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4장


식사 때 간혹 수혁이 서희를 챙기는 일을 제외하고는 유별날 것이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로 수혁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한 시간 뒤에 있을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던 제희가 로비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제희가 서희를 불렀다.
“실장님! 로비에 회장님을 찾아오신 분이 계시다는데요.”
“그래요? 누군지 신원 확인했어요?”
수혁을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 선약이 되어 있는 사람이거나 회사 중역들이어서 로비에서 이렇게 연락 올 일이 없었다. 그래서 서희는 신원 확인부터 했다.
그녀의 말에 전화로 로비의 보안 직원과 다시 몇 마디 나눈 제희가 말했다.
“세광그룹 김혜아 양이라고 합니다.”
김혜아!
그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지만 자신의 매력적인 외모로 뭐든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서희의 학창시절 악의적으로 그녀를 놀리고 괴롭혔던 인물 중 하나였다.
서희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과거를 떠올리고 말았다. 부모님의 사고 이후로 가장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시절의 기억이 그녀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1학년, 같은 반도 아니었던 김혜아는 일부러 자신을 찾아오면서까지 험한 말들을 늘어놓곤 했었다. 그녀가 주로 했던 말은 뚱뚱하고 못났으니 공부만 한다는 식의 놀림이었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고, 서희 자신이 외모에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서희와 사이가 안 좋아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그녀의 부모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희더러 부모 잡아먹은 년이라고 학교에 소문을 내어 결국은 수능을 앞두고 서희가 전학을 가기에 이른 것이다.
원래는 전학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워낙 학교에 소문이 크게 났었다. 그것 때문에 서희가 소문을 피해 학교에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임 회장의 도움으로 학교를 옮겼고 그곳에서 수능을 봐 대학을 갔다.
그런데 질긴 인연일까? 우연히도 같은 대학에서 혜아를 다시 만난 것이다. 평소 그녀의 성적으로 봤을 때는 결코 올 수 없는 학교였지만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대학 정도는 그들에게는 우스웠으리라.
아무튼 대학에 와서도 혜아의 이유 없는 악담과 뒷담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같은 과가 아니었고 고등학교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 그 소문들이 그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나빴던 사이는 그대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수혁과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찾아왔다니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래도 나중에 어떤 후환이 돌아올지 몰라 수혁에게 보고했다.
“회장님.”
- 네. 무슨 일입니까?
다음 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데 서희가 인터폰을 울리자 수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로비에 세광그룹의 김혜아 씨께서 와 계신답니다.”
- 김혜아?
“네. 어떻게 할까요?”
잠시 말이 없던 수혁은 짧고 나직하게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더니 대답했다.
- 들여보내요. 그리고 최 실장, 차 좀 부탁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로비에 혜아의 방문을 허락한다는 연락을 한 뒤 서희는 준비실로 들어갔다. 제희나 민경을 시켜도 될 일이었지만, 혜아와 마주치기 싫어 서희가 직접 차를 끓이기로 했다.
찻물을 올리고, 잔을 꺼내서 준비를 할 때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는 데 절차가 왜 이리 까다로워?”
화려하게 치장한 혜아가 대뜸 반말을 하니 제희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애써 표정을 숨기며 수혁의 사무실에 노크를 했다.
“회장님, 김혜아 씨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네. 들어가십시오.”
혜아가 들어간 뒤 사무실 문을 닫으며 제희가 머리를 쥐어박는 흉내를 내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는 혜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도도한 표정을 유지하며 책상 앞에서 일어나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오빠!”
친근한 호칭에 일어서던 수혁이 멈칫했다. 그녀는 친구인 혜석의 동생으로 사석에서 한 번 봤던 게 전부였다. 이렇게 찾아올 이유도 없고 친근한 호칭을 허락한 적도 없었다. 일단 찾아온 손님이라 만나 보자 생각했는데 혜아의 반응에 기분이 살짝 언짢아졌다.
“어서 와요.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사무실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로 혜아를 안내한 수혁도 맞은편에 같이 앉았다.
잠시 뒤 제희가 찻잔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와 탁자 위에 잔을 올려놓았다.
“고마워.”
혜아가 인사를 건네는 말을 듣고 수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 딴에는 아버지의 비서에게도 하지 않는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평소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는 수혁으로선 그녀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혜아에게 반말을 들은 제희도 굳어진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항상 웃는 얼굴의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가자 수혁이 마음이 다시 한 번 더 불편해졌다.
하지만 자신이 방문을 허락한 손님이니 접대를 소홀히 할 수 없어 최대한 웃는 얼굴로 혜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말 놓으면 안 될까요? 친구 동생인데 말 높이면 저 불편해요.”
사무실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혜아가 대답하자 수혁이 기분이 다시 나빠졌다.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사무실 인테리어를 평가하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수혁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차차 하기로 하고. 정말 어쩐 일이에요?”
“지나가는 길에 차나 한 잔 얻어먹으러 왔죠. 안 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다행히 이렇게 한 잔 마시고 가네요.”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혜아를 보며 수혁은 기가 찼다.
당차다 해야 할지, 무모하다 해야 할지 당최 감이 안 서는 아가씨였다. 단정하고 예의 바른 그의 친구인 혜석과는 180도 다른 모습에 수혁은 두 사람이 정말 남매인지 의심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 혜아를 쳐다보며 다시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갈 때 책상 위에서 인터폰이 삐, 소리를 내며 울렸다.
혜아에게 목례를 한 뒤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눌렀다.
“네.”
- 회장님, 회의 시간 다 되어 갑니다.
서희의 목소리에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흘깃 본 수혁이 말했다.
“알았어요.”
수혁이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본 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신 것 같은데 이만 갈게요. 차 잘 마셨어요.”
수혁과 같이 더 있고 싶었으나 회의를 알리는 인터폰에 마지못해 일어서는 혜아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무례한 아가씨와 마주 보고 싶지 않은 수혁이 서둘러 그녀를 배웅했다.
“바빠서 멀리는 못 나가요. 잘 가요.”
“네.”
혜아가 수혁에게 인사를 하고 나간 뒤 문이 닫히자 수혁이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회의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전화를 해 준 서희가 고마웠다.
서희는 수혁에게 인터폰을 한 뒤 얼른 준비실로 들어갔다. 어떤 마음으로 전화를 했는지 본인 스스로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혜아에게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와 수혁이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걸 상상하다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인지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튼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차를 마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저도 모르게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커피를 핑계로 얼른 준비실로 들어 왔던 것이다.
빈손으로 나갈 수 없어 잔에 커피를 따르고 있는데 혜아가 나가는 것인지 밖이 부산스러웠다. 잠시 뒤 조용해지자 서희가 커피 잔을 들고 사무실로 나갔다.
“손님 가셨어?”
“네. 그런데 정말 꼴불견이에요.”
“왜?”
“우리가 자기 직원이에요? 어디서 반말이에요? 반말이.”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러려니 해.”
“아시는 분이에요?”
“조금 알아.”
민경의 질문에 대답하는 서희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하긴…… 있는 집에 딸이 하나니 오냐오냐했겠죠.”
세광그룹 하면 BS그룹만큼이나 유명한 대기업이었다. 그 집에 외동딸이 있다는 것은 웬만해선 다 아는 사실이었다. 민경과 제희가 혜아를 비롯한 재벌가의 사람들을 상대로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다음 회의 준비나 잘해 둬.”
“네.”
서희가 그녀들의 말을 자르며 대화를 정리했다. 다행히 더 이상 말이 길어지지 않고 다들 회의 준비에 들어갔다.
제희와 민경이 먼저 회의실로 가고 서희는 회의에 쓰일 서류를 정리해 수혁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서류를 가지고 들어오는 서희를 본 수혁이 보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 든 수혁이 그것을 훑어보며 서희에게 말했다.
“좀 전에는 고마웠어요.”
“네?”
“느닷없이 찾아와서 난감했는데 최 실장이 잘 넘겨 줘서 고마워요.”
“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채자 서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시선을 피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 하는 대답만 간신히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예요?”
“그게…….”
갑자기 물어 오는 수혁의 질문에 서희는 난감했다. 평소와 다르게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자 수혁이 서희를 올려다봤다. 별다른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서희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서희를 수혁이 계속 쳐다보자 서희가 입술을 질끈 물더니 대답했다.
“그게…… 예약이 안 되어 있는 손님인 데다가 다음 회의 때까지 좀 쉬셔야 할 것 같아서…….”
작고 느리게 나오는 목소리를 끝까지 들어 준 수혁이 슬쩍 미소를 보였다.
“어찌 됐든 최 실장 덕분에 난감한 상황은 모면했어요. 한 번 본 사람인데 찾아와서 나도 좀 놀랐거든.”
“네.”
수혁의 말에 서희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왜 그랬냐, 타박이라도 하면 어쩌나 내심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서희에게 나가도 좋다는 사인을 보낸 뒤 수혁은 서류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희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좀 전에 보여 준 서희의 귀여웠던 표정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후에 들어간 회의를 마지막으로 비서실의 하루가 마감이 되었다. 모처럼 만에 야근이 없자 다들 저녁 약속을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수혁이 서희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오늘 약속 있어?”
반말로 물어 오는 수혁 때문에 서희가 놀라서 되물었다.
“네?”
“서희, 오늘 저녁 약속 있냐고.”
“아뇨.”
“잘됐네. 본가에 갈 건데 같이 가자.”
“회장님 댁에요?”
“응. 할머니가 너 보고 싶으시대. 약속 있으면 어쩔 수 없고.”
계속 반말로 이야기하는 수혁이 적응이 안 되어 서희가 대답하는 것도 잊고 그를 말똥말똥 쳐다봤다.
“이제 퇴근 시간이니깐 오빠 동생이잖아.”
“네…….”
그제야 수혁의 행동이 이해된 서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하고 같이 오라고 하세요?”
“응.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하시니깐 집으로 가서 뵈어야 할 것 같아.”
“네. 준비할게요.”
“나중에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깐 차는 두고 가.”
“……네.”
머뭇거리는 대답을 남기고 사무실에서 나오자 다른 직원들은 이미 퇴근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장님! 저희 퇴근할게요.”
“그래요. 오늘 수고했어요.”
“먼저 갑니다.”
세 사람이 비서실을 나가자 뒤이어 수혁이 사무실을 나왔다. 서희가 머뭇거리며 옷을 챙기는 동안 묵묵히 기다린 수혁은 유쾌한 미소로 서희를 챙기며 본가로 향했다.

한편 수혁의 본가에서는 집에 오는 손자와 친손녀 같은 서희를 위해 수혁의 할머니인 황 여사가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저녁 내내 종종거리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해 오래 서 있지는 못한다 해도 주방 식탁 의자에 앉아 감독을 하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성산댁, 이따가 서희 가져갈 반찬은 통에 골고루 담아.”
“네. 걱정 마세요. 사모님.”
“혼자서 잘 챙겨 먹나 몰라.”
“그러게요.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서희가 아플 때 직접 음식을 해 날랐던 성산댁이라 서희가 걱정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서희가 가져갈 반찬을 챙기는 성산댁의 손길이 더 분주해졌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수혁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보는 서희 때문에 모처럼 임 회장의 집은 활기를 띠었다.
이제는 현역에서 물러나 집에서 난을 가꾸며 하루를 보내는 임 회장 부부는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해했다. 더군다나 몇 주 전 입원까지 했던 서희의 안색이 예전보다 좋아진 것 같아 더 기분이 좋아지는 부부였다.
“서희는 요즘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게야?”
“네.”
“네 할미가 요즘 거동하기가 영 시원찮아 예전처럼 자주 못 들여다 봐. 말로만 그러지 말고 잘 챙겨 먹고 다녀.”
“네. 그럴게요.”
임 회장의 말에 황 여사가 서희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만하세요. 그래도 얼굴이 훨씬 좋아졌잖아요.”
말을 하며 황 여사가 서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기 때는 얼마나 예뻤는데. 데리고 다니면 인형이라고 서로 안아 보자 그랬어.”
황 여사의 말에 서희가 얼굴을 붉혔다.
“아니, 인물은 지금도 어디 가서 안 빠져. 얼굴에 손 하나 안 대고 저 정도면, 그 뭐냐? 자연 미인? 그래, 자연 미인이지. 허허허.”
임 회장의 말에 서희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만하세요. 서희 얼굴 터지겠어요.”
“그래? 허허허.”
수혁의 말에 임 회장이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수혁이 최 실장이 아닌 서희라고 부른 것에 내심 놀랐다. 그건 황 여사도 마찬가지인지 남편을 쳐다봤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조부모님의 의중을 알면서도 수혁은 차만 마시고 있었다.
네 사람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성산댁이 저녁 준비가 끝났다며 알리러 왔다.
“밥 먹자. 네 할머니하고 성산댁이 저녁 내내 종종거렸다.”
임 회장의 말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의 말대로 식탁 한가득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다리도 아프신데 뭘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내가 했냐? 성산댁이 고생했지.”
수혁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으며 황 여사가 대답했다.
“아주머니 고생하셨어요.”
“뭘…… 그렇게 많이 한 것도 아닌데. 많이 먹어. 서희도.”
“네.”
자리에 앉은 임 회장이 수저를 들자 본격적으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많이 한 게 아니라고 성산댁은 말했지만, 어디에 먼저 젓가락을 가져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푸짐한 반찬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 모두가 행복한 고민을 했다.
행복한 고민에서 제외된 한 사람, 서희는 먹을 것이 푸짐하게 차려졌음에도 다른 반찬에는 눈도 주지 않고 제 앞에 있는 콩나물만 집어 먹으며 식사를 했다. 그런 서희를 맞은편에서 빤히 보던 수혁이 성산댁을 불렀다.
“아주머니. 여기 작은 접시 하나만 주세요.”
“접시?”
“네.”
“그래, 알았어.”
수혁의 말에 성산댁이 작은 접시를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수혁이 그 접시 위에 반찬을 골고루 담기 시작했다. 손자가 뭘 하나 가만히 지켜보던 황 여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수혁이 골고루 반찬을 담은 접시를, 서희의 앞에 있던 콩나물 접시를 치우고 그 자리에 놨던 것이다.
열심히 먹던 콩나물 접시가 치워지자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밥 한 공기 다 먹을 동안 그 반찬 다 먹어. 안 그럼 내가 직접 먹인다.”
수혁의 말에 서희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숫제 밥그릇 속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서희에게 편하게 말을 놓는 손자와 또, 수혁이 시키는 대로 접시 위의 반찬들을 비우는 서희를 지켜보는 노부부의 눈빛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바쁜 일과 속에 밖에서 사 먹는 밥이 아닌 오랜만에 맛보는 집 밥으로 배를 채운 두 사람은 후식으로 나온 과일까지 먹고 나서야 임 회장의 집을 나섰다. 황 여사가 챙겨 준 밑반찬을 들고 두 사람은 서희의 집으로 향했다.
“저기, 아파트 입구에 세워 주세요.”
“생각보다 무겁던데, 집까지 들어 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서희의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수혁은 운전만 했다. 그런 수혁을 가만히 쳐다보던 서희가 한숨을 폭 내쉬며 다시 앞을 쳐다봤다. 포기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는 서희를 곁눈으로 훔쳐본 수혁은 그녀 몰래 웃으며 서희 집으로 향했다. 수혁은 그녀의 말대로 아파트 입구에 주차를 했다.
자신이 말했던 대로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우자 수혁이 그냥 가려나 보다 생각했던 서희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먼저 차에서 내린 수혁이 뒷좌석에서 쇼핑백을 꺼내며 서희를 불렀기 때문이다.
“서희야, 얼른 내려. 집에 가자.”
수혁의 말에 서희가 얼른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수혁의 손에서 쇼핑백을 받아 들려고 손을 내밀었다.
“저 주세요. 늦었는데 가서 쉬셔야죠.”
“괜찮아. 몇 분이나 걸린다고. 가자.”
수혁은 쇼핑백을 건네받기 위해 뻗은 손을 잡으며, 서희를 집 방향으로 이끌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수혁의 행동에 서희가 놀라 얼굴이 빨개져 손을 빼려고 힘을 줬다.
“회, 회장님. 손, 손 놓아주세요.”
얼마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는 서희였다. 그런 서희를 뒤돌아보며 그가 말했다.
“여기 회장님이 없어서 손 못 놔주겠다.”
“아, 저, 저…….”
말을 잇지 못하고 결국 서희는 수혁에게 이끌려 집으로 향해 걸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던 도중 지난번에 과일을 샀던 슈퍼가 보이자 수혁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이제야 그냥 갈 생각인가 싶어 속으로 좋아하던 서희가 다시 울상이 되었다. 수혁이 슈퍼로 들어간 것이다. 지난번에 과일을 한 아름 산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 슈퍼 주인이 수혁을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어서 와요. 이번에는 뭘 드릴까요?”
“안녕하세요? 지난번처럼 과일 좋은 걸로 좀 주시고요, 녹차 티백 있죠? 그거 하나 주세요.”
수혁의 말에 슈퍼 주인이 얼른 밖으로 나와 여러 가지 과일을 골고루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수혁이 찾는 녹차를 챙긴 뒤 계산을 끝냈다.
“그런데, 총각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잔돈을 거슬러 주며 주인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뉴스 같은 데에서 나오는 모습은 봤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회장으로 취임한 뒤, 나이 어린 수혁이 BS의 수장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 나라가 떠들썩했던 것이다.
“누구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듣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능청스러운 대답을 한 뒤 수혁이 슈퍼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 서희는 슈퍼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쇼핑백에 과일을 산 봉투까지 한 손에 들며 수혁이 다시 서희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서희가 다시 빨개진 얼굴로 손을 빼려고 했다.
“저기…….”
“서희야. 저기가 아니라 오빠다.”
“제가 들고 갈게요.”
끝내 오빠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서희가 말했다. 그런 서희를 돌아본 수혁이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오빠랑 손잡는 게 그렇게 창피해?”
“아뇨, 아뇨.”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서희가 급하게 대답했다.
“그럼 빨리 걷자. 오빠 서서히 팔 아파 온다.”
수혁의 말에 서희가 걸음을 빨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