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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것들 1화
프롤로그 낭만이란 (1)


천장도, 벽도, 바닥도, 전부 반들거리며 빛을 내는 대리석이었다. 덕분에 복도는 온갖 흰색으로 물들었고 반짝이는 만큼 한없이 차가운 기운을 뿜었다.
그 색감 때문일까. 히터가 돌아가며 뺨을 덥히고 있었음에도 건물 내부에는 은근히 추운 기운이 맴도는 듯했다. 그들은 그런 공간 속에 있었다.
“팀장님, 시작해요!”
대기실에 있는 커다란 LCD 모니터 앞에는 두 명의 직원이 앉아 있었다. 미영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그녀들에게로 걸어왔다.
소파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쳐 앉은 미영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화면을 보았다.
“뭐야, 벌써 시작했어?”
“방금 시작했어요. 그런데요, 팀장님. 우리 이거 꼭 봐야 해요? 안 그래도 월요일이라 피곤해 죽겠는데 굳이 이것까지…….”
“그래도 사장님이 출연하는 방송인데 본방사수 정도는 해 드려야 예의지. 그리고…….”
“……?”
“궁금하지 않아? 그 박무열이 얼마나 가식을 떨지.”
미영이 다시금 머그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소리 없이 웃었다.
주말 내내 얼마나 신이 나게 놀았는지 직원들은 아직 피로가 채 풀리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퀭한 시선들이 화면을 향했다.
예약도 없이 월요일 아침부터 고객이 찾아올 일은 없다. 그렇게 따지면 여유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피로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종일 보게 될 사람인데 굳이 텔레비전을 통해서까지 또 볼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던 참이었다.
그때, 불만에 차 중얼거리던 목소리들이 조용히 사그라졌다. 성가시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고 있던 얼굴들이 어느덧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 방송의 화면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박수 세례와 함께 막 등장하던 참이었다.
「오늘의 초대 손님은…… 독특한 매니지먼트로 요즘 굉장히 핫한 결혼정보회사죠? ‘낭만’의 능력 있는 CEO, 박무열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박무열입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쑥스럽네요.」
“웩.”
“아……. 나 그냥 가서 업무 준비나 할래…….”
다정하게 웃는 얼굴에 약간의 쑥스러움을 가미한 내숭까지. 가식적인 무열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려 할 때였다. 미영이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더니 두 사람의 어깨를 꾸욱 눌러 다시 앉혔다.
“재밌잖아. 계속 봐.”
즐거워 보이는 한마디에 도로 앉은 두 직원의 입술 사이에서는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흔한 광고 하나 없이 인터넷과 SNS의 입소문만으로 이 자리까지 오셨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맞습니다. 초창기에는 SNS의 영향에만 주력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회사를 키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었거든요. 직원들 월급이 밀리지 않을 정도, 나 역시 적당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만 되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말에 직원들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웃기시네. 매출 떨어졌다고 명절에 집에도 못 내려가게 하려던 사람이 누군데.”
“와, 정말 신고하고 싶어요. 저런 사기 방송……!”
미영이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얼마나 가식을 떨며 인터뷰를 할지 내심 궁금했다. 혼자서 상상도 해 보았었다. 그랬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아니, 그보다 더 가식적이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분명 홍보가 될 거라며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이 정작 방송에 나가서는 금전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행동할 줄이야.
「회사 이름이 참 낭만적이에요. ‘낭만’이라니.」
「하하, 그런가요.」
「타 결혼정보회사와는 다르게 추구하는 부분이 있다면서요?」
「예. 성혼율을 높이는 데에만 집중하는 기존의 결혼정보회사와는 조금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희는 결과보다 그 과정을 중요하게 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저희가 추구하는 것은…….」
“연애결혼입니다.”
직원들의 대사가 화면 속 무열의 것과 일치했다. 하루 이틀 듣던 강조점이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처음 들으면 ‘뭐라고?’ 하며 되물을 수밖에 없는 말. ‘낭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열의 결혼정보회사는 그 말도 안 되는 묘한 단어를 추구하는 회사였다.
「연애결혼이요?」
「예, 그렇습니다. 결혼정보회사라는 정체성과 조금 어긋나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희가 추구하는 결혼은 그렇습니다. 서로 조건만을 따져 형식적인 절차로 인생 설계를 위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아 설레는 연애를 거쳐 결혼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때문에 첫 만남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이루어지는 결혼은 지양하고 있으며, 데이트 코칭과 그 밖의 지원도 계속해서 늘려 가고 있습니다. 나이와 환경에 쫓기며 조건을 위해서 하는 성급한 결혼이라니, 전혀 낭만적이지 않잖아요?」
「독특하기는 하네요. 결혼정보회사라면 성혼율을 높이는 게 가장 큰 이득 아닌가요?」
「결혼에 대한 압박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달콤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이 모든 여성, 아니, 모든 사람들의 꿈이 아닐까요. 저희는 그래서 결혼과 함께 그들의 달콤한 연애도 지원하는 겁니다.」
사회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무열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 결혼을 위한 결혼이 아닌, 연애 혹은 사랑을 만나 이루어 내는 결혼. 그것을 목표로 했던 그의 취지가 의외로 여성 고객들에게 잘 먹혀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조건에 맞는 사람과 적당히 만나다가 적당히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라고들 말했다. 적당과 보통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지는 것이 만남이고 결혼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무열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비현실적인 꿈을 노렸다. 조건을 따지는 게 나쁘다고는 하지 않되, 그와 동시에 사랑을 향한 낭만도 함께 찾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깊은 수는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취지로 업계 2위라니…… 대단하긴 해요. 말이 2위지, 고객 퀄리티로 따지면 1위나 다름없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사장님 머리 하나는 비상하니까요. 여성을 타깃으로 한 게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도 들고요. 일단 여성 고객들이 이쪽으로 몰리니 남성 고객들까지 따라오는 건 일도 아니잖아요.”
보기 싫으네, 가식이네, 한참 중얼거리던 직원들이 어느덧 턱을 괴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머리가 비상한 것도, 수완이 좋은 것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 박무열은…….
「결혼정보회사에는 등급표라는 게 존재한다면서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희의 경우 등급 같은 건 따로 나누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업체와 차이를 둘 수도 없죠. 연애결혼에 등급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업체를 통한 결혼이라도 결단코 사랑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저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악! 더는 못 봐 주겠어!”
“사기 방송이라니까! 등급이 없긴 뭐가 없어. 고객들한테만 없는 척할 뿐이지, 우리끼리 일정 잡고 매칭 할 때는 급 나눠서 붙이는 거 뻔히 알고 있는데. 와, 저 사기꾼.”
그때 어느덧 커피를 다 비운 미영이 빈 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게 최선이기는 해. 대놓고 ‘저희는 등급이 있습니다. 고객님은 학력도 딸리고, 키도 딸리고, 외모도 딸리기 때문에 15등급이네요.’ 이럴 수는 없는 일이잖아? 일단 어느 정도 조건이 맞아야 연애로의 호감도 발생하는 법이니까.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배경, 재산, 지적 수준에서 너무 판이하게 차이가 나면 그 괴리를 못 견디고 헤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야. 아마 헤어지지는 않더라도 결혼까지 가면서 엄청 삐걱거릴걸?”
“역시 김 팀장. 내가 사람을 잘 뽑았어.”
불쑥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에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언제 도착한 걸까. 복도 끝에서 무열이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났을 법도 한데 방송 소리에 묻혀서 미처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귀신을 본 듯 놀란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오셨어요?”
당황하는 직원들과 달리 미영은 익숙하다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무열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종종 무열을 향해 ‘자를 거면 자르세요. 집에 가서 애나 보고 집안일이나 하죠, 뭐.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오는 것도 아니고…….’ 하고 말했다. 남들이라면 기겁을 했을 패기였다. 하지만 무열은 그녀의 그런 당당함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직원들은 생각했었다. 또라이는 또라이를 알아보는 게 아닐까.
“이, 이거 생방송 아니었어요? 어떻게 오셨어요?”
말을 더듬는 직원과 잠시 눈을 마주친 무열이 고개를 돌려 화면을 응시했다. 매일 아침 거울을 통해 마주하는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반듯한 척, 매너 좋은 척, 다정한 척 연기를 하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아, 이건 녹화. 방송은 생방송인데 내 인터뷰 장면만 따로 녹화 뜬 거야.”
“아…….”
“근데 카메라가 영 안 받네. 역시 난 실물이 나아.”
무열이 갑갑하다는 듯 맨 위까지 채워 잠갔던 단추 하나를 풀며 말했다. 안 그래도 높은 콧대가 더욱 위로 향하는 착각이 인다.
여직원들은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잘생기긴 했지만 그걸 본인의 입으로 말하니 한결 더 재수 없게 느껴진다.
그들의 눈에 무열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저 출근에 게을러 주었으면 싶은 고용주에 불과했을 뿐.
원래 사장이 너무 성실해도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숨통이 막히는 법이다.
“그나저나…… 사장실 앞에서 사장이 나오는 방송을 보며 사장 욕을 하다니. 배짱이 대단한데, 우리 직원들.”
“…….”
“요즘 일이 술술 잘 풀리나 봐? 미진 씨, 지난 달 실적 좀 확인할까? 유선 씨, 즐거운 월요일 아침부터 예정에도 없던 회의가 고픈 모양이지? 아량 넓은 사장으로서 사양하지는 않을게. 어때, 다들 회의실로 모일까?”
“…….”
화면 속의 무열은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선 무열은 어느덧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날카롭게 그들을 쏘아볼 뿐이었다.
그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한쪽 귀로 들리는 무열의 친절한 목소리와 다른 쪽 귀로 들리는 피곤한 목소리가 도무지 한꺼번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직원들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 박무열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단연 눈앞에 있는 그를 가리킬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무열 본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무열에게 있어 상냥한 웃음은 공적인 일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포장하거나 감추는 일에 능했지만 적어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그에게 있어 회사 ‘낭만’은 자신의 소유였으니 그 안에서 만나는 고용인들에게까지 거짓으로 치장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게 박무열이었다.
“그럼 여기서 짧게 하지.”
무열은 그렇게 말하며 유선의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신규 회원의 정보가 들어 있는 서류였다. 첫 맞선 일정과 매칭을 위해 이번 주 안으로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자신의 담당 서류가 그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걸 본 유선은 마치 그의 손이 제 목을 붙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붙잡으면 뭐 하나라도 트집을 잡지 않고는 못 배기는 저놈의 성미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거 봐, 이거. 매칭을 이따위로밖에 못 하냐는 거야.”
“뭐, 뭐가 문제인지 말씀을 해 주시면…….”
“여자가 약사인데 왜 이렇게 낮은 등급의 남자를 가져다 붙여? 장난해, 지금?”
등급표 같은 건 없다고 인터뷰하던 사람이 맞기나 할까. 무열은 앞서 방송을 탔던 인터뷰가 무색할 정도로 등급을 운운하며 서류를 흔들었다. 그의 손에서 흔들리는 것을 쳐다보며 유선의 시선도 한없이 방황했다.
그러나 그녀의 롤모델은 미영이였다. 무턱대고 지르는 그의 트집에 지고 싶지 않았다. 유선이 자신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는 걸 어필하고자 마음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