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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지명, 장소, 인물, 기관명, 상호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나무에 기대었다
1화
프롤로그


<훈 조경> 주차장.
<훈 조경>의 현장 시공 소장인 태훈이 자신의 SUV 차량에서 내려서며 작업복 점퍼의 지퍼를 내렸다. 속에는 늘 입던 헐렁한 티셔츠가 아닌 셔츠 차림이었다. 단추를 하나 풀어 둔 하얀 셔츠는 가맣게 그을린 태훈의 얼굴과 대비되어 그 색이 더 선명해 보였다.
태훈이 조금 급한 마음에 작업복 점퍼를 자동차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회사 출입구로 향하려는데 낯익은 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태훈의 차 옆에 주차한 그 차는 동생 래훈의 것이었다. 래훈이 차에서 내려서며 태훈을 향해 물었다.
“왔어?”
“문 사장 왔다며?”
“어. 서울에 볼일 있어서 왔다 가는 길에 들렀대. 설계도 수정된 것도 좀 볼 겸.”
래훈의 대답에 태훈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오늘 <훈 조경>을 찾은 문 사장은 최근 계약이 진행 중인 <서빛스틸>의 사장 문현서였다. 공사를 발주한 사람이 안성에서 꽤 이름난 중소기업의 사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문 사장은 태훈보다 고작 몇 살이 더 많은, 올해 나이 서른일곱의 젊은 남자였다.
얼마 전 <훈 조경>에서 제출하였던 설계도 중 몇 군데만 수정하여 계약하기로 구두로 합의한 상태라 최종 설계도 작성이 마무리되면 직접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그가 직접 이곳을 찾았다. 태훈은 어찌 된 일일까 궁금하기도 해서 형인 고지훈 대표의 뜻에 따라 현장 일을 마무리하자마자 사무실 쪽으로 차를 몰아 돌아온 터였다.
태훈이 래훈의 손에 들린 검은색 비닐봉지를 눈짓하며 물었다.
“그건 뭐야?”
“아이스크림. 아까 사다리 타서 걸렸거든.”
“어째 매번 너만 걸리는 것 같냐?”
“그러게. 이렇게 털리기만 하는 게 내 팔자인가 봐.”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하냐는 듯, 태훈이 래훈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가자.”
“어.”
아스팔트가 곱게 깔린 주차장을 벗어난 두 사람이 원목 출입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단단하고 긴 돌계단을 묵묵히 걸어 오르던 태훈이 래훈을 향해 말했다.
“래훈아.”
“응.”
“평택에 개인 정원 조경공사 의뢰 들어온 거 있지?”
“어.”
“그 공사, 네가 맡아서 해 봐.”
“내가?”
“그래. 이번 기회에 네 실력 좀 보자.”
“형, 나 아직 그거 맡아서 할 정도 아니야. 알잖아?”
“내가 보기엔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라는 거야.”
“큰형도 허락한 거야? 나 볼 때마다 아직 더 배워야 한다고 틈만 나면 잔소린데.”
“내가 얘기해 볼게.”
“아마 안 된다고 할 거야.”
래훈은 부정적으로 대답했지만 태훈은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이때를 기다려 왔는지.
그들의 아버지인 고경우가 만든 <훈 조경>이라는 울타리 안에는 세 형제가 있었다. 설계 및 대표직을 맡은 큰아들 지훈과 현장 시공 책임자로 근무 중인 태훈, 그리고 그 밑에서 여러 해째 일을 배우고 있는 래훈.
세 아들 중 래훈은 아버지와 흡사한 외모에 수려한 손재주까지, 아버지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그 덕분인지 현장에서 일을 습득하는 속도가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빨랐다. 그러니 작은 공사부터 하나씩 맡겨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태훈이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래훈은 큰형인 지훈이 아직 허락하지 않았지만 태훈이 밀어붙이면 안 될 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바닥만 보며 걷다가 갑작스레 멈춰 선 태훈의 등에 이마를 부딪쳤다.
그러자 태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거 뭐야? 치워.”
낮게 가라앉은, 또 슬쩍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래훈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태훈의 눈은 계단이 끝나는 지점, 그러니까 사무실로 향하는 입구에 심어진 금목서를 향하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금목서 나무 옆 돌벽 위에 얹힌 머그잔을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보고 있었다.
금목서는 태훈의 나무다.
적어도 래훈의 생각에는 말이다.
작년 가을, 함양에서 돌아온 태훈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이 <훈 조경> 마당에 금목서 한 그루를 옮겨 심은 일이었다. 지훈과 래훈은 물론 다른 직원들도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나무 많은 마당에 한 그루 더 심는 게 무슨 대수일까 생각해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다.
래훈이 아직도 돌벽 위에 얹힌 머그잔을 쳐다보고 있는 태훈에게 말했다.
“아, 저거? 문 사장 비서가 마시던 거야. 아까 아이스크림 사러 나갈 때 보니 나와 있더라고. 맞다. 형, 그 여자 되게 예뻐. 비서들은 다 그런가? 음, 뭐랄까, 약간 서늘한 느낌이 있긴 한데 그래도 엄청 예쁘더라. 보자마자 속으로 우와 했다니까. 아까 보니까 큰형도 보면서 실실 쪼개는 게.”
“치워.”
“까칠하기는. 알았어.”
태훈은 래훈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짧게 내뱉은 뒤 사무실로 향했다. 머그잔이 놓인 돌벽 가까이 간 래훈이 태훈을 불렀다.
“형!”
“왜?”
“이거 그냥 둬야겠어. 아직 반밖에 안 마셨는데?”
태훈의 입매가 굳어졌다. 하지만 다시 치우라고 하지 않았으니 그냥 둬도 되겠다고 판단한 래훈이 곁으로 오며 말했다.
“작은형, 그거 병이야.”
“뭐가?”
“가끔 이상한 데서 까칠하게 굴어서 주변 사람 피곤하게 하잖아?”
“내가?”
“그래. 요즘따라 더 심한 거 알아? 별거 아닌 일에 화내고 많이 예민해져 있다고 김 반장님도 그러시던데.”
그랬나? 생각하던 태훈이 그랬구나, 인정하며 잠자코 걸었다.
“여유를 좀 가져. 그런데 형, 혹시 말이야.”
“혹시 뭐?”
“아, 아니야.”
“뭔데?”
사무실 문 앞에 다다른 태훈이 궁금한 표정으로 래훈을 돌아보았다.
“말해.”
“저기, 형 그 이상한 성격 말이야.”
이상한 성격이라는 래훈의 말에 태훈의 한쪽 눈썹이 일그러졌다. 래훈은 지금이라도 말을 멈추는 게 맞는 걸까 생각했지만, 입 안에 담긴 말들은 기다리기도 지쳤다는 듯 좌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혹시 너무 오랫동안 남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살아서 생긴 욕구불만, 뭐 그런 거 때문 아니야? 솔직히 말해 형 그 나이에 여자도 안 만나지, 매일같이 회사, 집만 왔다 갔다 하지, 그거 문제 있는 것 같아서. 오죽했으면 엄마가 형 제발 외박 좀 했으면 좋겠다고.”
래훈은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 대고 있었다. 태훈은 사무실 문을 열려던 손을 거두고 래훈에게로 한 발자국씩 천천히 다가갔다. 래훈이 위기감을 느껴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도 벌어진 입으로는 계속해서 말을 쏟아 냈다.
“그러니까 제발 뭐라도 좀 하라고. 사람이 그렇게 재미없게 사니까 별일 아닌 데에도 예민해지는 거잖아?”
“너 오늘 꽤 신선하게 군다?”
“굳이 형한테 그렇게 보이고 싶진 않은데? 참! 문 사장! 안에 문 사장 기다리고 있잖아! 나랑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 없을 텐데?”
문 사장이라는 말에 태훈이 자리에 우뚝 서서 말했다.
“고래훈.”
“어.”
“네 그 신선한 도발에 대한 답례는 나중에 아주 천천히 해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라.”
“아니, 무슨 답례까지.”
태훈은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확인한 래훈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올까, 말까 주춤거리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겁을 내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는 거 보면 녀석도 이제 다 자라기는 한 모양이다. 하긴, 나이 서른이 다 되었는데. 태훈은 기분 좋게 웃으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태훈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안에는 여직원 나영뿐이었다. 태훈이 눈짓으로 대표실을 가리키자 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안에 계세요.”
고개를 끄덕인 태훈이 대표실이란 팻말이 붙은 나무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형인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태훈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각 테이블 위의 설계도에 머무르던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를 향했다. 문 사장과 지훈이였다.
문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으며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네요, 고 소장.”
태훈이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많이 바쁠 텐데, 나 때문에 들어온 거죠?”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소파에 앉은 뒤, 문 사장이 지훈을 향해 물었다.
“우선 하던 얘기부터 마무리 짓죠. 아까 어디까지 말했었죠?”

* * *

<훈 조경> 사무실.
송이 화장실에서 나오며 수돗물에 차게 식은 두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무심코 둘러보니 여직원 나영이 모니터 속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송이 나영을 방해하지 않으려 발걸음 소리를 죽여 천천히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뒤에서 나영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안에 계시기 불편하세요?”
나영의 물음에 송이 고개를 저으며 싱긋 웃었다.
“바깥 날씨가 정말 좋아요. 앉아만 있기엔 아쉽잖아요. 또 향기 좋은 꽃나무도 있고 해서요.”
“꽃나무요?”
나영은 송이 말한 나무가 무엇일까 생각하다 이내 알겠다는 듯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웃었다.
“노란 꽃송이 달린 그 나무 말하는 거죠?”
“네.”
“그거 저희 소장님이 되게 아끼시는 나문데.”
“그래요?”
“네. 작년에 직접 옮겨 심으셨거든요.”
“네.”
송이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곤 유리문을 밀어 밖으로 나가려 하자, 나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커피 말고 다른 차도 있는데요.”
“아뇨. 아까 주셨던 매실차 아직 남아 있어요.”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네.”
송이 오늘 이곳에 오게 된 건 순전히 문 사장 때문이었다. 문 사장은 몇 해 전 교통사고 이후 최근 들어 운전대를 잡긴 했지만, 아직 장거리 운행은 무리였다. 그래서 오늘 그녀가 그의 일정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안성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들를 곳이 있다고 하더니 바로 이곳이었다.
송은 사무실 출입구를 감싸듯 둥근 곡선 형태로 이루어진 세 개의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계단 제일 아래 칸에 서니, 따뜻한 가을볕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송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눈을 감은 송이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잠시 기분 좋게 서 있었다.
정말 가을이 왔구나.
어디선가 야트막하게 불어온 바람에 그리운 기억이 슬며시 따라 왔다. 샛노랗게 익은 벼 끝에서 나던 풀 냄새와 금이 가 벌어진 껍질 새로 단물이 흐르던 홍시 한 알. 그 밤 삐걱거리던 나무문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부드러운 입술로 자신을 어루만져 주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다시 눈을 떴다.
다 지나간 일일 뿐이다. 그리운 향기도, 달콤했던 목소리도, 조심스러웠던 그 손길도.
송은 지난 일들을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어 흔들고는 마당을 거닐었다. <훈 조경>의 마당엔 종류가 다른 나무 여러 그루가 아무렇게나 심겨 있었다. 서로 가지를 맞대고 사이좋게 어울린 단풍도 있었고, 담 너머로 비죽 고개를 내민 소나무도 있었다. 계단 옆, 혹은 바닥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심어진 화초들과 모양이 다른 디딤석들도 조화롭게 어울렸다.
어쩐지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걸어 본 적이 있었던 숲길을 거니는 듯 익숙한 느낌에 마당 곳곳을 둘러보는 송의 눈이 계속해서 반짝였다. 그중에서도 입구에 심어진 금목서에 마음이 더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송은 금목서 근처 돌벽 위에 얹어 두었던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머그잔 속 차게 식은 매실차 한 모금을 들이켰더니, 입 안 가득 퍼지는 매실차의 향과 코끝으로 스며드는 금목서 향기가 한데 어울려 한층 더 아찔하게 느껴졌다. 달콤한 매실차의 맛을 음미하며 주홍빛 꽃잎을 올려다보는 송의 귓가에 그립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떠올랐다.

‘금목서예요. 천리향이 아니라.’

천리향이라고도 불리는 나무의 정확한 이름을 알려 주었던 남자. 문득문득 나타나서 나 아직 당신 마음속에 살고 있다고 말해 주었던 남자. 고작 며칠을 함께했던 남자였을 뿐임에도, 그 남자를 떠올릴 때면 아련해지는 이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송은 나무를 보자마자 습관처럼 떠오른 남자의 모습을 지워 내려 눈을 질끈 감았다.

* * *

<훈 조경> 대표실.
지훈이 설계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말씀하셨던 차폐가 필요한 이 부분에는 넓고 긴 형태의 플랜트를 설치해 회양목이나 남천 같은 관목류나 화초류를 심을 예정입니다. 또 이쪽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사이에 두고 등받이가 없는 벤치를 사각으로 둘러놓아 앉을 공간을 늘릴까 합니다. 그리고 원래는 디딤석을 옥상 출입구 쪽에만 깔 예정이었는데 조금 바꿔 보았습니다. 크기가 작은 거로 종류를 바꿔서 옥상 바닥에 길을 내듯이 까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입구부터 시작해서 다시 입구로 돌아오는, 말하자면 짧은 산책로 같은 느낌을 주게 할까 하는데, 어떠세요?”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럼 이 부분이 흡연실입니까?”
지훈의 설명을 듣던 문 사장이 설계도의 구석진 곳에 그려진 네모난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설계를 의뢰할 때 문 사장이 꼭 필요하다며 요청했던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
“음. 뭐랄까, 전에 보여 주셨던 것보다 조금 더 편안해진 느낌이네요.”
“사장님께서 주위 빌딩들 때문에 삭막한 느낌이 너무 강해서 좀 갑갑하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계속 생각이 나서요. 아마 이렇게 해도 숲 속 공원 같은 느낌에는 훨씬 못 미칠 겁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자연 속에서 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신경 써 봤는데, 어떠십니까?”
말을 마친 지훈이 문 사장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굳게 닫힌 입술과 깊어진 눈빛에 지훈과 태훈의 긴장감도 깊어진다. 문 사장이 손에 들었던 설계도를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좋네요. 현장에 대해서야 저보다는 고 대표님과 고 소장님이 더 잘 아실 테니, 알아서 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꼼꼼히 보던 모습과는 다른 대답이다. 그러나 이제 다 됐구나, 하는 안도감에 지훈이 시원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저희 고 소장이야, 제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아마 믿을 만할 겁니다.”
“공사 들어가면 수시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느물거리는 두 사람 옆에서 태훈이 똑 부러진 말투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