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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고 소장님 참 딱딱해.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될 것을 꼭 선을 긋는다니까. 그렇지 않나요, 고 대표님?”
“저 녀석한테 그런 면이 조금 있죠? 손아래 동생인데, 가끔은 저도 함부로 못 한다니까요.”
지훈이 너스레를 떨자 문 사장이 하하, 쾌활하게 웃었다. 딱딱하다는 말을 들은 고 소장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도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문 사장이 말했다.
“같이 저녁 먹읍시다. 내가 살게요. 고 소장 얼큰하고 칼칼한 그런 거 좋아한다면서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으니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뼈해장국 끝내주게 하는 데 알아요. 전에 누가 소개해 줘서 알았는데, 땀까지 흘리면서 국물까지 싹 비웠다니까요. 괜찮겠죠?”
“좋습니다. 그럼 2차는 저희가 대접하겠습니다.”
지훈의 말에 문 사장이 손을 저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놓고 그러는 건 실례죠. 오늘은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우리 옥상 공사 잘 부탁한다는 뇌물의 의미로.”
“뇌물은 저희가 써야죠. 타 업체 견적도 안 받아 보셨다면서요?”
“우리 집에선 어머니 말씀이 법이에요. 어머니 입에서 <훈 조경>이면 더 볼 것도 없다는 말씀 나왔으면 다 된 거죠, 뭐.”
태훈은 알고 있었다. 문 사장이 말은 저렇게 해도 보기보다 꽤 꼼꼼한 성격이라는 것을. 소소한 얘기를 나눌 때면 스스럼없이 밝게 웃다가도 일 얘기가 나오면 냉철해지는 눈빛과 낮게 깔리는 음성이 그의 성격을 짐작게 했다.
만약 이쪽에서 제시한 설계도와 견적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다른 업체를 고용했을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이다. 태훈은 그래서 더 다행이라고 여겼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말을 참아 가며 대하는 것은 이쪽에서도 사양이니까 말이다.
문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따라 일어선 지훈이 대표실 문을 열며 길을 터 주었다. 대표실을 나선 문 사장이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며 눈으로는 비서 송을 찾았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딜 간 거지?
문 사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다는 걸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나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같이 오신 분 찾으시는 거죠? 지금 정원에 나가 계세요.”
“그래요?”
“네. 제가 모셔 올까요?”
“아닙니다. 제가 가 볼게요.”
문 사장이 뒤에 선 지훈에게 말했다.
“아! 미리 말씀을 못 드렸는데, 식사 자리에 우리 직원도 동행해도 될까요? 오늘 저 대신 운전하느라 고생 많이 했거든요.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배려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나가서 기다릴게요. 준비되는 대로 나오세요.”
“네.”
문 사장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도 자리에 앉아 도면을 보고 있던 태훈이 뒤늦게 대표실을 빠져나와 지훈에게 말했다.
“많이 수정했네? 지난번에 봤던 것보다 훨씬 낫다.”
“그렇지? 플랜트 옆에 소나무도 생각해 봤는데 답답해 보일 것 같아서 그냥 빼기로 했다.”
“계약은? 기존에 제출했던 견적가 그대로 작업하기로 했어?”
태훈이 견적 제출 이후 늘 벌어지는 협상, 즉 <서빛스틸>에서 <훈 조경>이 제출한 공사 대금 견적가에 관해 인하 요청을 하진 않았는지 물었다.
“아까 너 오기 전에 문 사장한테 그 얘기부터 했어.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제출한 견적가가 최저가는 아니고 적정가라고. 그런데 거기서 더 낮추면 원하는 분위기 내기 어렵다고 하니까 알겠대. 그 금액에 맞춰 준비해 달래.”
“그래?”
공사 대금을 조금이라도 더 깎아 내리려는 사람들도 많은데, 보이는 것만큼이나 꽤 시원시원한 타입인 건가? 생각하고 있는 태훈에게 지훈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문 사장이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대. 다음 주 계약서에 도장 찍기로 했어.”
“공사는? 다음 달 초부터?”
“어.”
“그럼 형.”
태훈이 갑자기 형이라 칭하며 은근하게 부르자 그 모습이 낯선 지훈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너 왜 또 그렇게 불러? 부담스럽게.”
“평택에 개인 정원 의뢰 들어온 거 래훈이 맡겨 볼까 하는데, 어때?”
“래훈이?”
“어. 이제 그래도 되지 않겠나 싶어서.”
“아직은 좀 이르지 않아?”
“배 소장님이 도와주시겠대.”
태훈이 아버지 밑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셨고, 현재에도 <훈 조경>의 자문으로 계신 배진규 소장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던 지훈이 긍정적인 어투로 답했다.
“배 소장님이면 뭐, 그렇게 해. 그리고 너도 나갈 준비해. 문 사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야, 잠깐만.”
지훈이 밖으로 나가려는 태훈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태훈이 무슨 일이냐는 듯 두 눈썹을 추켜세우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너 또 그 소리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무슨 소리?”
“래훈이한테 일 넘기고 그만둘 거라는 소리 말이야.”
지훈의 진지한 물음에 태훈이 입술을 늘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우리 형도 눈치 많이 늘었네?”
“야!”
“이번엔 농담 아니야. 진짜 그만둘 거야.”
“너 진짜.”
“지난번엔 아버지가 붙잡으셔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젠 안 돼. 그러니까 나 몰래 머리 굴릴 생각하지 마.”
“나쁜 놈.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명줄 거머쥔 사람은 네 형수가 아니라 너인 것 같다. 이제 좀 살 만해지는가 싶었는데.”
“래훈이 있잖아? 두고 봐, 이번에 실력 제대로 보여 줄 테니까.”
“그만두고 함양 갈 거야?”
“어.”
“지긋지긋하다, 진짜. 거기에 꿀 발라 놨어?”
“래훈이 이번 공사 끝내고 자리 잡으면 알아서 퇴직금 정산해 줘.”
“미친놈. 퇴직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가 줄 줄 알아!”
지훈이 꽥 소리를 질렀지만 태훈은 가볍게 웃으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태훈은 대학 졸업 이후 약 10여 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이곳에서 일했다. 태훈 역시 배진규 소장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고 현장 소장 자리에 앉은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오랜 기간 함께 일해 온 지훈과 태훈 두 사람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손, 발이 잘 맞는 동료였다. 그래서 지훈은 그가 더 오래 일해 줬으면 싶은데 태훈은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몇 해 전에도 하던 일을 접고 함양으로 내려가 살겠다는 그를 붙잡은 건 아버지였다. 고집 센 태훈도 아버지 말씀은 거역하기 어려워 다시 이곳에 눌러앉았지만 이제는 잡을 도리가 없다. 지훈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영에게 투정하듯 물었다.
“나영 씨, 어디 괜찮은 친구 없어? 장가라도 들여서 묶어 놓든지 해야지. 이거 원.”
“고 소장님 여자한테 관심 없으시잖아요? 전에 제 친구 소개해 드리려고 물어봤었는데 단번에 자르시던데요?”
“그래? 뭘 믿고 저런대?”
“그러게요. 고 소장님 연애 안 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그런데 사장님, 나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던 지훈이 아차, 하더니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였다.
“오늘 못 들어오니까 나영 씨도 알아서 퇴근해.”
“네.”

* * *

마당으로 나온 문 사장이 송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송은 정원 입구의 어떤 나무 아래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송!”
그의 부름에 천천히 뒤를 돌아본 송은 문 사장이 이리 오라 손짓하자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송이 가까이 올수록 더 확연히 보였다. 곱게 늘어진 입술 위 반짝거리는 눈동자. 마치 신기한 것을 발견한 아이같이 들떠 보이는 송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곧 입술을 벌려 자신이 경험한 무언가에 대해 늘어놓을 것 같던 송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라 꽤 신선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송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쨍그랑!
거센 파열음이 들렸다. 송의 손에 있던 머그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 버린 것이다.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표정에 문 사장이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송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장님, 있잖아요.’ 하고 아이처럼 재잘거릴 것만 같던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허옇게 질려 있었다.
“송?”
문 사장의 부름에도 송은 멍한 눈길만 던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송의 시선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문 사장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그곳엔 송보다 더 당황한 표정의 태훈이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둘이 아는 사이인 건가?
문 사장은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송이였다. 송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깨진 머그잔 조각을 한 손으로 주워 빈 손바닥으로 옮겨 담고 있었다. 그러자 태훈이 빠르게 걸어 그녀의 앞까지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만해요.”
태훈이 말했다. 그러나 송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깨진 조각을 주워 담고 있었다.
“피 나잖아! 그만하라고.”
짜증스럽게 말한 태훈이 그녀의 손바닥을 뒤집어 깨진 조각들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송의 손바닥에는 빨간 피가 곳곳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미련한 여자 같으니라고! 화가 난 태훈이 주위를 살피더니, 사무실 건물 뒤편의 창고에서 나오는 동생을 불러 세웠다.
“고래훈!”
“어?”
“이리 와!”
래훈은 순간 아까 자신이 친 장난에 대해 답례를 하려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형의 목소리는 꽤 날카로워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문 사장의 여비서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래훈이 빠르게 뛰어왔다.
래훈이 오자 태훈은 송의 팔목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거 좀 치워라.”
“컵 깼어?”
“그래.”
그때까지도 송은 자신의 손목을 꽉 움켜쥔 태훈의 손등만 응시하느라 자신이 깨트린 잔을 줍는 사람이 래훈인지 누구인지 분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치료부터 하죠.”
“아니, 저기.”
“그 입술, 다물라고.”
단호하게 말한 태훈이 그녀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문 사장이 자신의 앞을 지나치려는 태훈의 팔을 붙잡았다.
“고 소장.”
“손바닥을 많이 다쳤어요. 우선 치료부터 하고 나올게요.”
“아, 네.”
문 사장은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송이 다쳤다는 말에 그를 놓아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사무실에서 나온 지훈이 자신의 옆을 지나쳐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벙벙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문 사장이 흠, 흠, 하며 목기침을 하였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지훈이 문 사장의 곁으로 내려오며 물었다.
“지금 들어간 사람, 문 사장님 회사 직원 아닙니까?”
“맞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송이 조금 다쳤어요. 고 소장이 치료해 준다고 데리고 들어갔고요.”
“네. 그럼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잠시 저곳에 좀 앉을까요?”
지훈이 마당 한 곳에 놓인 목제 벤치를 가리키자 문 사장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 * *

벽시계의 똑딱임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한 공간. 송은 자신의 손바닥에만 시선을 둔 태훈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워 사무실 이곳저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던 중 소파 옆으로 놓인 원목 책상 위에 낯익은 이름 하나가 적힌 명패를 발견했다.
‘고태훈 소장’
이름 옆에 붙은 소장이라는 직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일 년 전 가을,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는 그녀에게 나무 심는 일이라고 대답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일이 이 일이었던 건가?
생각에 잠겨 펴고 있던 손바닥을 살짝 움츠렸나 보다. 태훈이 그녀의 손바닥을 똑바로 펴며 말했다.
“손!”
송은 선생님께 꾸지람이라도 들은 아이처럼 손바닥을 쫙 폈다.
하아.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한쪽 손을 내맡기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하필 이곳에서 부딪칠 게 뭐야. 문 사장 차는 자기가 알아서 운전하라고 할 걸, 괜히 돕겠다고 나서서는. 송이 자신을 탓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소독하고 연고만 바르면 끝날 것 같은데, 태훈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한참을 잡고 놔주질 않는다. 송이 슬그머니 손을 빼려 할 때였다.
“가만있어요. 다 되어 가니까.”
뚝뚝한 태훈의 목소리에 송의 몸이 움찔거렸다.
“붕대만 감으면 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붕대요? 그냥 밴드만 붙이면 될 것 같은데.”
“찢어진 곳이 여기저기라 밴드로는 부족해요.”
태훈이 구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내 그녀의 손 전체를 감기 시작했다. 큼직한 손이 자그마한 손바닥을 감느라 애쓰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던 송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기, 태훈 씨.”
송이 태훈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미세한 동요도 없이 붕대를 감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송이 아까부터 망설였던 말을 꺼내었다.
“오랜, 만이네요.”
이번에도 역시 별 대답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다음 말을 준비하던 송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니, 노려보는 듯한 태훈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날이 선 눈으로 송의 눈을 뚫어져라 직시하던 태훈의 입가가 서서히 비틀어졌다.
“오랜만? 그렇긴 하네요. 그쪽은 잘 지냈어요?”
송은 태훈의 차가운 음성과 뚝뚝한 말투, 또 비아냥대는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런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담담한 척 대답했다.
“네.”
“그래 보이긴 하네요.”
송은 다시 입을 닫고 자신의 손바닥만 만지작거리는 태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단, 그녀를 대하는 모습은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