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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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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아, 볼일 보러 왔을 텐데 어서 들어가 봐요. 난 나가는 중이었어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윗입술을 달싹거리는 정호를 향해 인희가 짧게 손을 들어 보였다. 인희는 상대의 맑은 두 눈에 깃든 것이 아쉬움 비슷한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곧 제 착각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식상하고 따분한 인사. 그 다음이 언제일지 기약 없는 헤어짐.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인사치레가 어쩐지 지금은 껄끄러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다려도 건물 안으로 들어설 기미가 없는 정호를 두고 결국 인희가 먼저 등을 돌렸다. 쥐색의 트렌치코트가 바람에 물결처럼 길게 나부꼈다. 막 점심시간을 맞은 회사원들이 제각각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인희의 가느다란 실루엣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에 가려졌다. 또각또각. 규칙적으로 바닥을 찍어 누르던 하이힐 소리가 멎은 건 그때였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완전히 섞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인희는 느리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한 무더기가 되어 분주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희의 눈이 잠깐 누군가를 찾는 듯 맴돌았다. 은회색 빌딩은 간신히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마주 서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통화를 하는 여자. 같은 모양의 유니폼을 입고 얼음이 든 커피를 들고 종종거리며 걷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 사이에, 박정호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인희는 은근한 섭섭함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에 계약서가 든 봉투 모서리가 무참히 구겨졌다. 인상을 구기며 돌아서는 몸짓에는 약간의 짜증까지 배어 있었다.
“다행이다.”
다시 앞으로 내딛지 못한 하이힐이 잠시 휘청거렸다.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가다듬는 그 아이, 정호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그녀를 보며 눈을 휘었다.
“여기 계신 줄 모르고, 찾느라 저기 길 건너편까지 뛰어갔다 왔더니…….”
“…….”
“숨이 좀 차서.”
허리를 쭉 편 그가 뻐근한 듯 옆구리를 누르며 멋쩍은 듯 웃었다. 인희는 땀에 젖은 정호의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흔들어 숙이며 쏟아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조개 팬 얼굴을 가렸다. 핸드백을 열어 손수건을 건네주는 인희의 얼굴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철저히 예사로웠다.
“닦아요.”
“네?”
“땀.”
인희가 손가락을 들어 얼굴을 가리키자 정호는 그제야 젖은 이마를 깨달은 듯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꽤 썰렁한 바람이 부는 봄날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땀을 흘릴 정도라면, 정호가 말하는 길 건너편이 적어도 가까운 곳은 아니겠구나 짐작했다. 그리하라 시킨 것도 아닌데 미안해졌다. 손수건을 보고도 받아 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멍청히 서 있는 정호에게 인희가 농을 섞었다.
“땀이요. 닦을 줄 몰라요? 내가 닦아 줄까요?”
끔뻑끔뻑. 머루 같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렸다 드러나길 몇 차례 반복하는 동안 남자는 말이 없었다.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거나, 혹은 덥석 손수건을 받아 들거나. 둘 중 하나. 침묵이 어색해질 무렵 정호는 그녀가 만들어 놓은 선택지에 없는 행동을 했다.
“네.”
“네?”
“닦아 주세요.”
황당해서 되물을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는 인희와 그 앞에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춘 정호의 시선이 하나로 얽혔다. 부드러운 손수건의 감촉에 진저리가 쳐졌다. 불편한 자세로 올올히 버틴 채 기다리는 모습에 인희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놓칠 것 같은 정사각의 직물을 세게 움켜쥐고 결 고운 피부 위를 톡톡 두드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등을 감질나게 건드렸다.
가까이한 남자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칼칼한 스킨 향도, 자극적인 향수 냄새도 아닌 편안한 냄새. 흔한 듯하면서도 흔하지 않아, 딱히 꼬집어 묘사할 수 없는 희미한 체향. 그것을 느끼자마자 인희는 대충 땀을 닦아 내던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세탁해서 드릴게요.”
쉽게 떨쳐지지 않는 잔향을 되새기는 인희의 손에서 정호가 손수건을 가져갔다. 조심스럽게 갈무리해 안주머니에 넣는 그의 움직임이 흥미롭다. 확대해석이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 귀하게 다뤄지는 제 물건을 보니 인희는 저가 마치 그리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이 제게 이런 마음이 들게 하다니.
인희는 미지의 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상대를 관찰하고, 정호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외투의 단추를 꼼꼼히 채운 후 가슴 언저리를 쓱쓱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조금 전에 집어넣은 손수건이 어디 도망갔을 리도 없는데, 마치 그것이 제자리에 없을까 염려하는 사람처럼.
“작가님, 점심 전이시죠?”
듣기 좋은 발음과 울림으로 정호가 물었다. 인희는 그의 손끝을 주시하던 것을 멈추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그럼 저랑 같이 드세요. 계약 축하하는 의미로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이 아이와 내가 그런 이유로 같이 식사를 할 만큼, 친근한 사이던가?
뾰족하게 가시 돋친 마음은 그렇게 외쳤다. 기실, 서인희는 그렇게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던 시절엔 한두 명쯤 친구라는 존재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이젠 연락조차 되지 않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선 딱히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아니, 아버지란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녀에게 가족이라는 안락한 의지처가 되어 주기엔 부적합한 치였다. 한 핏줄. 그 단어가 너무나 끔찍스러웠던 시절엔 피를 몽땅 뽑아 다른 새 피로 전부 갈아 버리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그런 인희에게도 한때 가족이 있었다. 아주 절실히, 가족이고픈 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온 망령 같은 기억에 시야가 뿌옇게 가라앉았다. 인산인해의 거리가 순식간에 적요해졌다. 인희는 이러한 기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떠올리기 싫은 광경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생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다시 찾아오려는 것이다.
“작가님?”
백주대낮에 혼자만의 악몽에 끌려 들어가려는 그녀를 구해 준 건 정호였다. 인희는 좀처럼 초점이 돌아오지 않는 아득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말간 얼굴이 걱정에 사로잡혀 어두운 기색이었다. 두 눈을 몇 번 슴벅거린 그녀는 곧 아무 문제없다는 듯 여상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내가 살게요. 계약금 받아서, 부자 됐거든요.”
잠시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제 갈 길을 재우치던 사람들이 꼭 한번쯤은 그들을 돌아보았다. 인기 있는 맛집인지 어느 식당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던 여자들이 정호를 가리키며 저들끼리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고 인희는 무심결에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내내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들켜 버린 시선을 수습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희와 함께 있으면 그녀를 보는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 덕분에 부끄러움은 온전히 인희의 몫이 되었다. 그녀가 황망히 눈앞의 식당을 가리켰다. 별 이견 없이 선뜻 그곳으로 앞장서는 정호를 따라 인희도 좁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매콤한 냄새에 절로 침이 고였다. 인희는 그제야 기껏 고른 곳이 떡볶이 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좋아해요?”
“전 가리는 거 없어요. 다 잘 먹어요. 작가님은요?”
“음, 그럼 골고루 시켜 볼까요?”
앉아서 물을 따르고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는 정호의 손은 그 모양새만큼이나 정갈하여 보기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박하게 담아낸 떡볶이며 튀김, 순대가 차례차례 식탁을 채웠다. 혹시 이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계약금을 받았다고 크게 한 턱 낼 것처럼 해 놓고 겨우 분식이라니 섭섭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정호는 바삐 젓가락을 움직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질 만큼 맛있게 먹는 정호를 보며 인희는 전에 없는 허기를 느꼈다. 떡볶이를 하나 집어 베어 물자 금세 코끝이 알싸해졌다.
“엄청 맵네요. 정호 씬 매운 거 잘 먹…….”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빈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던 인희는 마주 앉은 정호의 얼굴을 보고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로 혓바닥을 내밀어 식히던 정호가 인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입꼬리에 힘을 주어 끌어내리던 그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소박한 점심식사가 수더분한 대화로 채워진다. 신기하게도 인희는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 정호가 참 편안하였다. 언뜻 서늘하게 보이는 귀공자 같은 이목구비임에도 이토록 포근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 표정과 태도의 몫이 컸다.
단어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듣는 자세나 미지근한 농담에도 함박웃음을 짓는 것. 활짝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와 그 입술의 선이 세필로 정교하게 그린 듯 유려했다. 높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하는 말에 흠뻑 취한 인희는 시간이 가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몇 테이블 없는 자그마한 식당에 한 무더기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할 수 없이 일어나야 하는 순간에는 느닷없는 아쉬움까지 느껴져 내심 당황하였다.
“어, 내가 사려고 했는데.”
핸드백을 챙긴 인희가 부랴부랴 계산대로 갔을 때에는 이미 정호가 값을 치른 후였다.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거북했다. 그가 그녀보다 연하라는 건 차치한다 하더라도,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봉 감독의 말과 아직 수입이 넉넉지 않은 신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인희의 미안한 얼굴을 본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다음번엔 더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작가님.”
인희는 피식 웃었다. 아까 그녀의 인사처럼, 그의 ‘다음’이라는 말도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한 것일까. 조금 씁쓸한 기분으로,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며 인희가 대꾸했다.
“다음번엔 내가 사야죠. 다른 신인배우들은 막 사 달라고 조르던데. 정호 씨는 어째 그 반대네요.”
“잘 보이고 싶으니까요.”
“나한테요?”
“네.”
점심시간이 끝난 빌딩숲은 다시금 한산함을 되찾았다. 바람도 멎은 거리에서 정호의 뜻밖의 대답은 인희에게 수많은 의문을 남겼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겨보았다.
“로비하려는 거면 상대를 잘못 골랐는데. 나 아직 햇병아리 작가라고요.”
“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웃자고 던진 말에 어쩐지 정호는 어쩔 줄 모르고 말끝을 흐렸다. 너무 정곡을 찔렀나? 하지만 쩔쩔매는 모습이 어쩐지 사랑스럽다. 자꾸 놀려 주고 싶게끔 해서 너스레를 떨게 되는 것이다. 저처럼 재미없는 인사에게 이런 식의 충동을 불어넣다니. 인희는 그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앞을 그가 서투르게 막아섰다.
“그게 아니에요, 작가님.”
가라뜬 눈이 서서히 그녀를 향했다. 고인 물처럼 늘 담담하던 그것이 크게 일렁이고 있어 인희는 퍽 긴장하고 말았다. 손금 사이사이 미지근한 땀이 맺혔다.
“배우로서 잘 보이고 싶다는 말이 아니었어요.”
그러면요?
의문은 곧 파문이 된다.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리하지 못한 것은, 두려워서였다. 기대한 대답이 아닐 것이 두렵고, 또한 기대한 대답일까 봐 두려웠다. 무엇도 할 수 없어 인희는 그저 조용히 눈맞춤을 피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선명히 느껴지는 남자의 열띤 시선에 문득 현기증이 일었다. 봄볕이 너무 따가워서라고, 그렇게라도 핑계를 찾을 수 있어 다행한 날이었다.

* * *

인희는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사 내용을 드래그하는 손가락엔 미처 숨기지 못한 짜증이 배어 있다. 노트북을 소리 나게 덮어 버린 그녀는 회전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피식거리는 웃음이 연방 새어 나왔다.
[한진호, 드라마 <환상통> 출연 고사]
[연희정, 드라마 <환상통> 캐스팅 사실 무근]
[드라마 <환상통> 삐걱대는 출발]
스치듯 보았던 짤막한 헤드라인이 멋대로 머릿속을 부유한다.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든든한 제작사를 두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 실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작가였다. 세 편의 단막극이 성공했다고 해서, 스무 편짜리 미니시리즈 역시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그런 데에서 기인한 걱정으로 출연 제의를 거절하는 거라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짐작하는 바, 주연급 배우들이 줄줄이 퇴짜를 놓는 것은 분명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 실컷 떠들어라.”
인희는 자신의 과거사가 방송가의 뒷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입에 심심파적으로 오르내린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겠지. 더러운 구설을 두른 여자와 함께 일하기 싫다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안타까울밖에. 인희는 자신 있었다. 그녀의 첫 미니시리즈는 분명 성공할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를 가려낼 눈을 갖지 못한 치들과 동고동락할 마음, 그녀에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