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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앞으로 어떡하지?”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그나마 집은 대학원생이지만 부업으로 모델 일을 하는 남동생 라영이가 전세금을 대서 얹혀살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동생네 집에 얹혀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오면 뭐 했냐고, 누구랑 있다가 오는 거냐고 꼬치꼬치 묻는 폼이 얼른 남자라도 생겨서 나가길 바라는 것 같다.
하긴, 저도 스물여섯 살이나 먹은 남자인데 여자 친구도 데리고 오고 싶겠지. 이러다가 결혼한다고 나 나가라고 하면 진짜 맨몸뚱이로 쫓겨나야 하는 거네? 후―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까만 스틸레토 힐, 블랙 타이트 스커트, 흰색 실크 블라우스에 서류 뭉치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일하고 싶다는데도 일을 안 시켜 주는 더러운 세상. 진짜 내가 운명을 따라 살지 않아서 이렇게 꼬이는 걸까? 운명을 따라 살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까? 자꾸만 박수무당의 말이 떠올랐다.
“에잇. 말도 안 돼. 운명은 무슨 운명.”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보영이였다.
“어. 보영.”
― 야, 나 서울 다 와 가고 있어. 얘기 좀 해 봐.
“선은 잘 봤어?”
― 언제나 한결같은 패턴으로 마무리했어. 너나 어서 보고해.
보영의 목소리를 들으니 궁금해 죽겠는 모양이었다. 서울에 있었으면 점집에 갔다 온 금요일 저녁 득달같이 쫓아왔을 텐데, 선보러 본가로 끌려 내려간 덕에 취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전화가 왔을 때는 제가 이력서 제출 마감 시간이라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주말에는 보나마나 선보는 것을 핑계로 밀린 쇼핑과 마사지숍, 메이크업숍을 방문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고, 오늘 아침에서야 선 실패 후 엄마에게 등짝 몇 대를 맞고 서울로 날아오는 중인 듯했다.
“어디서 그딴 돌팔이를 들이대 놓고선 보고를 하래.”
― 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해 대더라.”
―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 봐.
“아 몰라. 나 지금 지난주 면접 본 회사 불합격 통보 받아서 말할 기운도 없어.”
― 뭘 한두 번 받아 본 불합격 통보도 아니면서 괜히 핑계야.
“이게 친구야 원수야?”
― 아무거나. 하여튼 내가 너네 집 갈까? 아님, 좋은 말 할 때 네가 우리 집 올래?
성격 급한 보영이 오늘 꼭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귀찮은데 오라고 할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라영이 일찍 들어온다고 했는데……. 오면 또 옆에 찰싹 붙어서 다 참견하려고 할 텐데, 그럼 이야기를 제대로 나눌 수 없다.
“아냐, 내가 갈게.”
― 오케이, 올 때 맥주도 사 와!
“안 돼. 그 돌팔이한테 복채도 오만 원이나 뜯겼어. 이제 진짜 거지야, 거지.”
― 알았어. 그건 내가 줄 테니까 사 와.
싫은 말, 거친 말을 턱턱했지만 그만큼 친한 친구 사이였다. 내가 거지임을 드러내도 쪽팔리지 않고, 얻어먹어도 마음 편한 그런 친구였다.
‘언젠간 꼭 갚고 말 거야. 네 은혜.’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으며 중얼거렸다.

집을 나온 다미는 두 정거장 거리의 보영의 집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탈까 잠깐 고민을 하다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백수가 아껴야지 뭐.
지방 유지의 딸로 꽤 부유하게 자랐고 본인 스스로도 약사로 일하고 있는 보영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자기 소유의 오피스텔을 갖고 있었다.
다미는 도착 후 고개를 들어 오피스텔을 올려다보았다. 20층 높이에 편의점, 식당가, 각종 숍들이 들어찬 꽤 큰 규모의 오피스텔이었다.
“난 언제 벌어서 이런 집 사나.”
내 평생 이런 집을 가져 볼 수 있을까 싶다. 뭐 서울에 30평대 아파트는 고사하고라도 어차피 혼자 살다 죽을 팔자, 이런 오피스텔 하나라도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놔. 왜 이러지?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닌데 자꾸 생각만 많아지고 울컥해지네?’
오랜 백수 생활과 옹녀 운명을 따르지 않으면 평생 그 모양 그 꼴로 살 거라는 박수무당의 점괘가 자꾸만 생각이 많아지게 만들었다.
1층 편의점에 들러 4개 만 원짜리 수입 맥주 4개와 새우 맛 과자, 오징어 하나를 샀다. 덜렁덜렁 하얀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보영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림과 동시에 현관으로 쪼르르 보영이 달려 나왔다.
“심부름센터에서 왔습니다.”
보영의 얼굴에 하얀 봉지를 들이밀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손으로 밀며 고개부터 불쑥 내밀었다.
“헛소리 말고. 뭐래? 뭐라고 했기에 돌팔이라 그래?”
평상시 같으면 맥주에 먼저 반겨 들 보영이 비닐봉지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미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잠깐만.”
“아, 뭐라고 했는데?”
보영이 재촉했다.
“목 좀 축이고.”
거실 중앙에 있는 좌식 테이블에 가서 털썩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 온 맥주와 안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사이 보영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세팅을 마친 후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쭉 뻗고 소파에 등을 기댄 후 캔 하나를 들어 시원하게 들이켰다. 재빨리 답해 주지 않자 답답했던지 보영도 캔 하나를 냉큼 들었다.
꼴깍꼴깍―
점집에서 나온 후 미친 듯이 한잔하고 싶었지만, 복채로 돈을 날린 마당에 더 이상 낭비할 돈이 없어 꾹 참아 왔던 알코올이었다.
“캬― 이제 좀 속이 뚫리는 것 같네. 내가 옹녀래.”
캔을 완전히 비운 후, 입가에 묻은 맥주를 닦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내뱉었다.
“켁.”
이제 막 맥주 캔을 따서 한 모금을 넘기던 보영이가 사레들려 캑캑댔다. 옷과 테이블 위로 맥주가 튀었다. 다미는 덤덤히 두루마리 화장지를 보영에게 건넸다.
휴지를 받아 든 보영이 두루마리를 둘둘 풀어 여기저기 흘린 맥주를 잽싸게 닦으며 다시 물었다.
“네가? 내가 아는 옹녀 말고, 사전적으로 다른 뜻 있니?”
“아니, 나도 엊그제 집에서 검색해 봤는데 없어. 옥녀만 뜨더라.”
“그건 뭔데?”
“옥같이 고운 여인이라나 뭐라나?”
새우 맛 과자를 집어 먹었다. 짜다. 에잇. 안 그래도 마음이 염전 밭이구먼. 달달한 과자나 초콜릿으로 사 올걸. 잘못 골랐네, 잘못 골랐어. 그러면서도 새우 맛 과자를 한 움큼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음, 뭐 딱히 옥녀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옹녀보다는 옥녀가…… 네 캐릭터에 맞는 것 같은데?”
보영의 현실 부정 단계였다. 뭐, 자신도 그제는 그랬으니까. 다미는 오징어를 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아닐걸? 그 점쟁이가 옥녀 앞에 수식어로 음란하고, 방탕하게를 사용했거든.”
“헐.”
보영의 턱이 툭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맥주 캔을 내려놓더니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다미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말도 안 되지? 네가 생각해도 그 박수무당, 돌팔이 같지?”
다미는 덤덤히 물으며 두 번째 캔을 땄다.
“캬―”
다미가 두 번째 맥주를 음미하는 사이 보영은 미간을 좁히며 고민했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당황스럽지만, 그 도사님이 틀릴 일이 없다.
“아냐, 그 도사님 엄청 용해. 나 예전에 뭣 모를 때 사귀던 그 마마보이 새끼, 처음엔 이상한 놈이라고, 헤어지라고 할 때 안 믿었는데 진짜 개또라이였잖아.”
대학교 4학년 때 만난 일곱 살 위의 의사는 보영이가 좋아하는 조지 클루니와 똑같이 생겼었다. 박식한 머리, 좋은 매너, 훤칠한 외모,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첫 경험을 하려고 했던 날, 보영의 가슴을 만지며 우리 엄마 것보다 네 것이 더 좋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때 그 개또라이가 또다시 떠올라 보영이 몸을 떨었다. 그 이후 연상이라면 아주 치를 떨며 새파란 영계 아이돌이 취향이 되어 버렸다. 하여튼 그 박수무당은 보영에게는 인생을 구해 주신 분이며 보영은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게다가 그 박수무당이 처리해 준 건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모쏠 현지도 2년 전에 가서 처방받고 시집가고, 지원이도 그 무당 말 듣고 난 다음 회사 때려치우고 외제차 딜러 돼서 판매왕까지 했었잖아.”
“우연의 일치일 거야.”
어느새 두 번째 맥주도 다 마신 다미가 손으로 캔을 힘껏 구겼다.
“참, 효경이 알지? 걔는 뽀로로 도사가 액운이 들었다고 굿해야 한다는 거 무시하더니 교통사고로 병원에 1년 넘게 입원하고 수술하느라 엄청 고생한 거 너도 알지?”
절대 틀리지 않는 백발백중 점괘를 자랑하는 도사님이었다. 용했던 점괘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다미처럼 부정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그 뽀로로 도사님의 말이 맞았다.
“고마해라. 마이 들었다 아이가.”
아니라고, 돌팔이라고 계속 되뇌었던 다미였지만, 이렇게 친구들의 성공담과 실패담 사례들을 들으니 마음이 이상해졌다.
돌팔이가 아니라 진짜면 어떡하지?
슬슬 걱정되었다. 점쟁이의 말을 듣자니 옹녀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데, 어떻게 사는 게 옹녀처럼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 해결 방안도 딱히 내 주지 않았는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돌팔이의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주변의 검증 사례가 너무 많았다.
한마디로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이었다.
“야.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뭐가 다행이야?”
“비구니 운명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거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야?”
“위로가 안 돼? 미안.”
보영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마시다 만 맥주를 들고 홀짝였다.
“어휴. 이것도 친구라고. 제 인생 아니라고 아주 태평이다, 너?”
“오히려 쉬운 거 아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보영이 과자도 하나 집어 먹으며 말했다.
“물론 돈 드는 건 아니지. 하지만 여태 안 되던 연애가 마음먹는다고 되냐고!”
참을 수 없이 욱하고 올라오는 짜증에 다리를 뻗어 동동 굴렀다.
“그렇긴 하지.”
보영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보통 남자도 아니고 변강쇠를 만나야 한대. 내가 어디를 가서 변강쇠 만나? 그냥 남자 만나서 연애하기도 어려워 죽겠는데.”
“그것도 그렇지.”
보영이 백 퍼센트 동조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할수록 첩첩산중, 오리무중.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애꿎은 맥주만 벌컥벌컥 마셨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났는지 보영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럼 액받이용 원나잇은 어때?”
“액받이용 원나잇?”
“왜 얼마 전 드라마 기억 안 나? 왕에게 일어나는 흉한 일은 대신 받아 준다는 액받이 무녀.”
보영이 다미 쪽으로 몸을 숙이며 작게 소곤거렸다.
“그니까 그게 지금 액받이 어쩌고저쩌고하지만 결국은 원나잇을 하라는 거야?”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포커스를 원나잇에 두지 말고, 액받이에 둬.”
“너 내 손에 죽고 싶냐?”
보영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너 잘되라고 머리 짜낸 언니한테 그게 할 소리야?”
보영이 재빨리 자신의 얼굴 앞으로 두 팔을 크로스하며 공격을 막았다.
“내 손에 안 죽으면 우리 부모님이 와서 널 죽이실걸?”
평생 교사로 살다가 퇴직하신 걸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깐깐대마왕 아빠와 그런 아빠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옳다고 하는 엄마가 이걸 들으시면 뒷목 잡고 쓰러질 이야기다.
하지만 보영은 엑스 자로 교차한 팔을 유지한 채 계속 말했다.
“그게 어때서?”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 원나잇은 무슨 원나잇이야.”
하도 어이없는 소리에 들었던 손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장난칠 기운도 없다.
“연애는 어렵잖아. 그러니 양기가 많아 보이는 놈 하나 잡아서 한번 자 보는 거야. 그럼 너의 음기 탱천한 상태도 좀 꺾일 거고. 그러면 연애도, 일도 조금은 잘 풀리지 않을까?”
“이게 지금 10년 넘은 친구한테 할 소리니? 날 알면서 그런 말이 나와?”
정신이 들도록 보영의 등짝을 한 대 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자신을 위한 소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손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보영과 다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15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 오면서 서로의 인생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사이였다.
고등학교 때 다미가 짝사랑하던 모범생 오빠는 다미가 선물한 곰 인형과 초콜릿을 전교에서 제일 재수 없지만, 얼굴만은 이쁘던 계집애에게 갖다 바쳤다.
대학교 1학년 때 사귄 첫 남자 친구와는 키스 한 번 못 해 본 채 플라토닉한 사랑만 나누다가 신부님이 된다고 신학교로 가 버렸다.
3학년 때 사귄 놈은 술을 마시고 용기를 낸 첫 뽀뽀 시도에서 입 안으로 혀를 넣자 네가 이렇게 발랑 까진 애인지 몰랐다며 다미를 차 버렸다.
그 이후 몇 번의 짧은 연애 역시 어디서 이상한 것들만 꼬이는지, 대학교 졸업 후 다미는 연애는 포기하고 결혼이나 제대로 할 거라며 공무원 시험에 올인했다. 하지만 꿈 역시 이루어지지 않아 오늘날 이 모양 이 꼴로 점을 보러 갔다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