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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T : 일단, 그렇게 깊이 이입하고 공감하며 읽어 주셔서 저로서는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좀 믿기 힘드실 수 있겠지만, 그런 장면은 저도 펑펑 울면서 씁니다. 퇴고하면서도 질질 짜면서 합니다. 네가 쓴 글인데 왜 네가 우느냐 하면 잘 모르겠어요. 제가 썼는데도 남이 쓴 것처럼 느껴지는 건, 음…… 역시 기억력의 문제일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도 아니고 섬세한 감성 같은 것도 별로 없어요. 그래서 쓰면서 질질대는 이유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B : 사실 <샤인>은 소장본도 나왔던, 집필한 지는 조금 오래된 작품이었죠. 그간 많은 분들이 <샤인>은 안 나오냐고 문의를 많이 주셨었어요. 반면에 소장본 사셨던 분들은 조금 궁금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30만 자 수정에 대해서 말이에요.
소장본도 분명 연재분에서 퇴고 다 하셨을 텐데 그렇게 많은 양이 수정되었다고 하니까 조금 놀라신 분들도 계셨던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이 수정되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T : 에휴. 저도 나중에야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정 부분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 좀 자세히 설명해 드릴걸. 제 불찰입니다.

제일 먼저,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관련 법규와 사회 정서에 따른 수정 부분이 있었어요. 개인 출간본이 상업지로 나오면 피치 못하게 고쳐야 할 부분이 있잖아요. <천년의 제국>을 상업지로 낼 때도 전 팀장님한테 수정 작업을 위한 관련 법 조항을 받았고, 그 가이드라인에 따라 삭제한 분량이 있었어요.
B : 교정보면서 늘 편집자도 가장 예민하게 잡아낼 수밖에 없는 부분이죠.
T : 네, 그렇죠. 작가와 독자 모두 아쉽더라도 상업지라면 그 규정을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B : <샤인>에서는 어떤 부분이 걸렸었는지요?
T : 기형이가 청소년기에 아저씨에게 성적으로 들이대는? 부분이었어요. 끝까지 가지 않았더라도 상업으로 나와선 안 될 부분이 분명 있어서 수정이 불가피했습니다. 그래서 담당자님께 넘기기 전에 그 부분은 먼저 수정했어요.
그런데 그 부분을 고치니까 성인이 된 후에, 연희와 첫 번째 관계로 이어지는 부분이 어색해지게 됐고, 그 부분을 다듬을 필요가 생겼어요. 흐름 자체가 수정됐다는 부분이 이곳이에요. 그 분량이 전부 합쳐서 5~6만 자 가량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수정분은 중간 외전 에피소드 수정 및 삭제분이에요. 부적절한 용어들을 수정하고,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부분적으로 손질했고요.
B : 아, 그렇죠. 사실 중간 외전도 분량이 상당했는데, 그중에서도 몇몇 에피소드가 부분 수정되었었어요.
T : 네. 그때 담당자님하고도 의논했지만 기형이 학교생활 관련 개그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소스를 얘기해 준 사람에게 확인해 본 결과 경험담이 아닌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어요.
B : 그게 시험 답안 에피소드였죠?
T : 네네. 꼭 자기 얘기처럼 해 줘서 그거 쓰게 허락해 줘, 했는데. 글쎄, 그게 자기 얘기가 아니었대요.(눈물) 그런 경우는 상업지에 함부로 포함시키기 조심스러워서 그때 의논드렸고, 결국 삭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3~4만자 정도. 상업지로 나가는 거라면 출처도 그렇고 조심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두 가지 모두 외전에 들어 있는 내용이고, 기형이의 양육이나 학교생활 관련 에피소드라 전체 내용의 흐름과 큰 관계가 없다는 것 정도?
아, 그리고…… 씬…….(눈물)
악평 자자한 씬을 어떻게든 좀 고쳐 보려 노력……했는데 나아졌는지 더 나빠졌는지 판단이 안 돼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퇴고를 하면서 지인에게 팩폭 공격을 받았어요. 재연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컵 : 씬 수정하면 좀 나아질까?
지인 : ㅇㅇ 뭘 써도 그보다 더 나빠질 순 없으니까. 법전을 베껴도 그보단 꼴릴 듯.

B : (폭소) 법전이라니요!
T : 아니에요! 사실 아니에요! 이거 지워 주세요. 저는 제 씬 꼴려요!
B : (폭소)
T : 그리고 마지막 수정분은 문단 나누기였죠. 스마트폰 환경을 고려한 문단 나누기 분량이 제일 커요. 이 부분이 20만 자, 10% 남짓? 보통 퇴고할 때 쳐 내고 다듬는 분량 기준을 10% 정도로 잡고 있는데 (스티븐 킹이 말했던 퇴고 시 수정 삭제 기준이 그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샤인>에서는 문단 수정이 그 정도 분량이었죠.
실은 처음 담당자님 수정 요청 받고 제일 당황했던 내용도 그거였어요. ‘한 문단을 A4 10포인트 기준 3행 이내로 잘라야 한다’는 거요. 이북 독자들은 보통 스마트폰 환경으로 책을 보는데, 문단이 길면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하셨고요.
B : 네, 그렇죠. 그때 작가님과 전화 통화하는데 당황하신 게 그대로 느껴졌었어요.
T : 진짜 많이 당황했어요. 막 떨리는 목소리로 그랬잖아요.
“담당자님! 예전엔 기준이 5행이었는데요!”
“담당자뉘이임! 멀쩡한 문단을 중간에서 덜렁 잘라서 이상한 꼴로 만들 순 없어요!”
“누가 봐도 한 덩어리, 한 문단인데 허리가 동강 잘린 거 뻔히 보이잖아요, 뉘이임! 크아아앙!”
제 똥고집 때문에 담당자님도 당황하셨고.(웃음) 산뜻하고 스피디한 내용이나 감정선 위주, 혹은 작은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는 내용이라면 문단이 다소 길어도 괜찮을 텐데 <샤인>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내용은 무겁고 감정은 더 무겁고 호흡도 긴 데다 소재는 기업 전쟁, 그것도 숫자들이 횡행하고 있는 판에 긴 문단 무거운 호흡을 그대로 가지고 갔다간 끝장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어떡하나 암담하긴 했어요.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샤인을 종이책으로 보고, 파일을 스마트폰에 담아서 읽으며 비교해 본 후에(저는 그동안 이북을 25인치 화면으로만 봤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B : 저도 그때 참 안타까웠답니다. 호흡이 긴 글인 걸 알고, 작가님이 당혹스러워하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하지만 확실히 스마트폰은 화면이 작으니까요.
T : 네, 담당자님 말씀이 이해가 됐어요. 종이책에선 얼마든지 수용 가능했던 <샤인>의 긴 호흡은 스마트폰에서 큰 장애가 되는 게 맞더라고요. 심지어 종이책에서는 크게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던, 제가 좋아하는 고풍스러운 어휘나 말투조차 상당히 거슬리는 요소가 되어 있는 걸 보고 그냥 아, 그렇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요청대로 긴 문단들이나 호흡이 긴 부분을 찾아서 중간을 자르는 작업을 시작했고, 잘린 문단이 이상해 보이거나 거슬리게 느껴지지 않도록 다듬는 작업을 병행하게 됐어요.
내용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었고, 스마트폰 같은 작은 화면으로 읽을 때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문장 위치, 조사, 낱말 같은 걸 옮기고 빼고 가는 작업이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이런 종류의 수정은 별로 애쓴 티는 안 나는데 오타 비문 잡는 것보다 극도로 피곤한 작업입니다. 게다가 10권, 200만 자 가까운 초장편이니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죠.
B : 정말 고생이 많으셨죠. 허리도 아파서 고생하셨고요.
T : 그때 마감 치느라고…….(눈물) 일코 때문에 집에서 마감을 칠 수 없어서 고시원을 잡았어요. 거기 박혀서 오밤중까지 일하면서 마감을 했거든요. 그게 싼 방이라 의자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침대에 앉아 일을 했는데, 허리가 틀어지고 눈병 나고 열감기에 몸살감기에……. 저 원래 엄청 건강한 통뼈인데 말이에요.
교정보다가 침대에 누워서 엄마야, 나 죽겠다, 그냥 배 째라, 그냥 긴 문단 그대로 내 달라고 할까, 그런 무책임한 생각도 쬐끔 했어요.
그래도 결국은 끝냈죠.(웃음) 일등공신은 탄수화물과 고카페인 음료들? 그리고…… 대망의 진사님 일러스트! 너무 잘생겼어요! 저는 잘생김 3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잘생김 10이 왔더라고요(말춤) 비밀 폴더에 숨겨 두고 힘들 때마다 꺼내 보면서 “빠워!” 하고 힘내서 다시 작업하고 그랬습니다.
B : 저 역시 일러스트 보면서 힘을 냈었죠! B&M에서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T : 네. 그 외에는, 중요 내용이나 흐름, 등장인물 설정 같은 것에 대한 수정은 없었습니다.
B : 네, 자세히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음, 다음 질문은 독자님의 질문 원문을 그대로 가지고 왔어요.
[제가 이 구역 호진맘입니다, 작가님. 서브공에게 반했다가 개피보기는 처음입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눈물) 아니 서브공에게 매력을 이렇게 몰빵 하시면 거기에 반한 저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이러세요. 숨어서 울고 있는 호진맘이 저 혼자는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음, 사실 호진이 주식 산 사람들이 참 많았죠.
T : 잠시만요.(눈물)(눈물) 저도 좀 울고요…….
B : 사실 저도 호진주 좀 많이 사 놨었어요…….
T : 우선 답변 드리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는 작가가 글의 의도나 설정을 책 밖에서 설명하는 일에 대해, 좀 조심스럽게 생각해요. 글은 작가 손을 떠나면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며, 작가가 어떤 의도로, 어떤 방향으로 글을 썼든 책이 나와서 읽히는 순간부터 그것은 온전히 독자의 것이 된다고 배웠습니다. 글이란 독자의 경험과 철학에 따라서 다채로운 스페트럼과 다양한 깊이로 읽히는 법이니, 작가는 자기 글을 독자에게 놓아주고 그 감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요.
저는 그래서 아무리 글이 작가의 의도와 반대로 읽힌다 하더라도 작가가 나서서 자신이 생각한 방향을 독자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B : 네, 사실 작가가 모든 독자와 일대일로 소통할 수는 없는 법이고 해석은 독자의 몫이겠지요.
T : 네. 그러니까 심지어 레 미제라블 다섯 권을 다 읽고 쓴 감상이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그 감상을 부정하거나 자신이 생각한 방향을 지시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글에 대한 설명을 글 밖에서까지 부연해야 한다면 그것은 미숙한 글이라는 의미이며, 작가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이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면서도 좀 많이 창피합니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나오는 말은 절대적인 해설이 아닌, 글을 구상했던 한 개인의 생각과 의도였을 뿐이며,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꼭 이렇게 생각하실 필요도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려요. 그리고 독자님의 온전한 감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으시면, 제 답변은 읽지 않으시는 것을 추천드리고요.
여기서부터는 작가의 메우 개인적이고 신경 안 써도 되는 견해.
제가 생각하는 호진이는 서브공 아닙니다!(오열) 저는 분명 대등한 비중을 가진 이공일수로 잡고 썼고, 소장본 때는 광고할 때도 메인공, 서브공 아니고 똑같이 공1, 공2, 그런 식으로 소개가 나갔어요. 심지어 호진이가 공 1로 먼저 소개가 됐었죠.
B :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T : 제가 생각하는 이호진은 이야기 안의 비중으로나, 연희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의미로나 기형이와 똑같은 분량과 무게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주요 서점 키워드에 이공일수가 없다는 걸, 이북 발간 직전에 담당자님 말씀을 듣고 알게 됐어요. 다공일수 아니면 서브공있음, 그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거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통화 내역을 기억나는 대로 재연해 보겠습니다.

#컵 : 담당자님! 그럼, 이공일수도 어쨌든 다공이니까 다공일수로 갈까요?
담 : 작가님, 그런데 다공일수는 수가 공 여러 명을 한꺼번에 차지하는 경우를 말해요. 한 명하고만 맺어지는 경우는 그 키워드를 쓸 수 없어요.
컵 : 늬에?
담: 가능한 키워드는 ‘서브공있음’이에요.

T : 순간 예전 모니터 요원의 팩트 폭격 환청이 들렸어요. ‘그래 봐야, 둘이 이어지지 않으면 존나 불쌍한 서브공이지!’
컵 한 마리는 담당자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컵 : 호진이는 서브공이 아니에요, 담당자님! 걔도 메인공이에요. 아시잖아요!!!
담 : 아는데요, 작가님. 그래도 샤인에서 다공일수 키워드를 쓰면 안 될 것 같아요.
컵 : 하지만 호진이는 언해피엔딩일 뿐이지 서브공이 아니에요! 둘이 안 이어지는 새드 엔딩 소설 공이라고 해서 서브공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담 : ……그럼 서브공 키워드도 뺄까요?(목소리가 좀 지치신 듯?)
컵 : 아, 서브공있음 안 써도 돼요? 그럼 일공일수로 받아들이려나? 그것도 아닌데.
담 : (한숨) 작가님, 서브공 유무는 독자들한테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예요. 게다가 호진이는 비중도 그렇게 큰데 안 밝히면…….
컵 : 욕먹을까요?
담 : 네.
컵 : 많이 먹을까요?
담 : ……네.
(컵 한 마리는 드디어 수화기를 붙잡고 광광 울기 시작)
컵 : 그럼(울먹) 서브공있음으로 가요…….
담 : ……네.
컵 : 그런데 담당자님, 호진이는 서브공이 아니에요…….
담 : 네. 알아요, 작가님…….

B : 정말…… 혹시라도 가능할까 싶어 키워드 가이드를 몇 번이나 읽었었는지. 사실 호진이라는 캐릭터는 ‘서브공’이라는 말 안에 담기에는 연희의 인생에 끼친 영향이 정말 너무나도 큰 인물이었죠.
T : 네, 크죠. 나중에라도 이공일수 생기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이건 아까 샤인을 쓰게 된 이유에서 나왔어야 할 내용 같긴 한데, 여기서 좀 덧붙여 써도 될까요?
B : 네, 얼마든지요.
T : 왜, 어느 날 갑자기 현타가 올 때 있잖아요. 갑자기 나 뭐 하고 살고 있지? 그런 이상한 느낌 들 때요. 갑자기 내가 어떻게 살아왔지? 하고 뒤돌아보게 되고, 그런 이상한 느낌 들 때요.
저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그냥 뒤를 돌아보게 되는 시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궁금해졌어요. 진짜 뜬금없이.
어? 내가 오래 전에 사랑했던 사람, 취미, 물건, 인연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을까?
기분이 되게 이상했어요. 그때의 사랑은 지금의 사랑을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나? 지금 나는 새로운 취미에 빠져 있는데, 예전의 덕질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나? 난 학창 시절 내내 꿈꾸던 직업을 접어 버리고 새로운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럼 난 그동안 헛짓거리를 했던 걸까?
그럼 현재도 조만간 과거가 될 테니 지금 소중한 것들도 언젠가는?
그런 생각이 드니까 한동안 좀 허탈하고 허전하고 서글프고 그랬던 거 같아요.
물론 사랑했던 것들과 이별하거나 멀어지는 과정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어요. 아름다운 이별 따윈 없다잖아요. 귀찮아서건 정나미가 떨어질 일이 생겨서건, 어쨌든 뭔가 이유가 있어서 멀어진 거고, 마음은 방어기제를 발동해서 그 시간을 모조리 부정하고 파묻어 버린 거고요.
그렇다고 내가 그때 사랑하고 행복해했던 마음이 가짜는 아니었잖아요.
저는 그렇게 강제로 부정당하고 잊혔던 것들에게 빛을 주고 싶었어요. 그것들은 여전히 내 속에 남아 있고, 나를 완성시켜 가는 그 무언가였고, 그것들은 이제 나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허탈해하지 마. 없어진 거 아니야. 네 안에 이렇게 예쁘게 남아 있잖아. 아마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B : 아, 좋은 말이네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그 사람을 이루는 거죠.
T : 네, 그렇지 않을까 싶었어요. <샤인>에서 호진이는 바로 그 ‘예전에 사랑했던 것’을 상징해서 보여 주는 존재입니다. 어머니, 서현, 검도 등과 같이 ‘한때 빛나고 아름다웠지만 강제로 부정당하고 잊혔던 것들, 하지만 이제는 인생에서 그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 주고 싶은 것들’을 대표해서 보여 주는 인물이에요.
그런 이유에서, 호진이는 연희와 최종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갈등을 유발하기 위한 보조 캐릭터’나 ‘비중이 적은’, ‘잠시 나오다 마는 캐릭터’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서브공’이라는 키워드에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호진이하고 기형이는 분량과 비중이 반반이에요. 애초에 줄거리를 짜고 목차를 잡을 때부터 <샤인>의 테마를 드러내 줄 두 명의 공에게 동등한 분량과 비중이 돌아가도록 계산해서 배분한 거거든요. 그러니 ‘나중에 이어지지 않으니 서브공’이라는 패러다임으로는 호진이에게 돌아간 비중과 무게가 아마 잘 납득이 가지 않으셨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글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호진이가 그런 오해를 받게 되는 상황이 내내 안타까웠고, 제 능력부족으로 제 캐릭터들이 욕을 먹는 것 같아서 그저 미안하기만 하더라고요.
저도 호진이를 무척 아꼈습니다. 연희, 기형이만큼이나 아낌없이 사랑했어요.
그래서 그에게 어울리는, 그리고 이호진이라는 캐릭터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의 형태를 내내 생각했죠. 그래서 외전과 히든 트랙에서 그 실마리를 살짝 보여 드렸어요. 호진이에게 가능한 최선의 행복의 형태.
호진이는 한국에 귀국해서도 여전히 학자로, 그리고 어느 곳에서의 CEO로 잘나갈 것이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아들은 흡족하게 잘 자랄 것입니다.
호진이는 아마 ‘더 샤인’의 주식을 팔지 않고 여전히 2대 주주로 남아 있겠죠. 귀국하면 아들과 함께 주주 총회에 참석을 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단상에 서 있는 ‘더 샤인’의 회장님한테 올해 순익비가 왜 이 모양이냐, 해외 진출 신규 매장 적자 규모에 대해서 정신없이 쪼아 댈 수도 있을 거예요.
진땀 빼면서 회의를 끝낸 회장님과 악수를 하면서 고생하셨습니다, 한 마디쯤 할 수도 있겠고, 다보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회의실 밖에서 만나 싱긋 웃으며 안부도 묻고,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요.
오지랖 넓은 ‘더 샤인’의 젊은 비서실장은 아빠 손잡고 주주총회에 따라온 꼬마 신사에게 무릎을 접고 앉아서 어려운 경제 용어를 쉬운 말로 조곤조곤 설명해 주고 있을 겁니다.
제가 상상하는 호진이의 미래 모습은 연희나 기형이와 마찬가지로, 나름 따뜻하고 부드럽고, 안온하고 행복합니다. 그 세 사람이 자신의 영역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존재하기를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4. 테암컵, 그리고……
B : 그럼 이제 조금 가벼운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작가님 혹시 남성분 아니신가 하는 질문이 들어왔어요. 실례가 아니라면 성별 여쭤 봐도 될까요?
T : ……이게 가벼운 질문이라고요? 이런 질문을 여기서도 들어야 하나요?(눈물) 여자인 거 증언해 주세요, 담당자님! 같이 고기 먹었잖아요!
B : 저는 질문을 전하는 전서구 역할을 했을 뿐인데요……. 물론 제가 증인 서겠습니다. 작가님 여자 맞습니다. 하하.
T : 그럼 저는 이에 관련된 슬픈 사연이나 몇 가지 말씀드리고 증언은 담당자님들께서 해 주시는 걸로 해요.(다시 눈물)
슬픈 사연 1.
머리카락이 비죽비죽 걸리적거리는 거 싫어해서 뒷머리, 옆머리를 바리캉, 아니 이발기로 쫙 밀어 버리고 다녀요. 그래서 주민등록증을 남자 주민증 바구니에서 찾아왔지요. 동사무소 아저씨랑 한참 찾았습니다, 흡흡.
그런데 저 여자 맞습니다.
B : 아니, 뒷자리가 2로 시작할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죠?
T : 사진을 보고 나눠 담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슬픈 사연 2.
바바리 입고 워커 신고 전철역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키가 초큼 큽니다. 안에 있던 여자분이 엄마야! 하고 소리를 지르셨고 저는 “죄송합니다!” 하고 밖으로 뛰어 나왔죠.
B : 아니, 왜 사과를 하셨어요!
T : 그렇잖아도 나와서 좀 생각했죠. 도대체 나는 뭐가 죄송했을까? 하지만 사과한 걸 무를 수도 없고, 그냥 다른 여자 화장실 갔습니다.
그런데 저 여자 맞습니다.(눈물)
B : 네, 우리 테암컵 작가님 여자 맞습니다, 여러분!
T : 슬픈 사연 3.
예전에, 좀 여성스럽고 팔랑팔랑 가녀린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시작했었어요. 검도가 살이 잘 빠진대요. 그래서 검도 했습니다. 5킬로 넘게 뺐습니다.
그때 생긴 우람한 어깨뽕과 종아리 알통이 10년 넘게 달라붙어 있습니다.(눈물)
어쨌든 저 여자 맞습니다.
B : 네, 그럼 작가님 여성인 걸로! (땅땅) 작가님이 슬퍼지신 것 같으니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작가님이 좋아하는 씬 이야기로!
T : (반짝반짝)
B : 작가님이 아끼시는 ‘씬’에 대한 독자 질문이 있습니다. 러브 씬은 전개 과정에 따라 쓰시는지, 아니면 전개부를 먼저 쓰신 다음에 씬을 끼워 넣어 쓰시는지 물으셨어요. 후기를 보면 씬에 대한 작가님의 열렬한 애정이 느껴지기에, 편집자로서는 씬만 먼저 좌라락 다 쓰시고서 사건 전개를 사이사이에 쓰신 게 아닐까 싶은데. 실제로는 어땠나요?
T : 씬…… 얘기는 맞는데 야한 얘기가 아니잖슴…….(구시렁구시렁 대실망)
B : 아, 아닌가요?
T : 그, 그럴 리가! 각 잡고 답변 드립니다.
제가 일할 때 좀 많이 아쉬운 점이 있는데, 멀티가 안 돼요. 카톡 하면서 일하고 음악 들으면서 일하고 그거 안 돼요. 세상 부럽지만 안 돼요. 그래서 그런지 씬도…… 순서대로 아니면 못 써요. 씬을 쓰려면 앞부분의 사건들을 죽어라 다 써야만 순서에 따른 씬을 쓸 수 있습니다.
씬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글을 쓰게 하는 가장 큰 파워 맞습니다! 그래서 씬이 나오기 전까지 글 쓰는 속도는 그야말로 빛의 속도죠! 그야말로 씬을 위해서 미친 듯이 달리니까요.
지인분들이나 독자님들께서 종종 차라리 씬을 빼고 쓰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왜들 그르세여.(오열) 그거 저한테는 그냥 글 쓰지 말라고 하시는 것과 똑같습니다.
B : 우리 작가님 씬 계속 쓰게 해 주세요!
T : 아, 근데 씬은 보는 것도 좋아해요. 심지어 저는 제 씬도 좋아해요.(웃음) 제 취향의 씬입니다.
B : 어디 보자, B&M 소설 중 고수위 소설들 목록이…….(주섬주섬) 인터뷰 끝나고 저만의 금빛 찬란한 고수위 소설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T : 감사합니다!!! 목록 주세여!!!!!
B : 아! 독자들이 제일 많이 질문 주셨던 ‘차기작’ 관련 질문입니다. 일전에 작가님을 뵈었을 때 소설에 불호 키워드가 많이 들어가서 고민이 많으셨는데요. 다음 작품에서는 키워드로 따진다면 어떤 키워드들을 만지작거리고 계시는가요?
T : 왜인지 모르겠는데 저에게 마이너 유전자가 내재된 거 같아요. 지뢰를 하나 피할 때마다 더 큰 지뢰를 밟은 것 같은 이 오묘한 기분은 뭘까요? 예를 들어 리버스를 제거했는데 조루공을 밟았다든가? SF 코드를 제거하고 썼는데 숫자 환장 대잔치라든가?
마이너를 피하려고 노력하고는 있는데 유전자가 강력하다 보니 그것도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몹쓸 요소가 튀어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만약 차기작을 쓰게 된다면 역시 제 취향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공이든 수든 세기적인 미남이 나올 것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B : 아, 그렇죠. 작가님 글에는 무조건 미남! <천년의 제국>과 <샤인> 모두 미남 파티였으니까요! 아, 그런데 그 두 작품 통틀어서 가장 애정 하시는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T : 좀 애매하네요. 다른 작가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애정이 없이 만들어진 캐릭터는 거의 없거든요.
하지만 제 남자였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라면 <샤인>의 윤연희예요. 이런 남자가 내 남자라면 참 행복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잘생겼죠, 정력 세죠, 능력 있죠, 책임감 있죠, 속정 깊죠, 따뜻하죠, 성격 좋죠, 인격 괜찮죠, 믿음직스럽죠, 나이 들수록 중후한 품위도 생기죠, 신체‧정신 두루 건강하죠, 내 사람이다 싶으면 끝까지 있는 힘껏 사랑하기까지! 이런 퍼펙트하게 판타지스러운 사나이라니! 심지어 사랑과 안정감에 목마른 캐릭터라, 모성애까지 불러일으켜요. 이런 남자가 내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게이잖아요?……아이, 제기랄.
B : 역시…… 유토피아와 내 남자는 모니터 안에서 안 나오는 법이죠.(눈물)
사실 이번 인터뷰는 테암컵 작가님과 작품을 아껴 주신 독자분들께 대한 감사 선물임과 동시에, 당분간 BL을 쓸 생각이 없으시다는(!) 작가님의 뜻을 되돌리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T : 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을 드릴 수 있겠네요.
보도자료용—제가 비엘을 쓰는 이유는 오로지 씬 때문이었죠.(단호!) 그런데 아직 에로도가 차지 않았습니다. 존잘님, 금손님들! 울트라떡대중년꽃수 좀 많이많이 내 주세요! 저도 에로뽕이 좀 차야 에로신도 다시 강림하실 것이고, 그래야 또 뭔가를 쓰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진실—그저 먹고사니즘에 치여 사는 불쌍한 중생입니다.(꾸벅)
B : 아, 세상에. <샤인> 댓글 중에 작가님 사는 동안 많이 버시고 부디 다작하시라는 댓글이 많이 눈에 띄었었는데 말예요. 아, 건강하시라는 말도요. 저 역시 작가님께서 부디 건강 잘 챙기시고 다작하시고 그리하여 사는 동안 많이 버시면 좋겠어요. 담당자이자 독자이자 팬으로서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T : 네,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글들 읽고 있으면 코가 시큰하고 그래요.
B : 작가님의 차기작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이게 마지막 질문이었네요. 긴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T : 세상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갔어요! 인터뷰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는데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다음에 단합대회 하면서 못 다 나눈 이야기들을 마저 나눠 보아요.
B : 그럼요! 중년떡대꽃수를 좋아하고 길 잘 잃고 얼굴 잘 못 외우는 사람들의 모임이겠네요.(웃음)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T : 네, 감사합니다!

작가님께서 얼른 돌아오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스스로 ‘장편병’이라고 하지만 그건 역시 인물에 대한 고찰, 작품에 대한 고뇌 등이 모두 작품에 녹아들 수 있도록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생겨난 대서사가 아닐까요.
테암컵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간절히 기다려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