 마리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잘 지켜보고 강준이 깨어나면 그대로 전해 줘야지.”
지독할 정도로 차가운 말에 과연 강혁이 그녀의 친자식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혜원은 그것이 괜한 의구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별채에 누워 있는 강준보다 강혁이 장 여사를 더 닮아 있었다. 선이 분명한 이목구비와 냉정해 보이는 분위기, 상대를 잡고 흔들려는 지배자의 눈빛이 그랬다.
“잘 들어라. 곧 이 아이를 강준이 호적에 올릴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설사 강준이가 깨어나지 않아도 강준이가 가진 회사 지분이 이 아이에게 넘어오겠지.”
혜원은 어리벙벙했다.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린 혜원이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얕은수를 쓰시겠다, 하긴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고저 없던 중저음의 목소리가 한 톤 높이 올라갔다.
“한 번에 죄다 박살 내 버리면 그만이니까.”
장 여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곁에 앉은 혜원이 놀라서 장 여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이 발작적으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들파들 떨던 장 여사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너 따위 짐승 새끼는 낳는 게 아니었어. 그때, 강준이 대신 네놈이 죽었어야 했는데…….”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날 선 긴장감에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해합니다. 그게 어머니 최대의 실수였죠.”
강혁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잡아먹을 듯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185cm 이상은 되어 보이는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날렵한 몸에서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가 주위를 압도했다. 그가 입은 도회적이고 세련된 슈트조차 그의 안에 내재된 사나운 야성을 희석하지 못했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그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참, 잊은 말이 있군요. 당분간 이곳에서 출퇴근하겠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혜원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 어떤 말보다 지금의 말이 두렵게 느껴졌다.
“널린 게 호텔이고 집이잖니. 여러 계집이랑 뒹굴기엔 그마저도 부족한 모양이지.”
장 여사의 조롱을 그가 맞받아쳤다.
“이 집이 제 소유라는 것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선친이 자손에게 물려주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땅, 감히 서씨가 아닌 사내가 누워 있을 땅이 아니란 말입니다.”
차가운 일갈에 장 여사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무너지듯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내내 없는 사람 취급하던 강혁의 시선이 혜원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꺼풀 한 꺼풀 벗기듯이 나른한 시선으로 그녀의 떨리는 몸을 더듬어 갔다.
“또 한 가지, 온갖 계집들과 굴러먹은 몸이 도무지 성이 안 차 만족을 모르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깨달았어요. 제 발로 여우 굴로 들어온 요망한 새끼 여우를 보니 군침이 돌아서 환장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제 입맛에 맞게 제대로 길들여 보려고요.”
선전포고와 같은 말을 남기고 강혁이 사라졌다.
전부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을 겨냥한 것이었다. 혜원은 예감했다. 자신은 이미 맹렬한 짐승의 먹잇감이자, 잔혹한 사냥꾼이 표적의 되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