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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쇼핑백을 받아 든 수혁이 집을 나섰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연락 없이 찾아가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아 수혁은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서희에게 전화를 했다.
-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서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수혁의 심장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왜 제 심장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여보세요? 회장님?
다시 한 번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수혁이 정신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한 후 말을 했다.
“최 실장, 뭐하고 있었어요?”
- 네?
“뭐하고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 ……그냥 있어요.
“오늘 본가에 들렀어요. 할머니 부탁으로 줄 것이 있어요. 집에 들르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서희와 통화를 끝낸 수혁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둔 쇼핑백을 쳐다봤다.
할머니가 챙겨 주신 삼계탕을 서희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였다. 저도 모르게 쇼핑백을 한 번 더 쳐다본 수혁이 시동을 걸고 서희의 집을 향해 차를 출발시켰다.
서희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수혁은 할머니가 챙겨 주신 쇼핑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서희가 사는 동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둔 터라 조금 걸어야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데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작은 슈퍼 앞에 진열되어 있는 과일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챙겨 주신 것도 있지만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수혁은 사과를 비롯한 다양한 먹을거리를 샀다.
할머니의 말씀대로라면 서희가 자신을 위해 장을 보진 않을 것 같아 골고루 여러 가지를 샀다. 할머니가 챙겨 주신 음식에 자신이 산 음식을 한가득 들고 서희의 집 앞에 도착한 수혁이 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네!”
초인종 소리를 듣고 서희가 현관에 나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실례 좀 하겠습니다, 최 실장.”
수혁은 문을 열어 주는 서희를 지나쳐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를 뒤따라 서희가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갔다. 양손에 한가득 짐을 들고 있는 수혁이 서희를 보며 물었다.
“이거 어디에 놓을까요?”
“이리 주세요.”
서희가 급히 그의 손에서 짐을 받아 들려고 하자 수혁이 만류했다.
“어딘지만 말해요. 생각보다 무거워요.”
“그럼 이리로 오세요.”
서희가 앞장서 수혁을 주방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가리킨 식탁 위에 짐을 내려놓은 수혁이 양복 재킷을 벗었다.
“최 실장. 미안한데 나 시원한 물 한 잔 주겠습니까?”
“네. 잠시만요.”
냉장고 문을 열고 물병을 꺼내는 모습을 수혁이 가만히 지켜봤다. 냉장고 안은 그가 생각한 대로 텅 비어 있었다.
서희가 건네는 물 잔을 받아 든 수혁이 그 안에 담긴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그리고 식탁 위에 잔을 내려놓고 쇼핑백과 비닐 봉투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건 할머니가 보내시는 거예요. 삼계탕하고 밑반찬 몇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건 오면서 보니 요 앞 가게에서 파는 과일이 좋아 보여 내가 좀 사 왔습니다.”
수혁이 음식들을 줄줄이 꺼내며 말하자 서희가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내가 그동안 최 실장을 너무 부려 먹은 것 같아 미안해서 그래요. 그냥 뇌물이라고 생각해요.”
수혁의 말에 서희는 할 말을 잃었다. 멍하니 잔뜩 쌓인 음식들을 내려다보다 정신을 차리고 그것들을 챙겨 냉장고에 넣으려고 하자 수혁이 말렸다.
“일단 먹고 넣어요. 최 실장 저녁 먹었습니까?”
“아니…….”
대답을 못하고 어물쩍거리는 서희의 얼굴을 본 수혁이 싱크대를 훑어봤다. 그의 생각대로 저녁을 먹지 않았는지 싱크대는 물기 하나 없이 말라 있었다.
서희를 다시 한 번 쳐다본 수혁이 싱크대 서랍장을 뒤져 큰 국그릇을 찾아내었다.
“저기 회장님, 나중에 먹어도 돼요.”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말리는 서희는 아랑곳없이 수혁이 그릇에 아직 따뜻한 삼계탕을 옮겨 담았다.
“할머니가 직접 하신 거예요. 최 실장 분명히 안 먹어서 쓰레기통으로 간다에 내 전 재산을 걸죠. 할머니 정성도 있으니 먹어요. 먹는 거 보고 가야겠어요.”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의 뚜껑까지 열어 놓고 수혁은 서희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본인도 맞은편에 앉았다.
정말 서희가 식사를 하기 전에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수혁은 자신이 사 온 사과 하나를 셔츠에 대충 닦더니 먹기 시작했다.
그런 수혁을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서희가 수저를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서희의 모습을 보던 수혁이 사과를 먹는 속도를 늦추었다.
사실 오랜만에 할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으로 과식을 한 상태라 사과가 들어갈 리 만무했지만 서희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무리해서 먹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말씀이 사실이었는지 서희는 다른 반찬은 손대지 않고 눈앞에 놓인 삼계탕만 먹고 있었다.
수혁은 젓가락 한 벌을 더 가져와 서희의 그릇 위로 반찬들을 집어 올려 주었다. 그러자 서희가 놀라 그를 말렸다.
“회장님 제가 먹을게요. 괜찮아요.”
“최 실장이 편식이 심한지 몰랐습니다. 골고루 좀 먹어요.”
서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혁이 계속 반찬을 집어 주자 서희가 포기를 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양이 적은지 작은 닭을 반 정도 먹은 서희가 수저를 놓았다.
“다 먹었어요?”
“네…….”
만족할 만한 식사 양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어딘가 싶어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갑니다.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 두고 먹어요.”
“네, 회장님.”
“최 실장.”
“네?”
수혁은 현관 앞으로 배웅 나온 서희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서희가 놀라 그를 쳐다봤다.
“나 최 실장하고 오래 일하고 싶어요. 일 처리 속도도 빠르고 나하고 호흡도 잘 맞고……. 일하면서 이렇게 잘 맞는 사람 만나는 거 정말 운이 좋아야 한다는 거 알아요. 그러니깐 최 실장도 몸 아껴 가며 일해요. 밑에 직원들도 좀 시켜 가면서. 이번에 다들 겪어 봐서 앞으로는 잘할 거예요. 그 점은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난 최 실장이 자신에게 신경을 좀 썼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하는 건 다이어트의 문제가 아니에요.”
혹시 자신의 말을 서희가 오해할까 봐 수혁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병원에서 그러는데 영향 불균형이라더군요. 아파서 쓰러지면 최 실장이 좋아하는 일, 더 이상 못해요. 골고루 잘 챙겨서 먹어요. 내 말 알겠죠?”
“네…….”
작은 소리로 대답하는 서희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뒤 수혁이 현관을 나섰다.
서희는 문단속을 하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는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수혁이 짚었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서희의 집을 나선 수혁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자신도 왜 서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는지 이유를 정확하게는 몰랐다. 하지만 손바닥에 와 닿는 서희의 체온이 따스하게 느껴진 건 확실했다. 다시 한 번 손을 내려다본 수혁은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 소파에 가방을 던진 수혁이 재킷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찾아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네, 회장님.
“너무 늦게 미안해요.”
-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회사 근처에 도시락 전문점이 있어요?”
- 글쎄요. 주의 깊게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내일 출근하면 알아봐요. 앞으로 외근 나갈 때 도시락을 이용합시다.”
- 네?
“박 대리도 그날 병원에서 들었잖아요. 최 실장 영양 결핍이랍니다. 박 대리 말대로 혼자 생활하니 챙겨 주는 사람 없고, 내가 보기에는 외근 나가서 식사도 박 대리랑 같이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그냥 다 같이 도시락을 먹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사 가지고 온 도시락을 버릴 수는 없으니 억지로라도 먹지 않겠습니까?”
- 아, 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사실 실장님이 매번 식사할 생각 없다 하셔서 저 혼자 먹었거든요. 회장님 말씀대로 도시락을 버릴 수는 없으니 드시겠네요. 내일 제가 출근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요.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 아닙니다. 쉬십시오.
박 대리와의 전화를 끊은 수혁이 그제야 씻기 위해 옷을 벗었다.

다음 날부터 수혁이 외근하는 날은 사무실로 도시락이 배달되었다. 가격은 신경 쓰지 말라는 수혁의 주문으로 박 대리가 질 좋은 도시락집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도시락은 언제나 맛있었다.
수혁과 박 대리의 생각대로 돈 주고 산 도시락을 버리지는 못하겠다며 서희도 같이 먹었다. 어쩌다 수혁과 같이 먹게 되는 날은 수혁이 지켜보고 있어 반찬을 모두 비워야 했다.
본인은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았지만 바라보고 있는 수혁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생각대로 서희가 따라와 줘서 좋았고, 비록 눈치를 보며 먹는 것이긴 해도 골고루 잘 먹는 모습에 수혁은 마냥 좋았다.
도시락을 먹는 장소는 그때그때 달랐다. 외근 가는 길에 공원이 있으면 거기서 먹기도 하고, 수혁이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은 식당에 양해를 구해 먹기도 했다.
매번 배달되는 도시락을 민경과 제희가 부러워해 가끔은 그 두 사람도 시켜 먹는 일도 생겼다. 서희 때문에 회장실에서 도시락을 먹는 진풍경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녀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혁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서희의 도시락을 챙기는 데에 열을 올리는 며칠을 보내다 보니 서희가 입원을 해 미루어졌던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업무가 조금 여유로워진 것을 확인한 수혁이 회식을 잡았다.
다른 부서와는 달리 긴장의 연속인 비서실 식구들이 그나마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것이 회식이라는 것을 잘 아는 수혁은 웬만하면 자주 회식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바쁜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보상 차원에서 회식부터 챙겼다.
인사팀의 재교육에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에 정신이 없었던 두 여직원이 회식을 제일 반겼다.
수혁의 배려로 회식 때에는 금액에 관계없이 직원들이 먹고 싶은 것으로 메뉴가 결정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느라 한창 들떠 있었다.
“박 대리님은 어디가 좋으세요?”
두 눈을 반짝이며 물어 오는 제희의 모습에 박 대리가 웃었다.
“하하. 일을 그렇게 해 봐.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네.”
“힝!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알았어. 메뉴는 알아서 골라. 실장님 최근에 아프셨으니깐 몸보신되는 거면 더 좋고.”
“알았어요.”
그러고 나서도 퇴근 전까지 어디로 갈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는 두 사람이었다.
한편 직원들과 회식 약속을 한 수혁도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내려고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서희의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항상 메뉴는 직원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결정하도록 했으나 매번 회식 때마다 서희가 제대로 먹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심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를 선택하기를 바랐다. 아니면 서희의 몸보신에 도움이 될 만한 메뉴였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고 일이 얼추 마무리가 될 즈음 박 대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장소를 정했습니다.”
“그래요? 어디로?”
“네. 제희 씨도 그렇고 민경 씨도 그렇고 실장님이 최근 아프셨으니깐 몸보신하러 가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래서 장어구이집으로 정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내심 직원들이 정한 메뉴가 마음에 들어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아버님이 잘 가시는 곳 알죠?”
“네, 회장님.”
“거기 예약해요. 7시쯤이면 되겠네.”
“네, 알겠습니다.”
회장실에서 나온 박 비서가 예약을 하라는 말을 전하자 제희가 ‘앗싸’를 외치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박 비서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차에서 내려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수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6시 정각에 퇴근 준비를 모두 마친 직원들부터 식당으로 보낸 상태였다.
직원들보다 조금 늦게 식당에 도착한 수혁이 방으로 들어서며 서희부터 눈으로 찾았다. 하지만 그가 찾는 서희는 방에 없었다.
“최 실장은 안 왔습니까? 내가 나올 때 사무실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서희가 자리에 없음에 수혁은 짜증이 났다. 자신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요즘 눈앞에 그녀가 안 보이면 저도 모르게 신경질이 났다. 그런 수혁의 날이 선 목소리에 민경이 약간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일이 조금 남으셨대요. 바로 오신다고 했어요.”
민경의 말에 겉옷을 벗고 자리에 앉은 수혁이 바로 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회장님.
“최 실장 지금 어딥니까?”
- 사무실입니다만…….
“빨리 식당으로 와요. 오늘 그렇게 급한 일 없는 것 알아요.”
- 저기 회장님.
“올 때까지 우리 식사 안 합니다.”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 수혁 때문에 서희는 난감했다. 이제껏 회식 자리에서 자신을 챙겨 준 적이 없는 수혁이었는데 요 근래 갑자기 관심을 받게 되니 얼떨떨할 뿐이었다.
오늘 회식도 사무실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 마칠 즈음에 식당에 들어가 인사나 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혁이 엄포를 놓으니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가자 직원이 그녀를 방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정말 식사를 안 하고 있었는지 깨끗한 불판에 이제 막 고기를 올리고 있었다.
“먼저 드시지 그러셨어요. 배고프실 텐데.”
서희가 테이블 맨 끝에 자리를 잡고 앉자 수혁이 그녀를 불렀다.
“최 실장 기다린다고 했잖습니까? 그리고 이리 와요.”
옆으로 물러나 앉으며 수혁이 서희를 불렀다. 그러자 직원들의 시선이 서희에게로 집중이 되었다. 끝에 앉아 있던 서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박 대리가 나섰다.
“실장님,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몇 명 안 되는 식구 뚝뚝 떨어져 앉을 필요 없잖아요. 이리로 오세요.”
박 대리까지 나서서 그녀를 부르자 서희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혁의 옆에 앉아 있던 제희가 옆으로 비켜나며 자리를 만들었다.
쭈뼛쭈뼛 수혁의 옆자리에 앉은 서희는 가시방석이었다. 하지만 모처럼의 회식 분위기를 망칠 수 없어 서희는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수혁이 서희를 힐끗 쳐다봤다.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 대로 서희는 자신의 앞에 있는 야채만 먹고 있었다. 불판 위에서 맛있게 익고 있는 장어에는 서희의 젓가락이 가지 않고 있었다.
그런 서희를 다시 한 번 더 쳐다본 뒤 수혁이 직접 장어를 서희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자 직원들의 시선이 다시 집중이 되었다.
수혁의 행동에 서희도 당황해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서희는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목소리로 수혁이 말했다.
“최 실장 잘 먹어요. 이번에 최 실장 입원하고 나 할아버지한테 엄청 깨졌어요. 일만 시킨다고, 또 아파서 나 혼나게 하지 말고 얼른 먹어요.”
“네.”
모기만 한 소리로 서희가 대답을 하고 장어를 입에 넣자 수혁이 직원들과 나누던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고도 회식 중간 중간마다 수혁은 서희를 챙겼다.
다른 회사와는 달리 회장의 나이가 젊어서일까? 수혁이 끼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식 분위기는 항상 좋았다. 하지만 오늘, 그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처음부터 서희가 회식에 참여했다는 것이고 수혁이 그런 그녀를 챙긴다는 것이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제희와 민경이 2차를 가자고 졸랐다. 수혁을 향해서도 같이 가자 졸랐지만 자신이 같이 가면 직원들이 불편해할까 봐 박 대리에게 카드만 넘겨주고 수혁이 먼저 자리를 떴다. 마지막 뒷정리까지 끝낸 서희도 먼저 자리를 떴다.
제일 불편한 두 사람이 자리를 뜨고 조촐하게 세 사람만 남게 되자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더 하기 위해 호프집으로 향했다.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아 안주와 술을 주문하고 나자 민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장어구이집에서 부터 궁금해서 입이 근질근질했던 말이었다.
“회장님이 요즘 실장님을 부쩍 챙기시는 것 같지 않아요?”
민경이 꺼낸 말에 제희도 냉큼 동조하고 나섰다.
“맞아요. 박 대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 대리가 대답을 하려고 하자 직원이 술과 안주를 내왔다. 500cc잔을 하나씩 손에 든 세 사람이 건배를 한 뒤 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실장님이 큰 회장님 친구분 손녀래. 그래서 회장님이 챙기시는 걸 거야. 게다가 이번에 실장님 아프시고 모두가 힘들었던 건 사실이잖아. 또 아플까 봐 그러시겠지.”
“대박! 진짜예요? 실장님이 큰 회장님하고 그런 인연이 있었어요?”
“응.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어. 두 분 다 말씀을 안 하시니 알 수가 있나? 이번에 같이 병원에 안 갔으면 나도 모를 뻔했어.”
“네.”
여직원들은 박 대리의 말에 쉽게 수긍해 주었다. 그리고 곧 나온 안주에 정신이 빼앗겨 방금까지 했던 대화의 내용은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요즘 들어 수혁이 서희에게 보이는 행동이 일반적으로 상사가 직원에게 가지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박 대리지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입조심을 하기로 한 그였다.



3장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항상 하던 대로 출근 준비를 하던 서희가 방을 가로지르다 말고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몇 달 후면 나이 30이 되는 뚱뚱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긴 머리는 하나로 틀어져 단정하게 올려져 있었고,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할 정도였다. 밝게 웃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주위 어른들은 부모님의 사고가 그녀의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동네 어른들이 부모 잡아먹은 년이라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부모님을 따라 산에만 가지 않았으면, 아니 자신이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지만 않았어도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엄마 아빠가 있는 행복한 가정에서 컸을 텐데…….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부모님의 죽음이 모두 자신의 탓인 것 같아 한때는 부모님을 따라 죽으려고 했었다.
그래서 끼니를 끊었더니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난리가 나셨다. 자식 앞세운 것도 속이 무너질 일인데 손주까지 못 보내신다며 자신이 먼저 죽는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그래서 그녀는 할아버지를 위해 억지로 먹었다.
그저 배만 부르면 된다는 생각에 제 앞에 있는 음식만 먹다 보니 당연히 영양 불균형이 왔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물도 입에 대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몸이 음식이 들어올 때 최대한 영양분을 비축하려고 하다 보니 당연히 먹는 것은 얼마 없어도 살은 빠지질 않았다.
그나마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옆에서 챙겨 주셔서 덜했지만 돌아가시고 옆에 아무도 없는 지금은 말 그대로 죽지 않기 위해 생각날 때마다 음식을 먹었고 자연스레 폭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평소에 잘 먹지 않아도 살은 빠지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며 한참을 멍하니 거울을 보던 서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출근을 서둘렀다.
오늘은 오전의 이사급 회의부터 부서장 회의까지 줄줄이 회의가 잡혀 있어 정신없는 하루가 될 것이었다.
같은 시간 수혁은 벌써 집을 나서고 있었다. 직원들의 출근 시간은 8시 30분이지만 서희는 보통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을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그도 그 시간에 맞춰 출근 준비를 했다.
조찬 약속이 잡히지 않은 날은 도우미가 전날 미리 아침을 준비해 놓고 퇴근을 하지만 혼자서 챙겨 먹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도시락이었다. 어차피 그도 식사를 해야 하고 서희도 분명 굶고 나올 것이 당연하니 도우미에게 도시락을 부탁했다. 지금 수혁은 그 도시락을 들고 회사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수혁이 사무실에 도착하니 생각대로 서희 혼자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수혁을 보고 서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회장님. 아직 출근 시간이 멀었는데…….”
“알아요. 최 실장 아침 먹었습니까?”
“아뇨.”
“잘됐네요. 나랑 아침 먹읍시다.”
“네?”
책상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서희의 팔을 잡고 수혁이 회장실로 향했다. 얼떨결에 수혁을 따라 회장실로 온 서희는 그가 꺼내어 놓은 도시락에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이게 다 뭐예요, 회장님?”
“조찬 약속이 없는 날은 혼자서 밥을 먹는데 그게 싫어 아주머니에게 부탁드렸더니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네요. 그러니 같이 먹어요.”
자신이 부탁해서 2인분의 도시락을 준비해 놓고는 죄 없는 도우미 핑계를 대는 수혁이었다.
도시락을 꺼내는 수혁을 보던 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실로 갔다. 그리고 녹차를 미지근하게 준비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새 이미 수혁은 도시락을 먹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어서 와요. 다들 출근하기 전에 얼른 먹어요.”
“네.”
수혁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서희도 젓가락을 들었다. 도시락에는 잡곡밥에 갖가지 반찬들이 정갈하게 담겨져 있었다. 뭐부터 먼저 먹어야 할지 몰라 서희가 도시락을 쳐다보자 수혁이 서희의 밥 위로 반찬을 올려 줬다.
“최 실장 가만히 보면 편식이 정말 심한 거 알아요?”
“아닙니다.”
“아니긴, 지금도 뭘 먹을까 고민 중이었죠? 다 큰 어른이 그게 뭡니까? 결혼해서 아이들한테 편식한다고 혼내지도 못하겠어요, 최 실장은.”
수혁의 말에 서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결혼…….
자신이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그녀는 여자로서의 평범한 일생을 포기했다. 자신 때문에 먼저 간 부모님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손녀 걱정으로 제대로 마음 편하게 지내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
모두에게 아픔만 준 자신이 감히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웃고 즐기고 또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산다는 것은 먼저 간 가족들에게 죄짓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일에만 매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비서라는 직업이 자신이 아닌 남을 도와주고 위해 줘야 하는 일이니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그 상사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을 친손녀처럼 걱정해 주고 챙겨 주신 분들의 손자가 아닌가…….
말없이 밥을 먹고 있는 서희의 밥 위에 반찬을 얹어 주며 수혁이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자신이 뱉은 말 가운데 무엇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생각은 딴 곳으로 가 있고 거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수혁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 말 없이 식사에만 몰두해서인지 어느새 도시락은 비워져 있었다. 다 먹은 도시락을 서희가 주섬주섬 챙기자 수혁은 좀 전에 서희가 가져온 녹차를 마셨다.
“잘 먹었습니다, 회장님.”
도시락을 챙겨 나가며 서희가 인사를 했다.
“그래요.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요. 커피 한 잔 더 부탁해요.”
“네.”
뒤돌아 사무실을 나서는 서희의 어깨가 다른 날보다 처져 보이는 수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