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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것들 2화
프롤로그 낭만이란 (2)


“여자분이 약사이기는 하지만 본인의 약국이 아닌 페이 약사인 데다가, 하반신 마비의 홀아버지를 부양하고 있어요. 이런 조건에서 단지 직업만으로 다른 분들과 같은 등급을 매칭 시킬 수는…….”
“유선 씨. 이 이상 같은 말을 하면 나 입 아플 것 같은데.”
“네?”
“김 팀장.”
무열이 미간을 좁히며 미영을 응시했다. 그를 따라 다른 직원들의 시선도 미영에게로 달라붙었다.
“‘낭만’은 고객들의 연애를 응원하고 그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혼을 추구, 타 결혼정보회사와는 달라야 한다. 사장님께서 입이 닳도록 하셨던 말씀이죠.”
이제는 익숙하다는 양 미영이 영혼도 담지 않은 목소리로 마치 책 읽듯이 술술 말했다.
“유선 씨, 알아들었으면 당장 등급 올려. 일단 여성 고객 위주로 맞추라고. 이대로 맞선 일정 잡았다간……. 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서류를 흔들던 무열이 갑자기 손짓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인상을 펴 내며 손에 쥐어진 것을 똑바로 응시했다.
달달 볶으며 귀가 아려 올 정도로 잔소리를 하는 그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려던 타이밍. 직원들은 갑자기 뚝 끊겨 버린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세요, 사장님?”
누가 뭐라고 말을 거는지도 들리지 않는 듯 무열은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멈추어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전원을 꺼 버린 로봇이라도 된 모양새였다.
저런 걸 당황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까. 좀처럼 놀란 얼굴을 하지 않는 무열이였기에 직원들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그의 표정을 뭐라고 이름 지어야 할지 헷갈렸다.
무열의 시선이 꽂힌 것은 서류 상단에 적힌 낯익은 이름이었다.

최은서.

“……최은서?”
낮게 중얼거리는 무열의 목소리에 미영이 ‘아아.’ 하면서 시키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였다.
“아, 지난 금요일에 가입하고 가신 신규 회원이에요.”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흔한 이름이기도 했다. 흔하디흔한 이름이고, 어딜 가나 한 번씩은 스치듯이 들었던 이름인데도 무열은 그때마다 사고를 멈추었다. 마치 그 이름에 반응할 수밖에 없도록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랬다.
그게 벌써 몇 년째더라…….
세상에 최은서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어째서 아직도 그 이름만 보면 심장이 덜컥 놀라고 마는 걸까. 정말 바보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비웃으며 고개를 내젓던 무열이 서류를 천천히 훑어 내리다가 다시 시선을 멈추었다.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이 최은서가 그 최은서인지를. 그 최은서일 확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스물아홉. 새빛고등학교 졸업.

“…….”
그의 신경을 재차 붙들어 놓은 정보는 고작 그뿐이었다. 나이와 출신 고등학교.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 자신과 두 살 차이였으니 그때 그 아이가 성장을 했으면 지금쯤 스물아홉일 것이다. 나이를 떠올리며 그는 묘한 확신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일치하고, 출신 학교가 일치했다. 그에게 있어 그 두 가지의 단서는 무척이나 큰 것이었다.

‘선배님.’

귓가에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같은 교정에 서 있었다. 그때의 짧은 장면들이, 조각나 있는 줄 알았던 기억들이 일순간 파노라마가 되어 펼쳐졌다. 그녀의 이름이 발휘하는 마법처럼.
“유선 씨, 컴퓨터 켜 봐.”
“네?”
“확인할 게 있으니까 당장 컴퓨터 좀 켜 보라고.”
“아, 네!”
유선이 자리에 앉아 전원 버튼을 누르는 사이 무열은 그녀의 뒤에 팔짱을 끼고 선 채 모니터를 응시했다. 부팅이 되는 시간조차 길게만 느껴져 잘생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관심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컴퓨터가 켜지자 무열이 비켜 보라며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유선이 옆으로 비켜나자 마우스를 잡은 무열이 회원 리스트를 클릭했다.
찾는 이름은 단 하나. 최은서.
“최은서…….”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자 곧바로 정보가 떴다. 방금 전 서류를 통해 잠깐 보았던 그 이름, 그 나이, 그 학교.
그리고 그는 화면을 통해 가장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 떡하니 떠 있는 그녀의 사진이었다.

‘선배님.’

사진을 보는 순간 또다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지기는 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 모니터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은 뚱해 보이는 표정. 한없이 찬바람 부는 눈빛.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속을 간질이는 아름다운 얼굴은…….
그때보다 더 빛이 났다.
“……최은서.”
조용히 이름을 되뇌자 사진 속의 그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무열을 노려본다. 물론 착각이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한 시선이 오싹할 정도의 냉기로 자신을 휘감는다.

‘저는 선배님이 정말 싫어요.’

사진과 함께 어렴풋한 그때의 목소리가 무열을 뒤흔들었다.
“……찾았다.”
그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화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무슨 일인 거냐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목소리들 틈으로 무열의 웃음소리가 조용하게 공기 중을 울렸다.



01. 멀지 않은 곳에 (1)


거실에서 틀어 놓은 뉴스 소리가 방까지 들렸다. 지난주보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는 소식이었다.
은서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바깥과의 기온차로 창문에는 송골송골 물기가 맺혀 있었는데, 그런 것과 별개로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은 무척이나 따스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눈이 부셨다. 햇살이 코앞에서 잘게 부서지는 듯했다.
방 안에 따스하게 떠다니는 공기와 함께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한 겨울의 냄새가 은서의 마음을 아침부터 차분히 가라앉혔다.
눈을 감으면 밤이었고, 눈을 뜨면 아침이었다. 깜빡하면 봄이었고, 정신을 차려 보면 겨울이었다. 그렇게 시간 속에 스스로를 내맡긴 채 살다 보니 서른을 코앞에 둔 시기가 왔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 갈수록 은서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하는 횟수가 많아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마냥 좋다고 하기에는 그리 반갑지 않은 변화였다.
출근 준비를 마친 은서가 핸드백을 챙겨 들었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나란히 뉴스를 보고 있던 만호와 선희가 고개를 돌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는 중이었던 듯, 마침 포크로 사과를 찍은 선희가 그것을 은서에게 내밀었다.
“아침 사과는 보약이래. 이거라도 입에 물고 가.”
“고마워요, 고모.”
은서가 그 자리에 서서 사과를 오물거리고 씹었다. 그러자 휠체어에 앉아 뉴스를 응시하던 만호가 그녀를 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네. 결혼정보회사에는 잘 다녀왔고?”
“아……. 네.”
입 안에서 새콤하게 과즙을 내뿜으며 퍼지던 사과를 마저 씹어 낸 은서가 꿀꺽 삼켜 내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만호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고, 은서는 짧게 대답하면서도 어색하게 웃었다. 다녀온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적으로 물어 오니 왠지 모르게 머쓱해진 탓이다.
“생전 결혼 이야기도 안 꺼내던 애가 왜 갑자기…….”
그때, 의아하다는 듯한 만호의 목소리 틈을 비집고 선희가 끼어들었다.
“오빠도 참, 모르는 소리 하네. 얘도 내년이면 서른인데 더 늦기 전에 슬슬 결혼 생각할 때 됐지, 뭐. 좋은 대학 나와, 약사야, 얼굴도 저만하면 어디 가서 안 빠져. 분명히 좋은 상대 들어올 거야. 내가 주변에 알아보니까 여자 나이는 앞자리가 2인 거랑 3인 거에 그렇게 차이가 크대, 글쎄. 1년만 더 늦었으면 얼마나 아까웠을지, 어휴.”
선희가 구구절절 말하면서 은서를 힐끔 보았다. 그녀의 눈치에 은서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웃는 것뿐이었다.
지난주, 고모인 선희의 부추김에 못 이겨 그녀와 함께 결혼정보회사에 다녀왔다.
그런 곳에 찾아갈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의 위치가 대충 어느 정도인지 듣고 나니 마치 인생을 채점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비싼 회비를 내고 가입을 마치자 폭풍처럼 밀려오는 것은 씁쓸함과 회의감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목적으로 하는 그곳에 갔던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 만호를 위해서였다.

‘네 아빠 말이야, 엄마도 없이 너 키우느라 평생 고생만 했어. 알지? 그러니까 괜히 신경 쓰이게 하지 말자. 일찌감치 정착해서 가정 꾸리고, 예쁜 손주도 안겨 드리고, 그렇게 살아야지.’
‘…….’
‘저 인간이 겉으로 티를 안 내 그렇지, 네가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이십 대 다 보낸 게 전부 자기 때문인 줄 알아. 장애인 아버지를 뒀다는 사실이 네 혼삿길 막을까 봐 벌벌 떨어. 소변 마려운 줄도 모르고 몸에 줄 꽂고 살면서 자기도 힘들 텐데 사람들 시선에 다칠 네 생각만 한다고. 내 오빠지만 불쌍해 죽겠어. 넌 안 그러니?’

선희의 말에 은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의 고생에 대한 말들에는 언제나 침묵이 답이었다. 아니, 침묵이라도 해야 했다. 죄지은 게 없어도 그저 ‘죄송해요.’라는 말 외엔 떠올릴 수 없었으니까.
평생을 어두컴컴한 곳에서 고생해 온 그의 다리가 자신의 미래를 붙든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은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휠체어에 앉은 만호를 보았다.
“……?”
왜 그러냐며 마주 보는 시선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웃어야만 했다.
만호는 강원도에서 일하던 광부였다. 부인도 없이 그 일 하나만으로 혼자서 어린 은서를 키워 냈다.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엄마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은서의 엄마는 나이가 어렸다. 처음에는 세상 물정 모른 채 만호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살았지만, 나중에는 가족보다 자신의 삶이 우선시되어 버린 여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점점 더 예민하게 변해 갔다. ‘내가 너만 빨리 안 낳았어도…….’라며 딸에게 원망을 돌리거나, ‘이런 산골에 처박혀서 애나 키워야 돼?’라며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도망을 쳤다. 만호가 사흘이나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하던 시기였다.
어린 은서는 그 기간 내내 쪽잠만 잤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고, 집 안은 엉망이었다. 먹지도 씻지도 않은 채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직은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마주한 건 엄마가 아닌 아빠였다. 병원 침대 위에 안 그래도 마른 작은 몸뚱이가 비쩍 곯은 채 눕혀져 있었다. 그런데도 은서는 배시시 웃었다.
‘엄마는?’ 하고 물으면서.
은서가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녀가 조금 더 자란 뒤의 일이었다. 나중에 만호가 몇 다리를 건너 언뜻 들은 바로 은서의 친모는 필리핀에서 젊은 남편과 새 출발을 했다는 것 같았다.
그 일을 겪고도 은서는 바르게 자랐다. 엄마란 사람의 부재 속에서도 혼자서 밥을 차려 먹고, 숙제를 하고, 꽤 어른스럽게 행세했다. 누군가의 손길 없이도 해낼 수 있게 노력했다.
만호가 돌아올 때까지 홀로 집을 지키는 것에 그렇게 익숙해져 갔다.
일찍 철이 든 딸의 모습에 만호는 앞으로도 쭉 혼자서 거뜬하게 그녀를 키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빠로서 모든 걸 완벽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리던 딸이 너무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