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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술사 1권 5화
Chapter 1-4 (2)


프레슐은 아이를 데리고 나와 무작정 복도를 걸었다. 다급한 발걸음, 찌푸려진 이마. 자신은 어째서 화를 내는 걸까? 아무리 자문해도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작은 아이는 여전히 얌전하게 그의 팔에 덜렁 들려 있었다.
이제 어쩐다.
언젠가 후배가 생기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만남은 계산에 없었다. 선배와 후배가 서로를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극적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마녀사냥의 현장에서 데려오게 될 정도로 인상적인 만남은 없었다.
마침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하녀가 있었다.
“적당한 손님방으로 안내해 주게.”
황궁에서 지원 온 그 하녀는 다행히 눈치가 빨랐다.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고는 곧 조용하고, 깔끔한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프레슐이 따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바로 이어진 욕실에 물을 받아 목욕을 준비했다.
프레슐은 침구가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푹신한 침대의 한가운데에 루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이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동그란 눈동자를 그저 깜빡일 뿐이었고, 프레슐은 잠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프레슐이다.”
“……?”
아이는 그의 이름을 듣고도 그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는 감정술사다.”
프레슐은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 설명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감정술사가 무엇인지 이 아이는 전혀 알지 못할 텐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일단 씻어라.”
그가 루나의 로브를 걷어 내니, 피딱지나 더러운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넝마 같은 옷자락이 그대로 드러났다. 거의 찢겨 본래의 형태를 완전히 잊은 옷은 신체를 가린다는 제 기능을 거의 하지 못했다. 앙상한 다리가 허벅지까지 거의 그대로 드러났고, 말라비틀어진 몸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너무나도 작은 아이. 14살이나 되었을까? 프레슐은 아이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벗어야 씻지 않겠나.”
그는 루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헐어 빠진 옷은 그의 손끝을 따라 죽 찢겨 나갔고, 깜짝 놀란 루나는 얼른 제 팔로 몸을 감싸 낡은 넝마로 몸을 가렸다.
“사내 녀석이 뭘 그런 거로…….”
프레슐은 루나를 사내아이라 생각했다. 으레 다른 술사들이 모두 남자인 것처럼. 어쨌든 아이가 질겁을 하고 물러서니, 전부 하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목욕을 하러 들어간 아이를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고 방 안을 맴돌던 프레슐은 일단 자신을 진정하는 것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바로 오늘 오전에 선언하지 않았나. ‘평범하게 가르치고, 이끌 뿐입니다.’라고. 그래 그대로 할 뿐이다. 그걸로 된 거다.
목욕을 마친 루나는 미리 준비된 하얀색 면 옷을 입었다. 햇살에 말려 사락거리는 감촉이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확실히 씻기고 나니 아까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이었다. 프레슐과 똑같은 엷은 금발은 허리 즈음에서 살랑였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동그란 눈동자는 무척 맑았다.
“네 이름은?”
“……!”
루나는 곧 놀란 눈을 하고 프레슐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제 이름을 묻던 무서운 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질문을 던진 뒤에는 그녀를 마녀라고 멋대로 단정 지은 후 가둬 두었다.
무서웠다.
다시 그 일들이 처음부터 벌어진다는 생각에 손끝부터 덜덜 떨려 왔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프레슐은 영문도 모르고 그저 당황했다.
“여기 앉아라.”
아이는 깊은 공포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는 루나의 손을 끌어 푹신한 침대에 앉혀 주었다.
“앞으로 내가 너를 가르칠 거야.”
루나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대답 없이 고개만 푹 숙일 뿐. 그때 손끝에 남은 물기가 보였다. 그리고 곧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신이 없었다고는 해도 다른 사람에게 목욕을 맡기다니! 손끝에 물이 맺히는 마녀의 증표를 분명히 들켰을 것이다. 식사를 준비한다고 나간 하녀는 루나를 치안대에 신고할지도 몰랐다. 남아 있는 물기와 거미줄을 가리려 루나는 얼른 손을 옷 주머니로 쏙 넣었다.
[저, 저는 정말로 마녀가 아니에요.]
루나의 입이 뻐끔거렸다. 입술의 움직임에는 소리가 더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여 손끝에 물이 맺힌 것도 잊고, 자신의 입을 만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루나의 숨소리가 불규칙해졌다. 들썩이는 숨에 물기가 어렸고, 곧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아직 안정되지 못했다. 계속해서 변하는 현실 중 단 하나도 제대로 받아들여진 것이 없었다.
프레슐은 히끅이는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커다란 베게 하나를 안겨 주었다. 푹신한 기분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법이니,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곧 아이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아이는 새우처럼 등을 굽혀 안고 있는 베개에 얼굴을 꼬옥 묻었다. 울음소리는 계속되었다.
“잠깐 자라.”
들썩임이 멈추지 않았다. 프레슐은 어색한 손길로 아이의 어깨를 짚어 지긋하게 눌러 주었다. 얼마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아이의 몸은 곧 부러질 것만 같이 가늘었다.
“……괜찮다.”
아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눈치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젠 괜찮다.”
커다란 눈이 더욱 동그랗게 되고 또 천천히 감기는 것을 프레슐은 끝까지 바라봐 주었다. 어색하게 올려놓은 손이, 그리고 괜찮다는 말이 아이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곧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프레슐은 한숨을 쉬며 가까운 의자에 몸을 깊이 눌러 앉았다.
곧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아까 그 하녀가 다시 돌아왔다.
“어머, 배고파하시는 것 같더니 참지 못하고 잠이 드셨네요.”
“두고 가라. 일어나면 먹이겠다.”
“예. 술사님.”
“내가 감정술사라고 잘도 알아차렸군.”
“예전에 황궁 안에 있는 신전에서도 한 번 모시었습니다. 아마 기억하지 못하실 테죠.”
하녀의 얼굴 따위는 전부 거기에서 거기였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구별하기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레슐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아가씨의 몸에 상처가 무척 많아요.”
“그래 치료사님을 불러서 상처는 치료해야……. 뭐?”
방금 아가씨라는 존칭을 들은 것 같은데.
“아가씨의 몸에 흉이 남는 것은 좋지 않으니까요.”
“아가씨?”
프레슐이 되묻자 눈치 좋은 그녀는 곧 그의 오해를 깨달았다.
“이 아이 감정술사인데…… 아가씨라고?”
“네, 예쁜 아가씨죠.”
시녀는 황실에서 보아 온 감정술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보통 10년 주기로 1명씩 나타나는 편인데, 지금 그녀 앞에 있는 20대의 프레슐은 물론 그의 선배인 블랑, 그리고 그 위에 3명의 감정술사까지 모두 남성뿐이었다. 프레슐이 그녀를 남자아이라고 생각할 법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루나가 몸을 뒤척였다. 커다란 베개를 곰 인형인 양 안고 있는 모습은 의심할 여지없이 여자아이였다.
프레슐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이가 자신을 신용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짜고짜 끌고 와서 침대에서 옷가지를 찢어 버리고, 앞으로 가르치겠다고 말하는 남자를 누가 믿는단 말인가.
한숨이 길게 빠져나왔다.



Chapter 1-5 (1)


프레슐은 아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생각을 정리했다.
여성 감정술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흔하지 않았고, 현존하는 감정술사는 모두 남자였기 때문에, 이 아이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 당황했을 뿐이다.
똑똑.
들려온 노크 소리에 프레슐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이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데다, 혹시 막무가내로 이 아이를 끌고 간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누군가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프레슐.”
다행히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지금 꼭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프레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
“치료사님.”
“블랑이 연락을 주었지. 바깥 신전에 치료가 필요한 감정술사가 있다고.”
그의 주름진 얼굴과 친절한 미소를 보니, 프레슐의 긴장된 마음도 조금 풀어졌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감정술사 들의 치료를 담당해 왔다. 어린 시절 프레슐의 작은 상처나 팔이 부러지는 등의 큰 사고도 모두 그의 손으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금발의 소녀를 발견한 치료사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번졌다.
“블랑으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보니 정말 놀랍군. 여성 감정술사라니. 거의 120년 만의 일이야. 게다가 자네와 놀라울 만치 닮은 모습이라니!”
역시 블랑 선배는 여자아이라고 알고 있었구나. 라며 프레슐은 쓰게 웃었다. 그의 여성 편력이 유용한 순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녀를 불러오겠습니다.”
“부탁하지.”
여자아이의 진료에는 여성 보호자를 동반해야 했다. 루나의 경우는 대신할 이가 없으니 목욕 시중을 들었던 하녀가 그 자리에 서 주어야 했다. 특히 그녀는 아이의 상처가 어디에 있는지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을 테니, 효율적인 진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가씨께서는 팔과 다리에 여기저기 긁힌 자국과 멍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습니다만…….”
팔과 다리라면 어른이 되었을 때 때때로 어떤 드레스를 입느냐에 따라서 바깥으로 노출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흉터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최대한 섬세하게 치료를 해 나가기로 하고, 치료사는 가방에서 몇 가지 연고와 붕대를 꺼내 들었다. 하녀는 딱 필요한 정도만큼만 소녀의 옷자락을 올려 주거나 내려 주며 그녀의 명예를 소중하게 지켜 주었다.
“흉터가 남겠습니까?”
한 걸음 뒤에서 치료를 지켜보던 프레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도 질문 내용에 꽤 놀란 모양인지 어색한 표정을 한껏 지으며.
“벌써 훌륭한 선배 역할을 하고 있구먼? 걱정하지 마. 얼마 만에 나타난 귀한 공주님인데 어찌, 그런 자국이나 남게 할까.”
“선배 역할이라니, 저는 그런 게 결코…… 아니 그 이전에 공주님이라니, 저기 이 아이는…….”
당황한 걸까, 언제나 반듯한 프레슐의 말이 어순을 모르는 아이처럼 어그러졌다.
치료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몇 가지 약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주의 사항을 단단히 일러 주었다.
“나 참, 살다 살다 고문받는 감정술사도 다 보고. 별일이야.”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오해가 있어도 그렇지, 아니 그래 이 조그만 아이를 …….”
치료사 혀를 차며, 챙겨 온 가방을 정리했다.
“어쨌든 축하해. 드디어 자네도 후배가 생겼군. 잠들어 있는 공주님께도 이 늙은 치료사 할아범이 환영해 하더라고 전해 주게.”
“감사합니다.”
공주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그저 짧은 한숨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그 간지러운 표현이 마음에 쏙 든 듯했다.
어쨌든 후배, 후배라.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 프레슐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여자 감정술사라니, 분명히 이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기려는 거지. 에모티오 여신의 축복이 있음이야.”
“저 아이를 고문하려 한 것이 그 사제들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들이 여신님의 대리자는 아니지. 그렇지 않나?”
확실히 그들은 이제 인간의 왕을 모시는 것처럼 굴었다. 그들의 서랍에는 여신의 말씀이 아닌 황제가 쥐여 준 금화가 굴러다닐 것이다.
“며칠 정도 휴식하고 나면 황궁 신전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야. 무리하지는 말게.”
“네. 알겠습니다.”
프레슐은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치료사의 눈매를 바라보다가, 저 작은 손 위에 기어이 그 뜨거운 쇳덩어리를 올리고야 말겠다는 사제의 사악한 눈동자를 함께 떠올렸다.
지극히도 상반된 시선이 짧은 하루 동안 그녀에게 닿았다. 그것이 큰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그녀를 향한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감정술사는 귀했다. 세속이 정한 신분으로 그들을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이 아이는 유일한 여성. 치료사가 괜히 그녀를 가리켜 공주님이라 부른 것이 아니었다.
치료사가 돌아간 이후에도 아이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프레슐은 그녀의 머리맡에 끌어 놓은 작은 의자에 앉았다.
작은 아이다. 자그마한 얼굴뿐 아니라, 체구도 무척이나 작았다. 치료 중에 언뜻 보였던 팔과 다리도 그저 가늘었다. 몸매를 그리 가꾼 것이 아니라, 아마 그리될 수밖에 없는 경제 사정에서 자라 왔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는 무척 예뻤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이 아이에게서 반짝이는 빛이라도 나는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은 작은 손에는 상처가 많았던 탓에, 하얀 붕대가 손가락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프레슐은 그 영리한 작은 손에 감사했다. 마침 그때 공기와 감응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아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안심했다.
프레슐은 그녀가 제 앞에서 편안하게 숨을 쉬는 것에 안심했다. 또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