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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B&M 편집부에서는 2017년 5월, 10권에 달하는 대작 <샤인>을 출간하였습니다. 작가는 <천년의 제국>의 테암컵 님! 2012년에 출간된 <천년의 제국> 이후 5년만의 작품이기에 많은 BL독자들께서 출간 소식에 관심을 갖고 궁금해하셨습니다. 이에 저희 B&M편집부에서는 독자분들의 질문을 받아 정리하여 작가 인터뷰 이벤트를 진행하게 됐습니다.
카카*톡 메신저로 진행된 본 인터뷰는 5월 23일 오후 2시 30분에서 7시 30분까지, 다섯 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작가님의 다소 엽기적인 조합의 점심식사 메뉴 소개부터 거침없는 흑역사 공개, 담당자와 작가님의 확고부동한 공수 취향에 대한 수다까지 뒤섞여 소탈하고 유쾌한 분위로 진행됐습니다.

천년의 제국, 샤인의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차 한 잔을 곁들인 유쾌한 수다, 테암컵 작가님과의 인터뷰 내용을 독자 여러분께 지금 공개합니다!


※ 본 인터뷰는 <샤인>, <천년의 제국>에 대해 일부 내용 누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작품을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주의하여 주세요.

<샤인> 보러가기 https://ridibooks.com/v2/Detail?id=2093011055
<천년의 제국> 보러가기 https://ridibooks.com/v2/Detail?id=2093005866


B&M 담당자 : 안녕하세요, 작가님!
테암컵 : 안녕하세요! 테암컵입니다.
(이하 담당자는 ‘B’, 작가님은 ‘T’로 표기합니다.)
B : 이렇게 이야기하니 조금 색다른 기분이네요!
T : 그러네요! 그런데 메신저로 인터뷰한다는 말씀 듣고요, 막 두근두근하면서 어제 2000원 주고 고양이 이모티콘을 샀거든요? 그런데 그림 안 들어간다고 하셔서 지금 굉장히 시무룩합니다.
B : 어, 음.(당황) ……비록 독자님들께 전자책으로 보여 드릴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라도 실컷 쓰셔요!

―이후 작가님은 정말로 이모티콘을 팡팡 쓰시며 인터뷰에 응해 주셨습니다. 한이 풀리도록 쓰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새로 구매하셨다는 그 이모티콘을 독자님들께도 보여 드릴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1. 테암컵, 그 시작
B : <천년의 제국>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테암컵’이라는 작가님의 필명을 검색했을 거예요. 그만큼 작품이 주는 감동이 크니까요. 제가 검색한 당시에는 아직 <샤인>을 쓰시기 전이라 검색 결과에 다른 작품이 나오지 않아 무척 낙담했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나 싶어 teamkup, teamcup, team컵 등으로도 검색했던 기억도 나고요.
<천년의 제국> 이전에 BL소설을 쓰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BL이라는 장르를 처음 접하신 상황과 그때의 인상이 궁금합니다! BL 입문기를 들려주세요.
T : 입문기요? (첫 질문부터 당황) 담당자님, 그 질문 혹시, “저 작가는 저런 괴랄한 마이너 취향을 과연 어디서 얻었을까?” 같은 질문 들어온 거 돌려서 말씀하신 건 아니시죠? 게다가 이런 질문은 너무나 대놓고 흑역사 공개 요청인 것입니다.
B : 에이~ 그래도 조금만 공개해 주세요.
T : 제 입문기는 제가 생각해도 좀 거시기한데 뭐 까라면 기꺼이 깝니다! (수치능욕 플레이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컵 한 마리)
입문기는 짧아요. 한 몇 달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전에 만화 볼 때도 뭔가 흐뭇한 분위기는 감지하고 있었죠! 은근슬쩍 비엘 코드가 많았거든요. 왜 잘생긴 남자들이 여자하고 연애를 안 하고 남자들끼리 노는? 그런 오묘하고 설레는 분위기 있잖아요. 하긴 거기서도 남주 여주가 아니라 걔들이 이상하게 더 좋았던 거 보면 제가 확실히 싹수가 있었어요.
아무튼 BL 소설이 있다는 건 꽤 늦게 알게 됐고, 접한 기간도 짧다 보니까 처음 연재할 땐 암묵 룰 같은 것도 모르고 용어도 모르고 지인도 없고 물어볼 데도 없어서 많이 헤맸었어요. 아는 건 ‘공’이랑 ‘수’라는 용어 정도?
그래도 떡대수나 아방수 같은 건 대충 눈치로 알겠는데, 검색에도 안 나오는 ‘리맨’, ‘키잡’ 같은 건 정체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너무 초보적인 것 같아서 이놈의 걸 물어볼 수도 없고. 상황이 그 지경이다 보니 이불 뻥뻥 구멍 낼 만한 흑역사도 꽤 적립했었죠.
B : 오, 흑역사 몇 개만 소개해 주세요!
T : 음, 조아라에서 연재할 때인데요…….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텍본하고 관련된 일이었는데요.
B : 텍본! (진저리)
T : 지금 생각하면 되게 이상하지만 그때 조아라에서 연재할 때는요, 쪽지로 텍본을 달라는 독자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냐면…… 답쪽지로 물어봤어요.
“님, 텍본이 뭔가여……?”
B : 세상에!(폭소) 답변은 어떻게 돌아왔나요?
T : “텍스트본 파일인데요.” 하는 대답이 왔죠.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거든요. ‘아니, 이렇게 열심 성실히 연재하고 있는데 왜 따로 파일을 만들어서 나눠줘야 해?’, ‘가만, 혹시 이쪽에 그런 문화가 있나?’, ‘음, 하긴. 무수한 덕질 필드에는 이방인은 절대 알 수 없는 고유한 문화가 있지 아니하던가!’ 이런 생각들을 했죠.(지금 생각하면 답도 없이 망충했던 컵 한 마리…….)
B : 아, 아니어요!
T : 네, 절대 아니죠. 하지만 그땐 이쪽 입문이 처음이고, 아는 게 워낙 없어 놓으니 “님들아, 왜 내가 그걸 만들어 줘야 해?” 하고 따지지는 못하고 다른 연재란을 기웃거리면서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애썼어요. 또 실제로 그런 케이스가 있는 것을 보고 좀 놀랐구요.
그래서 ‘아아? 그럼 이건 이 장르의 불문율 같은 건가?’, ‘뭔가 이해하긴 어렵지만 이쪽 문화에선 그런 종류의 작가 서비스가 있나 보다?’ 진짜로 그렇게 해맑게 뇌맑게 생각하려고 했어요. 사실 알고 보면 작가의 저작권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더 예민하고 강경한 곳이었는데 말이죠.
“작가뉘이이임! 텍본은 뿌리면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자기 글이라도 눼버!”
다행히, 오해는 바로 깨졌어요. 그때 B&M 팀장님이 혜성처럼 나타나셔서…….(웃음) 계약하자마자 울부짖으며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이 저거였네요. 그분이 절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너무 창피해서 그분 퇴사하실 때까지 못 물어봤거든요. 크흡.
B : 작가님 순진하시다! 내가 지켜 드려야지! 하지 않으셨을까요!(웃음)
T : 그, 그럴 리는(진땀)……. 아, 그리고 비슷한 제 2의 흑역사!
쪽지로 소장본 요청하시는 독자분도 많이 계셨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개인 출판이라는 게, 왜 있잖아요. ‘실수요는 거의 없지만 특수 목적으로 발간하는 자비 출판’? 그런 것뿐이었거든요. 학술지나 ‘김떡순 여사 고희 기념 자서전 <바람에 나는 민들레는 울지 않는다>’ 같은 책들이요. 개인 소장본 출간이 그렇게 활발한지는 몰랐던 거죠.
그래서 그때 했던 생각이 이거였어요. ‘아니, 그렇게 열심 성실히 연재했는데, 적금 깨서 자비 출판 서비스까지 해야 해?’(지금 보니 정말 답도 없이 망충했던 컵 한 마리 2.)
그런데 결국 상업지로 종이책이 나왔죠.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입니다.(웃음)
B : 그럼요, 그럼요~
T : 아, 맞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버스! 리버스 사태!
크으. 전 그거 그렇게 싫어하는 분들이 많은 줄을 몰랐어요, 진짜로. 아니, 사나이 인생 공평해야 하고, 똑같이 달렸으면 똑같이 써먹어야 하고! 저한테 맛있는 떡, 아니 케이크면 남한테도 맛있는 케이크고!
B : 서비스로 외전 리버스를 쓰셨던 거죠?
T : 네, 리버스……. 저는 진심으로 말씀드리건대, 애정 어린 팬 서비스 차원으로 넣은 거였습니다. 그런데 서비스가 서비스가 아니었던 것.(눈물)(지금 보니 정말 답도 없이 망충했던 컵 한 마리 3)
B : 그래도 여전히 리버스는 좋아하시죠? 작가님 말씀대로 취향은 죽지 않으니까요!
T : 당연하죠!!! 백 번이라도 씁니다!!!!! 취향은 죽지도 않습니다. 사라지지도 않습니다!!(폭풍눈물)
B : 아, 그러고 보니 집 나간 본론을 데려와야겠어요, 작가님!
T : 아, 네. 맞다. 입문기 얘기였나요? ……영어! 그렇죠. 영어 때문이었어요.(먼산)
전에 외국에 꽤 오래 머물 일이 있어서 미리 영어 공부라는 걸 해 둬야 했거든요. 아무리 영어를 못한다지만 길 잃었을 때 물어물어 집에 찾아올 정도는 돼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소문난 방향치라서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방송되지 않은 오래된 미국 애니메이션을 찾아서 개인 블로그에 딕테이션과 해석을 해 가며 리스닝 연습을 시작했어요.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제 철벽 뇌세포에는 효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블로그에 이웃으로 오신 분들이 있었어요. 잘 안 들리는 부분이나 해석을 도와주기도 하셨고, 애니메이션 시리즈나 배경, 인물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도 해 주시고 그러셨어요. 야근 철야 상사 뒷담 그런 것도 같이 하다가…… 나중에는 그분들과 서로이웃을 맺고, 블로그에도 룰루랄라 놀러 가게 됐지요.
그런데 세상에! 그분들이 소설을 쓰고 계신 것이었씀미다!!!
저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어머나, 이분들이 소설도 쓰시네? 하면서 첫 페이지를 열어 보고 바로 엄뫄야!!!! 소리를 육성으로 뿜었습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키보드 위로 침이 떨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게 자꾸 마우스 휠을 돌리는 손가락과, 이유를 알 수 없게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 고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저는 바로 깨달았습니다!
“예에에쓰!(주먹 불끈) 이것이야말로 나의 운명이다!”
하늘에서 벼락 치듯 내려온 깨달음이었죠. 저는 그렇게 하여 새로운 세계를 영접하게 됐습니다.
B : 신세계가 열렸군요.
T : 네. 말 그대로 신세계였어요. 그래서 어쨌느냐 하면…… 뭘 어쩝니까, 고3 때도 겪어 보지 못했던 맹렬 열공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죠.
B : 이쯤에서 생각나는 속담(?). BL을 한 번도 안 본 여성은 있어도, 한 번만 보는 여성은 없다!!
T : 네. 만화 때부터 싹수를 알아봤어야 했어요. 어쨌든 그리하야 신세계에 입성한 컵 한 마리는 밤을 꼴랑꼴랑 새우게 됐습니다. 토끼눈이 돼서 눈이 떠지지도 않고 감아지지도 않는데 모니터를 부여잡고, 정줄을 빼놓고 오예오예오예!를 외치는 모습…… 따위 상상하지 마세요. 좀 마이 숭악헙니다.(웃음)
B : (뜨끔)(상상하고 있었다.)
T : 그러다 몇 달이 지난 후…… 와야 할 것이 오고야 말았어요. 아! 영어는……? 하는 현타요.(눈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그 아이디를 없애 버렸어요. 이번엔 진짜 열공 모드로 들어가야지, 했는데…… 출국이 내일모레더라고요. 엄마야, 나 어떡해, 하고 질질 울면서 공항에 나갔죠.
뭐 대충 그랬다고 합니다. 제 짧은 입문기는 그것으로 종말을 고했습니다.
B : 엇, 그런데 현타가 오셨는데 어떻게 독자에서 창작자가 되셨나요? 뭔가 강력한 계기라도?
T : 그게, 출국한 뒤로 되게 바빴어요. 할 일도 엄청 많고 영어는 계속 버벅버벅버벅.(눈물)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탈덕이 된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동안 잊고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푸른 하늘을 보면서 갑자기 에로신이 강림한 거예요. 아, 씬을 쓰고 싶다…… 하는 강렬한 욕망이!!! 그분이 오신 거죠.
나중에 들은 건데, 원래 휴덕은 있지만 탈덕은 없다면서요?
B : 아, 그럼요.(진지)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랍니다.
T : 그거슨 레알 진리입니다. 어쨌든 비엘 에로신의 계시가 임했고, 에로뽕이 막막 그냥 막 차올랐고, 씬을 너무너무 쓰고 싶었어요.
제가 굼뜬 것 같으면서도 이상한 데서 행동력이 빨라요. 그 길로 당장 비엘을 올릴 수 있는 사이트를 찾다가, 조아라라는 사이트를 찾았죠. 우와! 읽을 게 엄청 많더라고요.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 바로 가입하고 글을 올렸는데 그게 <천년의 제국>이었어요.
B : 와! 진짜로 ‘테암컵 작가’의 시작이네요.
T : 진짜 무식해서 용감했죠. 개초짜 생초짜의 지름글이었는데 과분하게 사랑을 받았어요. 제 글의 미숙함은 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읽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진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B : 좋은 작품이니까 모두 함께 달리고 응원하셨겠죠.
T :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고기 쏴 드려요.
B : (두근) 아, 그럼 그 이후로 가장 즐기시는 BL 취향을 키워드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예를 들자면 미인공, 떡대수, 키잡물……. 역시 쓰신 글=작가님 취향일까요?
T : 선호 키워드는 ……미남……이요.
제가 늘 주장하지만, 미남이야말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정수 아니겠습니까?
B : ……아, 역시.
T : (한숨) 질문해 주신 내용대로, 제 글에는 제 취향과 사심이 듬뿍 담긴 거 맞습니다. 우물을 파는 아쉬운 사람으로서 경건하고도 절절한 마음을 담아 쓰는데 당연하죠. 미남이란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텔레비전에만 나오는 외계 종족 아니던가요.
B : 모두 연예 기획사 지하에 갇혀 있단 이야기가 있더군요.
T :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제 주변에선 씨가 마른 거였어요! (폭풍 눈물)
여튼 제 취향은 초지일관 명명백백 확고부동, 굳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 있습니다. 공이든 수든 잘생긴 거! 남자가 일단 잘생겨 놓으면 뭐랄까, 좀 미운 짓을 해도 용서가 되지 않습니까?
제가 샤인 연재할 때 하도 미남 타령을 했더니 독자님들이 미남 종교 창설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미남신봉교 창설했어요. 제가 교주입니다. 계속 신도 모집 중이니 담당자님도 들어오세요.(급 포교모드)
B : 오, 받아 주세요! 미남 안에서 평화를…….
T : 그 외에도 미남만큼이나 좋아하는 키워드로는 떡대수와 아재공수, 수줍공수, 상남자, 배틀호모, 리맨물, 슈트빨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취향이 굳건하다고는 해도 독자로서는 지뢰 키워드가 없어요. 재미만 있으면 다 봐요. 항마력도 높고요. 울트라마이너 작가지만 독자로서는 참 순하고 참한 독자랍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습니다.)
T : 아니, 이 침묵은 뭔가요……?
B : 음…… 네……. 다음 질문 갈까요?
T : 사람 말 좀…… 믿어 주시죠?


2. 테암컵, 그리고 <천년의 제국>
B : 키워드 얘기는 이후에 조금 더 나눠 보도록 할게요. 일단은 작품 얘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역시 <천년의 제국>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죠. 이 작품이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은 그야말로 감탄이었습니다. 네 권 분량에 담긴 인문, 정치, 전략, 우주, 사회 등등 전방위적인 내용들! 특히 SF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스페이스 오페라급의 외계 행성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야광봉)
첫 작품으로 SF라니,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후기에 ‘씬이 쓰고 싶었어요.’라고 하셨지만 씬을 쓰기 위해 굳이 SF를 쓸 필요는 없으니,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듯한데요.
T :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되게 창피하네요.
왜 하필 SF였냐 하면 아마 개인의 선호도가 반영된 게 아닐까 싶어요. 우주 관련 소재를 좋아하거든요.
어쩐지 우주에 대한 책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철학자가 되는 것 같아요. 일단 숫자의 규모나 기본 단위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우주에선 거리의 기본 단위가 글쎄 ‘빛이 1년 가는 거리’인 거예요! 오예! 뭔가 단위만으로 모든 걸 평정하는? 해탈하는 기분? 저 달을 바라보며 도를 아십니까, 묻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전공이 이공계는 아닌데 우주 항공 과학 쪽의 책은 종종 사서 읽어 보는 편입니다. 저의 소박한 실생활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돈 한 푼 안 되는 내용들이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그래서 돈을 못 버나…….) 목성에 혜성 조각이 들이박혀서 폭발한 거나 어느 머나먼 은하의 모 초신성이 폭발해서 블랙홀이 된 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런 얘기 들으면 귀가 쫑긋 서고 되게 재미있거든요.
B : 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우주 앞에서 느끼는 막연함이나 경이로움 같은 거!
T : 네, 그리고 현실 배경을 다루는 것보다 상상력을 좀 더 자유롭게 풀어놓을 여지가 많아서 매력적인 것도 있고요. 저에게 SF는 사이언스 픽션이라기보다 사이언스 판타지인 것입니다!
B : 하지만 실제로는 우주에 방사능이 쫙 깔려 있어서 나가면 피폭되고 암에 걸린다죠?
T : 네. 우주선(宇宙線)이라고 부르는 선인데, <천년의 제국>에도 그 장면이 나오죠. 운트 위비라고, 세기의 과학자가 나오는데 그가 차단제도 안 바른 상태로 이 우주선을 맞고 죽을 뻔했던 에피소드예요. 뭐 결과적으로는 야수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입니다.
B : SF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론과 시오가 화성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감동을 느꼈습니다. 불모의 땅 화성에 버려진 생존자들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생각에 론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화성 이주민들의 처참한 삶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다 보니, 소설 속 일인데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서 끌어온 물이 화성의 분화구에 쏟아지는 장면에선 마치 소설 속 화성인이 된 듯 가슴이 벅차더군요.
그밖에도 SF적인 상상력이 발휘된 장면이 참 많았습니다. 막상 그러한 장면을 쓰시려면 플롯 단계에서부터 점검을 많이 하셔야겠던데요. 넣고 싶었으나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인 근거가 마땅치 않아 버려야 했던 설정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자료 조사하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었나요?
T : 아, 담당자님, 진실을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실현 가능한 근거를 세어 보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요…….(진땀)
<천년의 제국>은 외국에 있을 때 일코를 하며 썼던 거라서 자료조사가 정말 어려웠어요. 책들은 다 집에 있고, 한국 자료는 구하기 어렵고, 외국 자료는 읽으려면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인터넷 사용 비용은 한국의 열 배쯤 됐습니다.
B : 헉, 그 정도면 자료 조사가 거의 불가능하셨겠는데요.
T : 네, 그리고 일단 머물던 집에 과학 관련 한국 책이 거의 없었어요. 상황이 그렇다 보니 별도의 자료 조사라기보다 머릿속에 있는 걸 박박 긁어서 인터넷에서 확인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어요.(일단 이 자리에서 검색창에 큰절 한번) 그때 구글의 달 지도, 화성 지도 같은 것도 참 많이 봤는데 나중엔 한국 지도처럼 되게 친숙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음, 그리고 마땅치 않아 버려야 했던 설정이라기보다, 조사한 것들을 다 쓰지는 못했죠. 다 써서도 안 되고요.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다 써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 하고 누가 말씀해 주셨는데…… 저도 작가 이전에 독자인지라 필요 없는 설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쓸 때는 설명봇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는데 아마 늘어지거나 설명로봇 느낌도 있긴 했을 거예요.
맞다, 이건 기억나요. 달에 설치된 전진 기지, 문 베이스를 론이 공격하러 갈 때 혜성 속도를 구할 일이 있었어요. 이 불쌍한 수학 고자는 혼자 헤매면서 며칠 동안 열심히 계산했는데 쓴 건 한 줄. 크와앙! 나중에 어떤 독자님이 혜성 속도 나온 외국 자료를 보내 주셨는데 다행히 계산 결과가 맞더라고요. 허탈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안심했습니다.
B : 그 치열한 과정을 딛고 나온 <천년의 제국>은 정통 SF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본문에 시가 자주 인용되어서 또 의외였어요. 안 어울렸다는 게 아니라 소설 속 흐름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시로 인해 더욱 선명해져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천년의 제국> 2권에서 주인공 시오 헤이브가 오랫동안 몽크 마스터로서 머물던 ‘힐링 마운틴’과 동료 수사들이 전쟁 과정에서 참변을 당했었지요. 시오 헤이브는 김소월의 시 <초혼>을 읊는 것으로 죽은 이들을 기렸는데요. 시오 헤이브의 깊은 슬픔과 죄책감이 드러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외에도 프랜시스 버딜런의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 복효근의 ‘콩나물에 대한 예의’, 유치환의 ‘행복’ 등 여러 시가 인용되었지요. 이런 식으로 시가 자주 인용되는데, 어떤 생각으로 시들을 고르셨는지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김소월, ‘초혼’ 中]


T : 어쩌죠? 환상을 깨드릴 거 같은데…….(쭈글)
작중에 시가 많이 나오는 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시오 헤이브가 시를 좋아하는 문학 소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시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낭만적이고 곱고 예쁜 말은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이고, 거칠고 투박하고 적나라하게 상황을 드러내는 묘사를 좋아합니다.
한밤중 감성 폭발, 그런 거 없습니다.(한밤중에 폭발하는 건 식욕뿐인 컵 한 마리) 드물게 시 한 줄에 가슴이 찡, 할 때가 있긴 한데요, 그마저도 투박하게 턱, 찌르는 것 같은 스타일의 시가 많아요. 성격도 대체로 덤덤하고 무심……하다기보다 둔한 편인 것 같고요.
그나마 적절한 시를 적절해 보이는 위치에 몇 편 넣을 수 있었던 건, 대학 동기였던 룸메이트와 ‘치매 방지용’으로 시를 꽤 많이 외웠기 때문이에요. 생각하니 둘 다 그때 뭘 잘못 먹었나 싶은?
B : 치매 방지에는 산수가 더 좋지 않나요?
T : 저와 친구는 문과였거든요. 본능적으로 숫자는 피합니다.(웃음) 게다가 그 친구가 시를 좋아했거든요. 시집을 갖고 있던 것도 그 친구였고, 먼저 외우자고 했던 것도 그 친구였고, 여리고 감성적인 성격을 가진 것도 그 친구였지만, 외우기는 제가 훨씬 더 많이 외웠더라는 알 수 없는 결과가 나오긴 했습니다.
그때 알 수 없는 경쟁심에 불타올라 목마와 숙녀 같은 장시도 주먹 불끈 움켜쥐고 외웠어요. 정말 치매 방지용(과 알 수 없는 경쟁심)으로 외웠습니다. 다른 고상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 그리고 초혼은 조아라에서 연재할 때 독자님이 추천해 주셨던 거였답니다. 고마우신 독자분이었죠.
좀 안타까운 건 연재할 때는 시가 훨씬 많았는데 저작권 문제도 있고, 일단 연재 분량이 너무 많아서 내용을 필사적으로 누르고 밟고 쳐 내는 과정에서 시가 많이 잘려 나갔습니다.(눈물)
B : 그런데 사실 <천년의 제국>은 피폐물이라는 평도 많았어요.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론과 사랑에 헌신하는 시오의 관계 때문인데요. 최하층인 식민지 행성 혼혈 출신이면서도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에 불타는 론은 ‘킹 메이커’라 불리는 시오 헤이브를 손에 쥐고 자기 뜻대로 휘둘렀잖아요. 그러면서 참혹한 일도 여러 번 벌어지다 보니 독자들이 피폐하다고 많이들 말하십니다. 이러한 평을 알고 계신가요? 독자들에게 이에 대해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T : 네, 당연히 알고 있죠. 제가 생각해도 많이 피폐한걸요. 뭐 사실인데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읽다 보면 괜찮아진다고 뻥을 칠 수도 없고요. 론 타도위원회 1호 회원으로 가입해서 같이 짱돌 집어 던진 주제에 ‘론도 사실 괜찮은 부분도 조금 있어요. 잘생겼잖아요!’ 하고 변명해 줄 수도 없고.
그래서 후반부에 나름 꿀과 설탕을 듬뿍 발랐는데…… 이게 당의정도 아니고, 크흡.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쥐구멍)
B : 애초에 피폐물을 계획하고 쓰신 건가요?
T : 바닥까지 내려갈 거라고 잡고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시오헤이브한테 참 못할 짓을 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못된 건 론이 아니라 저…….
B : 시오가 무법지대인 7지구에 버려져서 겪는 일들도요?
T : 네, 남창 설정까지는 잡았었으니까요.
B : 역시 글 안에 멘탈 탈곡기를 심어 두신 게 맞았군요. 하긴, 즉흥적으로 쓰셨다고 하기엔 참…… 탄탄하고 물 샐 틈 없는 피폐물이었죠.
T : 그때는 피폐물 쓰는 게 그렇게 힘들 줄 몰랐던 것도 있어요. 일상 부분 쓰는 것보다 피폐한 부분 쓰는 게 더 힘들더라고요. 쓰기 전엔 몰랐죠. 아마 다른 작가님들도 비슷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B : 작가님의 용감하고 무모한 도전에 감사합니다. 후후. 그러고 보니 좀 무거운 질문들이 연이어 나왔군요. 가벼운 질문들도 있어요. <천년의 제국>에서 작가님이 가장 힘 줘서 쓰신 장면이 있다면요?
T : 씬!
B : 씬 빼고요.(엄근진)
T : 씬씬씬…….(움찔)
B : 씬 빼고.
T : (시무룩) 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 경우는 등장 인물들이 힘든 상황을 쓸 때 저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쟁 씬, 힐링 마운틴이 폭파되는 장면, 시오와 론이 밑바닥까지 구르는 장면, 문 베이스에서 승전 후에 지구로 추락하는 과정 같은 건 쓰면서도 괴로웠죠.
대신 무인도 장면이나 엔딩, 외전 같은 건 참 편하게 웃으면서 썼던 것 같아요. 그런 거 보면 저도 등장인물이나 상황에 이입해서 쓰게 되나 봐요. 무인도나 프러포즈 장면 같은 건 진짜 엄청 빨리 나왔어요. 무인도에서 엔딩까지는 너무 술술 잘 나와서, 조아라에서 연참도 했었죠. 엄청 긴 분량으로 매일 한 편씩 쫙쫙 올렸어요. 그 정도로 잘 나왔던 거죠.
제가 감수성은 바닥인데 감정 이입은 잘합니다. 남의 글 읽을 때도 그래요. 어떤 이해 불가 캐릭터도 그냥 막 다 이해가 돼! 정말이라니까요? 그래서 제가 참하고 순한 독자인 것입니다.(꿋꿋)
B : 아, 아까 힐링 마운틴 사람들 이야기가 잠깐 나와서 말인데요. <천년의 제국>은 네 권 분량인 만큼 등장인물도 무척 많아요. 두 주인공인 론과 시오 헤이브 외에도 시오의 친구 알파 리온, 론을 좋아하는 레암 세케르스, 세기의 과학자라는 운트 위비를 비롯한 힐링 마운틴의 수사들 등등. 이 중에서 테암컵 작가님께서 가장 애착을 갖는 인물과 가장 표현하기 힘들었던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T : 양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들이 아무래도 복합적인 매력이 있겠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사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양면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 건 본인의 원래 성품과는 무관하게 야누스의 얼굴을 갖게 된 시오 헤이브, 그리고 레암 세케르스라고 생각해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상반된 모습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게 관건이었는데 잘못해서 캐릭터 붕괴로 이어질까 봐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