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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굿바이
1화
Before Goodbye
1(1)


2011年 4月

바람이 좋은 날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에 남는 소리가 참 좋은 날. 인희는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하나의 감각을 차단하면 나머지 감각이 그만큼 더욱 예민해진다. 그녀는 느리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박동이 흐릿해지자 파도와 닮은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겨우내 꽁꽁 얼어 있던 가지에서 막 돋은 여린 잎이 저들끼리 몸을 부대끼며 만들어 내는 소리. 인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어? 서 작가?”
그녀가 초록의 연주에 흠뻑 빠져들 무렵, 걸걸한 음성이 평화로운 시간을 무참히 부수며 끼어들었다. 굳이 눈을 떠 확인하지 않아도 불청객의 정체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끝에 ‘님’자를 붙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녀를 호칭하는 사람 중에 이다지도 심한 탁성을 가진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설마 자고 있었던 거야?”
인희는 당연한 듯 묻지도 않고 맞은편 자리에 털썩 엉덩이부터 붙이고 보는 봉석주 감독을 무심히 눈으로 좇았다.
“네. 좀 피곤해서요.”
삐죽빼죽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을 뜯어보던 인희가 뭔가의 존재를 느끼고 왼편으로 고개를 틀었다. 내내 그녀가 봐 주기를 기다렸다는 양,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새카만 눈이 퍽 매력적인 사내가 꾸벅 허리를 굽힌다.
“안녕하세요.”
몸을 수그림에 따라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졌다. 초봄의 햇살이 닿자 그것은 일견 파랗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몸을 펴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그가 씩 웃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며, 여드름 따위는 모르고 자란 것 같은 결 좋은 피부가 선비처럼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정호입니다.”
그가 손바닥을 제 바지에 문지르며 머뭇거렸다. 악수를 청하고 싶은데 망설이는 듯한 눈치였다. 인희는 설명을 요구하듯 봉 감독을 쳐다보았다.
“아, 신인 배우. 이번 단막극 같이 찍고 있어.”
상당히 불친절한 소개를 남긴 봉 감독이 이내 눈을 빛내며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 불혹의 사내는 곧 두 볼이 터질세라 빵조각을 욱여넣었다. 인희는 제 점심이 고작 몇 초 만에 공중분해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숨을 흘리며 반쯤 몸을 일으켜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인희예요. 반가워요. 벌 서는 것도 아니고, 여기 앉아요. 뭐 좀 마실래요?”
남자, 기실 소년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은 그, 박정호가 눈에 띄게 기쁜 기색을 하고 덥석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인희는 마디가 불거진, 그러면서도 가늘고 긴 손가락이 제 손을 소중히 감싸 쥐는 것을 바라보았다.
순간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녀가 냉철히 분석하기로, 방송가에서 서인희란 사람이 갖는 존재감이란 이제 갓 코흘리개 딱지를 뗀 초짜 작가, 딱 그만큼이었다. 그녀가 쓴 무수한 극본 중 3개 정도가 단막극으로 방송을 탔고 그중 2개는 예상 외로 꽤 반응이 좋았다. 시청률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어도 뒤늦게 입소문이 나 다시보기 부분에서 국장의 인정을 받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들었다. 그 덕분에 미니시리즈 하나를 계약 검토 중에 있지만, 그거야 언제 엎어질지 모르는 일이고.
그런 저에게 이 남자, 지나치게 반색을 한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라는, 그런 식상한 인사말이 음성화되지 않았을 뿐, 태도 하나하나가 그러하다. 뭐, 배우라고 했으니 연기일 수도 있겠다. 연기로 이렇게까지 진심 어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라면 감히 짐작컨대 대성할 재목이었다.
“제가 사 올게요. 커피, 다 드신 것 같은데 새로 사 올까요?”
인희가 포스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앉아 있어요. 이 아저씨가 사 줄 거예요.”
“아저씨라니? 나 아직 만으로는 서른여덟밖에 안 먹었어!”
“아아, 아니에요. 제가 사고 싶어서 모시고 온 건데요. 감독님, 어떤 거 드세요?”
분개하듯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는 봉 감독을 만류하고 그가 부지런히 몸을 일으켰다. 사시사철 ‘남자는 캐러멜 마키아토’를 고집하던 봉 감독이 예상을 뒤엎고 아메리카노를 시키자 인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호가 계산대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석주가 쯧, 혀를 찼다.
“그새 취향이 바뀌셨어요?”
“응?”
“마키아토요. 하루에 서너 잔도 드시더니.”
“아아. 아메리카노가 싸잖아.”
어깨를 으쓱인 석주는 다 먹어 버린 베이글이 아쉬운 듯 빈 접시를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친구 집안 형편이 좀 어려워. 아, 그런데도 맨날 얻어먹기만 해서 죄송하다고 자꾸 이리로 끌고 오는 통에 버틸 수가 있어야지.”
“그새 배우 사랑이 극진해지셨네, 우리 봉 감독님.”
“뭐, 쟤는…… 애가 착하니까.”
“신인 땐 누구나 다 착한 거죠.”
인희가 우스갯소리를 하자 석주가 그도 그렇다는 듯 킬킬 웃었다. 카운터에서 쟁반을 받아 든 정호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쟨 좀 유별나게 착해.”
석주가 일어나 쟁반을 건네받았다. 고맙습니다. 티 없이 웃는 말간 얼굴과 잘 어울리는 근사한 목소리였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눈매를 관찰하던 인희는 다른 부분에 비해 살짝 어두운 색의 눈꼬리와 내리뜰 때에만 나타나는 쌍꺼풀이 참 예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 작가님 거요.”
미처 시선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정호가 인희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내심 당황하여 헛기침을 흘렸다. 나쁜 생각을 하던 것도 아닌데 어쩐지 볼에 열기가 몰렸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인희의 손이 조심스럽게 잔을 건네받았다. 밤색 액체가 훈김을 밀어 올리며 찰랑였다.
“잔이 비어 있길래. 드시던 거랑 같은 거, 맞죠?”
“맞아요. 핫초코. 눈썰미가 좋네요.”
인희의 칭찬에 정호가 의뭉스레 눈을 빛냈다. 쑥스러운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던 그가 또박거리는 발음으로 대답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했었어요. 3개월 전까지만 해도요. 가끔 오실 때마다 핫초코 주문하셨던 거 안 잊었거든요.”
눈빛이 지나치게 진지하였다. 어떤 반응이 적절할지 몰라서 잠깐 뜸을 들이던 인희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말간 얼굴이 기억에 없다는 것에 낙담하고 말았다. 메뉴를 고르고 값을 치르고, 주문한 것을 받아 오고. 그 일련의 행위를 하는 데에 굳이 종업원의 얼굴을 확인할 필요는 없으니까.
인희는 자신의 무심함을 탓하며 흐리게 미소 지었다.
“몰랐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는 계산보단 주로 음료 제조하는 쪽이라, 직접 얼굴 뵐 기회가 많지 않았으니까…… 당연해요.”
“우와. 제조요? 아쉽다. 이렇게 잘생긴 아르바이트생이 만들어 준 건 줄 알았으면 좀 더 아껴 마셨을 텐데.”
괜찮다면서 속상해하는 게 보여서 인희가 부러 농담을 섞었다. 인희를 주춤 물러나게 할 정도로 또렷이 직시해 오던 정호의 눈동자가 아래로 또르르 굴렀다. 잘생겼단 말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들었을 것 같은 남자는 놀랍게도 이러한 칭찬을 처음 받아 본 사람처럼 계면쩍어하고 있었다. 살짝 붉어진 듯한 남자의 귓불을 발견하고 인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웃음이 새어 버릴 것 같았다.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 만들어 드릴게요.”
떨어뜨렸던 시선을 들어 다시금, 당혹스러울 정도로 빤히 인희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말했다. 어떠한 선서처럼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그 곧고 흔들림 없는 음성에 인희는 순간 되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바람이 나무를 희롱하고 잎이 술렁거리며 또다시 쏴아아, 파도를 만들었다. 그 소요 속의 짧은 고요를 끊어 낸 것은 석주였다.
“내가 그랬지? 이 녀석, 유별나게 착하다고.”
왜 그랬을까. 인희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릴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석주가 있다는 걸 그야말로 완전히 잊고 있던 사람처럼.
인희는 어렵사리 정호에게 묶여 있던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옆얼굴에 꽂히는 그 눈길이 너무나 선명하였다. 목이 깔깔해 핫초코를 살짝 머금어 목을 축이고는 고개를 끄덕여 봉 감독의 말에 동조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버릇처럼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어색하게 떨리는 입가에 미소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 * *

인희가 정호를 두 번째로 만난 건 카페에서의 짧은 첫 만남이 있었던 날로부터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한 드라마 제작사의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 회전문에서, 인희를 발견한 정호가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두 사람이 이런 장소에서 마주친 게 크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닌데, 그는 마치 지구 반대편에서 그녀를 만난 듯 우연이란 단어에 유난히 힘을 실었다.
“이런 데서 우연히 뵙네요, 작가님.”
“그러게요. 잘 지냈어요?”
“네. 작가님도 잘 지내셨죠? 아, 드라마 계약하신다는 곳이 여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방금 막, 계약하고 나오는 길인데.”
인희는 겸연쩍은 얼굴로 옆구리에 끼우고 있던 흙색 봉투를 팔랑거리며 들어 올렸다. 자리에서 튀어오를 것처럼 깜짝 놀란 정호가 손뼉을 마주치며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축하드려요, 작가님!”
“고마워요. 어쩌다 보니 정호 씨한테 제일 먼저 축하를 받네.”
어차피 달리 축하해 줄 사람도 없긴 하지만.
인희는 뇌리를 긁고 지나가는 누군가의 얼굴을 애써 무시하며 조금은 사무적인 투로 물었다.
“근데 정호 씨는 무슨 일로…… 윤 엔터랑 작업하는 거 있어요?”
“아니요. 저는 여기 8층에, 기획사에 볼 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여기 8층요? 8층에 기획사가 있었나…….”
인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정호는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이 기꺼운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소속 연예인도 저 포함해 둘이고요. 근데 그마저도 제가 선배예요.”
그렇게 즐겁게 얘기할 만한 게 못 되는 것 같은데.
인희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읊었다. 첫 만남 때 스물셋이라고 소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어울리지 않게도 군필. 인희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정호를 찬찬히 살폈다. 천진한 소년의 모습에 없던 모성애도 자극당할 판이다.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다가 인희는 충동적으로 묻고 말았다.
“원래 그렇게 잘 웃어요?”
“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놀란 듯 굳어 버린 표정을 보고 뒤늦게 아차, 싶다. 시비조로 들렸을까? 어쩐지 초조해져서 다급히 덧붙였다.
“웃는 게, 되게 예뻐서요.”
“아…….”
“음, 보기 좋아요. 뭐랄까,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되는 것 같아서.”
일순 조금 멍해졌던 동공이 그녀가 변명에 살을 덧붙일수록 반짝반짝 빛을 냈다. 인희는 제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그 변화가 신기하였다. 배우는 표정으로 말을 한다더니 그게 바로 이런 거구나, 상황에 맞지 않는 감상이 줄줄이 꼬리를 무는데…….
“그럼 더 많이 웃어야겠네요.”
더욱 진해진 미소를 건 입술이 또박또박 대꾸했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인희는 썩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정호를 마주 보았다.
“제가 웃으면 작가님도 따라 웃게 된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게 왜?
“작가님도 예뻐요. 웃으실 때.”
세상에.
이건 명백한 작업 멘트다. 다른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면 팔에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다지도 담백한 목소리라니. 홍채와 동공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온통 까만 눈은 순한 강아지 같아서 인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잠깐이라도 혹시 하는 의문을 품으며 경계하려 했던 스스로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주제 파악하자, 서인희. 몇 번이나 되새김질하고서야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정호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