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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은 하나도 받지 못하고 결국 여신님께 간택되어 그 답답한 태양왕의 궁에 끌려가는 처지라니.
“저기, 테라 언니.”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동네 꼬마 라라가 몰래 다가와서 나무 창살 사이로 고 작은 손을 내밀었다.
“테라 언니, 건강해야 해.”
이상했다. 이별의 인사지만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응, 너도.’라고 대답해 주어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태양의 신부로 가게 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데. 태양의 궁 밖으로 나가는 일도 몹시 어려워진다는데. 내가 과연 그곳에서 살 수 있을까?
“언니, 이거 먹어…….”
아이가 내민 것은 작은 과자였다. 조금 보기 싫었지만, 망고 모양을 한.
“고마워, 라라.”
아이의 손은 어른들보다 따듯해서 아주 짧은 스침에도 그 온기가 분명하게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때 접시를 든 라프 님이 굉장한 속도로 달려오며 라라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거기! 먹이 주지 마!”
당황한 라라는 얼른 엄마 품으로 달려가 버렸고, 전속력으로 달려온 그는 얼른 내 손안에 있는 망고 과자부터 확인했다.
“독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리 주십시오.”
“라라가 저한테 왜 독을 주겠어요.”
“라라 양을 이용해서 일을 꾸밀 만한 이들이 있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게다가 그 모양을 보십시오.”
“……망고!”
나에게 있어 망고는 불길, 불행, 불운의 상징이었다.
“지금 여기에 갇히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망고!”
“그 과자의 모양은?”
“망고!”
겁나 위험하잖아!
나는 얼른 쿠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더는 망고의 저주에 빠질 수는 없었다.
내가 과자를 내려놓는 것을 확인한 라프는 곧 고기 접시를 건네주었다.(창살이 좁아서 접시를 비스듬히 넣느라, 고기 중 일부가 바닥에 떨어지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자, 먹이입니다.”
“응, 고마워요. 응?”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미묘하게 이상한 단어로 음식을 부르고 있지 않아?
“아이코, 죄송. 창살을 보고 있으니 자꾸 먹이라고 하게 되네요.”



“테라!”
오, 역시 나를 이해해 주는 것은 너뿐이야! 나의 벗, 아란! 탄생과 동시에 우정을 나눈 평생의 친구여!
“망할 년.”
네?
“나쁜 계집애.”
“너, 너, 그게 지금 강제로 끌려가는 친구에게 할 말이야?”
“너야말로 도망가는 멍청한 짓을 하면 어떻게 해! 내가 얼마나…… 얼마나…….”
아아…… 아란. 역시 진심으로 날 걱정해서…….
“기가 막힌 계획을 세워 두었는데! 전부 허사가 되었잖아!”
“계, 계획?”
나는 예전부터 아란의 입에서 계획이라는 말이 나올 때가 제일 불안했다. 계략을 좋아하는 성격인 주제에 머리는 나빠서 항상 쓸데없이 일만 부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때문에 그녀의 대단한 계획은 한 번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적이 없었다.
아란은 주변을 휘휘 둘러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바로 너와 내가 서로 정체를 바꾸는 계획이지! 어때? 계획만 성공했다면 너는 여기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고! 네가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아깝지 않아!?”
“이야, 그것참.”
저 라프 님이 잘도 속아 넘어갈 만한 획기적인 계획이구나. 너무 감쪽같아서 필시 모두가 속겠지.
아란의 계획을 듣고 나서야 나는 도망을 선택한 것이 차라리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이 좁은 감옥을 아란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아란의 금발을 쓰다듬어 주었다. 보들보들 기분이 좋은 촉감. 아란의 유일한 장점. 이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딘가 심장이 아려 오는 것 같았다.
“아란.”
나도 놀랄 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란도 알아준 걸까?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서도 나를 바라봐 주었다.
“늘 고마웠어.”
엉뚱하고 솔직하고 매력적인 나의 가장 친한 친구.
“항상 좋아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손이 많이 가는 이 아이를 이제는 누가 챙겨 주게 될까?
“테, 테라…….”
“술은 적당히 마시고, 카드놀이에 자꾸 돈 걸지 말고, 살찐다고 밥 굶고 폭식하는 거 반복하지 말고.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어린 시절의 약속까지 함께 떠올랐다. 아란의 사촌 언니가 결혼식을 하던 날에 우리는 테이블에서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며 소중한 약속을 나누었다.
“언젠가 아란이 결혼하게 되면 레이스나 프릴이 잔뜩 달린 사랑스러운 튜브톱 드레스로 했으면 좋겠어.”
어른이 되어서, 결혼하게 되면 서로의 드레스를 골라 주자던 소녀들의 약속. 새끼손가락도 걸고 도장도 찍고 분명하게 복사도 해 두었다. 우리의 손 어딘가에는 그 약속 도장이 아직도 찍혀 있을 것이다.
“소중한 드레스를 같이 골라 주지 못하게 되어서 미안해.”
아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바보야…… 테라는 바보야!”
“왜 울어.”
나는 아란의 눈가를 몇 번이나 손으로 훔쳐 내었다. 마음 약한 아란은 계속 눈물을 참고 있었나 보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그만 울어. 내 드레스 안 골라 줄 거야?”
“고, 고를 거야! 내가 고를 거야!”
눈물을 흘리다 못해 이젠 콧물까지 훌쩍이던 아란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꼭 깨물어 눈물을 삼켜 냈다.
“테라는, 테라는…….”
“그래.”
“가슴이 작으니까 뽕을 많이 넣어도 티 나지 않는 드레스였으면 좋겠어.”
너 이년?
“그리고 여신님이 입는 것같이 주름이 길고 멋지게 늘어지는 드레스가 좋아. 응. 테라는 어울릴 거야. 분명히 예쁠 거야.”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을 상상까지 해 보았는지 아란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만족해했다.
여신님이 입는 것과 같은 드레스라. 우아하게 길게 늘어지는 그것 말이지? 아란은 좀 멍청한 것 같아도 내 취향 정도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도 그녀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가슴에 뽕을 넣는 걸 잊으면 안 돼.”
“……그 뽕 소리 좀 그만할 수 없는 거야?”
“응. 여신 드레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거든. 떠올려 봐, 테라. 달의 여신님의 가슴은 달처럼 크잖아?”
“옷매무새는 가슴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응, 하지만 가슴에서도 나오는 거지. 안 되겠다. 역시 불안해. 계획이 필요해.”
나왔다! 아란의 계획! 계획 세우지 마! 너는 영원히 무계획으로 살아! 아니, 최소한 내 인생엔 계획 세우지 마!
“라프 님!”
아란은 근처에서 서성이던 라프 님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테라가 태양의 나라로 이동하는 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공문으로 꼭 보내야 하는 내용이에요. 테라는 멍청해서 보나 마나 필요한 것도 제대로 요청하지 못할 것이 뻔하니까요.”
살다 살다 아란이 나를 멍청하다고 얘기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요청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다고.
“달의 나라 사람이 태양의 나라로 이동할 때에는 원활한 적응을 위해서 달의 나라 쪽에서 요청 사항을 넣는다고 들었어요.”
“물론입니다.”
“꼭 필요한 조항이 있어요.”
“호오, 그렇습니까.”
라프 님은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말씀하시지요.”
“네, 테라는 가슴 뽕이 필요해요!”
“저런.”
신부로 팔려 가는 것도 억울한데, 그 꼬리표에 ‘가슴 뽕 필요’까지 달아서 가라는 거야? 태양의 나라에서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니지, 가만. 나는 여신님이 정한 고귀한 기준(망……고!)으로 뽑힌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서류에 그런 민망하고 부끄러운 말 따위 추가할 리가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달의 종족은 개인의 존엄성을 가장 존중하는 것을 전통으로…….
“그럼 서류에는 ‘태양왕의 반려의 기품 있는 옷매무새를 위해 가슴의 형태와 크기를 확대 보정할 수 있는 최신 기술의 획기적인 속옷이 필요합니다.’라고 추가하면 되겠습니까?”
우리 달의 종족은 개인의 존엄성을 가장 존중하는 것을 전통으로…….
“최우선 사항으로요!”
“틀림없이 추가해 놓겠습니다. 역시 가장 친한 친구분의 존재는 완벽한 준비에 도움이 되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 목욕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들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망고!



천국에 계신 어머님, 건강하신가요?
이제야 제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어머님, 천국에 계시는 게 확실하다면 거기 아무 신이라도 붙잡고 제 운세를 조금 알아봐 주시겠어요? 존엄하신 신을 점쟁이 취급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저는 신급 점쟁이의 힘이 필요한 일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달의 나라에서의 마지막 밤. 저는 감옥에 갇혀 야근하고 있습니다. 주문 제작 중이던 바샴 씨 부채의 마무리 작업이에요.
천국에 계신 어머님. 혹시 그곳에 망고의 여신 같은 것은 없을까요? 있다면 그 과육의 길쭉한 씨를 발라 주시겠어요? 씨 발라 버려요!
어라. 뭔가 충족되는 어감이 장난 아니다.
“마지막까지 바쁘시군요.”
“라프 님.”
“아쉽습니다. 테라 양의 부채는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요.”
“고마워요.”
방금 다 만들어진 바샴 씨의 부채를 살살 흔들어 보았다. 바람 한 점 없던 감옥에서 공기들은 부채의 움직임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고 곧 시원한 바람이 되었다.
“다 했다.”
나는 항상 사용하는 우리 가게 포장 상자에 그 부채를 잘 넣었다. 뚜껑을 닫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푸른 리본도 묶었다. 내가 만드는 부채들은 항상 이렇게 포장되어서 팔려 나간다.
“……다 했다.”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말해 보았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아마 이게 내가 만드는 마지막 부채가 될 것이다.
달의 여신이 선택한 태양왕의 반려가 멀리 도망가는 데 성공했다거나, 이혼해서 돌아왔다거나 하는 전설은 아직 들어 본 적 없다.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았다. 태양의 궁에 평생을 바치는 호화로운 생활. 나도 아마 그렇게 되겠지.
“싫으십니까.”
항상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걸어오던 그가 이번에는 창살에 등을 기댄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묘하게 편안한 분위기가 흘렀다.
감옥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무서운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나도 조금은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싫어요.”
“만약. 그곳에 가지 않으신다면, 무얼 하시겠습니까?”
“여신님의 뜻을 거스른 사람이 달의 나라에 있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어디로 가야 할까. 높은 산을 넘어서 도착할 수 있다는 바람의 나라일까. 아니면 불의 나라일까.
“멀리 가야죠. 어차피 오늘 이별의 인사도 전부 다 했고. 음, 부채를 들고 불의 나라로 가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긴 엄청 덥다고 하니까요.”
“그렇군요.”
맥이 빠질 만큼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진지하게 대답해 준 것이 조금 민망해졌다. 애초에 왜 물어본 거야?
“테라 양이 도망가지 않겠다고 하시면 감옥에서 잠시라도 풀어 드릴까 했는데.”
……시험이었어? 젠장. 속았다.
“역시 마지막까지 가둬 두는 무례를 용서하시길.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이시여.”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달의 위치가 하늘의 가운데를 넘어섰기 때문일까. 오늘 나는 태양의 나라로 가야 하니까…….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
태양왕이 갖지 못한 단 하나. 그 성별을 결정지어 완성시키는 존재. 그의 반려를 부르는 말.
“싫어요. 그 호칭.”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나는 싫다는 말을 내뱉고 어쩐지 라프 님에게서 돌아올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또 이렇게 말하겠지. ‘곧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무어라 불러 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테라.”
예상과는 다른 그의 말. 그리고 온도.
뒤돌아 있는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째서 계속 이쪽을 보고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