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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술사 1권 6화
Chapter 1-5 (2)


“후유…….”
깊은 한숨이 나왔다.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확인했다. 그사이에 햇살은 모습을 감추었고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다시 침대로 고개를 돌려 보니, 소녀가 살짝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얼른 모른 척 이불 사이로 고개를 숨겼다.
“괜찮나?”
그의 물음에 소녀는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의 걱정대로 급변하는 상황들로 인해 판단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일단 그녀가 마음 가는 대로 하도록 프레슐은 기다려 주었다.
“뭔가 먹어야지.”
프레슐은 그녀가 배고파했다는 하녀의 말을 기억해 냈다. 발걸음을 옮겨 테이블에 놓여 있던 쟁반을 집어 들었다. 수프와 숟가락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아마 오랫동안 먹지 못했을 그녀를 위해 준비한 부드러운 유동식인 듯했다.
그러나 그는 곧 쟁반을 내밀던 손길을 멈추었다. 따듯했던 수프가 완전히 식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표면이 조금 굳고 갈라진 자국도 보였다. 결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식었다. 잠시 기다려라.”
달그락.
그러나 아이는 재빨리 쟁반을 제 앞으로 잡아당기며 도리질을 쳤다. 다급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다시 빼앗을 수도 없어서, 그는 그대로 식은 수프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상체만 겨우 일으켜 수프를 먹었다. 아니 거의 마시다시피 했다. 식었다든가 표면이 조금 굳은 정도는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맛도 보지 않고 모두 꿀떡꿀떡 삼켜 냈다.
“맛있나?”
솔직히 말하면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삼켜 냈지만, 소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슐은 입가에 하얗게 묻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허겁지겁 먹고, 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제법 깜찍한 모양새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주머니를 뒤져서 손수건을 꺼내서 소녀 앞에 내밀었다.
“……?”
“입가, 묻었다.”
소녀는 얼른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음식물로 더러워진 손수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차마 다시 돌려주지 못하고 손안에 꼭 쥐었다.
“더 먹겠나?”
아이는 도리질을 쳤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의 끝이 빈 그릇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빤히 보였다. 프레슐은 하녀를 불러 따듯한 수프를 한 번 더 부탁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이 한 번에 많이 먹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맛있게 먹고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그까짓 수프 한 그릇에 말이다.
그의 생각대로 소녀는 두 번째 그릇도 뚝딱 먹어 치웠다. 이번에는 입가에 묻히기 싫은 모양인지 제법 얌전하게 먹었다.
프레슐은 침대 가까이에 의자를 가져가 앉아서 팔짱을 끼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차마 그의 눈은 마주치지 못하고 그가 건네준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움츠러든 아이를 바라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어쩐지 제가 괴롭혀 아이가 저리된 것으로 보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직도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인지, 때때로 눈치를 보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마저 거슬렸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있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당연하지만.
프레슐은 곧 자신이 그녀를 어디에서 구해 왔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말을 그녀에게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가 그녀의 선배가 된다거나, 감정술사와 같은 쓸모없는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너는 마녀가 아니다.”
긴 정적을 지나 프레슐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소녀의 올곧은 시선이 그에게 다가왔다.
“너는 마녀가 아니야.”
그러고 보니 블랑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떤 마법의 주문보다도 더 확실하게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방법은…….
“이름을 기억하는 것, 눈물을 흘리는 것. 이런 것들로 너를 마녀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그저 나는.”
단순한 진실을 단순한 말로 전하는 것.
“너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네가 결코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신전에서 바로 마주쳤던 눈길에서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의 머리는 심장보다 깨달음이 늦었다. 감정술사의 힘이 이 아이의 심장에 있었고, 그것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느껴졌었다.
“너와 나는 감정술사.”
아이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감정술사라는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 아직은 그게 뭔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마치 과거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도 자신의 감정 속에서 그리고 타인의 감정 속에서 헤맬 것이다.
“천천히 알려 줄게.”
프레슐은 손에 걸려 있는 약간의 공기와 감응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사이에서만 반짝이는 초록색의 별빛과도 같았다.
“내가 알려 줄게.”
자신을 향한 맹세라고 생각했다. 모든 선배들이 보여 주었던 후배에 대한 책임감을 이제 그가 짊어져야 할 차례였다.
그가 살짝 손을 털어 내자, 반짝이는 것들은 소녀의 곁을 한번 가볍게 감싸고는 곧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네 이름을 알려 줘.”
소녀의 입이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그 모양만으로는 도저히 이름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커다란 보름달이 바로 빛을 내려 주고 있었다.
프레슐은 높이 뜬 달과 천천히 움직이는 소녀의 입술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의 이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루나(Luna).”
루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프레슐은 그녀의 이름을 작게 몇 번 더 읊조려 보았다. 감정술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Chapter 2-1 (1)


작은 체구 때문에 14살 정도로 보였던 루나의 나이가 사실은 17살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레슐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몰랐다고는 해도, 내년에 만 18세가 되는 여자의 옷을 강제로 끌어 내렸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도 상당했다.) 얼마나 형편이 좋지 않았던 걸까? 그는 끼니때마다 반드시 고기가 포함되어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제때 맞춘 균형 잡힌 식사와 구름과 같이 푹신한 침구 그리고 청결한 환경은 루나의 건강을 순조롭게 회복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고통은 아직도 선명하게 자리했다. 친절하고 상냥하게 구는 프레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 낯선 이였고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보호해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통과 좌절은 완전히 루나를 길들여 놓았다.
이젠 그녀의 괴로움을 말로 옮길 수조차 없었다. 입을 움직여 소리를 내고자 해도 나오는 것은 희미한 공기의 흐름뿐이었다.
루나는 그저 이 신전이 두려웠다. 그리고 프레슐은 그곳에 속한 자로 보였다. 그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들, 무언가가 잘못되면 나중에는 무서운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저는 마녀가 아니에요.’라고 허공에 홀로 외치는 날이 돌아올지도 몰랐다.
뜨거운 쇳덩이를 손에 올린 채 괴로운 비명을 지르는 날이 다가올지도 몰랐다.
그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이 곧 그런 날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망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프레슐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한 것 같지만, 그가 가까이 다가가면 저도 모르게 몸을 잔뜩 움츠렸다.
“괜찮다.”
동그랗게 말린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이제 안전한 곳에 있으니 마음을 놓으라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경계를 받아도 그는 조금도 상처 입지 않는다는 뜻일까? 이야기를 꺼내는 프레슐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괜찮다.”
그런데도 그는 그 말을 반복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루나.”
이름이 불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소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감정술사라고 한 것은 기억하지?”
끄덕끄덕, 루나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수습 감정술사는 황궁 안에 있는 신전에서 지내면서 교육을 받게 된다. 황궁은 알고 있겠지. 그래. 그곳에 작은 신전이 있어. 이 나라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지.”
그는 굳이 안전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아마 그녀가 철없고 맑은 소녀였다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식을 탐하는 아이였다면 모든 학문의 정점을 모두 접할 수 있는 곳이라 말했을 것이다.
“같이 가자.”
루나는 이불을 꼭 쥐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프레슐은 저도 모르게 “왜!”라고 거칠게 대답하고는 곧 사과했다.
“루나.”
소녀의 입이 뻐끔거렸다. 프레슐은 그 입 모양을 바로 이해했다. ‘아빠’라고 말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아비를 죽인 마녀라는 사제들의 말이 떠올랐다.
“……범인을 봤나?”
루나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아니 거의 각인되었다고 해도 좋았다. 악마와도 같은 붉은 눈동자와 천진한 미소. 웃음기 섞인 목소리까지.
“수도에서 치안대를 내려 보내도록 요청해서 반드시 잡겠다.”
“……?”
“살인은 곧 사형이고, 사형수는 감정술사의 손에서 감정을 복원받는 절차를 거친다.”
살인자에게도 평등하게 여신의 은총을 전하기 위한 절차였다.
“그러니 황궁에서 감정술사가 되어서 그자가 잡히기를 기다려라. 감정술사는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강제할 수 있으니, 지금 이 순간 네가 느낀 절망과 공포를 그자에게 모두 전이해라.”
그 무서운 자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았지만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감정을 강제로 옮길 수 있다니.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지독한 어둠에서 그자가 죽어 갈 수 있게 복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감정술사의 직업적 윤리에 어긋나는 말이었으나 프레슐은 개의치 않았다.
루나는 이불에 머리를 묻었다.
아빠의 불퉁한 발이 떠올랐다. 파리해진 피부 위로 붉은 피가 흐르고 맺혀 있었다. 철퍽철퍽 하고 살을 가르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으니, 차마 바라보지 못한 그 위는 더욱 참혹했으리라 짐작했다.
‘왜?’라는 그녀의 짧은 물음에 그는 ‘나도 모르겠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을까? 다른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루나는 알고 싶었다.
‘왜?’
루나는 그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프레슐의 말은 어려웠지만 단 한 가지는 이해했다. 적어도 그 무서운 이를 다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다시 어디론가 모르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두려웠다. 약해진 마음은 금방 또 눈물을 쏟아 내었지만,
루나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슐은 준비를 서둘렀다. 생각해 보면 이 신전은 그녀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났던 장소였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정신 회복에 이로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식으로 그녀를 블랑이나 그 위의 감정술사들에게 보이고, 인정을 받아야 했다. 마음은 식물과 같아서 제 자리가 있어야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황궁에 입고 갈 만한 옷을 사다 줄 수 있나?”
그는 항상 도움받는 시녀에게 돈을 조금 건네며 부탁했다.
“어머, 술사님. 황궁에 입고 갈 만한 옷이라면 전부 맞춤으로 제작되는 옷들뿐이랍니다.”
“기간이 걸리는 것은 곤란한데.”
“요즘에는 상인의 딸들 사이에서도 귀족 아가씨 흉내가 유행이죠. 이미 만들어 놓고 파는 물건이긴 하지만, 질은 나쁘지 않아요. 그런 것이라도 괜찮으시겠어요?”
“헐렁하고 볼품없는 옷만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어.”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짐작 가는 곳이 있어요.”
“내 이름을 대면, 신전에서 작은 마차 하나 정도는 내줄 거다. 빠르게 다녀오도록. 어…… 음…… 그러니까…….”
“제인, 제인이라고 합니다. 술사님.”
“그래, 제인. 부탁하지.”
그가 건넨 돈을 세어 보던 제인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프레슐에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의 구두는요?”
프레슐은 아이가 신고 있던 낡은 가죽 주머니 같은 신발을 떠올렸다.
“구두라, 그것도 새로 사 와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머리 장식은요?”
“머리 장식……. 그래 필요하겠지.”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속옷은 어찌할까요?”
“속…….”
찢어진 옷 사이로 얼핏 보였던 낡은……. 잠깐, 그만. 프레슐은 최선을 다해 사고를 정지시켰다.
“……네가 아는 한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사라.”
“그것은 제게 판단을 맡기시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은 건가요?”
“그렇다.”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것이, 예산 걱정 없이 마음껏 쇼핑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자신의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님에도 제인은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