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내가 어디 가서 남자를 꼬셔 원나잇을 해!”
“야, 연애 못 한다고 원나잇도 못 하라는 법 있어? 오히려 시간 줄이고 좋지 뭐. 남녀 몸 섞는 데 연애처럼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것도 아니고. 학벌, 인성, 재력, 시댁 다 빼고 성적으로 끌리는 놈 찾아서 하룻밤 자자는 건데 그게 연애보다 어려울 게 뭐야?”
그런가? 원나잇은 연애보다 쉽다는 건가? 술술 나오는 보영의 말에 약간 흔들렸다.
“생각해 봐. 일반적인 마인드로 원나잇이 용납이 안 되니까 연애랑 결혼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거지. 정신줄 살짝 놔 봐라? 30분만에 침대로 직행할 수 있는 게 원나잇이야.”
하긴, 이런저런 조건 없이 외적인 매력만 따진다면 쉬울 것 같기도 하다.
조용히 자신의 말을 듣는 다미의 모습에 보영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다른 조건 다 빼고, 서로의 육체적 매력에 이끌리는 게 뭐 나빠. 그냥 여기가 동물의 왕국이고 네가 발정 난 암사자라고 생각하면.”
“뭐 발정 난 암사자?”
다미가 보영의 등짝을 때리기 위해 손을 올렸다. 하지만 보영이 잽싸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잠깐, 그건 농담이고.”
아까보다 보영의 눈빛도 더욱 진지해졌다.
“또 이상한 놈들 만나서 시간만 버리느니 아예 액땜 제대로 하고 괜찮은 놈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동안 다미가 되지도 않는 연애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는지 옆에서 보아 온 보영이였다. 자신의 연애사도 뭐 딱히 자랑스럽진 않지만, 저 이다미의 연애사는 너무 하찮다. 어떻게든, 다미가 새 인생, 새 출발을 했으면 했다.
간곡하고 꽤 논리적인 보영의 읍소에 귀 얇은 다미는 슬슬 끌리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
좀 더 잘 들어 보겠다는 듯 양쪽 머리도 귀 뒤로 꽂아 보였다.
“게다가 우리가 그동안 쌓은 지식도 많은데, 언제까지 썩히고 있을 거야. 이제 슬슬 실전에 들어가도 되잖아. 아끼다 똥 된다. 우리가 하던 말을 생각해 봐.”
보영이 허공에서 손을 움직였다. 그 손을 따라 지난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그랬다. 보영과 다미는 우정만 나눴던 것이 아니고 야동도 나누던 사이였다. 남들 다 하는 연애에서 자꾸 제대로 일이 안 풀리자 시대에 너무 뒤처지면 안 된다고 고안해 낸 방법이 자기 주도 야동 학습이었다.

‘남들 다 하는 거 실습이 안 되면 이론으로라도 익혀야지. 이러다가 나중에 제대로 할 줄 몰라서 또 차인다고.’

이상한 논리에 쿵짝이 맞아 그동안 심심할 때면 야동을 보며 자신들의 남성 선호 타입과 취향, 체위 등에 대해 꼼꼼히 학습하여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노력했다.

‘나는 크리스 햄스워스 같은 남자가 내 두 팔을 넥타이로 묶고 엉덩이 막 때려 줬으면 좋겠어.’
‘나는 오피스 섹스. 다들 퇴근한 빈 오피스에서 책상 위에 여자를 올리고……. 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하게 하는 게 유행이더니, 요새는 여성 취향도 많이 나오네.’
‘맞아. 요새는 마사지물이 많더라고. 난 야외 취향인데.’

장난삼아 했던 말들이 자신의 숨겨진 욕망의 표출이었던가?
“그래, 알고 보면 네 몸속에 옹녀가 있었던 게 맞는 거 같아. 그러니 그렇게 야동을 보지.”
보영이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 야동 나만 봤니? 그동안 같이 자기 주도 야동 학습 연구한 게 누구인데. 내가 옹녀면 넌 옹녀 할머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제치고, 하여튼 우리가 그동안 그 수많은 야동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잖아. 젊을 때 즐겨야 하는데, 아끼다 똥 되는데, 하면서. 이제 때가 된 거야. 즐길 때. 눈 딱 감고 해 봐.”
“그, 럴까?”
약 파는 계집애라 그런지 말발이 좋았다. 악마의 속삭임 같은 보영의 말발에 홀라당 넘어갔다.
“근데, 어디 가서 남자를 구하지?”
자신이 음란하게 살겠다고 마음먹는다고 그게 뿅 하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남자를 만나야 하는 건데, 그 남자를 도대체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부터 막막했다.
“소개팅? 도 안 되고, 대학 때 들이대던 놈? 도 아니고, 동네 사람? 은 절대 안 되고.”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지만 모두 꽝이었다. 꽝꽝꽝!
“네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는 그런 인간이어야 해.”
“하긴, 원나잇해 놓고 그 상대를 또 만난다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렇지. 그럴 일은 절대 없어야 해.”
“음……. 클럽?”
“거긴 너무 어린애들이 많을 텐데?”
“그렇긴 하지.”
더 이상 생각도 안 났다.
“길거리 가다 헌팅할래? 저기요, 저랑 같이 하룻밤 자 주실래요? 어때?”
한번 시작한 대화는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근데 변강쇠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하지? 그놈의 박수무당이 그냥 남자 말고 변강쇠 같은 놈 만나랬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첩첩산중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보영이 손으로 딱, 소리를 냈다.
“아! 좋은 생각 났어! 그럼 수영장이나 워터파크는 어때?”
“수영장이나 워터파크?”
자고로 수영장과 워터파크란 몸 좋은 젊은 남녀들의 집합소 아닌가. 그곳에서는 수영복만 입고 만나니까 몸매 확인이 확실할 거고, 게다가 얇은 수영 팬티를 입었을 테니 구분도 잘 될 거고. 나름 괜찮은 생각인 듯했다.
“네가 생각해도 괜찮지?”
“근데 워터파크는 꽤 추워졌는데 사람들 있을까?”
“그래? 그럼 이 부근 물 좋은 수영장으로 할래?”
“그럴까? 어느 수영장이 좋을까?”
너무 가까운 곳은 곤란하다. 행동반경 밖의 수영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너무 멀면 다니기 힘든데, 어디가 좋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지 말고 스포츠 센터는 라영이가 꿰고 있잖아. 전화해 봐.”
보영이 다미의 핸드폰을 집어 건넸다.
“맞다. 나의 사랑스러운 남동생. 평상시 쓸모도 없는데 이럴 때나 좀 써먹어야지.”
잽싸게 핸드폰을 눌렀다.
― 어, 누나? 누나가 웬일로 전화야?
“야, 우리 집에서 최소 버스 타고 열 정거장 이상 떨어져 있으면서 물 좋은 수영장이 어디야?”
― 하여간 인사 없이 본론인 건 엄마랑 똑같아, 진짜. 왜?
바빠 죽겠는데 왜 이리 눈치 없이 말만 많은지 몰라.
“됐고. 질문에 답만 해.”
― 집 가까운 데 빼고? 그러면 동대문구 쪽에 S 스포츠 센터가 물이 좋지.
“S 스포츠 센터가 물이 좋대.”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보영에게도 제가 얻은 정보를 알려 주었다.
― 옆에 누구 있어? 보영 누나야?
갑자기 라영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얘 왜 이러나 싶어 귀에서 수화기를 떼고 스피커 부분을 바라보았다.
“응, 그래 보영이다.”
― 보영 누나랑 같이 수영 다니려고? 왜 집 멀리 물 좋은 수영장 찾나 했더니 설마 둘이 남자 꼬시러 가?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에 속도감까지 장착했다. 라영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뱉어 냈다.
“어른들 하는 일에 애들은 빠져라.”
보영이 잽싸게 핸드폰을 뺏었다. 수화기 너머로 라영의 ‘누나, 누나!’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보영은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이번엔 반드시 성공해서 뻥 뚫린 8차선 도로처럼 빛나는 삼십 대를 만들겠다, 란 굳은 결심으로 다미의 눈이 반짝거렸다.

*


다음 날 아침부터 다미는 당첨된 로또 상금을 수령하러 가는 것처럼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일단 이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간절함이 생겨났다.
‘이번만, 이번에만 성공하면 취직도 할 수 있을 거야.’
평상시에는 절대 믿지 않을 말, 하지 않을 행동이 나의 미래를 바꿔 줄 당첨된 로또처럼 확실해 보였다. 그렇게만 하면 내 인생이 정말 달라질 것 같다는 깊은 확신이 밀려왔다.
이력서 제출을 모두 끝낸 저녁 타임에야 짬이 나서 한달음에 스포츠 센터로 달려왔다. 접수처 앞에서 직불 카드를 공격적으로 들이밀며 이렇게 외쳤다.
“주 5회 새벽 6시 중급반이요.”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밝은 미래를 위해 눈을 딱 감았다. 하지만 접수처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다미를 쳐다보았다.
“이번 달 수업이 4회밖에 안 남았는데요. 다음 달 새벽반으로 등록해 드릴까요?”
월말이 가까워지는 날짜라 이번 달 수업이 몇 번 안 남았기에 한 달 치 등록을 한다면 무려 3주 치를 손해 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보통 알뜰살뜰한 사람이라면 이런 등록은 당연히 않겠지만 지금 저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서 빨리 수영 수업을 들어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꼭 이번 달 거로 등록해 주세요. 빨리요.”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출발 직전 기차표라도 사는 듯한 다급한 다미를 바라보는 접수처 직원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제야 너무 조급해 보였을까 싶어 아차, 했다.
“또 미루다가 안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마음먹었을 때 열심히 하려고요. 아하하.”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지금 자신이 순수하게 운동을 향해 얼마나 큰 의지를 보이는지 표현했다.
나 지금 운동을 몹시 하고 싶은 여자로 보이는 거 맞겠지? 남자 찾아 수영장 오는 여자처럼 보이면 안 될 텐데.
쓸데없는 걱정이 머릿속에서 동동 떠다니고 가슴이 쿵쾅쿵쾅 떨렸다.
“네, 그러셨군요. 보통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하시는 분들은 없으셔서요. 마음먹었을 때 하는 게 중요하죠. 꼭 원하시는 바, 이루시길 바랍니다.”
그제야 접수원이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수영 등록을 한 후 한숨을 내쉬며 접수대에서 등을 돌리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보영이였다.
“가시나. 타이밍 기막히네. 지금 스포츠 센터야.”
전화를 받으며 접수처 옆의 휴게실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산한 휴게실에는 한 남자만이 바쁘게 노트북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혹시 들을까 싶어 슬쩍 쳐다보았지만,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에 마음을 놓고 통화를 이어 갔다.
― 등록 잘 했어?
“응, 주 5회 새벽 타임 수영 중급반 신청했어. 말도 마. 이번 달 수업 거의 끝나 간다고 등록 안 해 주려는 거 간신히 졸라서 등록했어.”
― 왜 고급반 안 들어가고 중급반 들어갔어? 네 실력이면 고급반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동생한테 물어봤는데 여기는 중급반이 물이 좋대. 고급반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장악해서 젊은 총각 별로 없대.”
― 아, 그랬구나. 역시 용의주도한 것. 잘했어.
“그래 이왕에 하려면 물 좋은 데 가야 좋지. 적당히 못하는 척 ‘어머, 도와주세요’ 모드로 나가면서. 히히.”
― 응. 꼭 액받이 변강쇠 총각 잘 구해.
“알았어. 눈 똑바로 뜨고 괜찮은 놈으로 찾아볼게. 나 지금 수영복 사러 아울렛 갈 건데 너도 올래?”
― 수영복도 사려고? 이미 있잖아?
“안 돼, 그건. 너무 수영을 위한 수영복이야. 작업용 수영복을 하나 사야겠어. 훅훅 파인 거로.”
― 돈도 없다며?
“아무리 돈이 없어도 투자를 해야지.”
― 짠순이가 큰 결심 했다. 좋아. 나도 이제 퇴근하니까 좀 있다 거기서 봐.
다미는 보영과의 전화를 끊고 아울렛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휴. 스포츠 센터에 운동하러 다니는 게 아니라 남자 꼬시러 다니는구만. 어린 게 발랑 까져서는.”
강철은 바삐 나가는 자그마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는 늦은 시간 업무를 마치고 아침에 못 한 운동을 하기 위해 스포츠 센터를 찾았다. 거래처의 급한 이메일을 처리하기 위해 휴게실에서 작업 중이었다. 필요한 내용을 정리하고 메일을 보내는 순간 주 5회 새벽 타임 수영 중급반을 신청했다는 내용이 귓속으로 들어왔다.
‘어 나도 그 반인데?’
그런데 지금 월말이 다 됐는데 이번 달 등록을 했단다.
‘왜 그런 짓을 하지?’
절로 궁금해지는 내용이었다. 원래 남의 통화 내용을 듣는 성격은 아니지만, 조용한 휴게실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는 안 들으려고 귀를 막지 않는 이상 자연스레 고막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귀를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내용이 가관이었다.
물 좋다는 소리에 중급반에 들고, ‘모르겠어요, 호호’ 전법을 사용하며, 작업을 위해 훅훅 파인 수영복을 준비한다니. 이걸 종합하면 남자 꼬시러 수영 다니겠다는 말이잖아?
도대체 이런 썩은 정신머리를 가진 여자 얼굴이나 보자 싶어, 힐끗 쳐다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동그란 얼굴, 강아지 같은 눈망울에 시원한 입매로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이 마치 만우절 날 총각 교사를 놀리기 위해 장난을 계획하는 여고생처럼 보였다.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을까 안 넘었을까? 그래도 고등학생이면 아무리 날라리라도 수영을 새벽반까지 다니며 남자 꼬시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스무 살은 넘었겠지? 어린 게 뭐가 급하다고 저렇게까지 해서 남자 꼬시려고 하나. 그냥 자연스럽게 미팅이나 소개팅하면서 만나면 될 것을.
강철은 여자를 위아래로 다시 훑어보았다. 말은 꼬신다 어쩐다, 하지만 막상 차림새는 남자를 유혹할 만한 섹스어필의 모습이 하나도 안 보였다.
‘어휴 모르겠다. 저 어설픈 꼬맹이 꼬임에 누가 넘어갈라나.’
강철은 별 쓸데없는 생각을 꽤 오래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