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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2화
1. Thursday


딩동. 딩동.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주위가 온통 컴컴했다. 그저 목요일이라는 것만 기억났다. 젠장할 목요일. 신재는 부서져라 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딩동.
“얀마. 너 또 이게 무슨 꼴이야.”
문을 열고 나온 규영은 대뜸 인상부터 썼다.
규영의 말소리가 커다란 모기 소리처럼 윙윙 울렸다. 폭탄주쯤은 우스웠는데, 그것도 멀쩡한 정신일 때나 우스운 거였나. 추가 매달린 것처럼 머리가 무겁고, 멀쩡한 땅이 빙글빙글 돌았다. 신재는 비척거리는 몸을 적당히 가누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어…… 회식.”
“적당히 좀 마셔라. 술만 퍼마시면 왜 집에 안 가고 여길 와.”
“……아버지 걱정하시잖아.”
“효자 났네, 효자 났어. 그렇게 아버지 걱정되면 이제 그만하고 장가 좀 가라, 제발.”
잔소리를 잔뜩 쏟아부으면서도 규영은 그를 안으로 잡아끌었다. 중학교 때부터 15년을 붙어 다닌 녀석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쫓을 수 있을 리 없다. 규영은 그를 몇 걸음 부축해 주는 듯하더니 금세 어딘가로 내동댕이쳤다. 푹신한 것이 소파 같았다.
앉은 건지 누운 건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계속 웅웅거렸다. 거실에 틀어 놓은 TV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흐릿한 화면에서 쏟아지는 빛이 공중을 부유했다. 준희의 얼굴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장가……가야지.”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피의자며 참고인 신문하고, 진술서며 사건 기록에 파묻혀서 날밤 새워 버리면 그저 지나가던 목요일이었는데, 오늘따라 하필 회식이 잡혔다. 술이 거하게 취해 갈수록 이상하게 머릿속엔 준희의 얼굴만 또렷해졌다. 그래서 연거푸 잔을 비웠다. 그러면 그 얼굴이 사라질까 싶어서.
“이거라도 마셔. 숙취엔 헛개가 직방이다.”
냉장고를 여닫던 규영이 뜬금없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눈을 부비며 힘겹게 바라보니, 역시나 정체 모를 한약이 담긴 비닐 팩이었다. 한의사인 규영은 늘 뭔가를 연구하고 테스트하는 데 열심이었다. 보나 마나 이번에도 시험 삼아 조제해 본 희한한 약일 것이다.
“또 마루타냐.”
“마루타는 무슨. 효능 다 입증된 거라고.”
규영은 안 먹으면 안 될 것처럼 가위로 한약 팩의 모서리까지 잘라 손에 쥐여 주었다. 툴툴거리면서도 언제나 섬세한 녀석이었다. 아껴 주는 남자란 이런 녀석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신재는 한약 봉지를 입에 물고 쓰디쓴 내용물을 억지로 삼켰다. 차가운 것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휴지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규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준희 또 다녀갔다.”
준희. 고작 이름 두 글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 녀석은 무슨 준희 대변인이라도 되나. 어쩌다 가끔 오는 거긴 하지만, 올 때마다 듣게 되는 그 이름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어디…… 아프대?”
“아니. 준희 말고 회사 부장이 위궤양이야. 그러고 보면 광고도 3D 업종이라니까. 준희가 우리 한의원에 소개해 준 사람만 벌써 여섯이야. 다들 위장병에 디스크에…….”
저한텐 1년이 다 되도록 전화 한 통이 없으면서 하여간 그놈의 오지랖은. 상관도 없는 회사 사람들을 지가 왜 챙기고 있는 건지.
“근데 니들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빈 한약 봉지를 빼앗아 식탁에 던져 버리며 규영이 퉁명스레 물었다.
“결혼은 왜…….”
멍하니 대꾸하다가, 아직 규영이한테조차 헤어졌다는 얘기를 안 했다는 것이 문득 생각났다. 모르는 것을 보면 준희도 얘기를 안 한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대외적으로는 애인인 이 상황도 우스웠다.
신재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팔로 눈을 가렸다. 규영이 준 한약이 효과가 있는지 술이 어정쩡하게 깨는 기분이었다.
“규영아. 술 더 없냐.”
말보다 손이 먼저 날아왔다.
“미친 자식.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파, 인마.”
“아파도 싸다. 기껏 술 깨라고 약 먹여 놨더니. 너 언제까지 그렇게 기고만장할래? 도장 찍을 거면 확실히 찍어야지, 어물쩍하다간 준희 애먼 놈한테 뺏기고 땅 치고 후회한다.”
규영의 레퍼토리는 오늘도 똑같았다. 신재도 평소처럼 똑같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후회는 무슨.”
“저, 저. 야, 팀장이란 놈이 어찌나 살갑게 굴던지 버터가 따로 없던데. 니놈하고는 천지 차이더라.”
“……팀장?”
신재는 저도 모르게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놈인가.

‘……아껴 주는 사람이랑 만나고 싶어.’

귀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목소리.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그래. 회사 사람 소개시켜 줄 때마다 매번 준희랑 같이 온다니까. 다른 마음 있는 거 아니면 미쳤다고 그렇게 따라다니겠냐.”
그 남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짝사랑이라더니 진전이 많이 된 것일까. 생각해 보면 준희는 남자들한테 인기도 꽤 많았었다. 그 남자도 마다할 리 없겠지. 잘된 일이었다. 축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는.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욱신거렸다.
“생긴 것도 멀끔하고, 유학파라는데 매너도 죽이고. 여자들이 아주 깜빡 넘어가겠더라고. 준희가 아무리 너한테 목맨다 해도 안심할 거 아니다.”
“……목매기는 무슨. 형한테나 목맸지.”
“에잇. 이 머저리 같은 녀석! 말을 해 줘도 몰라요. 잠이나 자라, 자식아.”
성질을 확 낸 규영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불을 한 뭉텅이 꺼내 와서 던져 주었다.
거실에 켜져 있는 TV에선 화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광고 타임인 모양이었다. 눈 덮인 하얀 산을 배경으로 고군분투하는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파이어볼이 연신 현란하게 터졌다. 게임 광고인가…….
온갖 역경을 이겨 낸 마법사의 최종 목적지는 청량한 숲속이었다. 마법사가 경건하게 숲 속의 샘물을 떠 올리자, 눈부신 빛과 함께 물이 네모진 모양의 생수병으로 변모했다. 생수 광고였군. 신재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준희랑 마지막으로 본 영화에도 마법사가 등장했었다.
후. 그놈의 준희. 어딜 가나 무엇을 보나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준희와 연결되었다.
“자라, 인마.”
규영의 짧은 말과 동시에 TV가 꺼졌다. 거실의 불도 꺼졌다.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나서 주위도 온통 고요해졌다.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드는 작은 거실이 꼭 어두컴컴한 영화관 같았다.
너는 멀쩡히 잘 지내고 있을까. 그는 멀쩡하지 않았다. 준희가 원했던 대로 깔끔하게 친구 관계를 끊어 주었고 따로 찾아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까지 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일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짬이 생기면 언제나 준희가 생각났다. 준희와 만나던 목요일은 유독 더했다. 어느 목요일엔 영화관엘 가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 키를 꽂기도 했고, 또 어느 목요일엔 무의식중에 준희의 빌라 앞까지 갔다가 아차 싶어 돌아오기도 했다. 오랜 나날 쌓아 온 친구 관계는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는 게 아니었다.
1년은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다. 잊기에는 몹시 짧은 시간이었고, 견디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직 잊히지도 않았고 견디기도 힘이 들었다.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준희를 못 본 지 364일째, 목요일이었다.

* * *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슬슬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벌써 3월 하순인데도 봄이 아직 멀었는지 밖은 온통 겨울 분위기였다.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돌린 신재는 다시 관악산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수사 지휘서를 확인하고 도장을 찍었다. 오전 내내 수백 페이지짜리 사건 기록 세 개를 검토해 불기소 결정문 두 개를 써서 넘기고, 강도 사건으로 기소를 결정한 피고인에 대해 공소장을 작성한 뒤에, 혜화역 근처에서 발생한 폭력 사건의 체포 영장 기각서를 작성해 부장검사에게 결재를 올린 다음이었다. 그러고도 이번 주 내에 검토를 끝내야 할 사건 기록들이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야근과 철야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대한민국 검사의 흔한 일상이었다.
진하게 탄 아이스커피를 들이켠 신재는 또 다른 사건의 관련 자료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보험금 때문에 독으로 배우자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대학 교수의 피의자 신문이 잡혀 있었다. 곽필원. A대 생명과학부 교수다. 소문난 잉꼬부부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던가.
자료를 중반쯤 읽어 나갈 무렵 검사실 문이 열렸다. 외근을 나갔던 문강욱 계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검사님, 독성시험 결과 보고서 구해 왔습니다.”
그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문 계장이 으쓱한 얼굴을 하며 두꺼운 서류 뭉치 하나를 건네주었다. 곽 교수의 피의자 신문에 쓸 자료였다. 바로 서류를 넘겨 보는 신재에게 문 계장이 설명을 덧붙여 왔다.
“말씀하셨던 대로 혜명대 의대 생화학 연구실에서 얻었습니다. 기밀 자료라 절대 새 나가면 안 된다면서, 쓰고서 바로 폐기해 달랍니다. 약품 샘플은 김 수사관이 가지러 갔으니까 곧 구해서 들어올 거고요.”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직 개발 중인 단계라 보안이 철저해서 외부에선 일절 모를 거라던데요.”
“추정이었습니다. 피의자인 곽 교수가 작년에 클러스터 사업 관련해서 그곳을 사흘간 출입했더라고요. 알려지지도 않은 독성 약품을 그렇게 흔적 없이 구할 곳은 그곳밖에 없을 테니까요.”
신재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중앙지검 유일의 미중년으로 불리는 문 계장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추정이요? 그러니까 그냥 찔러보셨다는 겁니까. 그거 구하느라고 제가 얼마나 개난리를 쳤는지 아십니까. 총장실까지 찾아가서 정말. 김 수사관은 또 어떻고요. 알았으면 절대 못 했을 텐데, 어떻게 저희까지 감쪽같이 속이십니까.”
“그래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받았으니 된 것 아닙니까.”
빙그레 웃는 신재의 얼굴에 문강욱 계장은 울컥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야 했다. 그보다 열일곱 살이나 어리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하 검사는 그의 상관이었다. 게다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었다.
강욱은 9급 말단의 검찰 공무원으로 시작해 22년이나 검찰 밥을 먹고, 그중 13년을 검사실의 실무 책임자인 참여 계장으로 일해 왔다. 검사들의 속내는 거의 꿰뚫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하 검사의 속에는 뭐가 들어앉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의 신임 검사들이라면 응당 노련한 참여 계장의 손바닥 안에서 놀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직급이 높고 그 어려운 사법 고시에 합격할 만큼 똑똑하다 한들, 십수 년 경험의 차이를 한순간에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 검사는 처음부터 그의 손에 없었다. 고작 스물여덟에 초임으로 왔을 때부터도 그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3년 차인 지금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부장검사도 간단히 요리할 정도의 고단수가 되어 있었다.
“검사님, 관리실에서 곽필원 교수 도착했다고 연락 왔습니다.”
검사실 막내인 오윤희 실무관이 전화를 내려놓으며 말을 전해 왔다.
“예. 올라오는 대로 조사실로 안내해 주십시오.”
정중히 대답하는 하 검사를 보며 강욱은 헛웃음을 뱉었다. 저렇게 정중한 말씨와 정중한 태도로 사람을 참 잘도 부려 먹었다. 권위 가득한 검사들도 많은 반면에, 하 검사는 말단 실무관이나 하급 경찰들에게도 언제나 깍듯했다. 피의자 신문을 할 때에도 절대 목소리 높이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필요한 자백은 조목조목 잘도 받아 냈다. 일 처리가 확실하고 현장 감각도 뛰어나서, 검사라면 이를 가는 일선 형사들에게도 예외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지검장의 확고한 신임까지 받고 있는 이 잘난 남자에게 안티가 있다면 검·경찰을 통틀어 꼭 두 사람일 것이다. 그의 밑에서 실무를 담당하느라 수도 없이 뺑이 치고 있는 그 문강욱과 김수혁 수사관, 이 둘이었다. 강욱은 그의 자리로 돌아가며 하 검사를 몰래 흘겨보았다.

곽 교수의 자백은 간단히 나왔다. 내내 초연함을 유지하던 그는 혜명대 생화학 연구실과 독성시험 결과라는 얘기가 나오자 결국 평정을 잃었다. 일단 페이스가 무너지면 그다음은 쉽다. 아픈 곳을 집중적으로 건드려 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내연녀가 있었고 보험금도 있었다. 독을 손에 넣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20년 넘게 함께 산 와이프를 살해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 곽 교수 이야기의 팩트였다. 신문은 1시간 만에 끝났다.
“진짜 무섭지 않습니까, 검사님.”
청원경찰에게 이끌려 구치감으로 향하는 곽 교수를 바라보며 김 수사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말입니까.”
“저 얼굴 어디가 사람을 죽이게 생겼습니까, 그것도 자기 와이프를 말입니다.”
신재는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잖고 선한 인상의 곽 교수는 대학교수의 표본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글쎄요.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와이프한테 진짜 그렇게 잘했답니다. 다리 다쳤을 때는 휠체어도 안 태우고 업고 다녔대요. 집안 반대도 무릅쓰고 결혼할 만큼 대단한 사랑이었답니다.”
서류와 노트북을 챙겨 들며 김 수사관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신재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랑이라도 모든 사랑엔 유효기간이란 게 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 평균이 고작 3년. 호르몬 작용으로 들뜬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이후에 남는 것은 변질뿐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모든 음식이 부패해 가는 것처럼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애정이 식고 마음이 변하는 것은 인체의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이었다.
“대단한 사랑은 있을지 몰라도 영원한 사랑은 없죠.”
간단히 말을 던진 신재는 의자에 걸쳐 두었던 슈트 상의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랑. 믿지도 않을뿐더러 하고 싶지도 않다. 사랑이 유효한 고작 3년의 찰나에 집착해 인생 전부를 거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한 번으로 족했다. 그리고 깨끗이 잊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 주었던 친구가 있었으니까. 누구보다 든든했던 그의 준희가.
조사실을 나와 걸음을 옮기던 신재는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창가에 잠시 멈춰 섰다.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일 정도로 하늘 가득 내리는 눈이었다.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준희가 생각났다. 평소처럼 웃음 가득한 얼굴이 아닌, 검은 옷을 입고 주저앉아 숨이 넘어가도록 오열하던 아픈 모습이다. 준희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스무 살의 그날, 이렇게 함박눈이 끝도 없이 쏟아지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신재는 검토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라는 것도 잊은 채, 창가에 못 박힌 듯 서서 내리는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비단 눈이 내릴 때만 준희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준희와의 추억은 벚꽃이 만개했던 따사로운 봄날에도 있었고, 무더위에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던 여름날에도 있었다. 단풍이 물들면 물드는 대로, 바람이 거칠게 불면 부는 대로,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면 또 그런 이유로 준희의 얼굴이 머릿속에 찾아들었다.
고3 때 만나 10년의 세월을 친구로 지냈다. 6년을 같은 빌라에 살았고 대학도 같이 다녔다. 서로에게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인 그들이었기에 추억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천칭이네.’
‘어. 정의의 상징. 굳이 이런 거 없어도 너는 진짜 멋지고 정의로운 검사가 되겠지만.’

자리로 돌아온 신재는 책상 위 지정석에 놓아두었던 탁상시계를 집어 들어 멍하니 만지작거렸다. 기하학적 문양의 천칭이 그려져 있는 작은 탁상시계는 연수원에 들어가던 날 준희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어디서 이런 걸 다 구했는지. 대충 골랐다고 보기엔 의미가 깊은 선물이었다. 천칭은 그의 별자리이기도 했고, 정의를 상징하는 디케의 저울이기도 했다. 시계 위에 새겨진 이탤릭체의 글씨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for JUSTICE, for TRUTH

‘정의를 위하여, 진실을 위하여.’
준희가 새겨 준 이 문구를 연수원 시절부터 하루에 몇 번씩은 꼭 들여다보았었다. 검사실에 있을 때는 손목시계를 두고 꼭 탁상시계를 확인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보고 싶었던 건지, 시계를 보고 싶었던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일부러 이 시계에 신경을 안 쓰기 시작했던 건 준희와 그렇게 헤어진 다음부터였을까.
시계를 톡톡 건드리던 신재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0번을 길게 눌러 보았다. 산뜻한 컬러링이 기분 좋게 흘러나왔지만 준희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쯤은 받아 줘도 괜찮을 텐데.
머리가 또 몹시 아파 왔다. 요즘 들어 계속되는 증상이었다. 준희 생각을 할 때면 늘 그렇다.
준희를 못 본 지 378일째, 목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