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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



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1화)
프롤로그


17년 남짓 살아온 나날들은 미지근한 물속에 잠긴 것처럼 평화롭지만 따분함 그 자체였다.
아주 즐거운 일도 아주 싫은 일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미친 듯이 울어본 적도 미친 듯이 웃어본 적도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가끔 상상한다.
아주 멋진 일이 일어나면 어떨까?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재기 발랄한 모험이나, 인디아나 존스 같은 신비한 모험 같은 그런 모험을 해본다면 어떨까?
어떤 날은 그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여행은 반나절을 넘기지 못했다. 여행의 끝에 바로 고속도로 입구가 가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벽이 있는 것처럼 내가 넘지 못할 벽이었다.
그 벽을 넘을 수 있는 날이 언제 올까?
그때는 정말 암담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 그 벽을 넘을 기회가 너무도 당연히 왔다.
그런데 그 벽이 너무 많이 없어진 게 탈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느끼지도 못하게 너무 많이 넘어가 버린 게 탈이었다. 그리고 그 벽 너머는 내 생각만큼 아름답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1. 반복되는 꿈


또 같은 꿈을 꿨다.
황혼 무렵 붉은 빛이 온통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붉은 태양 빛이 대지를 비추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지의 빛깔이 원래부터 붉은 것인지 그저 온통 붉은 들판위에 그보다 더 진한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슬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서있는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요즘 따라 이런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다. 어딘가 책이나 영화에서 봤었는지 곰곰이 고민해 본 적도 있었지만 비슷한 것이 전혀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이 꿈에는 앞과 뒤가 있다고 막연히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지만 분명 이 장면이 처음도 끝도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아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서 생각나지 않는 오래된 영화처럼 막연하게 떠오르지 않는 느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론을 다 아는 영화를 보듯이 앞뒤에 대하여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 상태로 마치 남의 일처럼 제 3자의 입장에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기만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꿈속에서는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자꾸 이런 꿈이 반복되자 언젠가 부터는 잠든 후 꿈속에서 조차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 꿈하면 내가 주인공이 되기 마련인데 이 꿈은 이상하게도 나의 모습이 제 3자의 모습이었다. 그래선지 처음에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보다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었다.
꿈을 깨고 나서야 내가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이 꿈을 자주 접할수록 나의 존재감이 꿈 안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있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느낌.
마치 유령?
이나 신적인 존재?
아니 그보다는 공기 같다는 느낌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꿈 안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게 됐다는 느낌이라 3D영화를 실감나게 보고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늘 같은 것을 보아도 신기한 느낌이 들었기에 보고 또 봤다.
솔직히 꿈에서 깨지 않기를 바랐다. 현실보다는 이쪽이 훨씬 생동감 넘치고 무엇보다 비현실적인 감각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늘 보아도 질리지 않았고 이제는 익숙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이 장면을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생생한 느낌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가까이 가 보기로 결정했다.
그의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그 바람을 느끼며 이것이 꿈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꿈인지 현실인지 너무도 헷갈렸던 것이다.

그의 손에는 딱 봐도 장인이 만든 듯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칼을 쥐고 있었다. 실제로 그 비슷한 것도 본 적 없는 생생한 칼날은 부엌에 있는 칼에 비교할 수 없게 위협적이었다.
일단 색 자체가 은색처럼 보이지만 은색이 압축된 듯한 진한 검은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하게 살펴보면 볼수록 검은색은 날이 선 느낌 때문인지 푸른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장검 모양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양 칼날 가운데 납작한 면에 아주 세밀하게 문양이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문양은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곡선을 가지고 있어서 고풍스런 화사함을 가지고 있었다.
칼자루도 손에 쥐기 좋은 모양으로 단순하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마디마디에 칼등에 있는 것과 같은 세밀하면서도 단순 유려한 문양이 촘촘히 음각되어 있었다.
이렇게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으면 손이 자주 닿는 곳은 닳게 마련이지만 전혀 마모된 곳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닌 아주 오래된 듯한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형태가 단순하면서 우아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 꿈이지만 참 멋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칼에 있던 시선을 돌려 갑옷까지 샅샅이 살폈다. 자주 보니까 익숙해져서인지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 아니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갑옷은 은색으로 몸에 딱 맞게 오직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아주 실용적인 형태로 가슴과 등에는 단단하게 보이는 갑주가, 팔에는 팔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체인으로 된 금속이 팔뚝 윗부분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팔에는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갈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장갑도 보통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멋진 것이었다.
두꺼운 가죽에 어떻게 그렇게 정교한 수를 놓을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촘촘하게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장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장갑에 비하면 갑옷은 오히려 단순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갑옷에도 역시 보일 듯 말 듯한 아주 미세한 틈들이 있었다.
갑옷에 난 상처라고 생각했던 나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서 감탄했다. 그럴 것이 그것은 상처가 아닌 섬세하게 새겨진 무늬였다. 그 무늬는 꽃 같기도 하고 물결 같기도 한 기하학적인 문양이었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무늬는 단순한 모양의 갑옷을 화려하고 고귀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칼에 있는 문양이 잔잔한 느낌의 화려라면 갑옷에 있는 문양은 우아하고 화려했다. 꿈속에서 이런 대단한 갑옷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예술적 기질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 현실에서 그렇게 예술적인 무엇인가를 많이 겪어본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나는 그냥 감탄하면서 이런 것을 만든 사람은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꿈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내 꿈.
그렇기에 이 갑옷은 나의 창작품이 되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한 내 창작품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과 똑같은 것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나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 만큼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니 나의 잠재의식 안에 이런 창작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더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내 꿈이지 않은가!
난 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반드시 이 갑옷의 무늬와 디자인을 기억해 내리라고 다짐하면서 다시 한 번 갑옷을 눈 속에 새겨 넣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다.
잊어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잘 기억하려고 해도 꿈에서 깨면 꿈 따위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평소에 그림 실력이라곤 젬병인 내가 이런 디자인을 재현해 내려면 보통의 관찰 가지곤 힘들 터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갑옷을 만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꿈이었다.
난 마치 공기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 사람을 만지든지 어쩌든지 상관없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처럼 이 사람은 바로 앞에 있는 나를 느끼지 못할 것 아닌가!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이 그의 갑옷에 닿았다.
깜짝 놀랐다.
갑옷의 단단한 촉감은 물론이고 마치 현실의 것처럼 차갑고, 보이는 것처럼 섬세한 틈새가 내 손에 느껴졌다.
한참동안이나 이 생생한 감각을 즐기며 갑옷을 살폈다.
그러나 그런 나의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헉!”
등에 소름이 쫙 끼치며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났다.
그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마치 바람 같았다.
꿈속의 나는 신과 같은 존재로 내 창조물 사이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으나 또한 없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그도 나를 느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날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가 날 알아차렸다는 것에 공포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나의 꿈이고 그는 그저 내 꿈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일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원하면 그의 존재를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날 알아차렸다는 것이 왜 이렇게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 알 수 없는 공포가 나를 더욱 두렵게 했다.
나는 붉은지 검은지 알 수 없는 그 눈동자를 피해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그의 눈동자가 내 눈동자 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곳을 바라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며 꼭 감았지만 감았다는 느낌이 났지만 여전히 붙잡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온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 아니 빨려 들어가는 느낌…….
알 수 없는 느낌이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끝도 없이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그때 난 처음으로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히 꿈인 것이 당연한데도 전혀 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있는 곳, 내가 붙잡혀 있는 그의 눈동자 속이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나는 나의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고 몸이 무거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주 극한 상황이 되면 놀랄 만큼 이성적이 된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나는 내 스스로를 달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것은 꿈이 분명하다.’
공포는 느껴지지만 정작 내가 두려워해야 할 죽음의 대상인 내 몸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때서야 가위에 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가위에 잘 눌리는 나에게 해준 충고가 생각났다.
“가위에 눌리면 손가락 끝에 느낌을 집중시켜, 그래서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그 가위눌림에서 벗어날 수 있어.”
나는 그 충고를 떠올리며 내 모든 감각을 손가락 끝에 집중시켰다.
어느 순간 찬바람이 내 머릿속을 관통하며 온몸에 감각이 되살아났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