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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혜원이 침대 옆에 놓인 소파에 다가가 앉자, 정숙이 흘러내린 강준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시트를 정리했다. 익숙한 손길이 더없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깊이 잠든 사람을 보았니?”
갑작스러운 말에 혜원이 고개를 저었다.
“보통 식물인간 하면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를 생각하지만, 강준이 같은 경우는 자가 호흡이 가능한 상태란다. 그래서 인공호흡기가 따로 필요 없지. 마치 곰이 추운 겨울을 피해 동면하듯이 강준이도 아주 깊은 잠에 빠진 것뿐이란다.”
정숙이 혜원의 손을 끌어다가, 강준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오르내리는 가슴 위로 힘차게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어때, 내 말이 맞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강준의 손등을 뒤집어 손바닥을 보이게 하며 서로 마주 잡게 했다. 따스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혜원은 까닭 모를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강준이를 내가 처음 받았단다. 숨죽이다가 터트린 울음조차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생김새만큼이나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사려 깊은 아이였어. 모두가 이 아이를 사랑했지만, 받은 사랑이 부담스러워서일까, 좀처럼 깨어날 생각을 않는구나.”
정숙은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강준에 대한 경계심을 사정없이 부숴 버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맑고 깨끗한 남자를 앞에 두고 죽음을 상상하다니, 자신이 어리석었다.
“강준이는 올해 스물아홉이란다.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에 책 읽는 것을 좋아했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오래된 영화를 즐겼단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지만 그중에서 신선한 과일을 가장 좋아했어.”
혜원이 불안한 눈으로 정숙을 올려다보았다.
“한 간호사님.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그냥 나처럼 강준이를 좋아하면 된단다. 아니, 함께 있다 보면 저절로 좋아질 거야. 사람 간의 인연이 쉬운 듯 보이지만, 결코 쉬운 게 아니란다. 지금은 이렇게 누워 있지만, 강준이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곁을 지켜 준 너를 아끼고 사랑할 거야.”
아이처럼 평온하게 잠든 남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자신이 약혼자라니, 혜원은 어쩐지 믿기지 않았다.
고요한 심장박동과 따스한 몸의 온기를 지닌 사람, 아버지처럼 고함을 치지도 매질도 하지 않는 사람, 다른 남자들처럼 음흉한 눈으로 몸을 훑지 않는 사람.
불안의 그림자가 걷히자, 혜원은 돌연 남자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밤, 혜원은 강준의 곁에서 잠을 청했다. 처음 들었던 생각처럼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솔 향과 따스한 온기가 좋아서 바로 누운 몸을 더욱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깊은 꿈속에 빠져들었다.
꿈속의 강준은 다정했다. 그의 손을 잡고 꽃이 만발한 넓은 정원을 걸었다. 빽빽한 잡목 숲을 지나, 푸른 호수에 다다를 때에도 그는 말이 없었다. 돌아보는 눈동자가 지나치게 맑고 투명하여 혜원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혜원은 깨달았다. 달콤한 꿈은 짧아서 더욱 슬프다는 것을, 상상 속의 사랑은 허무가 주는 짧은 유희라는 것을. 그 모든 것이 진실과 맞닥뜨리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


공항 착륙을 앞두고 있는 비행기가 창공을 가르며 미끄러지듯이 하강했다. 뉴욕 JFK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14시간에 가까운 지루하고 따분한 비행이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육지가 가까워 올수록 시야가 흐려지고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어두운 잿빛 바다에서 안개처럼 떠다녔다.
어쩐지 우울한 날씨였다. 한국을 벗어나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던 그때처럼.
“……뭐야. 벌써 도착했어?”
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강혁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에서 깨어난 진욱이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승무원이 따라 준 샴페인을 연신 홀짝이던 그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긴 비행 시간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 쪽잠을 잘 만큼 바쁜 일정 가운데, 간만에 숙면을 취한 셈이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까다로운 네 비위를 맞추려면 별수 없잖아. 소처럼 부지런히 일할 수밖에.”
진욱이 익살맞은 얼굴로 농을 던졌다. 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두 사람은 허물없는 친구인 동시에, 좋은 사업 파트너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한국에 가자는 말에 두말없이 따라와 준 진욱이 강혁은 더없이 고맙고 든든했다.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이어지고 비행기가 몸살을 앓듯이 진동하며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익숙한 듯 서두르는 기색 없이 짐을 챙겼다.
공항 게이트를 지나 막 출구에 도착했을 무렵, 검은색 정장을 입은 30대 후반의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진욱은 지나치리만큼 깍듯한 남자의 인사가 부담스러웠지만, 강혁은 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짐을 넘기는 강혁은 이미 준비된 오너이며 타고난 경영자였다.
“이사회는?”
강혁이 물었다. 초면의 진욱에게 자신을 정한그룹의 기획실장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틀 후로 정했습니다.”
“내일 오전 10시, 즉시 통보하세요.”
“하지만, 여독으로 피곤하실 텐데…….”
“반복해서 말하는 거 질색입니다. 시키는 대로 처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무례할 정도로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러나 이미 강혁과 안면이 있는 듯한 남자는 불쾌한 기색은커녕 어딘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차에 오른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 후 룸미러를 통해 강혁을 보던 최 실장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일부 이사진의 반발이 있었지만, 다수가 의견을 모았으니 대표이사 선임 건은 무난하게 통과할 겁니다.”
“…….”
“다만 사모님께서…….”
차창을 응시하던 강혁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인 장 여사의 이야기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사모님이 반대하셔도 이번에는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 회사 안팎 사정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주변의 반발도 만만치 않고…….”
“강준 형은요? 여전합니까?”
최 실장의 말을 끊고 강혁이 불쑥 물었다. 곁에 앉은 진욱이 의아한 눈으로 강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형에 대한 화제를 올리는 것을 늘 꺼려 했다. 아마도 아물지 않는 마음의 상처만큼이나 쓰디쓴 기억 때문일 것이다.
“여전하시죠. 의식은 없지만,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정혼자가 정성껏 돌본 덕이겠지요.”
“정혼자?”
“모르셨어요? 서 이사님을 돌본 지, 이태가 지났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남다른 미인에 당차고 야무지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강혁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의식 없는 환자가 약혼이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서 이사님이 좀처럼 깨어나지 않으니, 사모님도 많이 초조하셨겠지요.”
“하여튼, 앞뒤 분간도 없이.”
강혁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조만간 정리할 생각이니, 외부에 쓸데없는 말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하지만 두 해를 함께했는데, 서 이사님이 깨어나면 좋은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사모님도 기꺼이 허락하셨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도 끔찍한데, 거기에 가십거리 하나를 더 얹으라고요? 누구보다 강준 형을 잘 아시잖아요. 유별날 정도로 사람을 가리는 성미에 어디서 굴러 온지도 모를 계집아이를 상대할 것 같아요?”
강혁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딱 부러질 만큼 분명한 어조가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서 회장을 떠올리게 했다.
부친을 고스란히 빼어 닮은 외모와 말투, 그리고 사업적인 수완까지. 기울어 가는 정한그룹을 일으켜 세울 재목으로 기대고 모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가족에게 외면받고 타국에서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 사모님께 인사부터 드려야죠? 삼청동으로 모실까요?”
최 실장이 불편한 화제를 돌리려는 듯이 강혁을 향해 물었다.
“아니, 성북동으로 가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는지, 최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 차의 방향을 돌렸다.
진욱이 유난히 날이 선 태도를 보이는 강혁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어째서 한국행을 결정할 것일까. 강혁이 잘나가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함께 가자고 제의했을 때, 진욱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깊은 내막을 알 수 없지만, 그가 가족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혁은 부모님을 그리고 형을 입에 올릴 때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숙이고는 했다. 마치 덜 아문 상처를 헤집어 놓은 듯이 괴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강혁아.”
진욱이 강혁의 어깨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운전 중인, 최 실장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귀엣말로 속삭였다.
“좀 웃어라. 짜샤.”
그제야 강혁이 아픔에서 헤어난 듯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냉정한 이면에 가려졌지만 알고 보면 속정이 깊은 친구, 서강혁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


붉은 털실이 바닥으로 데구루루 굴렀다. 혜원이 몸을 굽혀 잡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털실을 집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뭐 해? 수능 끝났다고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야?”
유난히 시원스러운 눈매를 가진 수연이였다. 털실이 받아 든 혜원이 꼬인 실을 풀어서 다시 둘둘 말았다. 엉성한 솜씨였지만, 목도리는 제법 그럴싸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수연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혜원 앞으로 다가앉았다.
“강준 오빠 선물?”
“곧 크리스마스잖아. 빨리 완성하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아.”
수능이 끝나고 겨울방학을 앞둔 탓일까. 왁자지껄, 까르르 숨넘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얼마 전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교실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혜원아. 우리 겨울방학에 여행 갈까?”
“여행?”
“너와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고, 부모님께서 함께 여행 보내 주시겠대.”
수연은 경쟁 상대인 동시에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다. 전교 1, 2등을 다투던 두 사람이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나란히 합격하자, 한동안 주변에선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혜원은 망설여졌다. 수능을 앞두고 강준에게 한동안 신경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강준 오빠 때문에?”
혜원이 짜다 만 목도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붉은색이 강준의 하얀 피부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한참을 고민하다 골랐다. 붉은 목도리를 두른 강준의 모습이 떠오르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수연아, 부탁이 있어.”
“부탁?”
“우리 멀리는 말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 가자. 강준 오빠와 같이.”
뜻밖의 말이었는지, 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괜찮겠다. 강준 오빠도 한곳에서만 누워 있으니 답답할 거야.”
무리한 요구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따스한 마음을 지닌, 밝고 구김 없는 성격의 수연이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과거의 일을 털어놓았을 때도 그녀는 같은 반응을 보였다. 쫓기듯이 집을 나온 자신을 힐난하거나 강준과의 관계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힘들었겠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최근에는 청평 별장에서 강준을 휠체어에 태우고 함께 산책하기도 했다.
“그보다 어디로 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차차 생각해 보자.”
“휠체어를 옮기려면 차가 필요할 텐데, 영민 선배에게 도움을 청해 볼까? 무거운 짐도 들고 힘든 일도 거들 수 있을 거야.”
영민은 한 학년 선배이며 현재는 수연의 남자 친구이기도 했다. 혜원의 속사정을 아는 몇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기에 큰 부담감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내게 맡겨. 그렇지 않아도 수능 끝나면 스키장으로 놀러 가기로 했거든.”
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연이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기대된다. 강준 오빠도 좋아하겠지?”
“그럼. 오빠도 분명 좋아할 거야.”
혜원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