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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너란 존재는
1화
Prologue. Gloomy White Day


목요일이었다.
차에서 내린 신재는 지하 주차장을 터벅터벅 가로지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0분. 서두른 덕에 아직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면 산더미 같은 사건 기록 덕에 밤을 새워야 할 테지만, 지금은 그저 늦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바쁘게 올라탄 엘리베이터 안엔 사람이 많았다. 거의가 꽃다발이며 바구니를 들고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남녀들이었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라도 되나. 화려한 꽃다발과 예쁘게 장식된 바구니가 눈길을 끌었지만, 신재는 잠시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준희보다 먼저 도착하면 좋겠는데.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점점 커졌다. 영화관이 있는 12층에서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대형 쇼핑몰의 맨 위층에 자리한 이 영화관은 밤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붐빈다. 커다랗게 붙여진 영화 포스터를 무심히 지나서 신재는 곧장 예매권 발권기로 향했다. 매주 오는 곳이기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둘러보지 않아도 잘 알았다.
“왔어?”
조금은 들뜬 듯한 쾌활한 목소리.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준희가 다가오며 반갑게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까만 눈동자가 부드럽게 접히며 눈 아래에 인디언 보조개가 옴폭 팬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아니길 바랐는데 이번에도 그가 늦었다.
“어. 많이 기다렸어?”
“아니, 조금. 일 많은데 괜히 나온 거 아니야?”
“별로. 사건 기록만 들이판다고 답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준희가 미안한 얼굴을 하는 것이 싫어서 신재는 대수롭지 않게 답해 주었다.
“아아. 뭐, 일도 머리 식혀 가면서 해야지.”
알 만하다는 듯 준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이 좀 나아졌다.
준희는 곧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씩씩하게 앞서 걷기 시작했다. 경쾌하게 걷는 그녀의 뒤를 따라 신재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영화관에서 만나는 건 매주 목요일 밤 9시 부근, 준희는 늘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다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 번쯤은 그가 먼저 도착해 기다려 보고도 싶었지만,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터라 잘되지 않았다. 준희가 그에게 바란 건 고작 매주 같이 영화를 보자는 그것 하나뿐이었는데도.
앞서가는 준희의 등에서 커다란 백팩이 무겁게 흔들렸다. 책을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커다란 백팩은 지퍼가 다 올라가지 않아 책 끝이 비죽 나와 있었다.
“무슨 책을 이렇게 많이 빌렸어.”
“아아, 일 때문에.”
뒤돌아본 준희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또 도서관에 들렀다 온 모양이었다. 가끔 가방이 다 잠기지 않을 정도로 책을 잔뜩 빌릴 때는 생소한 분야의 광고를 맡았을 때다. 이번엔 또 무슨 광고일까. 늘 잠잘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광고 일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녀석이었다.
발권기 앞에 멈춰 선 신재는 막 예매 번호를 누르려다 아차 싶어 준희를 돌아보았다. 무슨 영화인지 알려 주지 않은 것이 이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인 오브 마인> 예매했는데.”
“아아, 좋아 그거. 완전 보고 싶었어. 마법사들 나온다니까 특수 효과도 궁금하고.”
준희가 무척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마법사가 나오는 건가. 이번 주 개봉 영화 중엔 제일 평이 좋다는 문 계장님 이야기에, 그저 시간만 맞춰서 대충 예매해 두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영화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감독이 누구인지, 출연 배우며 줄거리는 무엇인지도.
“내용은 몰라. 살펴보지 않아서.”
“아아.”
준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잠시 사라졌다. 뭐 잘못 말했나, 생각하는 순간 준희가 다시 웃었다. 착각이었겠지.
“내용 모르고 보는 게 더 재미있지 뭐. 선입견도 없고. 나는 팝콘 사 올게.”
“어.”
무거워 보이던 가방을 의자에 던져 두고서, 준희는 단발머리를 팔랑거리며 팝콘 판매대로 뛰어갔다.
단발머리? 그러고 보니 머리를 자른 모양이었다. 등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가 깡총해져 가느다란 목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건가. 여자들은 그렇다던데.
짧아진 준희의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신재는 다시 발권기로 시선을 돌렸다.
“……아뇨. 콤보 말고요.”
예매권을 출력해 좌석 번호와 시간을 확인하는데 저쪽에서 준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서나 시선을 끄는 목소리. 고개를 들어 보니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에도 역시 주위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울림이 매력적인 목소리였기에 대학 시절엔 성우 하라는 말도 제법 들었던 준희다.
“치즈 팝콘 큰 거 하나랑 오렌지 주스 하나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따로 주시고요.”
검은색 가죽점퍼에 낡은 청바지가 여전히 잘 어울렸다. 판매대에 턱을 괸 준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신재는 피식 웃었다.
요즘은 널린 것이 영화관인데, 준희는 꼭 이 영화관만을 고집했다. ‘팝콘이 맛있어서’라는 단순한 이유였다. 같은 체인이라도 영화관마다 팝콘 맛이 다르다나 어쨌다나. 덕분에 그들은 다른 영화관을 거의 가 본 적이 없다. 그렇게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둘은 매주 목요일마다 이곳에서 만나 치즈 팝콘을 먹으며 습관처럼 함께 영화를 보고 있었다.
굳이 목요일에 만나는 이유가 있다면 대부분의 영화가 목요일에 개봉하기 때문이었다. 영화라면 장르 불문, 감독 불문으로 빠져들어서 보는 준희였지만 개봉하는 날 보려는 집념은 유독 강했다. 설렁설렁해 보이지만 의외로 매니악한 구석이 있었다.
“자, 아이스커피.”
양팔 사이에 팝콘을 끼고, 양손에 음료수 두 잔을 들고 온 준희가 얼음 넣은 아메리카노를 건네 왔다. 데이트 아닌 데이트 같은 영화 관람, 그가 영화를 예매하면 팝콘과 음료수는 준희가 샀다. 그저 당연한 일인 듯 그렇게.
“어, 고마워.”
종이컵을 받아 든 신재는 바로 아이스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아직 3월이라 쌀쌀한 날씨였지만, 그는 한겨울에도 차가운 음료만 마셨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취향을 꿰고 있는 관계.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10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인 대신’이라는 둘의 애매한 관계도 그렇게 벌써 3년이었다. 그 세월 동안 ‘애인 대신’은 이제 필요도 없게 되어 버렸지만, 관계를 재규정하지 않은 채로 그들은 벌써 스물아홉이 되어 있었다.
“영화가 재미있어야 할 텐데.”
“그러게.”
기분 좋게 웃은 준희가 무거운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멨다. 짧아진 머리가 마음에 걸려 무심한 척 쳐다보았지만, 평소와 똑같은 말투에 똑같은 분위기였다.
뭐,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얘기해 주겠지. 늘 미주알고주알 저에게 얘기를 털어놓던 준희였으니까. 잠시 머리를 자른 이유가 궁금하던 신재는 상영관으로 들어서자 금방 잊었다. 드러난 목선이 더 예쁘다는 생각만 머리에 남았다.
영화는 언제나처럼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세 명의 마법사가 아홉 가지의 메시지를 찾아 가는 이야기. 그래도 평소엔 준희가 이것저것 속닥여 주어 그런대로 영화를 즐겼지만, 오늘따라 준희는 말이 없었다. 그저 파고들듯 화면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특수 효과 때문이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마법으로 시작된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현란한 그래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직업병인지, 호기심인지, 준희는 특별한 영상이라면 그 무엇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준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에, 오늘은 영화를 보다 깜빡 졸기까지 했다.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까지 철야를 하다시피 한 터라, 어두운 공간에 앉아 있으려니 졸음이 더욱 크게 쏟아졌다.
피해자의 사체 사진과 엉망이던 사건 현장의 사진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부러 내놓은 것 같던 커다란 발자국. 이유를 알 수 없는 범인의 동선. 발견되지 않은 흉기…….
부연 안개처럼 혼탁한 의식에 형과 민경 누나의 모습이 희미하게 스쳐 갔다. 그리고 준희. 형이 기타를 치고 민경 누나가 첼로를 켠다. 근사한 연주에 준희가 탬버린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다. 스물셋,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이제는 다시 올 수 없는…….
…….

“……야, 신재야. 하신재.”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재는 부스스 눈을 떴다. 몽롱한 시야에 하얀 얼굴만 도드라지게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준희가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귀를 울리는 웅장한 음악. 멍하니 바라본 커다란 화면에선 벌써 엔딩 크레딧이 길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아예 푹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어. 미안, 피곤했나 봐.”
“그러게.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일이 바쁘면 그냥 못 온다고 하지.”
준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며 브리프케이스를 챙겨 주었다.
“아니야, 그런 거. 나가자.”
신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영관의 어두운 조명에 물들어서인지 준희의 얼굴이 이상하게 쓸쓸해 보였다.
준희가 안고 있던 팝콘 통도 무심히 기울어 팝콘 몇 알이 스르르 굴러떨어졌다. 치즈 팝콘에 목매는 준희라 영화가 중반을 지나기도 전에 늘상 비어 버리던 팝콘 통이었다. 어쩐 일인지 오늘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샌드위치 먹고 갈까?”
상영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신재는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건넸다. 그렇게 잠들어 버린 것이 미안해서였다. 머릿속엔 내일 찾아봐야 할 사건 현장부터 아귀가 맞지 않던 사건 기록까지 이것저것 수많은 것이 오갔지만, 어쩐지 준희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준희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전철 끊길 시간이야.”
“내 차 있는데 뭘 걱정이야. 가자.”
그냥 가 버릴까 봐 서둘러 준희의 팔을 잡았다. 그가 우기면 거절 같은 건 못 하는 준희다. 한 번도 거절당해 본 적 없는 신재는 잘 알고 있었다.
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준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할 얘기도 있고.”
“할 얘기?”
“……어.”
망설이는 듯한 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뭐, 들어 보면 알겠지.
둘은 건물 1층의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커피와 샌드위치가 모두 맛있는 이곳은 자정이 지나서까지도 영업을 했기에, 영화를 보고 출출할 때 가끔씩 들르던 곳이었다.
준희가 좋아하는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앞에 두었건만, 먹성 좋은 평소와 달리 그저 포크로 조금씩 깨작거리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팝콘도 거의 안 먹었지.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회사에 무슨 일 있어?”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넘긴 신재가 진지하게 물었다. 준희는 대답 없이 슬쩍 웃기만 했다. 콧등이 살짝 찡그려지는 것이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준희가 파란 이파리들만 꾸역꾸역 입에 넣는 것을 신재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았다. 숨기거나 그런 성격이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리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할 말 있다고 한 것은 저였으면서.
“……아니. 회사는 별일 없어.”
아까 그 질문의 답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할 만큼 타이밍이 한참 늦은 대답이었다.
대답을 하면서도 준희의 눈길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답지 않게 주위의 다른 커플을 슬며시 훔쳐본다. 주변엔 둘 말고도 연인인 듯한 커플 여러 쌍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준희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서로의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두른 채 끈적하게 앉아 있는 커플이었다.
“안 돼? 친구들이 오빠 보고 싶어 한단 말야. 남자 친구가 너무 신비주의 아니냐면서.”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내일 당장 볼까. 오빠가 크게 한 턱 쏘지 뭐. 우리 영은이 친구들인데.”
“와, 정말? 어디서 볼까? 호프집?”
“패밀리 레스토랑이 낫지 않아? 그래도 저녁은 근사하게 한 끼 사야지. 2차는 클럽 정도가 좋겠고.”
“꺄아, 오빠. 역시 우리 오빠는 어쩜 이렇게 멋진가 몰라. 쪽. 음. 쪽.”
하는 얘기들도 유치해서 못 들어 주겠군. 찰떡같이 붙어 앉은 커플은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손잡고 부비적거리며 애정을 쏟아 내기 바빴다.
저 정도면 풍기 문란인데. 공공장소에서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을 벌이는 그들이 신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희도 눈에 거슬려서 저런 걸 보고 있겠지.
“저기…….”
준희가 말을 꺼내려는 것 같아 신재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 말해.”
“있지 우리…….”
“어.”
“……우리 이제 그만 만나.”
“어?”
“그만 만나자고. 이제 ‘애인 대신’은 필요 없잖아.”
얼굴엔 미소까지 화사하게 띤 채, 준희는 듣기 좋은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일말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이나 그런 것도 없이.
“왜? 지금까지 잘 지내 왔잖아, 우리.”
“어. 그러니까.”
“……애인 생겼어?”
준희가 이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애인 대신’은 서로에게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 이를테면 시한부 같은 것이었으니까.
쿨하게 애초부터 선을 그어 놓은 관계였지만, 신재는 이상하게 배신감이 들었다.
“아니, 애인 생기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왜. 아아, 짝사랑이야?”
애인이 생긴 것도 아니면 짝사랑일 것이다. 뭐, 혼자 좋아하는 것도 사랑은 사랑이니까. 그런데 대체 누굴까. 준희의 마음을 홀랑 가져가 버린 그 자식이. 형은 이제 다 잊어버린 것일까.
“그 비슷한 거.”
“비슷한 건 또 뭐야.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생겼어. 사랑하는 사람.”
단호한 말에 신재는 잠시 멈칫했다. 어떤 일에도 말문이 막혀 본 적이 없는 그였는데, 준희의 이 말에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멍했다.
“있지, 신재야.”
“어.”
“나…… 아껴 주는 사람이랑 만나고 싶어.”
“어?”
아껴 주는 사람. 신재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테이블만 툭툭 건드렸다.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짝사랑하는 그 남자가 저를 아껴 줄 것 같은 남자란 뜻일까. 그는 아껴 주지 않았다는 얘길까.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 관계를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준희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으니까. 선뜻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다. 준희가 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럼.”
생각보다 답이 시원하게 나와 주었다. 3년간의 애매한 관계를 청산하는 일은 참으로 쉽고도 간단했다.
“어.”
준희가 다시 화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야박하게 속을 긁었다. 이파리를 다 먹고, 굴러다니는 아몬드 조각까지 깨끗이 집어 먹을 때까지, 둘은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음식만 먹었다.
준희는 데려다주겠다는 제안도 한사코 거절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결국 택시를 잡아 태워 보내고, 신재는 허전한 마음에 한참 동안 길에 그렇게 서 있었다. 뭔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달라질 건 없었다. 그저 습관처럼 만나 온 ‘애인 대신’인 친구가 있었고, 그 습관이 조금 바뀌는 것뿐이다. 너무 오래 함께해 왔기에 잠시 당황스러운 것일 뿐.
“……사탕 사세요. 마지막 떨이라 싸게 드려요.”
귓가에 커다란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바구니를 팔던 노점 상인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사탕 사세요, 사탕. 달콤하게 사랑을 고백하세요. 사탕…….”
사탕. 사랑. 고백.
익숙한 메시지가 스쳐 가자, 신재의 눈길이 무심히 상인에게로 쏠렸다.

[사탕보다 더 달콤하게 ♥ 사랑을 고백하세요. White Day.]

화려한 바구니들 뒤에 커다랗게 자리한 푯말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제야 신재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던 바구니며 꽃다발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렸다.
화이트데이.
딱히 줄 사람도 없고, 받을 사람도 없는 날이었기에 그에겐 별 의미 없는 날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을 처리하기도 바빴기에 그런 시시껄렁한 일에 쏟을 신경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랑을 고백한다는 그날, 그는 보기 좋게 차였다. 애인도 아니고 ‘애인 대신’인 친구한테서. 그러고 보니 물어보지도 못했다. ‘애인 대신’만 끝내자는 건지, 친구도 끝내자는 건지. 뇌리를 떠나지 않는 준희의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

준희는 ‘애인 대신’을 그만하자고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만나자고 했었다. 이상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신재는 서둘러 준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짙게 일었다. 준희한테서 꼭 해명을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준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열 번을 걸어도 스무 번을 걸어도 익숙한 컬러링만 메아리처럼 반복되었다.
그날뿐이 아니었다. 일 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생각날 때마다 전화했지만 준희는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 관계도 끝이 났다. 10년을 함께한 그들의 세월도.
그날 이후 신재는 단 한 번도 영화관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준희에게선 당연한 듯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