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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선빈 삼촌, 여자 친구 잘 있어?”
선빈 삼촌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기 전에, 태준 삼촌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6년 전, 웃는 얼굴로 통화하던 여자 친구라는 존재가 늘 마음에 걸렸으니까.
“누구? 선빈이 여자 친구? 언제 적 여자를 이야기하는 거지?”
“6년 전에 여자 친구 있었는데?”
“그래? 그랬으면 네 번은 더 바뀌었겠군.”
흐음……. 어쨌거나 그럼 지금은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건가?
“그런데 한 1년 전부터 없어. 내가 알기로는. 쟤도 딱히 연애하기 좋은 남자는 아니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다른 마음 있다면 접어.”
삼촌은 이미 내 마음을 읽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네 나이면 이제 어느 정도 남자를 진지하게 만나야 되지 않겠어? 권선빈은 여자를 진지하게 만날 마음이 아직은 없어. 늘 적당히 만나고, 여자가 부담 주면 적당히 헤어지고. 최근에 연애를 안 하는 것도,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차서 결혼에 가까워지니 그런 거야. 쟤는 자기 삶이 더 중요한 놈이라 그 안에 누가 깊게 들어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전혀 안 그래 보였어.”
“기본적으로 쟤는 사랑 같은 걸 안 믿어. 연애도 늘 자신만의 선을 그으면서 했고, 굉장히 차갑고 냉정해. 아마 결혼도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히 조건이 맞는 여자랑 할 거야. 안 할지도 모르고. 차라리 유명훈이면 몰라도 권선빈은 안 돼.”
그때, 선빈 삼촌이 돌아왔다.
“뭐냐, 내 이야기 했냐?”
질문을 던져 놓고는, 대답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삼촌은 무심하게 침을 뽑았다. 순식간이었다.
“너 예전에 아빈이한테 한의대 다니는 거 이야기 안 했어?”
“안 했나? 그랬나 보지.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진심으로 무심한 말투. 다정함과 무심함을 몇 번이나 오가는 저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 꼬맹아, 한번 일어나 봐.”
선빈 삼촌이 나보다 먼저 일어서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 손을 선뜻 잡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 믿음직한 손을 잡고 가볍게 일어났다.
“걸어 봐.”
조심스럽게 오른쪽 발을 내디뎠다.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프지 않았다.
“와! 안 아파요! 이거 엄청 신기한 거군요.”
“다행이네.”
호들갑스러운 나에 비해 선빈 삼촌은 당연하다는 듯, 담담했다.
“너, 돌팔이는 아니구나?”
“저 정도는 어려운 거 아니야. 네 조카님이 엄살 부린 거지, 심하게 삔 것도 아니고. 나도 괜히 월급 받겠어? 꼬맹아, 우리 나갈 테니까 이 스프레이 한 번 뿌리고 스타킹 신어. 그럼 훨씬 더 가벼울 거야. 그리고 월요일에 근처 한의원에 가서 한 번 더 침 맞고 물리치료도 받아. 제대로 고쳐야지.”
“삼촌 한의원은 어디인데요?”
어차피 가야 하는 한의원이라면, 선빈 삼촌에게 치료를 받고 싶었다. 이미 내 주치의였으니까. 하지만 잠시 잊고 있었다. 선빈 삼촌은 그리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안 가르쳐 줄 건데? 내가 친구 조카한테 돈 받고 침 놔 줄 수는 없잖아. 병원에 오면 절차상 그렇게 되는데, 굳이 돈 받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도 성가시고. 그러니 아무 데나 가. 그 정도는 다들 쉽게 해결하니까. 그런데 너 증조할머니께 인사는 드렸어? 어서 인사드리고 나와. 다들 너 궁금해하니까.”
말을 마치고 삼촌들은 방을 나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증조할머니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이제, 진짜 그 타이밍이 온 건가? 저절로 한숨이 나왔고, 잠시 잊고 있었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결국 이걸 여기서 하게 되는구나.
어차피 각오하고 왔다.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활에 송진을 넉넉하게 문지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영정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3
M.Bin


그게 뭐라고 씩 웃는 꼬맹이를 보니 나도 따라서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었다. 차림새나 말투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보니, 나름대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잘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가끔 생각이 나곤 했었다. ‘새엄마’라는 단어에서 동질감을 느껴서였는지, 아니면 울먹이던 얼굴에 동정심을 느껴서였는지.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스물여섯의 꼬맹이는 꽤 괜찮은, 아니 매력 있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야, 수육이 데리고 온다더니 왜 안 와?”
나와 태준이 자리에 앉자 다들 꼬맹이에 대해 물었다. 이미 옆자리에는 희준의 친구들까지 합세해 있었다. 희준의 친구들도 동명고등학교 2년 후배들이라 가끔 보는 얼굴들이었다.
“곧 올 거야.”
속으로 놀랄 김준석과 유명훈의 표정을 기대하던 순간이었다. 늦은 저녁, 조용한 장례식장 한가운데서 갑자기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느닷없이 이게 무슨 소리지? 나뿐 아니라 모두 술잔을 들었던 손을 내려놓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우리에 비해 태준과 희준은 크게 놀라지 않은 듯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흠, 김아빈이 결심을 했네.”
결심? 무슨 결심? ‘결심’이라는 표현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암시했다.
“뭐? 이거 수육이가 연주하는 거라고? 상갓집에서 바이올린을 왜?”
말없이 태준이 팔짱을 끼고 집중하는 자세를 잡았다. 나 역시도 일단은 같은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시작부터 느꼈지만, 아마추어라고 하기에는 너무 훌륭했다. 게다가 선곡이 ‘차르다시’라니. 기본적으로 그 곡의 유래가 춤곡인지라, 상갓집에서 연주하기에는 부적절하다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바이올린 소리가 퍼지는 것부터 보통 일은 아니었으니, 더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차르다시, 평범한 실력으로는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닌데. 비록 지금은 느린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고 있지만, 곧 ‘프리스’ 부분으로 넘어가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야 될 텐데, 꼬맹이가 이걸 연주하고 있다고? 나도 모르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벌떡 일어났다.
“권선빈, 어디 가?”
명훈이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 귀로 흘리고 소리의 근원지 쪽으로 다가갔다.
영정 사진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꼬맹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꼬맹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꼬맹이가 잘 보이는 벽 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아까 길게 풀고 있었던 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활을 움직이는 오른팔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 다부진 듯했다. 비브라토를 하며 움직이는 왼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꼬맹이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연주는 ‘라수’의 막바지에 닿았고 ‘프리스’의 미친 듯한 빠름을 향해 서서히 달려가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왜 이 공간에서 저 곡을 연주하는지는 이미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꼬맹이의 연주가 흥미로웠고, 끝까지 무사히 연주하기를 바랐다.
내 바람이 통했을 리는 없지만, 꼬맹이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번쩍하는 전율과 함께 초반부의 느리고 슬픈 느낌에서 곧바로 빠른 템포로 갈아탔다. 왼손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활을 든 오른손은 최대한 좁고 빠른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 음, 한 음 무리 없이 정확하게 짚어 나가는 연주 실력은 소름이 돋았다.
꼬맹이는 몸을 크게 움직이며 연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리듬을 타기 위한 움직임을 조금씩 보이고는 있었지만, 정말 곧은 자세로 서서, 손가락과 팔을 바쁘게 움직이는 연주를 하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소리가 너무나 당당한데.
참 잘하는구나, 하고 감탄하는 사이 곡은 잠시 느린 부분으로 들어갔고, 천천히 숨을 고르는 듯한 음이 퍼져 나왔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그 꿈이 무엇인지 느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곧 꿈에서 깨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꼬맹이의 손이 갑자기 빨라지면서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까.
이미 라수 부분에서 느꼈지만 꼬맹이는 그리 많은 장식음을 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역시나 억지스러운 기교 없이 정확하게 마무리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빠른 와중에도 재잘거렸다가, 큰소리를 쳤다가 그런 식으로 내 영혼을 흔들었다. 그 순간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 한 번만 더, 나는 아직 끝낼 준비가 안 되었는데, 한 번만 더 들려주면 안 될까? 짧은 순간 속으로 강하게 빌었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꼬맹이가 마지막 부분을 자연스럽게 한 번 더 반복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도돌이표, 내가 어딘가에서 들어 본 것 같은데? 하지만 생각을 더 이어 가기도 전에 곡은 끝부분에 다다라 있었다. 너무 빨랐다. 나의 아쉬움이 쓰나미처럼 밀려들 때, 꼬맹이가 끝을 알리는 마지막 세 개의 음정을 정확하게 짚었고 그렇게 연주는 끝이 났다.
박수를 치면 안 되는 상황인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지만, 곧바로 내렸다. 그리고 꼬맹이도 힘없이 활과 바이올린을 든 두 손을 내렸다. 무엇인가를 쏟아 낸 듯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맞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꼬맹이가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작은 몸이 심하게 들썩였다. 그리고 그 곁으로 친척들이 다가가, 모두 울음을 터트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런, 저 꼬맹이가 나를 갖고 놀았다. 짧은 연주를 듣는 사이에 나는 저 꼬맹이와 꿈같은 연애를 하고 갑자기 이별을 한 듯한 감정을 모두 맛보았다. 여운이 너무나 길었다. 왜 저 꼬맹이에게 자꾸 다가가고 싶은 거지? 왜 저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꼬맹이를 안아 주고 싶은 거지? 나름 나에 대해 냉정한 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여러 가지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스스로를 자꾸만 보게 되는 날 같았다.

“잘 보고 왔냐?”
태준이 나에게 말을 걸며 내 자리를 내주었다.
“대단한 꼬맹이네. 쟤 전공 바이올린 아니잖아?”
“아니지.”
복잡한 내 마음은 고스란히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꼬맹이에 대한 관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고, 간절히 그 연주를 다시 듣고 싶었다. 쟤 뭐지? 뭐 저런 애가 다 있지?
“김태준!”
“왜, 권선빈, 궁금해? 어딘가 모르게 너를 보는 것 같아서?”
태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김태준이 눈에 힘을 주고 나를 쳐다봤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앞에 앉아 있는 친구들은 우리 사이에 잠시 오갔던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바이올린을 잘 모르긴 하는데, 꽤 잘하잖아? 나 소름 돋았어.”
아직 꼬맹이를 보지 못한, 준석과 명훈도 꽤 흥미를 보였다. 그건 희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쯤 되니 김태준도 눈에 힘을 풀고 입을 열었다.
“아빈이, 돌아가신 엄마가 바이올리니스트였어.”
그랬군.
“일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
“응, 일본분이셔. 그래서 집안 반대가 엄청 심했지. 그런데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내한 공연에서 형수님이 저 곡을 연주하는 걸 보고, 형님과의 결혼을 허락하셨어. 이유는 나도 잘 몰라. 어린 기억을 되짚어 보면, 형수님이 한국에 오실 때마다 할머니께서 저 곡을 연주해 달라고 하셨던 것 같아. 그러면 형수님은 정말 망설임 없이 몇 번이고 연주했어.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시니까, 힘든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하셨던 거 같아.”
어찌 보면 참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다른 국적을 가진 손자며느리가, 차르다시를 좋아하는 시할머니를 위해 차르다시를 연주하는 상황이라니.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그런 식으로 할머니와 교감하려고 노력하신 거지. 그래서 우리 가족들한테는 익숙한 곡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형수님이 그렇게 되고 난 후로 슬픈 곡이기도 하고.”
“그래서 쟤가 저렇게 연주한 거야?”
“형수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 같아. 이제 ‘차르다시’는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것 같다고. 할머니께서 좋아하신 형수님만의 느낌이 있었던 거겠지. 그러면서 아빈이에게 부탁하셨어. 열심히 연습해서 엄마처럼 꼭 연주해 달라고.”
태준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꼬맹이의 뒷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 연주를 하기까지 꼬맹이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거듭했을까?
“그 당시만 해도 아빈이가 바이올린을 했었으니까. 그런데 아빈이에게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을 거야. 형수님이 즐겨 하시던 레퍼토리 중에 하나였으니 본인에게도 아픈 부분이었겠지. 최근 2년 정도 한국에 머물면서도 뭔가 망설이는 듯해 보여서, 아무도 아빈이에게 연주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결국 그걸 오늘에서야 한 거 같아. 아마 최선을 다한 연주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소름이 돋았을 거야. 나도 돌아가신 형수님 얼굴이 아른거렸는데 뭐.”
그랬구나.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증조할머니에 대한 본인 나름의 마지막 인사였구나. 어딘가 모르게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너를 보는 것 같아서?’라며 나를 쳐다보던 김태준의 말이 자꾸 내 머리 위를 빙빙 돌 때였다.
“오랜만이에요, 삼촌들.”
조금 전, 그런 연주를 했던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환한 표정을 한 꼬맹이가 태준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수를 했는지 이마 끝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준석도, 명훈도 내 예상대로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설마, 너!”
“맞아요. 수육 잘 먹는 애.”
꼬맹이가 싱긋 웃자, 모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꼬맹이를 처음 본 희준의 친구들도 꼬맹이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하긴, 쟤가 예쁘게 잘 크긴 했다. 그건 인정.
“야, 안경 어디 버렸어?”
“라식 했죠!”
저 밝은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자꾸 잡아당긴다. 오늘 참 여러 가지로 복잡하네.
“그러고 보니, 교정기도 이제 안 하네?”
“그건 진작부터.”
“또 어디 고쳤냐? 어떻게 해야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지?”
“치아 교정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준석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났다. 웃는 얼굴 그대로 시선을 돌리자 그런 나를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는 김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김태준과 대화가 필요한 것 같기는 한데.
“왜,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자꾸 날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그래?”
“끌려? 너도 느꼈을 텐데. 너랑 비슷하다는 거. 내가 느끼는 걸, 네가 모를 리 없잖아.”
비슷하다……. 김태준의 눈에는 비슷해 보였나 보다. 저 꼬맹이와 내가. 그러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정말 비슷했다.
“아까부터 어딘가 모르게 계속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는데, 네가 제대로 시원하게 긁어 주는구나. 동질감을 느낀 건 맞아. 그런데 끌리는 거라면?”
“접어.”
“왜?”
“달라. 너희 둘 다 잘 아는 내 입장에서는, 너희들 완전히 달라.”
다르다……. 김태준의 눈에는 저 꼬맹이와 나는 다른 사람인 건가? 젠장, 저렇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녀석의 말을 내가 다 알아듣고 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왜 눈빛만 봐도 아는 그런 소통을 저 녀석이랑 하고 있는 건지.
우리끼리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 이미 준석과 명훈은 꼬맹이에게 많은 질문들을 던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태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조금 전 연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카님, 수육 더 먹어야지?”
“아, 고맙습니다. 지난번에도 와 주셨는데, 이번에도 와 주셔서 감사해요.”
“왜 한국에 있었으면서 우리한테 연락 안 했어?”
명훈이 꽤나 호감이 있는 표정으로 꼬맹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여러 상황들이 이 꼬맹이에게 호의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적응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사실 일도 바빠요. 출장도 많이 다녀야 하고.”
“우리가 종종 태준이한테 네 안부 묻고 그랬었는데, 김태준이 너 한국에 있는 건 말 안 하더라고. 치사하게.”
“그랬어요? 삼촌이 너무했네. 이 삼촌들이 알았으면 진작, 나 수육 사 줬을 텐데. 그런데 제가 한국에 있는 날이 많이 없긴 해요.”
꼬맹이의 장난에도 태준의 굳은 표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아마 조금 전, 나와 주고받은 대화 때문인 듯했다. 이렇게 자기 표정 하나 못 감추는 놈이 무슨 연기를 한다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 좀 봐.”
결국 나보다 더 답답한 쪽은 김태준이었다. 태준이 나를 불렀고,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 두고 둘이 함께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지만 밤바람이 그리 차지는 않았다.
“아빈이 눈에 네가 들어간 것 같아. 아마 6년 전에.”
의외이긴 했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세 살 많은 삼촌 친구에게 본인만이 느낀 어떤 포인트에서 반하는 일은 스무 살에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냥 스쳐 갔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것 같아. 아까 너에 대해 묻더라.”
그건 조금 놀라웠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살짝 아찔해졌다. 그리고 또다시 내 몸속의 뜨거운 피가 속도를 높이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밤이고, 바깥이라 김태준의 눈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너니까 굳이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둘러서 말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너랑, 아빈이는.”
“왜지?”
“너는 사랑에 있어서는 냉정하니까. 내 조카가 너의 그런 성향 때문에 상처받는 건 싫어.”
이미 조금 전, 김태준의 말에서 나는 답을 찾긴 했었다. 하긴 태준이 몇 번 봐 왔던 내 연애는 결코 태준의 마음에 들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당사자인 나조차도 늘 별로인 연애였으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네가 왜 지금 이렇게 정색하는지도 알겠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미안해지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나도 걔가 자꾸 생각이 나긴 했어. 잘 살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울던 얼굴이 가끔씩 떠올랐어. 그 모습을 오늘 또 보게 되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6년 전만 해도, 나이만 스무 살이었지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의 겉모습과 다를 바 없었던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종종 생각이 났고, 혼자서 실없이 웃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를 그리 오래 두고 생각하는 유형이 아닌 것은 내가 가장 잘 알았다.
“그랬을 거야. 그건 의심 안 해. 6년 전에 아빈이에 대해서 너희들한테 대충 이야기할 때, 이미 네 표정에서 읽었어. 네 말대로 동질감이랄까, 그런 것. 그런데 오늘 그 동질감이 정점을 찍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빈이 연주를 보고 돌아오던 네 얼굴에서 그걸 봤어. 그런데 그거, 동정인 것 같아서. 나는 그게 걸려.”
과연 그런 것일까? 하긴 나부터도 내 감정이 동정인가 싶었던 순간이 있었으니 크게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분명히 어느 정도 동정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