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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화)


서장(1)


“할머니, 몸은 어떠세요?”
“선생님 덕분에 많이 나아진 것 같구려. 전에 그 동의보감에선이가 뭣인가 말하던 처방법대로 해보니 기운이 쌩쌩하다오.”
“하하, 그래도 쉽게 낫지 않아요. 암은 정신과 시간의 싸움이에요. 전에 말한 가지나 산두근 말고도 율무나 두릅나무 뿌리를 적당량 달여 먹어도 괜찮으니, 한 번 시도해 보세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독구 아저씨, 최근 변비가 심하다고 하셨죠? 신경성 변비일 수도 있어요. 제발 그 경마장은 끊으세요. 아니면 약 처방해 드릴까요?”
“어이쿠! 선생님, 약은 지금 먹고 있는 것도 네 가지나 됩니다! 더 늘렸다간 노이로제 걸리겠어요!”
“엄살은. 그럼 처방해 드리지 않을 테니까 당근과 사과를 갈아서 매일 아침 공복에 드세요. 많이 나아질 겁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꼭 드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강제로 약 처방해 드릴 거예요. 그리고 다음은…….”
“선생님!”
“우왁! 자영아, 가슴에 무리가 가니까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헤헤, 오늘은 하나도 안 아파요! 다 나은 것 같아요!”
개구쟁이처럼 내 가슴에 뛰어 들어온, 이 귀여운 소녀는 벌써 몇 년째 알고 지낸 덕에 이젠 내 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애정 깊은 환자였다.
“보세요! 이렇게 뛰어도 괜찮… 콜록! 콜록!”
“거 봐, 무리라니까. 괜찮아? 간호사 언니 불러줄까?”
“아니…에요. 헤헷, 이제 괜찮아요.”
자영이는 쌔액쌔액거리며 파리한 안색으로 잘도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어루만지듯 자영이를 꼭 안은 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안타깝고도 대견한 어린 소녀는 심장 부근에 종격종양이 있다.
종격종양이란 폐 안쪽 심장, 대동맥, 대정맥, 기관, 기관지, 미주신경(迷走神經), 식도와 흉선 등이 자리 잡고 있는 종격동(縱隔洞)에 생기는 종양을 말한다. 이 종양이 커지면 근처 장기를 압박하여 호흡곤란이 일어나거나 위치가 심장 또는 심장과 가깝다면 심장에 무리가 가 심장마비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 보통 양성이라면 조기 적출이 바람직하나, 안타깝게도 자영이가 앓고 있는 종양은 악성이었다.
종양의 크기, 위치, 침윤 정도는 직접 개흉하기 전까진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악성이라면 수술한다 하더라도 재발하지 말란 법도 없으며, 최악인 점은 종양의 위치가 심장과 매우 가깝다는 것이다. 어쩌면 심장에 침윤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지금껏 외과 치료가 힘들어 화학요법만을 이용해 약물치료로 버텨왔었다. 그걸로 운 좋게 종양이 사라진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신은 이 착한 소녀를 일찍 데려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보다 선생님, 저기 보세요. 고양이가 있어요.”
“고양이?”
자영이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창밖을 올려다보니 정말 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정말 태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고양이는 편히 자게 놔두고 그만 병실로 돌아가. 조금 있다가 간호사 언니가 찾아갈 거야.”
“주사는 싫은데.”
한껏 볼을 부풀린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자영이의 머리를 뒤헝클곤 번쩍 안아 들었다. 역시나 이걸 기대했던 건지 해맑게 웃는다.
“어허, 현호 선생 취향은 애들이었나?”
자영이를 안아 든 채 병실을 빠져나오는 내게 다가온 한 남성. 넉살 좋게 손을 흔드는 이분은 내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선배!”
“선배라니! 원장님. 다시 말해봐. 누구?”
“아, 네. 희준 원장님.”
떨떠름한 얼굴로 정정해 주니 좋다고 웃는다. 이런 작은 병원 원장이 뭐가 그리 좋다고.
원장이라 불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분은 한때 대학 병원에서 나와 함께 전문의로 활동했던 흉부 심장외과의 한희준 선배다. 지금은 비록 괜히 바보 같은 나를 감싸주다 이런 작은 병원에 원장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존경하는 선배다.
그나저나 수술 예정이 잡혀 있다고 들었는데, 벌써 끝마친 모양이네.
“자영아, 선생님은 원장님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미안하지만 혼자 병실에 가줄래?”
“…네.”
아직 어리지만 눈치는 빨라서 등을 토닥이며 보내자 보채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정말 착하고 의젓한 아이다.
“흐음, 자네 마치 자식을 떠나보내는 아버지 같은 얼굴일세?”
“저 아인 정말 제 딸과도 같으니까요.”
“흠흠, 보기 좋구먼. 이런 사람이 한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정한 천재 외과의였다니. 그걸 누가 믿겠나.”
“한국대학 병원 얘긴 몸서리쳐지니 입 밖에 꺼내지도 마세요.”
난 진저리치며 손을 내저었다.
불과 1년 전, 나와 희준 선배는 한국대학 병원에서 전문의로 활동했었다.
대학 병원이란 모든 의사를 배출해 내는 교육직 병원이다. 때문에 그만큼 건물도 크고 실력자 또한 많은 곳인데, 그중에서도 서울에 있는 한국대학 병원이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한국대학 병원에서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다면 어딜 가도 실력자로 알아주기 때문에 그만큼 명성이 따라온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하는가. 그 병원 자체가 썩었는데.
치료할 수 없는 환자라고 퇴원 조치하는 곳. 의료 실수로 사람이 죽어도 그 진실조차 파묻어 버린 채 최고 권위자라는 교수는 골프나 치러 다니며, 말도 안 되는 의료 방침 때문에 치료도 못한 채 시간만 버리는 환자도 수두룩한 곳. 그곳이 바로 한국대학 병원이다.
난 그런 병폐를 두고 볼 수 없어 싸웠다. 그렇게 교수 눈 밖에 나버려 내 논문은 고려할 가치도 없이 찢겼으며, 몇 달 동안 집도를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후우, 대학 병원에서 있던 일을 생각하니 혈압이 오른다. 아무래도 진정해야겠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아, 그렇지 참. 내 정신 좀 봐. 자네 요새 환자분들한테 이상한 요양 방법을 지도해 주고 있다 들었네만.”
“의료법 제24조, 의료인은 환자나 환자의 보호자에게 요양 방법이나 그밖에 건강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지도하여야 한다. 기본 아닌가요?”
“그야 물론 기본이지. 한데 병원에서 한의학이라니. 자넨 양의학 외과의가 아닌가.”
“아시잖아요. 이곳을 찾는 분들은 대부분 근근이 먹고사는 분들이 많다는 거. 생각보다 통원 치료에 많은 도움이 돼요.”
“그래서 1년 전부터 한의학 책을 파고들었다는 건가? 어이쿠, 환자를 위해 그렇게 까지나! 허준 나셨네!”
“놀리지 마세요.”
“우리 솔직해지세나. 사실 전부 자영 환자 때문이 아닌가.”
“딱히 부정할 순 없겠네요.”
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선배 말대로 한의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자영이 때문이 컸다.
자영이가 병원 생활을 하게 된 지 벌써 2년. 이 아이의 가정 형편은 애초에 그리 좋지 못했던지라 이제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이제 수술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혹시나 통원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1년 전 이 병원으로 오며 한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상태가 많이 나빠져 입원 치료를 하는 덕에 한의학 공부는 무용지물이 되었으나, 다른 방향으로 잘 써먹고 있으니 딱히 후회되진 않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잘못된 방법을 알려주진 않는다고 자신합니다. 하아, 선배가 무엇을 말씀하려는지 알아요. 이것도 불법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거죠?”
“그래. 제27조, 무면허 의료 행위 등 금지. 의료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의료 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의료인도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 행위를 할 수 없다. 잘 알면서 그러나.”
“그래서 저를 내쫓으실 건가요?”
“내가 미쳤나?”
“그럼 상관없겠네요.”
내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선배는 이마를 짚었다.
“대학 병원에서도 진즉 알아봤지만, 정말 환자를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구먼. 그렇게도 그 아이가 소중한가? 신의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자네가 한국대학 병원을 등 돌릴 정도로?”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선배까지 말려들어서.”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봐야 하나도 안 고마우니 관두게.”
선배는 투덜거리듯 손을 내저었다.
선배와 내가 작은 계열 병원으로 좌천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자영이의 일 때문이었다.
1년 전, 대학 병원 측에선 자영이의 병을 불치병이라 판단해 강제 퇴원 조치하라는 교수의 명령이 떨어졌었다.
자영이네는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다. 그 탓에 병원비 수납이 한참이나 지연되어 병원의 손해가 막심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고작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어찌 물건 버리듯 내쫓을 수 있단 말인가!
자영이의 주치의로서 끝까지 항의했다. 교수의 명령에도 불복종하고 강제로 다시 병실에 눕혔다. 한희준 선배는 그런 나를 옹호하고 나섰지만, 결국 병원 방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둘이 함께 적당한 계열 병원으로 좌천되었던 것이다.
“선배, 저에게 있어서 환자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제 진짜 가족은 이제 없으니까요.”
“자네…….”
“선배도 아시잖아요. 전 이제 두 번 다신 제 눈앞에서 누가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선배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사라면 어쩔 수 없이 임종을 지켜봐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네.”
“알아요. 신이 아닌 이상 모든 병을 고칠 순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후회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확고한 의지로 말하자, 결국 선배는 포기한 건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신의라 불린 자네라 할지라도 이번엔 힘들 거야. 개흉하기 전에 단단히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네. 이건 의사 선배로서의 조언이야.”
“명심할게요.”
“이거참, 어디서 이런 애물단지를 데려와서 내가 다 늙는 기분이구먼. 그보다 대체 미국은 언제 갈 건가?”
“안 가요.”
“그래, 조만간 그곳에서도… 뭐?”
“안 간다고요.”
입을 떡 벌린 선배.
이거, 괜히 즉답했나?
“아니, 왜! 그렇게나 좋은 조건을 어째서! 자네는 이런 곳에서 썩고 있을 인재가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가로채자 선배는 기도가 막힌 사람처럼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저는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린가! 자네라면 더 큰 수술도 얼마든지 담당할 수 있어! 지위, 돈! 의사로서 명예도 얻을 수 있다고! 그런데 이런 허름한 병원에 만족하겠다는 건가!”
“네.”
생각할 것도 없이 긍정하자 선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저에게 있어서 환자는 가족이나 다름없다고요. 선배, 저는요…….”
“얘! 더러운 동물을 병원 안으로 데려오면 안 돼!”
“하지만, 하지만!”
막 선배에게 뭐라 말하려던 그때, 병원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져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까 내가 떠나보낸 자영이가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