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대한제국 연대기 1권(5화)
제1장 탐라여일(耽羅麗日)(3)


고봉례는 이내 근심을 잊고 사위를 독려해 정의읍에서 바다 가까운 곳에 제철소를 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제철소래야 현대적 규모는 물론이고 19세기의 것들과 비교해 봐도 원시적이고 소규모에 불과했지만, 1400년의 미명 속에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시설이었다.
기와로 30칸에 가까운 규모의 공방들이 사방으로 둘러싼 형태에 중심부에는 사람 키의 네 배만한 높이의 고로 네 개가 세워졌다.
“이거 참 거대하구만. 사위 자네의 기술이 참으로 용하이.”
“여기서 뽑아져 나오는 강철들이 장인어른과 제주의 부를 늘려 줄 보물들이나이다.”
“그렇네. 그렇지.”
세훈의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고봉례가 보기에 자신의 사위는 절대 실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장을 돌리고 개발을 계속하려면, 특히 철광을 수매하려면 돈벌이를 늘려야 했고 제주 안의 대장장이란 대장장이들은 다 모아서 도검을 만들고 철괴를 주조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대로 개경으로 보내져 송상(松商)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 나갔고, 특히 강철도검은 비누와 함께 기존의 제주 특산품들을 제치고서 개경 수창궁에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즉위식에 보내졌다.
고봉례는 특별히 그 아들인 고상온을 데리고 상경하여 성주자리를 아들에게 습작(襲爵)할 것을 허락받고 제주에서 강철을 계속 생산할 수 있도록 전라, 경상 양도에서 철광석을 수매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 왔다.
기존 역사에서 공마(貢馬)며 말고기나 바치고 2년 뒤에는 스스로 성주의 자리를 폐하길 요청하는 것에 비하면 제주에서 중앙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세훈이 온 뒤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가 넘어가 이듬해가 되자 세훈은 용수철을 개발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쯤 되자 혼자서 일을 전부 추진하기엔 힘이 벅차 대장장이들을 교육시켜 가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석소(夫石所)와 정탄(鄭坦)이라는 두 대장장이가 기술이 좋고 나이도 젊어 세훈의 양팔 노릇을 하게 되었다.
특히 부석소는 용수철을 개발하는 데에 진력을 다하고 있었고, 정탄은 총기와 라이터를 만들 제련 기술 확보에 진력하고 있었다.
그 부석소가 용수철을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대충 용수철이 완성되고 나자 약쑥을 연료로 하는 라이터도 곧 발명되었다. 세훈은 기름 라이터를 만드는 것은 합금 기술이 부족해 시도하지 못하고 있지만, 제련 기술이 좀 더 안정화되는 대로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산에서 구하기 쉬운 약쑥을 연료로 하는 것은 경제성 면에서도 좋은 노릇이었다.
아직 신대륙에서 담배가 들어오기 전이라 판로는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불은 사람 사는 곳에서는 늘 사용되는 것이므로 호응은 좋았다.
발화기(發火器)라 이름 붙인 라이터는 이내 비누, 강철, 말, 해산물과 함께 제주의 5대 산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은 혁신에 가까웠는데, 제주는 물론이고 조선 전역에서 특산품이라는 것은 자연물이거나 혹은 수공업에 가까운 물건들이었는데 5대 산품 중 비누, 강철, 발화기는 공장제공업으로 진입하는 신호탄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초보적이고 이 시대의 유럽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길드공업에 비해서도 소규모였으나 생산해 내는 물품만큼은 이미 기술력에서 한참 앞서 있는 제품들이었다.

1401년은 세훈에게는 특별히 기억할 만한 해였다. 강철과 비누, 발화기의 생산을 안정화시켰을 뿐더러 작년에 혼사를 치른 고상희에게서 득남을 한 것이다. 세훈은 자신이 기술을 개발한답시고 밖에서 도는 동안 혼자 어린 나이에 애를 배어 고생했을 아내를 생각하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서방님도 참 야속하십니다. 이렇게 아내를 돌보지 않으십니까?”
고상희는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여자였지만, 아직 어렸고 산고(産苦)까지 겪은 뒤로 전에 없던 투정을 세훈에게 했다.
“미안하오. 맡은 바 일이 있다 보니 그대에게 소홀했구려. 정말 미안하게 됐소.”
“일전 치마폭에 적어 주신 시에 담긴 마음은 다 어디로 가고 밖으로만 다니시는지요.”
고상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세훈은 그저 난처한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아내를 꼭 껴안아 주며 그 등을 도닥였다.
“내 당분간 그대와 아이를 보며 집에 머무리다.”
세훈은 결국 세 달여간 집에 붙잡혀서 꼼짝하지 않고 아내와 아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냈다.
아들의 이름은 장인 고봉례에게 직접 받아 현도(賢道)라고 지음했는데, 세훈은 그럭저럭 마음에 들게 생각했다.
세훈이 집에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동안에도 플린트록식 소총의 개발은 조금씩이나마 진도가 나가고 있었는데, 이론상의 문제는 세훈이 제시해 준 대로 문제가 없었지만 기존 설계에 강선을 도입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세훈은 처음에 총열에 강선을 넣어 볼 것을 지시했지만 지금의 제련 기술로 깔끔하게 파는 데는 많은 수고가 들어가 제작 단가가 올라갔고, 기술력의 부족으로 발사 속도가 늦어지고, 총알을 담는 것이 수고로워지는 등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
이것은 원래 역사에서 100년 뒤쯤 오스트리아 빈의 야스파르트 졸러(Jaspard Zoller)가 개발하고 무구사(武具師)인 아우구스트 코터(August Kotter)가 개량을 시도했을 때도 똑같이 부딪힌 문제였다. 세훈은 결국 강선을 넣는 것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부딪힌 문제는 화약의 대량 확보였다. 국가에서는 최무선이 화약을 조제하는데 성공한 이래 화기도감 이외에서 화약을 생산하는 것을 일체 금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몰래 만드는 것은 많은 노고가 따르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중앙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제주라면 가능했다. 문제는 고봉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화약은 무엇 때문에 제조하려 하는가? 금상께서 불안정한 권력을 단속하기 위해 다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지금 지방에 대한 숙군(肅軍) 작업을 하고 계시네. 아무리 이곳 제주라지만 사병을 길렀다가 크게 당하는 수가 있어.”
고봉례는 여태까지 사위가 하는 일에 가타부타 말없이 그저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아 왔으나 화약과 총기에 관한 문제만큼은 민감했다.
팔 수도 없는 것인데 왜 만들려 하냐는 것이다. 괜히 그런 것을 확보해서 가지고 있다가 중앙에서 크게 의심받는 순간, 대대로 누려 오던 토관(土官)의 지위도 잃고 심하면 역도로 몰릴까 싶어 노심초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훈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벽이었다.
세훈은 이제 군사력을 길러 탐라의 독립성을 강화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소총이 양산되어 부대화(部隊化)시키는 데만 성공하면 지금 조선의 능력으로는 바다를 건너 제주에 산재한 소총수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일은 빨리 진행되어야 했다.
이방원의 왕위가 안정되고 지방으로 눈을 돌려 제주목에 관리를 파견하겠다고 나오면 그때부터는 일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선 중앙에 대한 공포심 절반 경외심 절반으로 억눌린 고봉례를 다른 방법으로 설득해야 했다.
“중앙에 반역하고자 함이 아니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 잘 설명하면 되나이다. 작년과 올해까지는 아직 왜구의 준동이 없었으나, 국가에서 병력을 파유해 줄 수 있는 내륙과는 달리 이곳 제주는 먼 곳에 떨어진 섬이라 스스로 힘이 없으면 왜구의 준동에 도모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겠나이까.”
“그야, 그렇지만…….”
결국 설득에 힘입어 고봉례는 몰래 화약과 총을 제조하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고봉례 스스로도 바다 바깥의 조정에 굴종하는 것이 꼭 능사만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제주 스스로 힘을 기른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결심이 더뎠었다. 게다가 고봉례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력이 있었다.
고봉례의 아버지는 고신걸(高臣傑)로, 136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제주로 내려와 서도부천호(西道副千戶)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다.
1374년에는 탐라에서 목호(牧胡), 즉 원나라가 철수한 뒤 남아 있던 말 기르는 몽골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최영(崔瑩)이 바다를 건너와 진압했으나, 이듬해에 토착민인 차현유(車玄有)가 마적(馬賊)의 무리를 이끌고 관아를 불태우고 제주안무사 임완(林完)과 제주목사 박윤청(朴允淸) 및 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 등을 살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최영의 목호의 난 평정 때 살아남은 잔존 세력까지 합세하여 반고려, 반명의 성격을 띠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이때 고신걸이 왕자 문신보(文臣輔)와 진무(鎭撫) 임언(林彦) 및 천호(千戶) 고덕우(高德羽) 등과 함께 반란을 진압했다.
그 이듬해에는 왜구 600여 척이 침입해 오자 적의 화살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신걸이 적을 대파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호조전서에 임명하고 홍정(紅?)과 표리(表裏) 및 술 등의 하사품을 내렸다.
고신걸은 1384년 탐라 성주가 되었으며, 1387년에는 아들 고봉례를 데리고 우왕을 알현했었다.
고봉례는 자라 오면서 아버지의 이러한 고려 왕조에 대한 속신(贖身)과 반란의 진압을 쭉 봐 오면서 자라났는데, 때문에 고봉례는 육지 왕실의 무력시위에 민감한 편이었다.
그러나 탐라 왕족의 후손으로서 제주 스스로 힘을 기르고자 하는 의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었고, 결국 세훈이 그곳에 불을 지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결국 사위의 간곡한 청에 마음을 돌린 고봉례는 동생인 고봉지(高鳳智)를 불러다가 세훈의 일을 단속하고 뒤에서 도와주도록 했다.
고봉지는 곧 세훈의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었는데, 고봉지는 원래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훈이 하는 일에 큰 흥미를 가지고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일은 꽤나 속도가 붙어 고봉지가 구해 온 황, 초석, 숯으로 화약을 배합해 흑색 화약을 만들어내고 때마침 완성된 플린트록식 소총으로 시험 발사를 할 수 있었다.
정의읍 제련소 근처의 들판에서 이루어진 시험 사격은 성공적이었고, 세훈은 여기에다가 보총(步銃)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였다.
“아!”
세훈은 고봉지, 부석소, 정탄 등과 함께 고봉례를 찾아가 보총 5정으로 사격 시범을 보여 주었는데 300보 앞의 표적지를 거침없이 꿰뚫는 파괴력을 보고 고봉례는 놀라서 그저 감탄성만 흘릴 뿐이었다.
“사위가 정말 수고해 주었네. 몇 정까지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인력만 조금 붙여 주셔서 숙달이 되면 하루에 다섯 정은 가능하나이다. 이참에 제주 성내(城內)로 시설을 옮겨 와 직접 가까이 두고 감독하여 만들고자 하나이다.”
“그러나 성내는 외지인의 발길이 가장 닿는 곳인데 괜찮겠는가?”
“어차피 낮에 하는 일은 새가 보고 밤에 하는 말은 쥐가 듣나이다. 언젠가는 알려질 것, 그전에 힘을 길러 두는 것이 가장 우선책이라 생각하나이다.”
결국 고봉례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봉례는 세훈의 지위를 올려 도내(都內)로 하고, 위치상 성주인 그와 왕자(王子) 다음에 오게 했다.
이미 제주의 산품을 독점하고 바깥과 거래해 섬을 풍족하게 만들고 있는 세훈이 그런 지위를 지니는 것에서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선적으로 계획했던 것이 완료되자 세훈은 고봉례에게 허락받은 대로 우선 제주 성내에 그동안 비누와 강철 그리고 발화기를 팔아 모은 재산을 전부 털어 정의읍에 있던 제철소를 철수해 가져온 것을 더욱 크게 지어 동영고로(東瀛高爐)라 이름 지어 세우고, 그 아래에 제련소(製鍊所)와 제총소(製銃所)를 둬서 강철과 총, 도, 검의 무기 생산을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화학소(化學所)을 설치해서 대외적으로는 비누의 생산을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화약의 생산 및 개량을 맡겨 두었다.
고로 전체는 도내의 지위 아래에 두고 제련소에 부석소를, 제총소에 정탄을 책임자로 보내고, 화학소에는 그간 비누를 열심히 판 오상복을 책임자로 보냈다.
그러나 화학소는 대외적인 책임자인 오상복과 별도로 화학의 제조를 진두지휘하는 별감천호(別監千戶)의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세훈을 조카사위로 두고 그간 화약의 제조에 깊숙이 개입해 왔던 고봉지가 그 자리를 수임했다.
1401년, 명 건문 2년, 조선반도의 저 외딴 남쪽의 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초석이 다져지고 있었다.